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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1편 6절-10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6절: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거짓을 말한다는 게 무슨 뜻이냐? 다윗에게 세상 일반적인 거짓말로 속여서 말을 한다는 거냐? 거짓말을 들으면 결국 자기가 또 거짓말쟁이가 돼버린다. 자꾸 욕을 하는 사람 옆에서 욕을 자꾸 들으면 은연중에 들은 그것이 자기 머릿속에 녹음이 되어서 입으로 나오게 된다. 들은 대로 나온다. 그래서 못 속인다. 들은 대로 귀로 들어갔고, 들어있는 대로 입으로 나오는 거다.
거짓말이라고 할 때 임시성에 속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영원에 속한 거짓말이 있다. 임시성에 속하는 거짓말은 세상에 관한 거짓말이고, 영원에 속한 거짓말은 신앙사상 면에서의 거짓말이다. 임시성적인 세상적인 거짓말은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인데도 일반적인 거짓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런 것은 버리고 신앙적인 거짓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신앙적인 거짓말에는 자기를 영원히 넘어뜨리는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잘 알아야 한다. 영원에 속한 거짓말은 실력적으로 이룰 수 있는 우리의 영원 궁극적 결과적인 이룰구원에 대한 거짓말이니 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면 그 손해가 엄청난 거다. 자기의 영원한 존귀 영광성이 손해가 난다.
그러면 영원에 관한 거짓말이란 어떤 것일까?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데 그 어떤 말을 해도 말을 하는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신령하고 영원하고 천국적이요 영적인 것이 아닌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목적적으로 말을 한다면 이는 거짓말이 되는 거다. 성경을 들고 말을 할지라도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면 이는 영원 궁극적 영능의 실력 면에 엄청난 손해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불타지고 썩고 변동되고 변질되고 동화되고 요동되고 바람에 나아갈 것을 영원히 가는 것처럼 자랑하고 주장을 하면서 이걸 많이 가지는 게 신앙이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다 거짓말이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전부가 썩어지고 불타진다. 그럼에도 예수이름으로 이런 것을 이루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전부가 거짓말쟁이다. 세상 불에 타질 것을 강조하고 소원 목적적으로 가지라고 말을 한다면 이는 다 거짓말이니 이런 말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이 거짓말에 걸려들면 자기의 일생이 영생으로 통과하지 못하고 통째로 사망으로 나가버린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다윗에게 와서 세상과 세상 것을 주장하고 있으니 신령세계를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을 소망하고 있는 다윗으로서는 그게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이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자가 한 두 사람이냐? 예수를 믿으면서도 거짓 교훈에 빠져서 세상과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성품을 입지 못한 채 하나님의 진노는 진노대로 당하고, 영능의 실력 면에서 영원히 손해를 본다면 이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헛 믿은 거고, 그의 삶 전부가 통째로 사망계로 날아간 거다. 교훈을 잘못 받으면 사람이 이렇게 영원히 망하는 것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면의 중요성을 별로 생각을 안 한다.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다윗을 찾아온 것을 보니 다윗이 아는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도 다윗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생전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거짓말을 하느냐? 그게 아니다. 다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서로 잘 아는 그들이 세상과 세상 것을 잔뜩 자랑을 하고 갔다는 거다.
그러면 이들이 다윗에게 왜 거짓말을 하고 갔을까? 가령 목사님이 어느 교인의 집에 모처럼 심방을 와서 불에 타질 세상 것을 잔뜩 빌어주고 갔다면 이 목사님이 진정으로 복을 빌어주고 간 거냐, 자기 마음 속에서 ‘나는 지금 거짓말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복을 빌어주고 간 거냐?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을 튀겨가면서 힘주어서 진정으로 복을 빌어주고 간 거다. 그런데 아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영원히 가는 복이냐? 아니다. 그러니까 그 목사는 거짓말쟁이다.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간악’이 뭐냐 하면 간사하고 악한 거다. 악한 자들은 성도 앞에서는 위하는 척하며 간사를 떨고서는 비진리적 육의 사람들 앞에 가서는 진리성도를 악평을 한다. 말로 악평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소문을 낸다. 참으로 간사하고 악한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육적인 면을 자랑하는 말만 잔뜩 늘어놓는 기독교 종교인들을 아주 주의해야 한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반역했을 때 다윗의 모사와 친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로 돌아가서 다윗을 죽이려고 모의를 했다. 이방 불신세계에서나 종교계에서나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거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7절-8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악한 자들이 다윗을 왜 미워하느냐? 사람이 어떤 때 미우냐? 옳은 말을 하면 미워한다. 사람이 참 이상하다. 자기의 약점을 찌르면 되게 싫어한다. 자기 속에서 깐족깐족하는 걸 안 죽이려고 애를 쓴다. 그런 것처럼 다윗이 늘 옳은 말만 하니까 미워하고, 자기들을 안 높여주니까 또 미워하고, 자신들과 같이 행동을 안 하니까 미워하고, 자신들을 반대를 하니까 미워하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들끼리 미워하는 면만 보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누구의 편인데 악한 자들이 누구를 미워하느냐?’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들끼리 미워하는 것만 보면 안 된다. 내가 있고 상대가 있을 때, 이 상대가 나에게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그 말을 듣는 나는 상대가 말을 하는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기 전에 나에게 말을 하는 이 사람이 어디에 선 사람인지를 먼저 심사를 하라.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해 말을 해 주는 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 있는지를 봐라.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 한 말은 참고적으로만 듣고 그냥 흘려버려라.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악한 자가 병이 들어있는 다윗을 보며 ‘다윗이 일어나지 못하고 얼마 안 있으면 죽는다. 빨리 죽어야 우리가 일을 할 텐데’ 라고 하며 깎아내리고, 짓밟고, 치고받고 하며 악독한 마음으로 헐뜯고 있다. 악한 자들은 앞에서 말했듯이 다윗이 그들에게 옳은 말만 하고 자신들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 않으니까 미워하는 거다. 다윗이 병이 든 것은 다윗의 범죄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징계하여 회개시키려고 하는 거지 그들과는 상관이 없는 거다. 그들에게 악한 짓을 해서 병이 든 게 아닌데 다윗에게 와서 물고 헐뜯는 거다.
그런데 사실은 다윗의 병이 악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미워하는 그들의 마음이 도덕적으로 더 악하다. 육신에 아무리 깊이 병이 들었어도 그것은 병일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육신이 건강해도 악한 마음이 있는데 이것은 중병이다. 어떤 병보다도 마음과 정신에 병이 든 게 더 중하다 그 말이다. 악한 것은 도덕성에 속하지만 병은 도덕성에 속하는 게 아니다. 부스럼 자체가 도덕성에 속하는 거냐? 그건 그냥 부스럼이다. 그러나 악한 정신과 마음은 도덕성에 속하는 거다. 이게 더 악하다 그 말이다.
9절: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본 절을 보면 3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던 가룟유다가 생각이 난다. 오늘날도 예수 믿는 사람이면서 세상 것 때문에, 배고픔 때문에, 돈 욕심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팔고, 진리 팔고, 사랑 팔고, 구원을 파는 사람이 많다. ‘교회에 나온다. 안 나온다’ 이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중심이 어느 곳을 떠났느냐?’ 그 말이다. 예수로부터 안 떠났다면 진리를 붙잡고 있는 거고, 진리에서 떠났다면, 진리를 싫어한다면 이건 예수로부터 떠난 거다.
구약에 보면 다윗에게 붙어서 총리대신까지 되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손잡고 반역을 일으켰다. 반역은 누가 하느냐? 멀리 있는 사람이 반역을 하느냐, 같이 길을 가는 자가 반역을 하느냐? 같이 길을 가는 자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로 나왔을 때 모세를 반역하던 자가 뭐라고 했느냐?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처럼 같이 있던 친구가 반역을 한다. 같이 떡을 먹던 자가 반역을 한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서는 원수가 금방 친구가 되고, 친구가 금방 원수가 되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니까 골목길의 어린아이들이 금방 싸웠다 금방 친구가 되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의 원수가 누구냐? 그리고 우리의 원수는 누구의 원수냐? 우리의 원수는 하나님과의 원수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진짜로 있는 거냐? 만왕의 왕이시고 만능의 능력자이신 하나님이신데 이런 하나님에게 원수가 있는 거냐? 하나님에게 손해를 주니까 원수라고 하는 거냐, 성도들에게 손해를 주니까 당신의 원수라고 하는 거냐? 당신의 백성에게 이룰구원 면에 손해를 주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라고 하신다.
진짜 하나님과 일 대 일의 원수는 온 천지에 없는 거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싫어하시면 우리도 싫어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우리도 좋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우리가 좋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거다.
진리를 붙잡고 좋아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비진리를 붙잡고 좋아하고 그런 곳에서 충성봉사를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 대적노릇을 하는 거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싸우고 붙고 할지라도 우리 기독자들은 무엇보다도 진리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면 안 된다. 진리본질에서 이탈이 된 것일수록 원수가 되기 쉽다.
진리를 따르면서도 성질이 모가 난 사람이 있다. 이러면 이룰구원 차원에서 자꾸 수치를 당하게 된다. 사람이 자꾸 넘어지면 얼굴이 자꾸 흉터가 난다. 얼굴에 딱지가 붙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쳐다보기가 좋겠느냐? 그러니까 얼굴이란 인격을 의미하는 거다. 성격이 모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격이 급한 사람도 있다. 그리고 평소에는 조용히 있다가 ‘확’ 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말다툼이 생기면 한 마디도 안 지려고 억압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성격의 소유자도 있다. 이처럼 성격이 너무 한 쪽으로 지나치게 되면 살아가면서 인격에 상당히 마이너스가 된다. 부끄러워진다. 실수가 많다. 인인 연관관계성에서 실수가 많아서 나중에는 부끄러워진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자기의 성격을 잘 다스려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 길에서 이탈이 될수록 사람과도 원수가 되기 쉽고, 세상적인 요소로 채워질수록 주님과는 멀어지고 원수 편에 가서 붙기 쉬워진다. 자석은 멀리 있는 철을 당기느냐, 가까이 있는 철을 당기느냐? 가까이 있는 철을 당긴다. 질이 같으니까 붙는 거다. 철이 자석과 어느 정도 멀리 있으면 아직은 철이 자석에 붙지는 않았지만 자석의 자장은 그 철을 향해 있다. 그런 것처럼 아직까지 행동적으로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가서 붙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중심이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는지 잘 봐라. ‘내가 어느 쪽으로 끌려가고 있구나’ 이게 있는 거다. 여기서 빨리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은 세상으로 끌려가게 된다.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발꿈치를 들었다는 것은 반역을 했다는 거다. 반역을 할 때 진리 때문에 반역이냐, 물질 때문에 반역이냐, 인간 때문에 반역이냐? 왜 반역을 하느냐? 가룟유다가 왜 반역을 했느냐? 돈 때문이다. 그러면 돈이 아니었으면 반역을 안 하느냐? 가룟유다의 마음은 이미 그 전부터 나침반이 늘 북쪽을 가리키듯이 돈 쪽으로 가 있었다. 그러다가 예수를 팔고 돈을 벌 기회가 오니 반역을 하게 된 거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이 세상부요 쪽으로 가 있으면 언젠가는 주님을 반역하게 된다. 그리고 반역을 하면 이방인들과 손을 잡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과거처럼 예수 믿지 말아라. 정말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10절: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보복하게 해 달라고 하는데, 보복성도 생각해 봐야 한다. 정복을 해서 멸망을 시켜서 없애버리는 보복이 있는가 하면, 진리의 성도가 악한 자들보다 월등하게 높아지고 커지게 만드는 보복도 있다. 그 다음에 악한 자를 깨닫게 해서 교만한 꾀를 납작하게 만드는 보복도 있다.
이 중에 어느 게 제일 좋으냐? 이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으로 보복을 하고 싶으냐? 두 번째의 보복은 일반적으로도 단수가 아주 높은 거다. 그러나 사람이 깨달아지고 만들어지는 게 없다. 세 번째의 보복은 사람이 깨닫고 만들어지는 게 있다. 그래서 우리가 보복성도 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이방 불신세상은 무기를 가지고 보복을 잘 한다. 진리성도의 원수들은 성도가 진리를 붙잡는 것을 원치 않고, 진리에서 떨어지기를 바라고, 영능의 실력이 떨어지기를 바라고, 성도끼리 싸우기를 바라고, 이를 위해 싸움을 붙이고, 게을러지기를 바라고, 예수 안 믿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받기를 바란다. 원수들이 이런 것들로 다윗에게 보복을 하려고 한다.
악한 자들은 그럴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진리이치를 더 많이 깨닫고, 영인성장에 더 부지런하고, 영능의 실력을 더 쌓아서 그 날에 가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원수들의 악한 보복성을 이용해서 내가 쑥 올라가는 거다. 이게 바로 앞에서 말한 세 번째의 보복이 된다. 쉽게 말하면 한나가 브닌나에게 보복을 한 것과 같은 보복이 되는 거다. 한나가 선으로 브닌나를 이겼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