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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거제도 주민들이 왕실의 부당한 행위에 반발한 「청원서」 3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대한제국기 거제도 주민들이 왕실의 부당한 행위에 반발한 「청원서(請願書)」 3건’은 모두 1905년~1907년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해가던 국망(國亡)의 시기이자, 황실과 외부 세력의 수탈로 민초들의 삶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이번 거제 주민이 올린 3건의 「청원서」는 황실이 민간의 어장(어기)을 강제로 빼앗거나, 국가에서는 세금과 소작료를 이중으로 계속 내라고 독촉하면서 하나의 땅에 두 번 세금을 매기는(一土兩稅) 고통을 주거나, 또 파견된 관리가 거제도 어민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사유 어장(민사어기)을 빼앗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당한 행정이 발생하자 이를 시정해 달라고 요구한 청원서다.
○ 이 청원서들이 발생한 구체적인 시대적 배경은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① 황실의 '광무개혁' 부작용과 내장원·경리원의 비대화에 그 원인이 있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권 강화를 중심으로 한 '광무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황실은 국가 재정과 분리된 황실 독립 재정(궁내부 내장원, 이후 경리원)을 구축했다. 이로부터 황실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전국의 광산, 인삼 전매권, 그리고 어장(어채권) 등 수익이 나는 민간의 권리를 강제로 황실 재산으로 편입했다. 이에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도 모자라 황실(궁방)에 또 고통을 받는 이중 수탈 구조가 형성되었다. 1906년 청원서에 등장하는 의친왕궁의 어장 강탈이 대표적인 사례다.
② 을사늑약(1905) 이후 일제의 경제적 침탈과 세금 독촉이 빈번해졌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고종 황제의 손발을 묶기 위해 황실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그 과정에서 국가 재정 압박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이로부터 가혹한 조세 징수가 불가피하게 전개되었다. 1904년 대홍수와 태풍으로 영남 지방(거제도 포함)이 초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정이 부족했던 정부와 황실은 세금을 감면해주기는커녕 사라진 땅(진두)에까지 이중으로 세금(일토양세)을 독촉하는 비정함과 무능함을 보였다.
③ 국가의 통치력 상실과 민중의 저항권이 박탈 당했다. 1907년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까지 해산(정미7조약)되던 해였다. 국가의 행정·사법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과거 조선 시대에는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청원)하면 국가가 이를 조사해 구제해주는 시늉이라도 했다. 그러나 1907년 6월 어민들의 청원이 '거부'당한 것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와 궁내부가 이미 백성을 보호할 통치 능력을 상실했거나 통감부의 압력으로 민간의 권리를 철저히 묵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이 청원서들은 "밖으로는 일제의 국권 침탈, 안으로는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황실 재산 기관(경리원)의 수탈"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국가에 눈물로 호소했던 거제도 민초들의 처절한 기록이다.
○ 다음은 이번에 소개하는 <대한제국기 거제도 주민들이 왕실의 부당한 행위에 반발한 「청원서」 3건>을 간략히 요약한 핵심 내용이다.
1) 「대한제국기 1906년 11월 거제도 주민들이 경리원에 제출한 청원서(請願書)」 대한제국기 황실이 민간의 어장(어기)을 강제로 빼앗아 의친왕궁에 귀속시키자, 주민들이 이에 항의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거제도 주민들은 나라에 세금이나 공물을 내던 공식 어장(진상조 5곳)은 궁에 가져가더라도, 원래 백성들의 사유지였던 어장(민사조)까지 전부 빼앗아 간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2) 「대한제국기 1905년 5월 거제군 7목장 주민들이 경리원에 올린 청원서(請願書)」
거제군 7목장(七牧場) 주민들이 태풍과 해일로 농토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에도 세금이 그대로 부과되자, 살길을 열어달라고 경리원(經理院)에 눈물로 호소하는 내용이다. 주민들이 1904년(지난해) 여름에 몰아친 폭우와 태풍(해일)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바다에 잠겨 폐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땅이 바다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도, 국가에서는 세금과 소작료를 이중으로 계속 내라고 독촉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하나의 땅에 두 번 세금을 매긴다(一土兩稅, 1토지 2세금)"며 고통을 호소했다.
3) 「대한제국기 1907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어업권을 돌려달라고 올린 청원서」는 거제도 어민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어업권을 돌려달라고 정부에 청원(請願)했으나 거부당한 사건이다. 대한제국 말기 을사늑약(1905년) 직후,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궁내부와 산하 경리원이 전국의 어장, 광산 등 이권 자원을 황실 재산으로 편입하여 세금을 뜯어내던 시기에 발생한 사건이다. 중앙 정부(궁내부/경리원)에서 거제도에 파견한 관리(파원)가 황실 재산 확충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거제도 어민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사유 어장(민사어기)을 빼앗고 사리사욕을 채우자, 어민들이 생존권을 위협받아 연명으로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결국 어민들의 억울한 호소를 들어주기는커녕, 사유지라는 증거가 없다면서 "시끄럽게 하면 엄벌하겠다"고 강력하게 협박과 기각했다. 수탈을 정당화하던 구한말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료다.
1) 「대한제국기 1906년 11월 거제도 주민들이 경리원에 제출한 청원서(請願書)」
이 고문서는 대한제국기 1906년(광무 10년) 11월, 거제도 주민들이 대한제국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에 제출한 청원서와 이에 대한 조정의 판결(지령)이다. 구한말 황실이 민간의 어장(어기)을 강제로 빼앗아 의친왕궁에 귀속시키자, 주민들이 이에 항의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 내용인즉, 대한제국 말기(1906년), 황실 재정을 확장하기 위해 민간의 토지나 어장을 황실 재산(궁방전, 궁방어기)으로 강제 편입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따라 백성들의 생계가 위협받자 전국적인 저항과 청원이 빗발쳤다. 거제도 주민들은 어장을 진상조와 민사조 두 종류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나라에 세금이나 공물을 내던 공식 어장(진상조 5곳)은 궁에 가져가더라도, 원래 백성들의 사유지였던 어장(민사조)까지 전부 빼앗아 간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다른 지역(타군)의 사유 어장은 정부가 조사 후 백성들에게 돌려주었는데, 왜 유독 거제도의 어장만 이미 돌려준 조치까지 뒤집으며 의친왕궁에 다시 귀속시키냐며 차별적 행정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에 대단히 억울한 호소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 대신은 "이미 의친왕궁 재산이 되었으니 우리 소관이 아니다. 의친왕궁에 직접 가서 따져라"라며 책임을 회피(각하)하는 정부는 비정한 답변(지령)을 내렸다.
이 문서는 구한말 황실과 궁방이 백성들의 사유 재산을 침탈했던 구체적인 사례와, 이에 맞서 문서(완문)를 근거로 법적 권리를 주장했던 거제도 주민들의 생생한 역사적 청원 기록이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11월 청원(請願)」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인민(民人) 윤영우(尹永禹), 옥선환(玉宣煥), 윤영엽(尹永燁)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十年十一月 日]
**「대한제국기 1906년 11월 거제도 주민들이 경리원에 제출한 청원서(請願書)」**
광무 10년(1906년) 11월 일. <청원서> 경상남도 거제군 주민 (청원인) 윤영우, 옥선환, 윤영엽 등.
위 청원 건은, 본군의 어장(漁基)에 대한 사실을 이미 앞서 제출한 청원서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군의 보고와 지시(군보지령) 내용을 보니, "거제군의 어장 전부를 이미 의친왕궁에 이속(옮겨 귀속)했다"고 하였습니다. 본군의 어장 중에는 조정에 공물을 바치던 '진상조(進上條)'가 5곳 있고, 그 외는 모두 백성 개인의 재산인 '민사조(民私條)'로서 백성들이 생계를 의탁해 살아가는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진상조 5곳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 개인의 어장(민사조)까지 합쳐서 전부라고 하는 것입니까?
백성 개인의 어장에 대해서는 지난 해(1905년) 황제의 칙교를 받들어, 궁내부에서 완문(完文, 소유권을 인정하는 문서)을 작성해 민간에 다시 돌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서상에 분명히 돌려준 것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에 와서 다른 군의 개인 어장들은 문서를 조사하여 모두 돌려주면서, 유독 본군(거제군)에 대해서만 이전에 이미 돌려준 어장을 다시 (의친왕궁으로) 이속시켜 백성들의 희망을 끊어놓으시니, 애처로운 온 군의 수많은 백성들은 죽어도 원한이 남을 것입니다. 엎드려 빌건대, 상세히 살펴 처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광무 10년 11월 일. 경리원대신 각하.
[요약] 거제군 윤영우 등이 청원함. 다른 군의 개인 어장은 조사하여 돌려주었는데, 본군만 유독 의친왕궁에 귀속시키는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한 건.
[지령(판결)] 이미 의친왕궁에 귀속되었으니, 해당 궁(의친왕궁)에 가서 청원할 일이다. 광무 10년 11월 12일.
[光武十年十一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巨濟郡居民〈請願人〉尹永禹, 玉宣煥, 尹永燁等. 右請願事段, 本郡漁基事實은 已悉於前呈中이온바 郡報指令內, 巨濟漁基全部을 業已移屬于義親王宮事이다온 本郡漁基에 有進上條五處이고 其外 盡是民私條, 而民生賴業之物리오니 今謂全部者 以進上條五處而謂全部乎잇가? 竝民私條而謂全部乎잇가? 民私條段은 在於昨年奉承勅敎하옵셔 自宮內府롭셔 成完文還出給民間하셔시즉 文簿上에 必有出給樣으로 分揀이옵거 忽於今者에 他郡漁條 調査文蹟야 盡爲出給, 而獨於本郡야 前已出給之漁條를 還爲移屬하시와 以絶民望즉 哀此全郡萬姓이 死有餘冤이온니 萬加洞燭處分하시물 伏祝. 光武十年十一月 日. 經理院大臣閣下.
摘槩, 巨濟郡尹永禹等請願, 他郡私條漁基, 調査出給, 本郡獨爲屬宮處分事.
[指令] 旣屬于義親王宮니 往呈于該宮 事. 光武十年十一月十二日]
2) 「대한제국기 1905년 5월 거제군 7목장 주민들이 경리원에 올린 청원서(請願書)」
이 문서는 대한제국 광무 9년(1905년) 5월, 경상남도 거제군 7목장(七牧場) 주민들이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경리원(經理院)의 수장인 경리원경에게 올린 청원서와 이에 대한 조정의 판결(지령)이다. 태풍과 해일로 농토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에도 세금이 그대로 부과되자, 주민들이 살 길을 열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내용이다.
○ 내용인즉, 1905년(광무 9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로, 대한제국 정부가 국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왕실 소유의 땅(내장원·경리원 관할 둔전 및 목장)에서 세금과 소작료를 엄격하게 거두던 시기였다. 거제도 주민들은 거제도가 평야 지대와 달리 섬 전체가 산이고 비가 오면 급류가 치며, 조금만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척박한 곳임을 강조했다. 특히 1904년(지난해) 여름에 몰아친 폭우와 태풍(해일)으로 인해 마을 전체가 바다에 잠겨 폐허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땅이 바다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도(이를 '포락'이라 함), 국가에서는 세금(결세)과 소작료(도전)를 이중으로 계속 내라고 독촉(쇄봉)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하나의 땅에 두 번 세금을 매긴다(一土兩稅, 1토지 2세금)"며 고통을 호소했다. 주민들은 구체적으로 2,729량 7전이라는 거액의 소작료를 깎아달라고(탈감) 요청했다.
*정부의 결론(지령) : 세금 징수관(봉세관)은 주민들의 말을 곧바로 믿고 깎아주는 대신, "실제로 바다에 잠겨 땅이 없어졌는지 거제군수가 현장을 상세히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현장 검증 후 감면해 주겠다는 긍정적인 유보 조치다.
* 덧붙여 이번 「1906년 5월 청원(請願)」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인민(民人) 옥철환(玉哲煥), 서내서(徐乃瑞), 김재규(金載圭)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九年五月 日]
**「대한제국기 1905년 5월 거제군 7목장 주민들이 경리원에 올린 청원서(請願書)」**
광무 9년(1905년) 5월 일. <청원서> 경남 거제군 칠목장(七牧場) 주민 옥철환, 서내서, 김재규 등.
우리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정은 이미 본 군수(거제군수)에게 올린 보고서에 다 기록하여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난해 본 군의 농사 형편 중 천포(川浦, 하천과 바닷가) 지역의 피해가 더욱 심했던 것은 바로 6월의 폭우와 7월의 폭풍우 때문이었습니다. 본 군의 지형과 토질은 다른 강변이나 평야 지대의 고을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환약처럼 작은 섬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떠 있는 까닭에, 큰 바람을 만나면 막아줄 곳이 없어 혹독한 매를 치듯 바람을 고스란히 맞습니다. 온 경계가 다 산이라 평평하고 넓은 들판이 없고 바닷가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가 조금만 많이 내려도 골짜기의 물이 급류가 되어 돌을 굴리며 곧장 내달려 논밭을 격렬하게 갉아먹습니다. 그러면 논밭이 그대로 바닷길로 변해버립니다.
또한 흙에 돌이 많고 물의 깊은 근원이 없는 까닭에, 비록 열흘만 비가 오지 않아도 보(洑)와 도랑이 모두 말라버려 곡식과 풀이 시들어 죽으려 합니다. 이것은 모두 섬 지역 토지의 이치와 형세가 평야를 낀 다른 군들과 원천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평야 지대는 바람이 한곳에만 모질게 불지 않고, 물이 불어나도 이곳이 잠기면 저곳이 살며, 가뭄이 들어도 둑을 쌓아 물을 대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이곳은 전혀 다릅니다.
지난해의 재앙 중 바다로 둘러싸인 목장과 천포 지역의 피해는, 해안과 골짜기의 위치가 바뀔 정도여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복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폭풍우의 피해를 입은 곳은 어떤 마을의 집터가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노니는 모래톱으로 변해버렸고, 무너지고 내려앉은 주춧돌들은 마치 전쟁을 겪은 폐허와 같습니다. 이처럼 농사지을 땅이 없어 굶주려 부르짖고,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백성들은 바야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정도일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의 토지에 두 번 세금을 매기며 이미 영구히 버려진 천포와 목장 밭의 결세(結稅, 토지세)와 도전(賭錢, 소작료)을 또다시 강제로 거두려 하시니, 슬프다! 이 멀고 외딴 섬의 백성들이 어떻게 이 넓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와 부르짖사오니,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은혜를 베푸시어 해당 목장의 소작료 중 천포조(川浦條)인 2,729량 7전을 기한 내에 확실하게 감면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희가 삶을 유지하고 보전할 수 있도록 선처 처분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광무 9년 5월 일. 경리원경 합하.
[안건] 옥철환 등이, 거제군 목장 토지가 바다의 넘침(해일)으로 포락(물에 잠겨 없어짐)된 곳의 소작료를 상세히 조사하여 감면해 달라는 일.
[지령(조정의 지시)] 해당 목장의 둔전 중 바닷물의 넘침으로 무너진 곳과 물에 잠겨 없어진(포락) 실제 지역을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서를 보내오게 하여, 조치를 취하도록 할 일. 광무 9년 5월 30일. 봉세관(세금을 거두는 관리)
[光武九年五月 日. 請願書. 慶南巨濟郡七牧場居民 玉哲煥, 徐乃瑞, 金載圭等.
右情冤事段은 矣等冤抑之情勢은 已悉於本郡守前報中, 枚擧陳告하잇견과 大抵昨年本郡農形之川浦尤甚은 卽六月雨水也와 七月風浪也라。本郡地形土理가 逈異〈於〉他江郡野邑하니 如丸小島가 孤浮滄溟之中故로 値風大吹, 則無所障禦에 偏受酷撲하고 一境皆山에 無平闊之野, 而迫接海濱故로 値雨少漲이도 峽流急湍이 轉石直駛하야 激囓阡陌즉 阡陌에 仍通海濤하고 土旣多石, 而水無深源故로 雖値十日不雨라도 洑渠皆涸에 穀草欲枯하니 此皆壤土海島之理勢가 與江野諸郡에 元無偏惡之風하고 水漲而此落彼生하며 日旱而堤堰引灌之地로 大不相似이온바, 昨年災形中環海之牧場川浦落은 岸谷이 移處에 萬無人力可完之道이고 風浪被劫處난 或村里基垈가 變爲鷗鷺之洲하며 或頹壓傾礎가 如同兵燹之墟하니 方此無土呼庚과 失棲流離之民이 不翅曰濱死之命이온듸, 其一土兩稅之永棄川浦牧田畓結稅賭錢을 又擬刷捧하시면 哀此遐外島蒼 何以竝生于普天化育之下乎잇가? 玆敢冒死奔籲하온니 特施如傷之澤하시여 同牧賭錢中, 川浦條二千七百二十九兩七戔을 期獲準減하시와 俾爲奠保케 積善處分홈. 光武九年五月 日. 經理院卿閤下.
玉哲煥等, 巨濟郡牧場土海溢浦落地賭錢, 詳査頉減事.
[指令]
該牧屯海溢所頹와 浦落實地 詳査報來야 以爲措處케 事. 光武九年五月三十日. 捧稅官.]
3) 「대한제국기 1907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어업권을 돌려달라고 올린 청원서」
1906년 거제도 어민들이 억울하게 빼앗긴 어업권을 돌려달라고 정부에 청원(請願)했으나 거부당한 사건이다. 대대로 운영해 온 사유(私有) 어장을 중앙 정부가 파견한 관리(파원)가 탐욕으로 강탈해 가니, 기존에 돌려주기로 했던 황제의 명령(칙지)에 따라 어업권을 반환하고 관리들을 처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황실 재산 관리 기구(경리원)는 어민들의 호소를 거짓 소송으로 규정하고, "애초에 너희 사유지가 아니다"라며 즉시 물러가지 않으면 엄벌하겠다고 협박하며 청원을 기각했다. 당시 국가(대한제국)가 백성을 보호하기보다 황실 재정 확충을 명분으로 수탈을 정당화했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 내용인즉, 대한제국 말기이자 을사늑약(1905년) 직후로,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궁내부와 산하 경리원이 전국의 어장, 광산 등 이권 자원을 황실 재산으로 편입(국유화)하여 세금을 뜯어내던 시기(1906년)다. 거제도 어민들은 원래 자신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사유 어장(민사어기)이 있었고, 이전 정부 공문(완문)을 통해 어업권을 인정받았다고 주장한다. 중앙 정부(궁내부/경리원)에서 거제도에 파견한 관리(파원)가 황실 재산 확충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어민들의 사유 어장을 빼앗고 사리사욕을 채우자, 어민들이 생존권을 위협받아 연명으로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당시 황실 재정 기구인 경리원(경리원경)은 어민들의 억울한 호소를 들어주기는커녕, "애초에 너희 사유지라는 증거가 없다"며 거짓 소송(무고)으로 몰아세우고 "다시 시끄럽게 하면 엄벌하겠다"고 강력하게 협박 및 기각(퇴거 명령)을 내렸다. 국가가 백성의 생존권보다 수탈을 정당화하던 구한말의 비극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사료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6월 청원(請願)」은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인민(民人) 조석근(曺錫瑾), 신주일(辛周逸), 옥상신(玉相莘)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제목: 光武十年六月 日]
**「대한제국기 1907년 6월 거제군 어민들이 어업권을 돌려달라고 올린 청원서」**
광무 10년(1906년) 6월 일. <청원서> 경상남도 거제군 어민 등 소장(狀).
우리가 호소하는 바는 엎드려 생각건대, 극도로 억울한 처지에서 백 번이라도 감히 호소하고자 합니다. 본 거제군의 민간 사유 어업권(민사어조)에 대해서는, 대궐(궁내부)로부터 황제의 명령(칙지)을 받들어 "해당 군의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주라"고 하신 지령 및 훈령 완문(공문서)의 역사적 사실을 앞서 올린 글에서 이미 사실대로 거론했습니다.
(이번) 지령 안에서는 "우선 마땅히 사실을 조사해 조치할 일"이라고 하셨으나,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또 궁내부의 지시와 훈령 완문을 받들어 이미 백성들에게 돌려준 백성들의 사유 어장(민사어기)을, 이제 와서 어디에서 다시 사실을 조사하고 조치한단 말입니까? 섬 전체 백성들이 재산을 보태고 생업으로 삼는 물건을, 파견된 관리(파원)의 입과 배를 채우는 계책에 함부로 삼켜지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만백성이 생업 자산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온 군의 백성들이 거의 뿔뿔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세금을 바치는 일로 말하자면, 해당 군에서 스스로 알아서 조정에 상납하는 것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입니다. 가장 높은 황제의 칙령과 가장 중대한 정부의 결정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파견 관리의 끝없는 탐욕 때문에 온 섬의 백성들이 물고기나 고기처럼 짓밟히는 참상이 극도로 원통하고 억울합니다.
이러한 사유로 앞서 올린 글을 덧붙여 일제히 소리 높여 우러러 호소하오니, 널리 깊이 살피시어 앞서 올린 글을 상세히 조사해 주십시오. 특별히 이 외딴섬 백성들이 짓밟히는 참혹한 형편을 생각하시어, 흩어진 자들이 편안히 정착할 수 있도록 본도 관찰사(경상남도 관찰사) 및 창원감리서에 엄중히 훈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 바다 구석의 쇠잔한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을 품고 아픔을 안지 않도록, 선을 쌓고 어루만져 주는 처분을 내려주시기를 천만번 엎드려 간구합니다. 광무 10년 6월 일.
[연명] 조석근, 신주일, 옥상신, 윤택근, 신석운, 옥선환, 윤영우, 박남기, 원석희, 김두영, 원세응, 옥영환, 윤영엽 등. 경리원경 각하.
[요약] 거제군 어기 백성 등이 본군의 어장 중 민간 사유분에 대해 다시 돌려달라는 뜻으로 훈령을 내려달라는 일.
[정부의 지령(판결)]
본 거제군의 어장에는 애초에 '민간 사유분(민사조)'이라는 명목이 없거늘, 망령되게 핑계를 만들고 오로지 무고하는 소송만을 일삼으니 극히 통탄할 일이다. 즉시 물러가서 다시는 이 일로 번거롭게 떠들지 말라. 만약 또다시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처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섞여 드는 버릇을 단호히 엄중 처벌할 것이다. 광무 10년(1906년) 8월 9일.
[光武十年六月 日. 〈請願書〉 慶尙南道巨濟郡漁民等狀.
右訴求은 伏以, 極冤之地에 百訴敢陳이오니 以本郡民私漁條난 自宮內府로 奉承勅旨하시와 還出給該郡民人하라신 指令及訓令完文事蹟를 擧實於前呈이오즉, 指令內에 第當有査實措處 事이시오나 奉承勅旨하옵고 又承宮內府指訓完文시와 旣爲還出給該民人之民私漁基를 何處에 査實措處乎잇가? 一島生靈補産資業之物을 沒含於派員口腹之計가 可乎잇가? 萬民資業賴生이 可乎잇가? 事至此境에 一郡民人이 幾至渙散之境이온즉 且稅納를 言之올진 自該郡으로 自爲上納이 爲國安民之策이온즉 莫尊皇勅之下, 莫重府決之事를 挾雜派員의 壑慾之心을 一郡生靈漁肉之慘이 極爲冤抑하시와 緣由로 前呈을 粘連齊聲仰籲하오니, 萬加洞燭시와 前呈을 細細察焉옵시고 特念殘島生靈漁肉之慘情景허시여 渙散者安接之意로 嚴訓於本道觀察使及昌原監理署하시옵고 使此海隅殘氓으로 毋至含冤抱痛케 積善撫摩之處分를 千萬伏包홈. 光武十年六月 日.
[後] 曺錫瑾, 辛周逸, 玉相莘, 尹宅根, 辛錫雲, 玉宣煥, 尹永禹, 朴南基, 元錫禧, 金斗英, 元世應, 玉英煥, 尹永曄等. 經理院卿閣下.
巨濟郡漁基民等, 本郡漁基民私條, 還出給之意發訓事.
[指令] 本郡漁基에 初無民私條之名目이거 妄生藉托고 專事誣訴가 極爲痛歎이라。卽爲退去야 切勿以此煩聒이되 倘復不悛이면 此等挾襍之習을 斷當嚴懲 事. 光武十年八月九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