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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된 자 십사만 사천(19)
말씀: 계 7:1-8. 2024년 7월 7일 일요일 오전 11시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은혜시대의 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십사만 사천’이란 수입니다. 대부분의 이단 종파들은 이것을 자기들의 종파 안에서 구원받는 자들의 수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약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큰 환란 때 구원 받는 자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계7:3).
큰 환란 때 이마 안에 인을 찍어 봉인 된 144,000명만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그가 성경을 읽지만 글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신약의 크리스천들이나 어떤 교단, 교파의 사람들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사만 사천이 누구인지, 이들의 수가 문자 그대로의 수인지 상징적인 수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의견,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지 않고 자기생각대로 해석해서 그 해석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에 문제가 터지고 복잡해집니다.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캠벨파 등 144,000명을 자신들의 교리를 믿는 성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성경을 읽을 때 기록된 대로 믿는 대신 자신들이 해석한대로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므로 그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볼 때엔 매우 웃기는 짓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신들이 십사만 사천의 무리들에 해당한다고 떠들어대는 무리들(신천지, 안상홍 증인회)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대로 읽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지 해석해서 그 해석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계시록 7장은 큰 환란 때 이 땅에서 구원 받는 성도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일곱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받으신 어린양께서 봉인을 떼실 때마다 땅에서 일어나는 재앙들을 보았고 기록했습니다. 다섯째 봉인이 열렸을 때 제단 아래에 있는 혼들을 보았는데(6:9). 그들은 큰 환란 때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간직한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들로서 순교한 환란 성도들의 혼이었습니다.
여섯째 봉인을 열자 땅에 있던 사람들은 왕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할 길을 찾지 못하고 죽음을 구하지만 죽지도 못하는 고통을 받습니다.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봉인을 열면 모든 봉인이 열립니다. 그런데 6장에서는 여섯 봉인까지만 열리고 7장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 전개됩니다. 그러다 8장에서 마지막 일곱째 봉인이 열립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계시록 6장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으므로 7장은 다른 내용이 삽입된 삽입장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봉인 재앙 중에 구원 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 {주}여, 내가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두려웠나이다. 오 {주}여, 그 해들의 한중간에 주의 일을 되살리시옵소서. 그 해들의 한중간에 알리시옵소서. 진노하실 때에 긍휼을 기억하시옵소서.](합3:2). “그 해들의 한중간에”(큰 환란 한중간)에 주님께서 자신의 일을 알리십니다.
7장은 주의 일을 되살리신 내용으로 재앙이 아닌 혼의 구원을 다룹니다. 우리는 5,6장에서 재앙을 보았지만 7장에는 주의 구원을 봅니다. 주님께서 그 해들의 중간에 알려 주시는 내용입니다.
7장은 큰 환란의 기간 중에 이 땅에 믿는 자들, 큰 환란 성도들, 남은 자들, 이기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환란 중에 있는 땅의 재앙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런 중에도 이 땅에 남은 자들 즉 구원 받는 자들이 있다는 점에 잠시 눈을 돌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4장에서 교회의 들림 받음(휴거)을 보았습니다.
5장에서 왕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 있는 봉인된 책을 보았습니다.
6장에서는 어린양께서 봉인을 차례대로 여시는 것과 그에 따른 재앙들을 보았습니다.
7장에서 우리는 새롭게 ‘봉인된 자들’을 봅니다.
신약의 은혜의 시대에서 봉인된 사람은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봉인하시고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고후1:2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봉인하셨습니다. 봉인되었다는 것은 도장(seal)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물에 도장을 찍고 봉인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세금을 내지 않으면 세무서에서 나와 모든 가구와 집기들에 빨간 딱지를 붙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재산이 국가의 재산으로, 국가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더 이상 자기 것들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원 받은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봉인하셨습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는데](엡1:13). 주님은 우리 몸에 표(mark)를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봉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에 의해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엡4:30).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봉인은 구속의 날까지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봉인된 우리는 완전함을 이루고 이 땅의 썩을 몸 안에서 해방되어 영광스런 하늘의 몸을 입게 됩니다. 큰 환란 때 봉인된 자들은 144,000명의 유대인들로서 이들은 여자를 알지 아니한 동정들(virgins)로서 신약 크리스천들과는 전혀 무관한 자들입니다.
계시록 7장에는 두 부류의 구원 받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1-8절까지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봉인된 12,000명씩 총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모두 여자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동정들(virgins:순결한 처녀)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았고 큰 환란의 재앙에서 죽었다는 기사가 없이 14장에서 땅이 아닌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환란 성도들의 휴거를 보여 줍니다.
9-17절에는 이방인들로서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 “곧 모든 민족들과 족속들과 백성들과 언어들에 속한 큰 무리”(9)로 전 세계의 이방인 환난성도들입니다. 이들은 흰 예복을 입고 있으며 큰 환란에서 나온 무리들이라고 분명히 밝혀 두고 있습니다(9,14). 이들은 또한 어린양의 피로 이긴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똑같이 7장에 기록되었지만 숫자를 정한 144000 명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큰 환란 때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란 것과 모두 땅에서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땅에 있던 이스라엘의 십사만 사천은 14:1에서 하늘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습니다. 큰 무리들 역시 땅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지만 저 하늘에 있습니다(6:9,15). 이들은 환란 성도들의 부활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큰 환란 때는 끝까지 견딘 자들 중에 하늘로 들림 받지 못하고 육체로 구원받고 곧 바로 천년 왕국으로 들어갈 자들도 많습니다. 광야로 도망가서 부양받은 사람들, 산으로 도피한 사람들은 하늘로 들림 받는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천년 왕국으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내용을 신약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교리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7장에서 십사만 사천과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의 차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렵지 않게 십사만 사천과 큰 무리들의 성도들이 전혀 다른 부류들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십사만 사천은 예외 없이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 수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십사만 사천은 이마에 인을 받아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들이 이마에 인을 찍어 봉인할 때까지 하나님은 천사들에게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나팔 재앙 때 나무와 풀이 상하고 둘째 나팔 재앙에 바다의 물 1/3이 피로 변하고 셋째 나팔을 불 때 강물들이나, 샘물들이 쓰게 되는데 주님은 나팔을 불기 전에 144,000명의 이마에 인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계9:4에 보면 주님은 이마에 인이 없는 그 사람들만 해하여야 한다는 명령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마 안에 인을 받은 이들은 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하에서 올라온 메뚜기들은 풀과 나무나 푸른 것을 전혀 해치지 않고 오직 사람만 해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들은 모두 큰 환란 초기 즉 전 삼년 반에 있는 일들입니다.
둘째, 7장 뒷부분에 나오는 아무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은 모두 이방인들입니다. 이들은 큰 환란 때에 십사만 사천이 받는 보호를 받지 못하고(9:4) 죽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6장에서 제단 아래 있던 혼들입니다.
★ 십사만 사천은 7장에서 현재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큰 무리들은 모두 셋째 하늘의 왕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있습니다(7:9).★ 십사만 사천은 큰 환란 초기 즉 전 삼년 반의 재앙 때에 활동하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큰 무리들은 모두 큰 환란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7:14). 이들은 주님이 주신 흰 예복을 입고 동료들의 수가 찰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늘로 들림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 십사만 사천은 하나님께서 인을 친 선택 받은 사람들(4)이요 동정들이지만 큰 무리들은 끝까지 견디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로서 이긴 자들이요(7:14) 남녀노소가 다 있습니다(마24:19).
★ 십사만 사천은 바닥없는 구덩이에서 올라온 메뚜기들의 재앙으로부터 특별보호를 받습니다(9:4). 그러나 큰 무리들은 죽기도 하고, 큰 환란의 재앙을 모두 겪었던지라 ‘주리고, 목마르고 해와 열기로 내리 쬐는 고통’ (7:16)을 받았습니다. 이상 말씀의 단순한 비교를 통해 우리는 명료하고 쉽게 큰 환란 때 전혀 다른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더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입니다. [이 일들 뒤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계7:1).
“이 일들 뒤에 내가 보니”사도 요한은 여섯 봉인이 열리는 것까지 차례대로 보고 기록했는데 그 일들 뒤에 본 것이 7장입니다.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땅이나 바다에나 나무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바람이 불지 않으면 땅에 사는 생명체는 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땅, 바다, 나무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당장 곡물 생산량에 치명타를 입게 되고 모든 과일과 씨앗도 꽃가루가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화접이 안 되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바다에 바람이 없으면 산소 공급이나 조류(潮流), 어류에 문제가 생깁니다. 가뭄이 심하면 녹조가 일어나 어류들에 산소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므로 폐사합니다.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바람이 없으면 꽃가루가 날리지 않고 태풍이나 해일, 토네이도가 없다며 좋아할 수도 있지만 바람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연환경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랍니다.
이런 자연환경에 필요한 바람과는 달리 성경 본문에서 네 바람은 심판의 도구를 말씀합니다. 특히 회오리바람은 주의 심판에 늘 등장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천사들이 강한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붙들어서 땅이나 바다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환난의 바람을 이 땅에 불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또 내가 보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계7:2). 인(the seal).
지금 요한이 보는 것은 일곱 봉인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일곱째 봉인을 여는 것을 보여 주시기 전에 뭔가 다른 것을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람을 잡고 있는 네 천사를 보았고 동쪽에서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쳤습니다(2). 큰 환란 때 주의 심판을 집행하는 이들은 천사들이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일은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한 천사가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동쪽에서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칠 권능을 가진 천사”에게 큰 소리로 뭔가를 외쳤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땅과 바다(물)는 생존의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는 땅과 바다를 해칠 권능을 받은 천사에게 외쳐 말하는데 그 내용인 즉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마칠 때까지 임무를 일시 중지(stop)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가 먼저 이 땅에서 자신의 임무를 마친 후에 그들이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동쪽으로부터 올라와”(2)란 표현은 동방의 별이니 동방예의지국이니 하면서 ‘한국’을 지칭한다는 주장을 하는 엉뚱한 이들이 있지만 그냥 소설일 뿐입니다. 동쪽에서 해가 떠서 그런지 동양인들은 유난히 동쪽을 길한 방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엔 한국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현자들은 동쪽으로부터 왔습니다(마2:1-2). 번개는 동쪽에서 나서 서쪽까지 번쩍입니다(마24:27).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는 동쪽에서 올라왔습니다(계14:2). 하나님의 사역은 동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갑니다. 사람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갑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그 앞에 민족들을 주어 그가 왕들을 다스리게 하였느냐?.......](사41:2)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동쪽으로부터 오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동쪽 문으로 오십니다. [그 뒤에 그가 나를 문 곧 동쪽을 바라보는 문으로 데려갔는데 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길에서부터 임하더라.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더라.](겔43:1-2).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흉내 내며 자신을 메시아로 가장하는 적그리스도는 어떻겠습니까? [내가 동쪽에서부터 굶주린 새를 부르되 곧 먼 나라에서부터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리라. 참으로 내가 그것을 말하였으니 또한 그것을 이룰 것이요, 내가 그것을 작정하였으니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사46:11). 이는 아마겟돈 전쟁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구절은 계시록 16:12절과 정확히 짝을 이룹니다. 적그리스도의 군대는 동쪽에서 옵니다. [.....동쪽 왕들의 길이 예비되게 하려 함이더라.](계16:12).
3절입니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그들을 봉인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라, 하더라.](계7:3).
동쪽에서 올라온 천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봉인을 합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땅과 바다를 해칠 권능’을 가진 천사들은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란 가운데서 자신의 종들을 먼저 세우고 보호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봉인된 자들이란 하나님의 종들로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자들입니다.
구약 성도들 중에 봉인 된 자들은 땅의 심판과 재앙 중에 보호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잉크통을 찬 사람을 불러 자신의 남은 백성들에게 표를 하게 하셨습니다(겔9:3). 예루살렘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며 배교의 때에 이루어지는 죄악과 불법들,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라고 하셨습니다(겔9:4).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잉크통을 찬 사람이“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내가 행하였나이다.”(겔9:11)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9:5-7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 주님으로부터 이마에 표를 받은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보호를 받습니다.
신약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봉인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셨습니다. 큰 환란 때 성도들 역시 하나님께서 인을 쳐서 봉인하십니다. 이들은 큰 환란 속에서 쏟아지는 재앙들 가운데서도 보호를 받습니다. 계7:4-8절까지는 봉인된 사람들입니다.
4절입니다.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십사만 사천 명이더라.](계7:4).
요한은 봉인된 자들의 수를 자기가 세어 본 것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이 구절은 큰 환란 때 구원 받는 성도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봉인된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인 맞은 수입니다. 천사들이 이마에 인을 찍은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 세계 어느 이방인들이나 한국인들도 아니며 영적 이스라엘이니 어쩌니 그런 말은 전혀 헛소리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유대인들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안식교 교인들, 몰몬교 교인들, 신천지 교인들이 아닙니다. 이단 종파들에서 이 구절을 끌어다 자신들에게 맞추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모든 지판에서 봉인되었고 그 수는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선별된 사람들로서 모두 144,000명입니다. 신천지이단은 이스라엘의 열두 자파의 이름대신 열두 사도의 이름을 붙여 베드로지파, 안드레 지파, 야고보 지파, 요한 지파 등으로 구역을 나누고 있는 꼴은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본문의 십사만 사천은 큰 환란 때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왕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계시록에는 두 가지 복음이 선포됩니다.
“왕국 복음”과 “영존하는 복음”입니다. 왕국 복음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음입니다. 유대인의 왕, 다윗의 씨에서 나신 왕이 온 세상을 다스릴 왕이 되고 왕국이 세워진다는 내용으로 주님과 침례인 요한과 사도들이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내용입니다. 왕국 복음에는 십자가나 부활과 같은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지금 선포하는 복음은 왕국복음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하나님의 왕국과 관련된 복음입니다. 영존하는 복음은 천사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땅에 거하는 자들, 즉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이마 안에나 손 안에 짐승의 표를 받지 말고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내용입니다(계14:6-7,9,11).
십사만 사천은 큰 환란 초기에 땅의 온 민족에게 왕국 복음을 선포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주께서 대언자 다니엘을 통해 말씀하신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을 너희가 보거든 (누구든지 읽는 자는 깨달을지어다.)](마24:14-15). 주님께서 큰 환란 때에 있을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라고 하십니다.
마24:14절은 전 삼년 반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마24:15절은 후 삼년 반이 시작되는 시점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적그리스도가 성전에서 자신을 하나님으로 나타내 보이는 장면입니다. 이 때 유대에 있는 자들은 광야로 도망가든지 산으로 도망가든지 그들을 피해야 합니다. 지붕이나 들에 있는 자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마24:17-18).
왕국 복음이 온 민족들에게 증언되기 위해서는 증언할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 일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은 온 세상의 모든 창조물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합니다(막16:15, 행1:8). 이 시대에 은혜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갈1:8).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 즉 큰 환란 때에 일어날 표적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마24:3). 마태복음 24장은 큰 환란에 관한 말씀들이므로 여기서 나오는 표적들, 재앙들은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큰 환란 때 왕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되고 그제야 끝(큰 환란의 끝)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5-31절까지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후삼년 반에 일어날 일들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초림 때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 이스라엘의 온 땅으로 가서 왕국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마10:1, 눅10:1). 초림 때는 이스라엘 민족 외에 다른 민족에게는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마10:5-6). 주님 자신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큰 환란 때에 주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가 아니라 땅의 모든 민족들에게로 오십니다. 주님께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이 땅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들의 왕이시오, 온 세상의 모든 왕국을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주의 종들은 모든 민족에게 가서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세우실 왕국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침례인 요한이나 제자들은 유대인의 왕,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세우실 왕국만 선포하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큰 환란 때 하나님의 종 십사만 사천은 온 땅의 왕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세우실 왕국을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왕국의 이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증언으로 온 세상에 선포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초림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두 명씩을 짝지어 보내셨듯이 큰 환란에서 십사만 사천 명을 두 명씩 짝지어 보내신다면 72,000개의 2인 1조의 선교 팀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봉인된 십사만 사천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계 14:1-5절에 나옵니다. 그들은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으로 불립니다. 그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는 자들로서 처녀들(순수 동정들-virgins)로 불리는 남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4). 이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입니다(4). 그들의 입에서는 교활함을 찾을 수 없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서 잘못이 없습니다(5).
그럼 왜 이스라엘의 12지파에서 12,000명씩 선별된 것입니까? 민수기 31장에 한 예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과 미디안과의 전쟁이 터졌을 때 모세는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군사로 뽑았습니다. [너희는 두루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로부터 각 지파에서 천 명씩 뽑아 싸움에 보낼지니라, 하매 이에 이스라엘의 수천 가운데서 각 지파에서 천 명씩 넘겨주니 만 이천 명이 싸움을 위해 무장하니라.](민31:4-5).
각 지파에서 천 명, 총 12,000명의 군대가 전쟁을 위해 선발되었고 이들은 맡겨진 임무를 모두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전쟁 중에 단 한 명도 부상을 당하거나 죽지 않았습니다. [군대의 수천을 다스리는 직무 수행자들 곧 천인 대장들과 백인대장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와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이 우리 휘하에 있는 전사들의 총수를 조사하였는데 우리 중에서 한 사람도 모자라지 아니하므로](민31:48-49).
미디안과의 전쟁에 뽑힌 군인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무사히 귀환했고 한 사람도 실종이나 죽은 이가 없었습니다. 큰 환란 때 짐승은 이 144,000명을 죽이려고 전쟁을 벌인다 해도 이들은 이마 안에 하나님의 인을 받았으므로 아무도 죽일 수 없습니다(계9:4). 땅에 내리는 어떤 재앙에도 이들은 죽지 않고 보호를 받습니다. 이들은 온 땅에 모든 민족에게 왕국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별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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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7:5-8절은 12지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파는 창세기 4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과 다릅니다. 야곱은 침상에서 아들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마지막 날들에 있게 될 일들을 예언했습니다. 얼른 눈으로 읽어 보시면 단 지파와 에브라임 두 지파가 보이지 않습니다.
5절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갓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계7:5).
유다, 르우벤, 갓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각각 만 이천입니다. 유다는 큰 환란 때 이스라엘의 맨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유다는 형제들 중의 으뜸이요, 통치자가 거기서 나옵니다. 르우벤은 본래 장자였지만 장자권은 요셉에게, 통치권은 유다에게 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에게 각각 다 넘어가 버렸습니다. 비록 그는 유업의 상속을 잃어 버렸지만 항상 12 지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그 이름이 “아들을 보리라.”란 뜻에서 지은 이름입니다(창29:32). 마지막 날들에 르우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갓 지파는 그 이름이 “군대가 오는도다.”란 뜻인데 마지막 때에 그의 이름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군대를 몰고 오십니다.
6절입니다. [아셀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납달리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므낫세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계7:6).
아셀은 “행복한 자, 복을 받은 자”란 뜻인데 마지막 날들에 고통을 받다가도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복을 누립니다. 납달리는 “내가 큰 싸움을 싸워 이겼다”(창30:8)란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들은 적그리스도, 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깁니다. 므낫세는 “고생과 수고 따위를 모두 잊어 버렸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이스라엘은 과거의 죄, 허물, 고생 따위를 다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모두 잊게 하십니다.
7절입니다. [시므온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레위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잇사갈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계7:7).
시므온은 “들으셨다, 주셨도다.”란 뜻입니다(창29:33). 마지막 날들에 주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셨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이스라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민족이 됩니다. 레위는 “연합”이란 뜻입니다(창29:34). 율법 아래서는 결코 하나님과 연합하거나 밀착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선별된 이들은 주님과 밀착하며 연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잇사갈은 “삯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창30:18). 주님은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은 주의 일을 행한 후에 보상을 받습니다. 마지막 날들에 이스라엘은 주께서 약속하신 땅을 유업의 상속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8절입니다. [스불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요셉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요, 베냐민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만 이천 명이더라.](계7:8).
스불론은 “좋은 지참금, 거할 곳”(창30:20)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 정착합니다. 요셉은 “더하시리라.”(창30:24)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다윗의 언약과 왕좌 외에도 많은 것을 더해 주십니다. 베냐민은 ‘오른 손의 아들, 늙어서 얻은 아들’이란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왕좌 오른 편에 계시며, 예부터 계신 분의 아들이 영원히 통치하실 것입니다.
자, 이렇게 열두 지파에서 봉인된 수가 12,000명 씩 모두 144,000명이 선별되어 큰 환란 때 주께서 맡긴 사역을 하게 됩니다. 동쪽에서 올라온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들은 이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이들은 큰 환란 속에서 죽지 않고 사역을 마친 후에 땅에서 구속을 받아 저 하늘로 들림을 받아 어린양 앞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계14:1-5).
여기서 본래 있어야 할 두 지파가 보이지 않습니다. 단과 에브라임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가 있고 요셉의 이름이 보입니다. 본래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둘에게 상속이 분배되어 그 이름이 없어야 합니다. 교리적 의미를 보기 전에 그 이름에서 이들의 이름이 빠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단 지파의 단이란 이름은 ‘심판하다.’란 뜻입니다.
이마에 인을 받은 이들은 ‘심판자들’이 아닙니다. 심판의 권한이 없습니다. 심판은 교회의 크리스천들에게 맡겨졌지 결코 큰 환란 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단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입니다.
에브라임은 그 뜻이 “늘어나다, 갑절로 증가하다”란 뜻입니다. 지파별로 12,000명은 고정된 수입니다. 늘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말씀 등은 더해질 수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에 담긴 그 의미는 마지막 날들의 예언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자, 그럼 교리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에브라임 지파’와 ‘단 지파’에서 아무도 선별하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연합하였으니 그를 내버려 둘지니라.](호4:17).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해 이들은 받을 몫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끔찍한 일을 보았는데 거기서 에브라임이 행음하고 이스라엘이 더럽혀졌느니라.](호6:10). 에브라임의 행음이란 말을 통해 이들은 우상 숭배 외에도 음행의 죄가 있었습니다. 이런 죄는 유업의 상속에 영향을 미칩니다.
[에브라임이 죄를 지으려고 많은 제단을 만들었으므로 제단들이 그에게 죄짓게 하는 것이 되리라.](호8:11). 이 부분은 심각한 죄입니다. 우리는 호세아 전체를 통해 에브라임의 죄를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서에는 에브라임의 죄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호9:8,13,16-17, 12:1, 14, 13:1,12절 등을 참고할 것). 그래서 에브라임의 이름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요셉이 들어갔습니다.
단 지파는 일찍부터 배교에 앞장 선 지파입니다. 야곱은 죽기 전 침상에서 단을 독사, 뱀에 비유했는데(창49:16,17) 이들은 페니키아의 우상 숭배를 수입해서 이스라엘 전체로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대언자 아모스는 말하기를, [사마리아의 죄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기를, 오 단아, 네 신이 살아 있다, 하며, 브엘세바의 풍습이 살아 있다, 하는 자들 곧 그들도 쓰러져서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암8:14)고 합니다. 사사기 17,18장을 보면 이스라엘에 이방 종교, 이방 제사장 제도가 수입되는 장면이 잘 나옵니다.
에브라임 산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을 가지고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미가는 신당을 만들고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어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다가 레위인 젊은이 하나를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는 고용 제사장을 하나 세웠고 종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거하며 나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십 세겔과 의복 한 벌과 양식을 네게 주리라, 하므로 이에 그 레위 사람이 거기로 들어갔더라.](삿17:10). -아버지와 제사장- 지금의 로마 캐톨릭 “신부(神父)”체계가 여기서 나옵니다.
주께서는 땅에 있는 자들을 아버지(마23:9)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가 이미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에브라임 지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가의 집에 있던 이 종교는 단 지파의 종교로 승격, 발전되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조용히 하고 네 손을 네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에게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겠느냐, 혹은 이스라엘 안의 한 가족 곧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겠느냐? 하니 그 제사장이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형상을 취하고 그 백성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니라.](삿18:19-20). 미가의 집에 있던 가족 제사장은 이제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종교가 됩니다.
미가는 자신이 만든 종교, 우상 숭배의 형상을 단 지파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는 단 자손을 향해 소리치며 부르짖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만든 내 신들과 제사장을 너희가 가져갔으니 내게 무엇이 더 남아 있느냐? 너희가 나에게, 무엇이 너를 괴롭게 하느냐? 하고 말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므로](삿18:24).
단 지파는 미가에게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고 떠났습니다. 단 자손은 그 새긴 형상을 세웠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날까지 레위 지파가 아닌 므낫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의 집안이 그 땅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삿18:30,31). 미가가 만든 형상은 단 지파에 의해 하나의 종교로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그 이름이 빠진 것을 보지만 그들이 영원히 구원에서 떨어졌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에스겔 48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에스겔 48장은 천년 왕국 때 이스라엘이 땅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겔 48:1절에 맨 처음 나오는 이름이 “단 지파”입니다(겔48:1). 땅의 몫을 받는 지파들을 보면 단, 아셀, 납달리, 므낫세, 에브라임, 르우벤, 유다(겔48:2-7), 베냐민, 시므온, 잇사갈, 스블론, 갓(겔48:23-27)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전이 위치한 중간 지역의 땅을 받습니다(겔48:12-13).
땅을 분배할 때 주님은 계시록 7장에 나오는 것과 달리 단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를 다시 회복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로 계시록 7장에서 이들의 이름이 빠진 것은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 몫을 잃어버린 것이지 영원한 구원이나 유업을 잃어버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배교한 이스라엘이 주님을 배척하고 죽였지만 그들은 영원히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일정 시간 징계를 받고 회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선물들과 부르심에는 뜻을 돌이키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롬11:29)는 말씀은 에브라임이나 단 지파에게도 적용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 중에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 음행, 우상 숭배, 살인 등의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옹호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죄에 대한 징계는 있으나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지속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는 유업이나 상속에서 많은 몫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화되지 않았다면 하물며 크리스천들에게 주신 은혜와 복이 취소되거나 파기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합니다. 거듭난 자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단절되거나 파기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상을 잃어버릴 일들은 하지 않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요일3:2).
[이는 너희가 다시 두려움에 이르게 하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분을 의지하여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롬8:15).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관계성, 친함이 멀어 질 수 있고, 교제가 껄끄러워 질 수 있습니다. 이는 친교의 문제이지(fellowship), 관계성(relationship)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것도, 누구도 아들이란 사실을 부인하거나 바꿀 수 없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변할 수 없습니다.(롬8:38-39절 참조). 인륜도 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천륜을 끊을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마귀, 죄, 나 자신 등 그 누구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시니라.](요10:28-30).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서 구원을 빼앗을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될 것입니다. 마귀나 죄나 나 자신도 하나님 보다 크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마귀나 다른 어떤 것이 우리의 구원을 빼앗을 수 없다면 나 자신이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나요? 예를 들어 자살을 하든지, 성령님을 모독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도 구원은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그분을 받아들였다면 그분은 내 안에, 나는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비롯한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는 나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듯이 나 스스로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하나님께서는 "결코(NEVER)"라고 말하심으로 어떤 경우에도 구원은 상실되거나 잃을 수 없음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외가 있다면 주님은 “결코...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자는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일단 예수님께 나왔다면 그가 자살이든 신성모독이든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이유를 들어 그를 내쫓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IN NO WISE(결코)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 다시 에스겔 48:31-34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땅이 아니라 도시의 문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천년왕국 때 예루살렘이란 도시의 12문은 열 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1. 르우벤 2. 유다 3. 레위 4. 요셉 5. 베냐민 6. 단 7. 시므온 8. 잇사갈 9. 스불론 10. 갓 11. 아셀 12. 납달리 입니다. 여전히 단 지파의 이름이 나옵니다. 야곱의 직계 열 두 아들의 이름이 모두 등장합니다. 새 예루살렘의 열두 대문에도 이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 도시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고 열두 문이 있었으며 그 문들에 열두 천사가 있었고 그 문들 위에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자손들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니라.](계21:12).
계시록 7장에서 단 지파가 빠졌다는 이유로 단 지파는 영원히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 지파는 단지 왕국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뽑는데 빠진 것입니다. 말씀을 볼 때 사사로운 추론이나 해석이 아닌 본문 그 자체를 항상 기록된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건전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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