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두동면
연화산(蓮花山) 해발(532m)
산행일:2020년 8월 1일 토요일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은편교회주차-2차선도로-디딤돌식당옆마을길-전원주택-콘크리트임도길-
임도삼거리-임도-산림보호구역지정알림판-우측능선-산불감시초소-
김해김씨묘-연화산-활공장-활공장임도-계곡-전원주택-
은편맛집-은편교회(원점회귀) 거리 6.5km
산행 시간 3시간 소요
*** 디딤돌식당옆 마을길 출발지점 ***
*** 전원주택지 막다른 길에서 좌측 콘크리트임도 ***
*** 임도 삼거리(체육시설 쉼터) ***
*** 산림보호구역지정 알림판에서 우측 능선길 길이 희미함
주의요함 ***
***산불감시초소에서 내려다본 치술령이 보인다 ***
*** 연화산 정상 ***
송신탑이 있으며 울창한 잡목으로 조망권이 없음
*** 활공장에서 내려다본 농촌 풍경***
*** 활공장 임도길에서 우측 계곡길인데
길이 희미하고 잡초가 우거져 약간 힘이 든 등산로 ***
*** 전원주택이 있는 곳에서 0,5km 내려가면
은편맛집 ***
*** 오늘 산행의 종점 이지만 차량 회수로
은편교회 옆 공터 주차장 ***
언양읍 봉화산 화장산으로 이동 거리 19km
울산광역시 울주군 법서읍 두동면 . 경북 경주시
치술령 해발(767m) . 국수봉(菊秀峰) 해발(603m)
산행일:2013년 8월 15일 나홀로 산행
산행코스:치산휴게소-법왕사-갈림길-망부석-전망대-갈미봉-주능선-콩두루미재-670봉-
서남재-은을암고개-은을암-치산휴게소 (원점회귀) 하산 거리 12.5km
산행 시간 5시간 20분 소요 된다
*** 법왕사(法王寺) ***
*** 치술령 ***
치술령은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경북 경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우리말로 '수릿재'로도 부르고
치술령은 신라의 충신 박제상과 관련된 전설이
있으며 박제상의 아내는 일본에서 순국한 남편 박제상을
그리워 하다가 남편이 떠난 바위가 보이는 치술령으로
올라갔다가 몸이 굳어 그 자리에서 굳어 바위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바위를 남편이 그리워
하는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望夫石)
이라고 부르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해지고
있다.
*** 신모사지 비석 ***
박제상의 부인이
망부석에서 죽은후 치술신모(鵄述神母)로
추앙하는 사당이 있었던 장소로 주춧돌과 부속의
흔적들이 이곳에서 발굴 되었다고 한다.
***은을암 ***
은을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로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신라시대 고찰로 설화와 함께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의 충신 박제상은 인질로
잡혀간 미해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난 뒤
부인 김씨는 일본쪽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치술령에 올라가서
남편(박제상)을 기다리다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두 딸과 함께 남편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하며 그 때 시신은 망부석으로
변했고 혼은 혼조가 돼 날아 올라 은을암 절에 있는 바위틈에 숨었다
하여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했으며 새가 날아 오른 자리를 비조라
했는데 이로 인해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비조마을이 생겼으며
그 뒤 충절과 정절을 기리기 위해 이 암자를 창건했다고
전하며 현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어 있는 설화가 깃든 암자로 알려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 국수봉(菊秀峰) ***
국수봉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과 두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두동면의 치술령과
맥을 같이하고 본래의 이름은 國讐峰(국수봉)
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國秀峰(국수봉)으로
부르다가 지금의 菊秀峰(국수봉)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신라의 경주를 중심으로 다른 산들은 모두 그 산세가 왕도(王都)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자세인데 유독 이 산만 나라에 반역하는 것처럼
등을 돌리고 앉았다하여 나라 국(國)자와 원수 수(讐)자를 써서 국수봉
(國讐峰)이라 했다고 전하며 국수봉 7부 능선에는 치술신모인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의 혼조(魂鳥)가 숨은 곳이라는 설화가 전해
지는 은을암이 있으며 해발(603m)인 국수봉은 범서 옛길
탐방과정에서 "국수봉을 범서의 주산(主山)으로
제대로 대접하자"는 제안이 있은 후 이를 다양한
방법들이 논의되어 그 중 하나로 정상에 설치된
표지석이 국수봉을 상징하는 것으로 너무
왜소하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보다
단정한 표지석 설치를 위한 구체적
인 작업이 추진되어 많은 사람
들의 도움으로 범서주민들의
뜻을 모아 지금의 표지석이
설치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