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 라자루스(Lazarus),
성 마로타(Marotas),
성 나르세스(Narses),
성 엘리야(Elias),
성 아비보스(Abibos),
성 셈베트(Sembeeth),
성 마레(Mare)
성 사바(Sabas)
축일 3월 27일
성 자니타, 성 라자루스(Lazarus),
]성 마로타(Marotas), 성 나르세스(Narses),
성 엘리야(Elias), 성 아비보스(Abibos),
성 셈베트(Sembeeth), 성 마레(Mare)와
성 사바(Sabas) 모두 9명의 페르시아 순교자들은
페르시아의 국왕 사푸르 2세 치하에서 희생되었다.
================================
성 루페르토(Rupert)
축일 3월 27일
성 루페르투스(Rupertus, 또는 루페르토)는
국적을 따지면 프랑크인이지만, 독일 보름스(Worms)의
주교로서 바이에른(Bayern)의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그 지방의 알톳팅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자,
그의 활동 영역을 멀리 도나우(Donau) 강 지역까지
펼쳐나갔다. 그의 선교 중심지는 잘츠부르크였다.
성 루페르투스는 독일을 선교했던 가장 열심한
주교로 꼽힌다.
================================
성 필레투스(Philetus),
성녀 리디아(Lydia)
성 마케도(Macedo),
성 테오프레피우스(Theoprepius),
성 암필로키우스(Amphilochius)
성 크로니다(Cronidas)
축일 3월 27일
성 필레투스(Philetus), 성녀 리디아(Lydia)
성 마케도(Macedo), 성 테오프레피우스(Theoprepius),
성 암필로키우스(Amphilochius)와
성 크로니다(Cronidas)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일리리아(Illyria)에서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성 필레투스는 원로원 의원이고 성녀 리디아는
그의 아내이며, 성 마체도와 성 테오프레피우스는
그들의 아들이었다. 성 암필로키우스는 장군이었고,
성 크로니다는 기록 책임자였다.
================================
성 빌리암 탕피에르(William Tempier)
축일 3월 27일
빌리암 탕피에르는 매우 어린 나이로
성 힐레르-드-라-셀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신심이 뛰어나서
원장도 역임했지만 1184년에는 성 요한(Joannes)
주교를 계승하여 푸아티에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그는 당시의 폐습이던 성직매매와 세속적인
교회 운영을 크게 개선하였으나, 그로인해 많은
반대자들이 생겨 일생동안 그들과 싸워야만 하였다.
1197년에 선종한 그는 푸아티에의 성 키프리아누스
(Cyprianus) 성당에 안장되었는데 그곳은
후일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윌리엄 탕피에르로도 불린다.
================================
성 아마토르(Amator)
축일 3월 27일
포르투갈 내의 몇 개의 성당이 과르다 교구의
은수자인 성 아마토르에게 봉헌되었다.
그런데 그는 종종 로카마두르(Rocamadour)의
성 아마토르와 혼동되고 있다.
================================
성 알렉산데르(Alexander)
축일 3월 27일
성 알렉산데르는 군인으로 로마 순교록에 의하면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레우스 황제 때 판노니아
(Pannonia, 오늘날의 헝가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
성 요한(John)
축일 3월 27일
성 요한(Joannes)은 이집트의 리코폴리스
(Lycopolis, 아시우트 Asyut)에서 태어났다.
콥틱 교회에서는 그의 축일을 10월 17일에 기념한다.
그는 원래 목수(또는 제화공)였지만 25살에
은수생활을 하기 위해 가까운 산으로 가서 이후
40년간 은수자로서 살았다.
함께 살고 있던 고령의 은수자는 그의 겸손과
순명을 시험하고자 1년 내내 마른 나무에 물을
주라는 등의 엉뚱한 명령을 이행하도록 시켰고
그는 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선배 은수자가 죽을 때까지 12년을 함께
생활했으며 그 후에는 여러 수도원에서 4년간을
생활했다.
40세 즈음이 되었을 때 요한은 리코폴리스 근처의
바위 꼭대기에 작은 방을 지어 들어가 살면서
해가 진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주중에는 기도하며 지냈으며, 토요일과
주일에는 그의 가르침과 영적 지도를 받고자 모여온
많은 사람들에게 방에 난 작은 창을 통해 가르침을
주곤 하였다. 자신의 방 근처에 병원과 비슷한
종류의 숙박시설을 짓게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방문객들을 돌볼 수 있게 하였다.
그들은 성 요한의 치유와 예언의 은사 그리고
마음을 읽는 능력 등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예언에 관한 성 요한의 은사는
‘테베(Thebes)의 예언자’라는 별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를 죽이고
387년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를 폐위시켰던
폭군 막시무스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를 공격하자
황제는 막시무스와의 전쟁에 대하여 요한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 후 자신만만해진 황제는
서쪽으로 행진하여 판노니아(Pannonia)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막시무스의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쳤으며 알프스를 넘어 아퀼레이아
(Aquileia)에서 그 폭군을 사로잡았다.
의기양양하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돌아온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는 이 승리를 성 요한의
기도에 돌렸다.
392년 에우게니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살해한
아르보가스테스의 도움을 받아 로마 제국의
서쪽 부분을 차지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내시
에우트로핀에게 요한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오도록
지시하였다. 만약 요한이 오지 않겠다고 하면
에우트로핀이 직접 성인에게 황제가 에우게니우스에
대항하여 진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동쪽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청하도록 하였다.
요한은 자신의 거처를 떠나지 않으려 했고,
황제의 승리를 예언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것이며 황제도 이탈리아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에우게니우스를 향해 진격했고
첫 전투에서 만 명의 군사를 잃었다.
패색이 짙었지만 다음날 전투(394년 9월 6일)에서
이교도 시인인 클라우디아누스가 인정했듯이
하늘의 기적적인 개입에 의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5년 1월 17일 자신의
두 아들을 동서 로마의 황제로 남기고 서로마
제국 내에서 사망하였다.
기록이 남아 있는 성 요한의 기적 중에는
그가 축성한 기름으로 원로원 의원 부인의 시력을
회복시킨 일이 있다. 그는 어떤 여성과의 대화도
거부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다른 매개체가 필요했다.
황제의 관리 중 하나가 요한에게 자신의 부인과
대화하도록 간청하였고, 이를 위해 그 부인은
리크로폴리스(Lycropolis)까지 어렵고 위험한
여정을 걸어왔다. 그러나 성인은 지난 40년간의
엄격한 봉쇄생활 동안 어떠한 여성도 보거나
말하지 않겠다는 불가침의 규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다고 했다.
황제의 관리는 재차 부탁을 청하는 부인의 간청으로
다시 성인의 처소를 찾았다. 그리고 성 요한에게
자기 부인이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슬픔을 못 이겨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성 요한은 그 관리에게
“부인에게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녀가 이곳이나
집 밖에서는 아니지만 오늘 밤 나를 볼 것이라고
전하시오”라고 하였다. 관리의 부인이 잠들었을 때
하느님의 사람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부인, 당신의 큰 믿음이 나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종을 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자제하라고
훈계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따라하십시오.
왜 나를 보고 싶어 하십니까? 내가 하느님의 진정한
종과 같은 성인이나 예언자입니까?
나는 죄 많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당신 신앙의 덕으로 당신이
당하고 있는 육체의 병을 낫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하십시오.
항상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고 살고,
그 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그녀의 품행에 대한 몇 가지 적절한 충고를
하고는 사라졌다.
부인은 일어나자마자 꿈에서 본 사람을 남편에게
이야기하였고 남편은 그가 성 요한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그 관리가
요한을 찾아갔지만 성인은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 관리는 성인의 축복을 받고 돌아왔다.
훗날 헬레노폴리스(Helenopolis)의 주교가 되고
성 요한의 전기를 쓴 팔라디우스는 394년 7월
성인을 방문하였다. 도착해서 보니 성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토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성인을 방문했을 때 성인은
창문을 통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통역을 통해 그들이 에바그리우스 공동체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그 지방의
총독이었던 알리피우스의 황급한 방문에 의해
중단되었다. 성 요한은 팔라디우스에게 총독과의
대화를 위해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고,
참을성 없는 팔라디우스는 그들이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에 짜증이 난
팔라디우스는 성 요한이 사람들 사이에 순위를
매긴다는 불평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결국 성 요한의 처소를 떠나려 할 때 요한은
통역을 보내어 “가서 그 형제에게 참을성을
가지라고 전하십시오. 나는 총독을 보내고 그와
대화를 할 것입니다”라고 말을 전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꿰뚫는다는 사실에 놀란
팔라디우스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알리피우스가 떠나고 성 요한은 팔라디우스를
불러 물었다. “왜 당신은 분노하고 마음속으로
나에게 죄를 돌리십니까? 당신과는 언제나 대화를
할 수 있고 당신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지도해주고 위안해 줄 수 있는 스승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총독은 급한 현세의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런 급한 현세의 문제들로부터
잠시 짬을 내어 유익한 충고를 들으러 왔는데,
내가 어찌하여 당신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나서 팔라디우스에게 자신을 유혹하는 것,
즉 은수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 하는 은밀한 욕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악마가 자신의 아버지의
형상으로 나타나 유혹하며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은수의 삶으로 유도하고자 유혹하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성 요한의 형제자매들은
이미 세속을 포기했으며, 아버지는 7년을
더 살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유혹을 무시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 요한은 팔라디우스가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당할 것이며 주교가 되겠지만
많은 고생을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그 모든 고통은 지나갈 것이지만 당시에는
극도로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예언도 덧붙였다.
그들의 만남에 대한 팔라디우스의 증언은
오늘날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다.
같은 해에 성 베드로니우스(Petronius, 10월 4일)가
여섯 명의 수사들을 동행하여 요한을 방문하였다.
은수자는 그 중 누가 성직에 있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였다.
사실 성 베드로니우스는 부제였지만 동행한 수사들 중
가장 어렸기 때문에 그릇된 겸손의 덕으로 이를
말하지 않았다. 요한이 성 베드로니우스를 지목하며
“이 사람은 부제이오”라고 말했을 때
성 베드로니우스는 부인하였다.
성 요한은 그 젊은이의 손에 친구하면서 말했다.
“아들아,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부인하지 않도록,
겸손이 그대를 배반하여 거짓으로 이끌지 않도록
노력하시오. 우리는 어떠한 좋은 상황에서라도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거짓도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행 중 한 명이 치유를 청하자
성 요한은 그러한 병은 영혼에 이득이 된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기름을 축복하여 그에게
전해주었고, 구토 증상을 보이던 그 수사는
그 순간부터 완전히 나았다.
그들이 요한을 재차 방문했을 때
성 요한은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성 요한은 수도승들에게 다른 덕을 얻기 위하여
허영과 자만을 버려야 함에 대해 긴 담화를 나누었다.
그는 비밀스럽게 허영을 품고 있어서 추문을 일으킬만한
부정에 떨어진 다른 많은 수도승들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 예를 들면서 가장 거룩하고 엄격한
삶을 살았지만 허영 때문에 간통을 범하였고
절망 속에서 무질서의 상태로 떨어진 사람의 사례를
이야기하였다. 또한 명성을 찾아 자신을 떠났지만
수도원에서의 설교를 통해 은혜로이 회개하여
뛰어난 통회자가 된 예도 들었다.
며칠 후 그 수도승들은 성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3일 간은 아무도 만나지 않는 대신
기도하였으며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두었다.
성 요한에 관한 명성은 사막의 교부요 은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안토니우스(Antonius, 1월 17일)에
버금간다. 동시대 사람인 성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9월 30일)와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8월 28일)
그리고 요한의 겸손과 뛰어난 순명의 은총을
하느님께 받은 특별한 선물로 돌린
요한 카시아누스(Joannes Cassianus, 7월 23일)도
성 요한을 칭송하였다.
================================
성 요한(John)찬미가 저자
축일 : 3월 27일
다마스커스의 어느 부유한 크리스챤 집안에서
태어났고, 부친은 칼리프 압둘 말레크의 궁중
고관이었다. 그는 그의 부친이 칼라브리아에서
체포한, 그당시 저명한 수도자이던 고스마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후 요한은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볓년을 지냈으나,
726년에 레오 3세 황제가 성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서를 발표하자, 즉시 이에 대하여 반대하면서,
가톨릭 입장을 옹호하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비쟌틴 황제의 분노를 샀다. 726년, 그는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는 예루살렘 근교로 가서
수도자가 되었다.
그후에도 그는 모슬렘을 공격하는 글을 써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일생동안 살았던
수도원은 "마르사바" 인데, 이곳은 예루살렌과
사해 사이에 있는 황량한 산악 지대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지식의 근원",
"정통신앙"등 이다. 그의 저서들은 중세 서방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는 많은 시와 찬미가를 지어 희랍 전례에서
사용되게 하였다. 흔히 그는 희랍의 마지막 교부라고
불리우며, 1890년에 레오 13세는 교회 박사로
선언하였다.
================================
성 젤라시오(Gelasius)
축일 3월 27일
아일랜드 시인 디아메이드(Diarmaid)의 아들인
성 젤라시우스(또는 젤라시오, 예수의 종이라는 뜻)는
데리(Derry)의 대수도원장으로부터 16년간 교육을
받았다. 그는 성 말라키아 오모르
(Malachias O'More, 11월 3일)가 은퇴한 1138년
아마의 주교로 축성되어 1174년까지 아일랜드의
수석 대주교로 봉직하였다.
그의 긴 주교직 동안 성 젤라시우스는 노르만족의
침략 전후의 사건들과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
(Hadrianus IV)가 영국의 헨리 2세(Henry II)에게
아일랜드를 기부한 진위가 의심스러운 사건 등에
직면해야 했다. 헨리 왕은 1171년에 아일랜드에
도착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허가한 모든 것을 확정하였다.
성 젤라시우스는 아마의 대성당을 재건하였고
노르만족의 더블린(Dublin) 침략과 정착이
더블린 관구의 신자들에게 있어 아마보다는
캔터베리(Canterbury)에 더 의지하였던 1162년에
성 라우렌티우스 오툴(Laurentius O'Toole, 11월 14일)을
더블린의 대주교로 축성하였다.
그 해 킬데어(Kildare) 지방 클레인(Clane) 시노드에서
아마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아마와 일치된 신학 교수들로
하여금 아일랜드 교회에 속한 학교들에서 가르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어 전례의 통일을 가져왔다.
성 젤라시우스는 지칠 줄 모르는 성직자였다.
그는 아일랜드 전역을 지속적으로 방문하였으며
오래된 수도원들을 재편성하였고 시노드를 소집했다.
그는 팔리움(Pallium)을 받은 첫 아일랜드 주교로
알려져 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의
재위기간 중에 파파로 추기경은 네 개의 팔리움을
1152년 켈스(Kells) 시노드에 가져와 아마,
카쉘(Cashel), 더블린, 투암(Tuam)의 대주교에게
수여하였다. 이 시노드의 기록에는 아일랜드 연감에
있는 십일조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있는데,
파파로 추기경이 제안했지만 참석자 아무도 지지하지
않았다.
십일조와 베드로 헌금은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와
영국의 헨리 2세 간에 계속해서 진행된 협상의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성 젤라시우스는 1170년, 전년도에 아일랜드를
침략한 앵글로노르만(Anglo-Norman)족이 자리를
잡기 전에 그들을 쫓아낼 수단을 찾기 위하여
시노드를 소집하였다. 1171년 헨리 2세가 도착하여
아낌없는 향락을 베풀어 아일랜드 군중과 교회
지도자들을 대접하였고, 아일랜드 교회의 발전을
위한 계획을 제시할 카쉘 시노드의 소집을 요청하였다.
이 시노드에서는 캔터베리의 주장이나 기증에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노드 결의안 제8항에서 아일랜드 교회는
당시 가톨릭이었던 영국 교회와 성무일도 사용법을
함께 하기로 결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의 주교는 카쉘 시노드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코노트(Connaught)와 얼스터(Ulster)를 방문하여
그곳의 왕과 협력하여 아일랜드 방어책을 조직하려
하였다. 성 젤라시우스는 헨리 왕이 자신의 참된
의도를 위장하여 많은 아일랜드 왕자들을
속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다음 해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
(Thomas Becket, 12월 29일)의 살해 때문에 파문당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토마스 베케트를 성인으로
공포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게
되었다. 맨발로 성 토마스 성당까지 걷고 아일랜드
교회의 지위 향상 계획을 포함한 헨리 2세의 참회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아일랜드를 영국에
기부한 사실을 확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일랜드 교회는 영국 교회가 됐다.
아마의 학교는 폐교되었고, 종교 개혁 전까지
아마의 마지막 토착 주교는 1313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