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金鶴峯誠一 — 학봉 김성일에게 주다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 숙부(肅夫). 호: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 조식의 문인으로, 이조좌랑, 홍문관직제학, 대사성, 전라도관찰사, 안동부사 등을 두루 엮임 하였으며,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었다.
侃侃吾宗老 飄然學士班 간간오종로 표연학사반
在家常祝聖 憂國願時安 재가상축성 우국원시안
鬢爲調和白 心緣報効丹 빈위조화백 심연보효단
緘書到北塞 頻問縶南冠 함서도북새 빈문집남관
강직하고 당당한 우리 문중의 어른이요,
훌륭한 학사의 반열에 우뚝한 분이네.
집에 있을 때에도 늘 임금의 안녕을 빌고,
나라를 걱정하며 세상이 평안하기를 바라네.
나랏일 조화롭게 하느라 귀밑머리는 희어졌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붉기만 하네.
봉한 편지가 북쪽 변방까지 이르러,
붙들려 있는 이 사람의 안부를 자주 물어 주네.
侃侃(간간) : 강직하고 당당한 모양. 바른말을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
吾宗(오종) : 우리 종족, 문중
宗老(종로) : 같은 종족·문중의 존경받는 어른. 김성일은 1538년생으로 김우옹보다 두 살 위이다.
飄然(표연) :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고상하며 뛰어난 모습.
學士班(학사반) :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학사들의 반열. 김성일은 문과 급제 뒤 사국(史局)에 들어가고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였으며, 삼사·이조 낭관·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
祝聖(축성) : 임금의 평안과 성수(聖壽)를 축원.
時安(시안) : 시대가 평안함, 나라가 안정됨.
調和(조화) : 정사를 조정하여 나라를 안정되게 함. 여기서는 김성일이 국사를 걱정하며 애쓴 것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鬢白(빈백) : 귀밑머리가 희어짐. 나랏일에 대한 근심과 노고로 늙어감을 뜻한다.
報効(보효) : 은혜에 보답하여 힘을 다함. 여기서는 임금과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
丹(단) : 붉다. 흔히 丹心(단심),
緘書(함서) : 봉한 편지, 서신.
北塞(북새) : 북쪽 변경. 여기서는 김우옹이 유배되어 있던 함경도 회령.
縶(집) : 묶다, 붙잡아 두다.
南冠(남관) : 본래 남쪽 초나라의 관을 쓴 사람이라는 뜻으로, 『좌전』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뒤에는 붙잡힌 사람·죄수·유배된 사람을 뜻하는 전고가 되었다. 여기서는 회령에 유배되어 있던 김우옹 자신을 겸손하게 지칭한 말이다.
이 시의 핵심은 김우옹의 회령 유배이다.
김우옹은 1589년(선조 22, 기축년) 기축옥사 때 정여립 사건의 여파 속에서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실제 『동강선생문집』에서 이 작품 바로 앞에는
己丑冬。謫會寧道中。次韓昌黎韻
기축년 겨울, 회령으로 귀양 가는 길에 한창려의 운을 차운하다
라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이 「贈金鶴峯誠一」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위키문헌-
따라서 이 작품은 김우옹이 회령에 유배되어 있던 1589~1592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유배지의 김우옹에게 김성일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던 것이다. 김우옹은 그 우정을 고맙게 여기면서도 단순히 개인적인 감사만 말하지 않고, 김성일을 임금과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으로 높여 칭송하고 있다.
특히 7·8구가 이 시를 개인적인 우정의 시로 만들어 준다.
緘書到北塞
頻問縶南冠
멀리 북방의 유배자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거듭 안부를 물었다는 데서 두 사람 사이의 깊은 교분이 드러난다.
이 작품은 학봉 김성일의 강직한 인품과 충정, 그리고 유배지의 김우옹을 잊지 않고 살펴준 따뜻한 우정을 노래한 오언율시이다.
앞의 여섯 구에서는 김성일을 강직한 선비이자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으로 높이고, 마지막 두 구에서는 시선을 자신에게 돌려 “북쪽 변방에 갇힌 나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는다”고 하였다. 특히 白(흰 머리)과 丹(붉은 마음)을 대비하여, 몸은 국사를 걱정하느라 늙어가지만 충성심은 더욱 붉다는 뜻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마지막의 「南冠」이라는 고사를 통해 자신의 유배 신세를 직접적으로 하소연하지 않고 절제하여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순한 증시(贈詩)를 넘어 충절과 우정이 함께 담긴 시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의성 김씨이다. 그래서 첫 구에서 김우옹은 김성일을
侃侃吾宗老
“강직한 우리 문중의 어른”
이라고 불렀다.
나이도 김성일이 1538년생, 김우옹이 1540년생으로 두 살 차이에 불과하다. 학문적으로는 김성일이 퇴계 이황의 문인, 김우옹이 남명 조식의 문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영남 사림이라는 공통 기반과 같은 의성 김씨라는 혈연적·지역적 유대가 있었다.
이 시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단순한 문중 관계를 넘어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안부를 묻는 깊은 우정으로 나타난다.
**참고**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년(중종 33)~1593년(선조 26)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이다. 퇴계 이황의 대표적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젊어서 동생 김복일과 학문을 닦다가 퇴계 이황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황도 김성일의 학문적 열의와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다.
1568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국에 들어갔고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삼사·이조낭관·사인·대사성·부제학 등을 지냈다.
특히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정사 황윤길 등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일로 유명하다. 당시 일본 정세에 대한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는 임진왜란 전후의 역사에서 자주 거론된다. 다만 이를 단순히 “김성일이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는 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당시의 정치·외교적 맥락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초유사(招諭使)로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활동을 독려하였다.
이후 경상우도 관찰사가 되어 전쟁 수습에 힘쓰다가 1593년 진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진주 지역 활동과 공로 때문에 훗날 진주의 경림서원에도 제향되었다.
저술은 후대에 『학봉집(鶴峯集)』으로 편찬되었다. 현전 문집은 원집·속집·부록을 합쳐 16권 10책이며, 특히 일본 사행 관련 글들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학봉이 초유사(招諭使)로 활동할 때, 필자의 선조이신 서암 배덕문 선생은 아들 배설, 배건 등과 성주의 제자들 그리고 사위까지 함께 현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에서 의병을 창의하여 부상진 전투를 이끌어 적장을 죽이고 또한 성주성을 탈환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에 서암 배덕문(裵德文, 1525~1603) 선생에게 「제독(提督)」, 즉 의병제독(義兵提督)이라는 직함을 준 인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