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과 현대 기독교인의 경험
유월절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킬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가족들을 모두 집안으로 모으라고 하셨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그저 믿기만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그들의 믿음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순종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는 아니지만 행함은 우리가 믿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고전 5:7, 히 11:28
바로의 계속된 거절과 은혜의 시간이 끝남
바로의 계속된 거절과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로 왕과 애굽에 허락되어 있던 은혜의 시간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하나님의 자비의 초청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성령의 감화에 굴복하기를 거절한다면 급기야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점차적으로 그 양심이 굳어갈 것이며,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도 거두어지게 된다. 고후 6:2
홍해를 건넘
홍해를 건넌 것은 침례 받음을 예표하였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물속에서 우리 자신을 장사 지내고 새 사람을 입고 물에서 올라왔는가? 아니면 우리는 아직도 옛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죽지 않으려고 물속에서 허우적대는가? 우리의 삶에서도 도무지 건널 수 없을 것 같은 홍해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경우를 당하게 된다. 이럴 때 불신은 장애물이 제거되기까지 기다리라고 속삭이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앞으로 전진하라고 촉구한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사막이나 바다를 통해 나 있는지 모르나 그 길은 안전한 길이다. 고전 10:1,2 히 11:29
시내산에서 주어진 십계명과 복음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반포하셨을 때 백성들은 기꺼이 율법에 순종하겠다고 언약하였다. 그러나 채 몇 주가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우상을 섬기며 배도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그들 스스로에게는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죄를 자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던 바로 그 장소인 시내산에서 그들을 용서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십계명과 복음은 별개의 것이며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해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심으로 십계명과 복음을 함께 주셨으며 이 두 가지는 영원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요일 5:3
섞인 무리
그들은 잡족이라고 불리웠으며 애굽인이나 혹은 애굽인과 히브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반역과 배도의 최선봉에 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짓는데 합류하도록 선동하였다.(시내산에서의 배도-출32:1~6; 음식물에 대한 불평-민11:4~6,10) 그럼에도 그들이 끝까지 가나안에 가기 위해 출애굽의 무리에 끼여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가나안에서 편하게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가나안 변경에서 있었던 바알브올의 배도에 빠진 그들은 모두 멸망 당하였다.
그러면 현대 이스라엘 중에도 섞인 무리들이 있는가? 물론이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섞인 무리들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을 때 배도하였던 것처럼 현대의 섞인 무리도 하나님의 계명은 지킬 수 없고, 지킬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를 놓고도 불평하였던 자들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해 주신 음식물에 관한 지혜를 무시하고 세상의 습관을 따르고자 한다. 그들은 거듭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 대열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섞인 무리’가 하늘 가나안에 입성할 수 있을 것인가? 결단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의 틈에 끼여 몰래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다. 예수 재림 바로 직전에 바알브올에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큰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를 갖고 이스라엘에 섞여 온 자들은 모두 흔들려 나갈 것이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끝까지 믿고 충성된 자들만이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순수한 이스라엘인가, 아니면 섞인 무리인가?
불뱀에 물린 자들이 구리뱀을 쳐다봄으로 살게 됨
우리는 죄에 물려 속절없이 죽어가는 우리 자신을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믿음으로 우리의 대속 제물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모세의 말을 믿고 텐트에서 나와 고개를 들고 구리뱀을 바라 보았던 사람마다 생명을 얻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요 3:14~15
열두 정탐꾼이 주는 교훈
사실과 진리를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또한 어떠한 정신으로 말을 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열 정탐꾼들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부풀려 말함으로써 백성들의 믿음을 흔들고 큰 재앙을 자초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백성들을 사단의 길로 인도하는 기별을 전했다. 마지막 시대에도 두 종류의 지도자들이 있다. 진리와 진실된 기별을 전하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지도자가 있고, 불신과 세속에 휩쓸려 오류와 사단의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대는 누구의 기별을 선택할 것인가?
마지막 흔들림과 체질
비느하스가 발람의 잔치에 응하고 하나님을 배역한 자들을 처벌하였던 사건은 마지막 시대에 있을 흔들림을 상징한다. 영적인 가나안인 하늘에 거의 다다른 지금, 우리는 많은 이들이 지도자와 평신도의 구분 없이 배도에 가담하고 있고, 그리하여 흔들림과 체질하는 일이 진행 중임을 볼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는 다수의 배도를 따라가겠는가, 아니면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품성과 영광을 대표하는 무리에 가담하겠는가?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많았으나 흔들릴 수 있는 모든 자들이 체질에서 떨어져 나갔고, 그리하여 마침내 가나안에 발을 디딘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단 두 사람 뿐이었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물으셨고, 또한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고 말씀하셨다. 역사는 틀림없이 되풀이되어 오직 소수의 진실된 사람들만이 마지막 시대에 있는 흔들림과 체질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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