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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장 16-21절. 바울이 아덴에서 전도함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while Paul was waiting for them at Athens, his spirit was being provoked within him as he was observing the city full of idols.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Ἐν δὲ ταῖς Ἀθήναις, ἐκδεχομένου αὐτοὺς τοῦ Παύλου,
in now the Athens, waiting for them of the Paul
‘기다리다가’(ἐκδεχομένου)는 현재분사로서(waiting for) 계속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마음에 격분하여
παρωξύνετο τὸ πνεῦμα αὐτοῦ ἐν αὐτῷ,
was provoked the spirit of him in him,
직역하면 ‘그의 심령이 그 안에서 격분되었다’는 뜻입니다.
‘격분하여’(παρωξύνετο)는 미완료수동태로서(was provoked) 계속 격분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θεωροῦντος κατείδωλον οὖσαν τὴν πόλιν.
seeing utterly idolatrous being the city
직역하면 ‘그 성이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란 뜻입니다.
‘있는’(οὖσαν)는 현재분사로서(being)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보고’(θεωροῦντος)도 현재분사로서(seeing) 계속 보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할 때,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를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서, 이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매일 상고함으로 많은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의 유대교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바울의 전도를 못하게 소동을 일으킴으로, 바울은 베뢰아 교인들의 호송을 받아서 육로를 버리고 배 타고 아덴까지 왔습니다.
이때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베뢰아에서 아덴으로 오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아덴 시가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철학의 도시요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아테네 도시가 온통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3만 개의 우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온통 길거리마다 우상이요, 문화유적지라는 것이 온통 우상이요, 도성 안이나 도성 밖이나 온통 우상들 천지였습니다.
2. 이처럼 문화가 발달했다고 우상숭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했다고 하는 일본도 6만 개의 우상들을 숭배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문화가 발달했다고 우상숭배를 타파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은 타락해서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나라는 우상숭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드는데 아직도 불교 우상, 유교 우상숭배가 만연합니다.
그래서 명절 때 귀신 섬기고, 결혼 때 사주보고, 아이 낳으면 작명하고, 죽어서 매장할 때 풍수지리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식하고 공부 많이 한 것과 우상숭배는 별개의 사항입니다.
의사들이 대학병원을 세워놓고 돼지머리 놓고 고사를 지내고, 첨단 비행기를 사다 시운전 하기 전에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덴에도 복음 전도가 필요하고, 오늘날 유식한 사람들에게도 복음 전도가 필요합니다.
단순하고 미련한 사람의 복음 전도가 유식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3. 바울은 철학의 도시 아덴에 우상숭배가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습니다.
이처럼 옳지 못한 것을 보면 마음에 의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서 우상숭배를 하니, 얼마나 의분이 생겼겠습니까?
이런 의분이 있어야 복음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의분이 생겼다고 해서, 유대교인들처럼 무력으로 우상 숭배자들을 죽이고 이 땅에 강제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9장 57절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통행을 못 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하게 해달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엄히 꾸짖고 다른 곳으로 가서 전도하자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기독교는 무력으로 우상 숭배자들을 처결하는 폭력 종교가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함으로써 우상 숭배자들이 스스로 깨닫고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스스로 우상 철폐를 하도록 유도하고 감동 감화시키는 종교입니다.
어쨌든 우상숭배에 대한 의분이 생겨야 복음 전도의 열정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거룩한 의분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7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he was reasoning in the synagogue with the Jews and the God-fearing Gentiles, and in the market place every day with those who happened to be present.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변론하니
διελέγετο μὲν οὖν ἐν τῇ συναγωγῇ τοῖς Ἰουδαίοις καὶ τοῖς σεβομένοις
He was reasoning indeed therefore in the synagogues with the Jews and those worshiping
‘변론하니’(διελέγετο)는 미완료과거로서(He was reasoning) 계속 변론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καὶ ἐν τῇ ἀγορᾷ κατὰ πᾶσαν ἡμέραν πρὸς τοὺς παρατυγχάνοντας.
and in the marketplace on everyday with those meeting
‘만나는’(παρατυγχάνοντας)는 현재분사입니다(meeting).
1.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교인들에게 전도했고, 장터에서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도했습니다.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은 안식일에 회당에 나와서 예배하는 혈통적인 유대교인들과 이방인으로 태어났다가 유대교로 전향한 경건한 사람들(소위 proselytes:개종자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거리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네 도성의 장터에는 중앙에 넓은 광장이 있고 철학자들이 강연을 하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장터 양쪽으로는 시장이 서 있었고, 위쪽에는 관공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장터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바울의 전도는 변론 형식으로 전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아테네에 사는 유대교인들이나 헬라인들은 자기들을 세계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에, 교만해서 바울의 전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따지고 변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당시에 최고 학부를 나온 유식한 학자였기 때문에, 유대교인뿐만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의 철학적 변론에 지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변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이런 변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5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테네에서는 복음 전도의 결실이 많지 않았습니다.
18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also some of the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were conversing with him. Some were saying, "What would this idle babbler wish to say?" Others, "He seems to be a proclaimer of strange deities,"-- because he was preaching Jesus and the resurrection.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τινὲς δὲ καὶ τῶν Ἐπικουρίων καὶ Στοϊκῶν φιλοσόφων συνέβαλλον αὐτῷ,
some then also of the 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 were conversing him
‘쟁론할새’(συνέβαλλον)는 미완료과거로서(were conversing) 계속 쟁론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συμβάλλω)은 ‘함께 말하다, 토의하다, 생각하다, 악의가 없이 이야기하다, 논쟁하다’(discuss together, consider, discuss without hostile, dispute)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되
καί τινες ἔλεγον
and some were saying
‘이르되’(ἔλεγον)은 미완료과거로서(were saying)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Τί ἂν θέλοι ὁ σπερμολόγος οὗτος λέγειν;
what may desire the babbler this to say?
‘말하고자’(λέγειν)는 부정사형 동사이고(to say), ‘하느냐’(θέλοι, may desire of)는 기원격 동사입니다(optative).
‘말장이’란 단어(σπερμολόγος)는 원래 씨앗을 쪼아 먹는 새를 가리키는데, 은유적으로 쓰여서 ‘지식의 파편을 쪼아 먹는 사람’(one who picks up scraps of knowledg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되
οἱ δέ·
others however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Ξένων δαιμονίων δοκεῖ καταγγελεὺς εἶναι·
of foreign gods he seems proclaimer to be
‘인가’(εἶναι)는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보다’(δοκεῖ)는 현재형입니다(he seems).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ὅτι τὸν Ἰησοῦν καὶ τὴν ἀνάστασιν εὐηγγελίζετο.
because the Jesus and the resurrection he was proclaiming the gospel of
‘전하기’(εὐηγγελίζετο)는 미완료과거로서(he was proclaiming) 계속 전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아덴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철학의 도시이기 때문에,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철학 사상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고, 하나는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이란 에피쿠로스란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부른 철학 사상가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스토아 철학자>들이란 이 철학사상가들이 늘 기둥이 많이 있는 회랑에서 철학사상을 강론했기 때문에 <기둥>이란 의미의 <스토아>란 이름으로 일컬음 받은 철학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두 철학 사상은 서로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즉 에피쿠로스 철학이란 한 마디로 쾌락주의 사상입니다.
그리고 스토아 철학이란 한 마디로 금욕주의 사상입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란 인생의 행복은 궁극적으로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철학적으로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피곤할 때 잠자고, 배고플 때 먹고, 놀고 싶을 때 놀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자녀를 낳고 싶을 때 자녀 낳고 살아가는 것이 철학적으로 옳고 창조 질서에도 합당하고 도덕적으로도 옳다고 주장하는 철학입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자들은 정말 인간이 행복하고 올바로 살려면,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놀고 싶어도 일하고, 배고파도 참고 살아야 행복하고 올바른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철학 사상은 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 생활만 해도 무엇이 먹고 싶은 것은 그 영양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음식을 과잉 섭취하면 오히려 병이 납니다.
피곤할 때 적당히 휴식을 취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놀면 건강에도 좋지 않고, 먹고 살 수 없습니다.
땀을 흘려야 먹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결혼 생활도 성욕이 있어야 자녀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하지 않으면, 가정을 망치게 됩니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서는 금욕과 절제와 윤리 도덕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금욕과 금식은 건강을 해치고, 결혼도 않는 독신생활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전도서 3:12-13.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9: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12: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즉 하나님이 주신 복은 누리되, 장래에 심판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장 31-32절에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는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 윤리관은 하나님이 주신 행복과 욕망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것이 복된 일이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자제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 철학은 먼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이 온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기독교 신관>입니다. (헬라철학은 범신론임)
그리고 인간은 죄인이지만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며, 이 세상은 마귀와 죄악과 죽음이 있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윤리관>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며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 윤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범죄하여 죄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에서 예수님 믿으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여 죽은 우리를 부활하게 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은 영생 천국,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 인생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쟁론했고, 스토아 철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쟁론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론과 쟁론으로써는 전도가 잘 안 됩니다.
3.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회당의 유대교인들과 장터의 철학자들과 변론하고 쟁론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론과 쟁론으로는 복음 전도가 잘 안 됩니다.
미련한 것 같지만 순수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변론하고 논쟁을 하자, 유대교인들과 아덴 사람들과 철학자들이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고, 이방 신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 논쟁을 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4절에서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고 하면서 논쟁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가서 전도할 때는 복음만 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철학적인 지혜를 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복음만 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4.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러라
바울은 아덴에서도 예수님을 전했고, 부활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유식한 아덴 사람들과 유대교인들과 철학자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활을 전해도 믿지 않고 말쟁이라고 하고,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아덴 전도가 많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바울의 복음 전도가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아덴 사람들이 유대교와 철학적 교만 때문에, 복음 전도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청종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17:32-34.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19절.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took him and brought him to the Areopagus, saying, "May we know what this new teaching is which you are proclaiming?
그를 붙들어
ἐπιλαβόμενοί δὲ αὐτοῦ
Having taken hold also of him
‘붙들어’(ἐπιλαβόμενοί)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aken hold) 단호하게 확 붙들어 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아레오바고로 가며
ἐπὶ τὸν Ἄρειον πάγον ἤγαγον,
to the Ares Hill they brought
‘가며’(ἤγαγον)는 부정과거로서(they brought) ‘데리고 갔다’는 뜻입니다.
말하기를
λέγοντες,
saying,
‘말하기를’(λέγοντες)은 현재분사입니다(saying).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Δυνάμεθα γνῶναι τίς ἡ καινὴ αὕτη, ἡ ὑπὸ σοῦ λαλουμένη, διδαχή;
Are we able to know what the new this, which by you is spoken, teaching?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Δυνάμεθα γνῶναι)에서 앞의 동사는 현재형이고(Are we able) 뒤의 동사는 부정사형입니다(to know).
‘네가 말하는’(ἡ ὑπὸ σοῦ λαλουμένη)은 수동태 문장으로서 ‘너에 의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즉 ‘말하는’(λαλουμένη)은 현재분사 수동태입니다( is spoken).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단어(διδαχή)은 명사로서 ‘가르침’(teaching)이란 뜻입니다.
1.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아테네의 철학자들과 시민들은 바울을 붙들어가지고 아레오바오로 올라갔습니다.
이 아레오바고란 <아레오 언덕>이란 뜻인데, 장터의 광장 북쪽에 16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있습니다.
이처럼 철학자들과 시민들은 장터 광장에서 바울과 쟁론하다가 시끄러운 장터 광장에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연설도 하고 재판도 하는 <아레오바고 언덕>에 가서, 바울이 강단에 서서 연설하는 것을 듣겠다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2.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부활은 아테네 사람들이 처음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테네 사람들은 고대의 철학자들을 다 알고 그들의 철학사상도 다 아는데, 예수라는 철학자와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에 대해서만 해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 같은 아테네의 헬라 철학자들은 육신의 부활이 아닌 영혼의 부활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부활도 애굽 사람들처럼 피라밋에 잘 보관하면 현세의 육신 그대로 부활한다는 것만 믿었지, 병들지 않고 썩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올라가서 바울이 강단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20절.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you are bringing some strange things to our ears; so we want to know what these things mean."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ξενίζοντα γάρ τινα εἰσφέρεις εἰς τὰς ἀκοὰς ἡμῶν·
Strange things for some you are bringing to the ears of us
‘이상한 것’(ξενίζοντα)은 깜짝 놀랄 만한 새롭고 이상한 것을 가리킵니다(something surprise new or strange).
‘들려주니’(εἰσφέρεις)는 현재형인데(you are bringing) ‘가져다주니’란 뜻입니다.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βουλόμεθα οὖν γνῶναι τίνα θέλει ταῦτα εἶναι.
We resolve therefore to know what wish these things to be
‘알고자 하노라’에서 앞의 동사(βουλόμεθα)는 현재형이고(We resolve), 뒤의 동사(γνῶ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now) 반드시 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 무슨 뜻인지’(τίνα θέλει ταῦτα εἶναι)는 직역하면 ‘이것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지’란 뜻이고, 마지막 동사(εἶναι)는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앞의 동사(θέλει)는 현재형입니다(wish).
1.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니까, 아덴 시민들과 철학자들이 도무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예수와 부활을 전하면 전혀 생소하지 않습니다.
이미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기들은 예수가 죄수라고 생각하는데, 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아테네 사람들은 전혀 구약 성경을 모르고, 장차 메시아가 와서 죄인을 구원한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아테네 철학자들은 세상 철학과 학문과 과학에만 관심이 있었지, 도무지 비과학적인 육체의 부활 이야기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2.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아테네 사람들은 시민들이나 철학자들이나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것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학구열이 대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에서 최첨단 학문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헬라 철학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학생들도 새로운 것을 알고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 탐구열이 있어야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최고인 줄 착각하는 사람은 학구열이 없고, 자기가 최고인 줄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느 교인은 초등학교 나온 사람인데 자기는 서울대 철학과 나온 사람 보다 더 유식하다고 교만한 말을 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가난한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더욱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날로 새로워지는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21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all the Athenians and the strangers visiting there used to spend their time in nothing other than telling or hearing something new.)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Ἀθηναῖοι δὲ πάντες, καὶ οἱ ἐπιδημοῦντες ξένοι
Athenians now all, and residing strangers
‘나그네 된’(ἐπιδημοῦντες)이란 단어는 현재분사로서(residing) ‘외국 도성에 임시로 거주하는’(resident temporarily in a foreign city)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εἰς οὐδὲν ἕτερον ηὐκαίρουν ἢ λέγειν τι, ἢ ἀκούειν τι καινότερον.
in nothing else spent their time than to tell something, and to hear something new
‘시간을 쓰지’(ηὐκαίρουν)는 미완료과거로서(spent their time) 계속 시간을 쓰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고’(λέγειν)와 ‘듣는’(ἀκούειν)은 둘 다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tell, to hear).
‘가장 새로운’으로 번역된 단어(καινότερον)는 비교급으로서 ‘다른 것 보다 더 새로운’이란 뜻이고, 자기들이 들은 것보다 더 새로운 것(something newer than they had heard).
1. 여기에 아덴이라고 하는 도시형의 사람들의 성격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새로운 것만 찾아서 유행을 따라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뉴욕이나 동경이나 파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대도시형 사람들은 항상 새로운 것 이상한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토픽 거리를 찾습니다.
그것을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이처럼 대도시는 언제나 유행에 민감합니다.
옷도 새로운 유행에 맞추려고 하고, 머리 모양도 새로운 유행을 따르려고 하고, 화장도 그렇고 구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항상 새롭고 첨단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하고 속이 빈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속이 꽉 찬 사람은 유행을 타지 않고, 아무렇게 입고 살아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오랫동안 사용한 것을 애용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했습니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믿고 살기 때문에, 이런 유행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담한 옷을 좋아하고, 외모를 가지고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에 있는 아름다운 인품이 드러나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외모로 꾸미지 말고, 숨은 속사람을 단장하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3-4.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 풍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무한 대도시의 첨단 유행을 따라 살려고 하지 마시고, 늘 기도하여 성령님 모시고 살아가시고, 하나님 말씀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