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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
시대 |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군 남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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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을 지원했으며, 미국은 중국의 예상과 달리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마오쩌둥은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을 도와 중국군을 참전시켰고, 이로써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한국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도 없이 중국의 위상을 높여 주었으나,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국제 관계에서 제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사회주의 진영과 민주주의 진영이 각자의 이념을 중시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냉전 시대가 도래했다. 이 냉전의 부산물 중 하나로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쫓겨 가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신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당면 과제는 토지개혁법을 반포하고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토지 개혁을 완성하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행정 구조를 구축하며, 경제적으로는 물가 안정과 국내 산업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이난 섬을 점령하여 영토의 확장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다음, 타이완 점령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적 접근의 어려움과 그즈음 중국군에 불어닥친 전염병으로 인해 타이완 공격을 신중히 하고 있었다.
한편 장제스는 중국 본토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Truman)은 중국 내부의 영토 분쟁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결론짓고 이를 거절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은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새로운 방위선을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 알류샨 제도, 일본 오키나와, 류큐 제도, 필리핀을 잇는 선을 따라 정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때 중국 정부는 타이완과 남한이 미국의 보호에서 제외됐음에 주목했다.
상황이 이러할 때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1948년의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 등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했다. 또한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해 국민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해 1950년 5·30총선거에서 210석 중 30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남한에서는 정국 불안이 계속되었다. 반면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북한은 남침 계획을 세우고 남한에 훈련된 게릴라를 파견하는 한편, 소련으로부터 비행기와 탱크 등 무기를 지원받았다. 1949년에는 중국이 중공군에 참여했던 북한군 5만 명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여기에 남한이 애치슨라인에서 제외되자 김일성은 소련과 남침에 대한 의견을 같이하고, 5월에 중국을 방문해 이를 통고했다. 결국 미처 전시 체제를 갖추지 못한 한국군은 완벽한 전력을 갖춘 북한군에게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두 달 뒤에는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국이 적극적인 군사 행동을 취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따라서 북한의 목적이 단시일 내 이루어질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중국의 예상과 달리 미국은 북한의 남침을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화 확대 전략으로 판단하고, 적극적 군사 개입을 선언했다. 즉각 참전을 결정한 미국은 1950년 7월 7일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등 16개국은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맥아더(MacArthur)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국전쟁에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이를 기회로 중국이 타이완 공격을 감행할 것을 우려한 미국은 타이완 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필리핀, 인도차이나의 반공 세력에 협조할 뜻을 밝혔다.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펼쳐 전세를 역전시켰으며, 유엔군은 기세를 몰아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한 뒤, 10월 초순에 38선을 넘어 압록강 근처까지 이르렀다.
전쟁 초반 중국 지도부는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나 동북 지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은 전시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군사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항미원조(抗美援朝), 즉 미국에 저항하고 북한을 지원한다는 운동을 벌였다. 총리 저우언라이는 "제국주의자의 중국 인근 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을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말로 미국에게 경고했다. 이어서 10월 3일에는 인도 주중 대사를 통해 "미국이 38선을 넘어 북한을 침입하여 전쟁을 확대시킨다면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라고 알렸다. 전세가 북한에 불리해지자 김일성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과의 관계로 직접 출병이 어려운 소련도 공중 엄호와 무기 지원을 약속하며 중국의 개입을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이념의 고수를 위해 한국전쟁에 적극적인 군사 개입을 주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주장은 신중국의 정치 경제 개혁이 우선이라고 여긴 군 지도부의 반대에 부딪쳤다. 두 차례 회의 끝에 마침내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이 결정되었다. 10월 8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정치위원 및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0월 13일, 소련의 스탈린이 약속한 공중 엄호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음에도 마오쩌둥은 공중 지원 없이 중국군만으로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중국이 파견한 100만 명의 군대로 북한군에게 불리하던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로 인해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또한 중국군의 게릴라전은 미군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1951년 초여름, 38선 일대에서 전선은 일진일퇴의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즈음 미국은 소련에게 비공식 제안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소련은 유엔을 통해 휴전 회담을 제의했다. 1951년 6월, 유엔과 북한, 중국 사이에서 진행된 휴전 회담은 군사분계선 설정, 중립국 감시 기구의 구성, 포로 교환 등의 문제로 서로 의견차를 보이며 2년여간 계속되었다. 휴전 회담이 난항을 거듭하는 중에도 전쟁은 계속되어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남한 이승만 정부가 반대했음에도 전쟁의 장기화를 원하지 않았던 미국과 소련의 이해가 맞물려 판문점에서 군사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정전 협정에는 유엔군 대표로 미국이, 공산 측 대표로 북한과 중국이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어느 한쪽의 승리도 없이 중국의 국제적 위상만 높여 주었다. 그러나 이후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국제 관계에서 제약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미군과 전투를 하면서 현대적이고 잘 무장된 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결과 중국군의 현대화 계획이 앞당겨졌으며, 전쟁에 필요한 엄청난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고자 재정 정책에도 변화가 생겼다. 민간 은행과 국가가 합작 경영하는 것으로의 전환이 추진되었으며, 정부의 통화 관리가 이루어졌다. 물자 부족으로 물가가 상승하여 투기 조짐을 보이자 시장의 관리, 통제가 심해지기도 했다.
또한 한국전쟁 중 중국 내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미 원조 운동은 유동적인 국민의 의사를 결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애국주의를 고취시켜 국민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데 용이하게 만들었다. 한국전쟁 참전 후 1년간 중국 국민의 80퍼센트가 애국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 결과 국민적 통합은 물론 정치적 결속이 강화되었다. 농민에게는 지원병 참여를 독려하였고, 노동자에게는 애국주의 생산 경쟁을 주문했다. 이 당시 강조된 민족주의는 한족뿐 아니라 중국 영역 내 다른 소수 민족을 포함하는 중화민족론으로, 기존의 것과 차이가 있었다. 한편 중화민족주의는 반혁명 세력을 진압, 처벌하기 위한 부정적인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내부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농촌의 향과 도시의 각 기관, 학교, 공장 등에 치안 방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사회 곳곳에 공안 조직망이 침투했다.
그러나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대외 정책에서 선택의 폭이 좁아졌으며, 미국과의 관계 회복이 어려워졌다. 이에 중국은 이념적, 경제적 측면을 고려해 친소 정책을 더욱 강화했고, 사회주의 일원으로서 자본주의 진영과 대결하여 냉전 시대의 한가운데서 대립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미국의 타이완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인 원조 강화로 중국 영토의 완전한 통일 계획이 실패하자, 타이완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었다.
ㆍ 1949년 : 중국이 중공군에 참여한 북한군 5만 명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키다.
ㆍ 1950년 :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하다.
ㆍ 1953년 : 전쟁의 장기화를 원치 않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군사정전협정이 체결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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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펼쳐보기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중국어와 중국문학을 공부하였다. 중학교 교사를 거쳐 현재 삼성전기, LG전자 등에서 중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교육 및 중국어 회화, 문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순천향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중국어 교육을 전공하였고, 서강대학교에서 한국어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였다. 중국 북경인민대학교, 중국대련외국어학원 한학원에서 ..출판기획자이자 역사 전문작가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동·서양 고전 및 역사 인물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힘쓰고 있다. 엮은 책에는 《중국사를 움직인 100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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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당대의 사건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분야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부터,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한 사건들도 함께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다양한 사진을 곁들여 이해를 도왔다. 중국의 역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당대의 사건을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분야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종합적으로 구성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건부터, 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