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강좌(18)】 ‘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 ."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18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
몰라. 그 전군이 다 그랬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싸움하던 그때 장군이 누구야?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그랬어요. 여호수아는 뭔가 하니 분명 해가 두 시간 동안 안 넘어간 걸 경험한 겁니다. 객관적으로 이 지구가 멎었냐? 그래 우리 지금 알지만 해가 안 넘어가려면 지구가 안돌아가야 하거든, 지구가 안돌아가. 두 시간 안돌아갔다면 어떻게 되겠나 생각을 해보시요. 버스가 가다 급정거를 해도 콧집이 터지고 뭐 다 야단이 나는데 말이야. 지구가 이 굉장한 속도거든. 이 갑자기 멎는다, 그래 보쇼. 여기 이 대 지구의, 이 대혼란이 일어 하나님이 그런 걸 한다 했을 리가 없습니다. 고건 제 편만 보니까 그러지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그건 이 객관세계의 이거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기억도 도저히 그건 불가능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면 그들이 그건 뭐냐? 그것은 자기네 믿음으로 이 속에 분명 뭐 있어. 거짓말 아니에요. 무슨 체험을 한 거예요. 세계가 다른 세계예요. 이 속의 내부의 일이지. 해가 그래 안 간 거를 배웠어도, 반드시 그 해가 멎어서 있을 필요는 없어요. 거짓말 아니지. 분명 그들은 경험을 했지.
여러분 좀 지내봤습니까? 이 마음에 무슨 기도를 하고 성령을 받았다고 그러고, 그런 경험을 하면요, 그건 일치하는 말이 뭔가 하니, 천지가 그대로 있는 천지가 온통 달라졌다는 겁니다. 새롭다는 겁니다. 그런 거 경험을 해보면, 그럼 다른 사람이 보기에 새롭긴 뭣이 새로워? 다 그대로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의 눈에는 그렇다는 거예요. 이제 거기가 중요한 뎁니다. 그러게 종교의 체험이 다 이렇게, 난 이런 걸 내가 늘 하는 얘깁니다.
어디서 이걸 확실히 얘기를 하게 됐냐? 그러면 박재봉 목사, 여기 요새 말이 없습니다만 박재봉 목사가 기도하다가 이상한 체험 많이 한분입니다. 예전 얘기하면 그 중에 유명한 금강산 떡 들어가 기도하는데, 아 이거 기도하고 앉아있노라니까 구렁이가 내려와 몸에 감기는데, 그러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종 죽습니다.” 그러고서 꼼짝을 못하고 그러는데, 갑자기 독수리가 어디선지 획하고 날아오더니, 그 독수리가 이 구렁이를 쫒더라는 거야. 그래서 날아와서 또 쫓고 또 저기 날아오니 이렇게 싸움이 한참 벌이지다가, 이제 마지막에는 그 구렁이는 죽었다든가 해서, 이제 됐다는 이런 건데, 그럼 그게 사실이 구렁이가 그랬겠나? 정말 독수리가 문제 아니에요. 그런 얘기가 내가 무슨, 박재봉 목사 놀라운 그런 체험을 해. 분명히 나는 모르겠다고, 난 참 알 수가 없다고. 어느 장로가 있더니, 에이, 선생님 제가 박재봉 목사하고 같이 오래돼서 말인데, 그분이 환상인지, 사실인지 구별을 못합니다. 그렇다! 환상은 원체 또렷또렷하게 이렇게 체험을 했기 때문에, 그게 자기가 본 환상인지? 여기 객관 세계의 사실인지 구별을 못해요. 그걸 확실히 그 사람에게 가서 이럽니까? 물을 필요가 없어요. 그게 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게 다르지 않아요. 믿은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달라. 믿은 사람에게선 분명, 믿지 않는 사람에게선 그런 것 모르지. 안보이지. 그래서 우리도 그런 것 많이 해요.
그러니까 믿는 사람의 눈으로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지진이 일어나고 옛날 자던 성인이 다 일어나고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몰랐지. 오늘 예수라는 청년이 저기 십자가에 죽었다더라. 뭐 그랬지. 자던 성인이 일어나긴 뭐? 성인이 일어나서 하는 걸 이렇게 봤으면 그놈도 사람이지. 그래 가만있었겠어? 어유, 이제 잘못했습니다. 그러고 회개를 하고 그랬겠지 뭐. 그런 기록이 아무것도 없는걸 봐서 세계가 달라요. 그런 점 혼돈하지 마시오.
종교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심령의 세계야. 그게 현실을 타고 뭐 이렇게 나타는 거. 환상이라는 건 객관적으로 저게 뭐 물건이 있어야 되는 게 아니라, 없더라도 내 눈앞에 그러니까 루터도 사탄이, “악마가 저기 들어왔다”고 잉크병을 들어 쳤다는 거 아니요. 그런데 악마 들어오긴 뭐 들어왔겠소? 그런 존재가 실지 그런데 분명 자기 눈앞에 섰기 때문에 잉크병을 들어서, 잉크병은 실지 잉크병을 던져서 오늘날도 잉크병이 떨어졌던 자리가 있겠지만, 그날도 어떤 악마는 실지 그런 거 아니니까 그건 모르지. 아무도 없지 않아요? 그때 그만이 본거지. 그런데 이런 점 때문에 무슨 거리껴서 기독교에 근본, 이 생명의 진리 그런 따위와 상관이 없다하는 거지. 없다.
이제 옛날에 이날까지의 입어오던 옷인데, 그건 활짝 벗어버립시다. 상관없어요. 그거 벗고도 벗을수록 진리가 높아가지. 그런 거 벗어버린다고 성경 없어질까 봐 걱정 마세요. 관계없어요. 그건 기독교를 살리면서도 그건 어린애 땐 난 늘 자꾸 그래요. 좀 안된 소리지만 이럴 땐 합니다만, 어릴 땐 뭔가 하니, 부모님이 애들보고 한다면 뭐 그걸 사랑하고 사귀자고 그래.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얻어온 애다,” 얻어온 애다 그러지. “어디서 얻어왔습니까?” “돌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그런 거 돌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게 뭐냐? 그게 20, 30이 된 다음에야 그 의미를 알거든. 그 돌다리 밑에서 왔다는데, 그건 부모님에게 자식이 “난 어디서 왔습니까?” 그럴 때 아무리 정직하게 과학적으로 말하는 부모라 하더라도, “너 아버지하고 너 어머니하고 어떠어떠해 났다”, 그러면 그게 뭐 설명이요? 그런 게 그 애들한테 돌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그게 다가 아니요. 어릴 땐 그래도 그 의문이 만족이 되는 거고, 새삼스럽게 거기대해 말하지 않아도 20,30 돼 가면 뭐인지를 아는, 그게 친부모지. 이 사람의 마음이 자라기 때문에 그런 건데, 뭘 어렸을 때 들었던 이제 40, 50이 된 다음에도, 70, 80이 된 어머니보고도 “그때 돌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어느 돌다리 밑이냐?” 대라고(웃음) 그러겠어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게 우스운 얘기지만, 우리의 마음이 좀 자유로워지자고. 아 활짝 벗어, 상관이 없어요. 상관이.
죽음이나 병은 죄 값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걸 다 이제 하던 거 자꾸 곁갈래로 들어갑니다만, 따지고 따져 들어가면 어디가 맺혀요. 언제나 죽음에 맺혀요. 이 죽음이라, 이 세상은 죽음이야. 꽉 죽음이라는 여기, 내 이제 이래서 말하는, 죽음이라는 객관적인 사실 그게 문제 아니에요. 그건 다 식물로부터 동물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 가지고 있는 거지만, 사람의 죽음이라는 물질적인 현상을 말하는 거 아니라, 우리가 거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한 심리적 영향이야. 심리적인 거야. 그러니까 죽음이 저번에도 그랬습니다. 식물에는 죽음 없어. 큰 남기 여기 있는데 도끼로 찍어서 그놈이 넘어가도 옆에 남기 웁디까? 작은 놈이 아이고, 우리 나무 넘어가면 웁디까? 동물은 개 짐승 같은 거는 어지간히 하면 하나가 죽으면 옆에 놈이 좀 우는 경우가 조금. 또 그래도 다른 느끼는 거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람과는, 사람엘 오면 비로소 죽음이라는 거 있어. 어딜 그 사실하고 난 죽는다 하는, 죽음이라고 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 하는 거 여기에 탁 들어붙어 가지고, 그럼 동양에서는 옛날 모든 성현들이 수양했다는 거 뭔가 하니, 죽음을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분리를 시켜서 거기에 대해서 어쩔 수 없는, 그건 뭐 천하 법 중에 상관이 없는 걸로, 그렇게 마음에 그러니까 이게 본래 붙을 거 아니거든. 이 물질적인 것하고 정신적인 것하고 붙을 거 아닌데 이게 붙었어. 그래 가지고 두려워하는 생각이 나는데, 그래 이제 좋은 실례를 든다면, 석가한테 가서 어떤 여인이 자꾸 울고 야단하고 그러는데, “내 외아들 죽었습니다.” 외아들 자꾸 살려달라고 그래. 암만 그러지 말래도 듣지 않고 그래. 그럼 “나 살려주마. 너 어디 가서 사람죽지 않은 집에서 쌀 뭐 몇 알인가 얻어오라.” 그래 두루 두루 돌아다녀 사람죽지 않은 집을 보니, 세상에 하나도 없어. 없습니다. 그러면 알거 아니냐? 사람이면 다 죽는 건데 뭘 죽지 않겠다고 그래. 그렇게 해서 그 죽음에 대한 걸 깨닫게 했다는 거. 동양에서 있는 그런 방법이라면 그게 한 방법이에요. 사람은 다 죽는 거다, 사람은 다 죽는 거다, 그 걸로도 상당히 해방이 돼요.
그런데 기독교도 이제 그 요소 없는 거 아니지. 하지만 어쩌나 우리가 알건 예수님으로 인해서 눈에는 안보이지만, 크게 혁명이 일어난 게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거. 구약에 있어서 조차도 죽음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벌로 알았어요. 병이라 그러면 죄 값으로 알았어요. 예수님에 와서 달라진 건 뭔가 하니, 병이 반드시 죄 값도 아니고, 죽음이 반드시 하늘이 미워 그런 것도 아니다 하는 거. 그 점이 우리를 이제 해방했다는 겁니다. 죽어서 저기 이다음에 가서 뭐 그런 게 아니라, 그건 이다음에 있을 런지 없을 런지 모르지만, 그게 우선 된다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죽음의 의미가 달라져. 그게 달라지노라니 자연이 하나님, 건 어디서 왔냐면 하나님에 대한 모순이라고. 하나님을 저 멀리서 볼 때에 굉장히, 삼각산 저 멀리서 보면 어이쿠, 저렇게 무서운데, 높은 놈의 산 어떻게 올라가 무섭지만, 차차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산이 무섭던 건 없어지고 친근미가 나오잖아? 아 거기 나무숲도 있고 꽃도 피고 물도 흐르고 그러니 그렇지. 멀리서 보는 산처럼 그렇게 무서워서야 누가 산에 올라가겠어? 하나님도 우리가 멀리서 볼 땐 무섭고 어벙벙 하기만 했지만 말이야. 차차차 가다가보면 차차 그 아버지의 모습이, 이렇게 가까이 가서 보면, 처음에는 산성이라고 그랬다가, 구원의 바위라 그랬다, 들소 뿔이라고 그랬다가, 뭐 가지가지로 그런 힘, 힘인 거로 표시하다, 만왕은 왕이라고 그랬다가, 재판장이라고 그랬다가, 예수님한테 오면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라고 하는 건 뭔가 하니, 상당히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너무 진부한 말이 돼 그럽니다만,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고 나니까 일체의 의미가 달라져.
그전엔 죽음이 뭔가 하니, 저 하나님이 노여워했기 때문에 말이야. 우리의 잘못을 벌로 하게 돼서 다 죽이는 거다. 그러니까 죽음이란 거 싫고 무서운 거 됐지 않아요? 예수님한테 오면, 그런 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진데 우리를 미워할 리가 없지. 그렇게 하고 해서 죽음을 생각을 하면 죽음의 의미가 아주 달라요. 그 전반적으로 인생이 음울한 맛이 없고 명랑해지게 되고, 이 속에 있는, 우리 잠자고 있던 생명을 될수록은 이렇게 일으키자고 하는, 그게 본래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만, 그 뚜렷하게 구약과 이제 대조되는 것은 하나님이 아주 굉장히 무서운 음울한 존재라면, 이것은 아주 굉장히 명랑한, 아주 약진하는, 약동하는 이런 종교 아니예요? 그런데 그중에 오늘 우리 관계된 것은 죽음이라, 그에 대한 공포를 이긴다, 오늘은 그렇게 보는, 그러니까 통분해하시고 마음에 충격을 받으셨다는 것도, 그런 걸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하면, 이거 무슨 마음에 그때 원래 그러셨을까? 그런 점 감히 가까이 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좀 이렇게 생각을 해서 더듬어 볼 수가 있는 거고.
그 다음에 대답이 “그를 어디 두었냐?” 그를 어디다 두었냐? 그런 것 아까 한 얘기대로 인간 전체화해서 생각을 해. 그를 어디다 두었냐? 그가 누구냐? 그가 인간인데 인간이 죽었지. 어디다 두었냐? 인간이 다 친척이라고 그러고 사제지간이라고 그러고, 다 그러다가도 죽으면 어쩔 수없이 무덤에다가 넣지 않아요? 어찌 그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러고 뭐 이러는 사람들이 말이야. 그럴까?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게 알 수가 없습니다. 요전번은 우리 외손녀가 조그맣고 이제 세 살짜리 되는데, 저 친할머니가 세상을 떠나 거기 장례에 왔더랬는데, 장례식 다 지난 다음에 가서 뒤늦게 갔는데, 그 전에 뭔가 하니 조그만 게 우리 집에 오면 말이야. 자기 친할머니 한번 꼭 가보자고 자꾸 가보자고, 멀리 갔다 놔서 못 보니까 친할머니 보자고 그래서 나간다고 하더니 못 갔는데, 그렇게 갔으면 이번에 갔으면, 그전에 그 친할머니 그렇게 보고 싶어서 그러던 애니까 그럴 거 같은데, 무덤에 올라가더니 말이야. 무섭다고. 내려가자고, 내려가자고 그게 무서운 거 아닙니까? 왜 그런지 모르지. 어드레 그런지 몰라요. 부모님인데 이제까지도 부모님인데도 죽은 다음에는 그 방안에 있기가 싫어서 많이 그럽디다. 그런 경험들 해본 분이 뭐 반드시 그 사람이 불효자가 되어 그렇지 않아요. 다 부모님 상당히 존경하고 다 참 애정 있게 그런 사람인데도, 숨이 져서 그러면 그 방안에 뭔지 있기가 싫다고 하는 거야.
이게 우리의 죽음에 대한 감정인데, 그런 거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모릅니다만, 후천적인 점도 많이 있습니다. 반드시 선천적이 아니에요. 선천적이 아니에요. 웬만한 거 우린 선천적이라고 갖고 갑니다만, 후천적으로 뭘 어려서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그런 교육을 자꾸 받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에 그러는 거지만, 엄마 죽는다, 나 죽는다, 그야 뭔지 모르게 죽는다, 어쩌나? 뭔지 싫다는 말인데 죽는다, 죽는다, 자꾸 그러니까 뭔지 모르게 죽음은 아주 싫은 걸로 자꾸자꾸 늘 암시를 주어서, 암시 그렇게 후천적으로 받은 그 교육의 영향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어떻게 가지냐 하는 것이, 죽음이 생명의 반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이 그 하는 모든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건, 우리를 구원했다는 건 뭐 있다가 이 몸이 여기서 어물어물 이 뼈다귀가 썩었던 게 다시 모여서 된다면, 그것도 잘되는지 모르지만, 그건 이따가 할 셈 치고. 우선 틀림없이 아주 분명히, 이렇게 우리가 얘기할 수 있는 건 뭔가 하니, 우리가 보기에 죽음에 의미가 달라졌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어.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이 아니라 인류 전체적으로 죽음에서 해방이 된 거야. 그적에 해방선언 한 거예요. 완전히 실현은 안됐지만 말이야. 실현을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지금 우리의 일이예요. 이 점이 죽으면 천당 간다는 얘기보다 더 중요한 얘깁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 얻는다고 그렇게 그저 교리적으로 그렇게 말로만, 실지 어떻게 구원했습니까? 글쎄 뭐라 말할까? 그렇게 말은 설명은 못하면서 그러는 것보다는 이제 이런 점을 생각해봐. 그런 점을 설명이 되면 이제 그때 가서는 거기가 더 깊은 뜻이 알려진다, 나 십자가 믿습니다. 믿지 않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자꾸 그런 거를, 높은 지경의 그런 거를 반복해서 말로 이렇게, 이렇게 교리를 이럭한즉,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고 도리어 거기를 모르게 돼.
생명이란 한번 들이대 보는 거요
그것보다는 마지막에 고기를 먹고 뼈다귀를 까게 그렇게 되려면 어려서부터 차차차 죽을 먹여. 이렇게 해서 제힘이 나서 제가 까먹게끔 되어야지 말이야. 늙은 다음엔 내가 씹어서 먹을 거요? 그럴 수도 없는 거고 아무 때가서도 제가 그걸 씹어 소화 할 수 있도록 돼야겠는데, 소화를 할 수 있도록 되려면 알 수 있는 것부터 알아야 돼. 알 수 있는 건 알지도 않고, 그리고 알 수도 없는 것부터 아는 것처럼 하려고 하는 데가 이 틀려먹은 거야. 더구나 이 신교의 잘못이거든, 프로테스탄트의 잘못이거든, 알 수 있는 건 아주 등한시해서 뭐 내버리고, 그러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라면 생활의 비굴한데 모두 나타나요. 인생이 뭐인지 맛을 몰라. 왜 남자 여자로 생겨났을까? 왜 낮과 밤이 있는 세계에 살까? 어째서 겨울 여름 일 년 춘추 사계가 왜 있게 세상이 됐을까? 그런 뜻은 하나도 몰라. 하나도 몰라. 생각을 안 하니까 그런 걸 찾아 봤던들 이유를 알 수가 있을 거예요. 뿌리를 잘 길렀던들 나무 잘 살 수가 있고, 나무의 통 크고 좋은 줄만 알고 말이야, 뿌리 가꿀 생각을 안 하니까. 한동안은 좋다고 그러지만 말이야. 얼마나 오래가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성경을 이해하는 건, 우리가 성경을 알기 전에 인생을 우리가 알 수 있는 현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실을 실어보면 그게 정말 생활화한 신앙 아니겠어요? 그러는 중에 제일 첫째로 다 들키는 게 죽음이라고 하는 거, 그 문제는 기독교만 아니지. 다른 종교도 다 다릅니다만, 요샌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아유, 죽었던 나사로를 어떻게 살려냈을까? 그것만을, 그 밖에 나타난 그것만을 보고 놀라서 기적이라고 그러질 말고, 이제 인생이 이런 걸 맛봐. 그러면 그를 가져다가 어디다 두었냐? 어디다 두었느냐? 사람이 사랑 한다, 가족 살림한다고 그러고, 동족이라고 그러고 그래도 죽기만하면 갖다 묻어야 할 줄 알지. 그밖에는 다른 걸 몰라. 아주 세상이 달라진 줄을 알고 죽음에 대해선 절대 엄두를 못내. 하기야 공화당이라고 하는 이 정당만 있어도 거기 대해서도 절댄 줄 알고 엄두를 못내는 사람들이니까, 죽음에 대해서 엄두를 감히 못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그래도 생명이라는 건 능히 반항을 하는 거 생명 아니에요? 이 천지간에 있는 모든 것 치고 우리가 반항 안 할 거 없어요. 생명이란 반항이에요. 한번 들이대 보는 거예요. 그래 보자는 게 생명이에요. 들이대 보자는 게 있는 법, 그건 물질계에 어쩔 수 없는 법칙이에요. 법칙 그러니까 법칙에 결로 보는 방법이 동양식으로 이자 할 수 없는 게, 그러게 체념이라고 그러지 않아요? 그건 체념이다, 어쩔 수 없는 거나 쓸데없는 걸 내어 걱정해도 소용없다, 체념을 하는 거고. 이거는 태도가 좀 달라요. 예수님의 태도는 체념의 태도가 아니야요. 죽음의 의미를 아주 그 올라가서 그게 저번에 우리 말했던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나기 위해 그런다, 그런 데가 이제 근본, 아까 내가 말씀했던 아버지의 하나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아서 그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에 일체 이점이 달라진다 하는 게 그런 점일 거다.
만일 죽음을 정말 이 속에서 이기기만 했다 그런다면, 그럼 그게 모든 두려움의 공포심의 근본이니까 그럼 문제가 없을 거예요. 따지고 따져 들어가면 다 거기 그거를 뭐 절대 벗을 수 없다, 죽음은 어쩔 수 없다 그 말이에요. 죽은 다음엔 아버지를 내다 묻었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살려달란 말도 감히 할 수가, 아들 외아들이라도 할 수가 없어. 대신 할 수도 없고. 인간이 거기 대해선 꼼짝 어쩔 수 없어. 그런데 객관적인 사실을 너무 보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는 그런 게 아니에요. 객관적인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로 인해 정신에까지 그런 거 아니다, 여기 딴 세계야. 그래서 감히 대항을 할 수 없는 델 대항을 해봐서 그렇게 대항을 하는 것은, 식은 이제 다르지만 그런 걸 이겼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내려와서 이야기를 하면 교리적으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가 죄 속함을 얻고 하나님과 둘 사이에 화해를 얻어서 구원을 얻게 됐다. 그렇게 신학적인 말로 발표가 됩니다만, 그렇지 않고 그 신학을 모르더라도 인생에 사실 이렇게 더듬어 이걸로 음미해보면, 그 무엇이 왜 도우셨다는, 마음에 충격을 무엇 때문에 받았을까? 인생의 이 모양을, 그를 가져가 어디다 두었느냐? 두었다는 데가 인생들이 우습게도 돌무덤을 만든 거기다가 두었다는 그런 걸, 이제 그것도 이젠 시간이 많이 가 그만 둡시다만, 하나씩 하나씩 음미를 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그를 어디다 두었나? 그 말씀도 잘 씹어보면 맛이 나는 거고 그러니까, 돌 굴이라, 거기다 놓고는 돌 굴을 막았다느니 그랬는데, 능력은 그렇게 있고 지혜가 그렇게 있어서 저 멀리 있으면서도 앓은 줄도 알고 죽는 줄 다 알고, 그 사람 죽는 거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는 예수가 돌문은 또 자기가 열지를 않고 돌문은 치워라, 사람더러 치우라, 그런 다음에 괜한 짓 그런 것이 다 생각하면, 능력으로 한다면 뭐 돌문이 자기가 일언지하에 ‘열려라!’ 그런 거 안 해요. 그런 거 안 하고 거 ‘열어 놓아라,’ 열어 놓고 그렇게 하고 불러내고, ‘야, 수건 돌려 벗겨줘라,’ 그것도 또 자기가 벗기려면 ‘벗어져라’ 한다든지, 그럴 수 있는 거, 그런 거 안 그런다, 그런 점을 찬찬히 음미를 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와 둘 사이에 요렇게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알게 되는 거야. 떼어놓고, 예수님이 여기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능치 못하는 게 없지. 그렇게만 하면 알면서도 그건 모르는 거. 그걸로 안 해. 그러면 그 예수와 나하고는 연락이 되지를 않아. 그런데 그런 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냐?
이 인간 세계에서 저번에도 그랬습니다만, 구원이 된다면 반드시 조건이 뭐냐? 윤리적으로 돼야 될 거예요. 마법 마술적으로 뭐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속에서 자라요. 그런데 만일 예수하고 나하고 둘 사이에 거리가 이렇게 떨어져 선이 도무지 닿지를 않는다는 것이 나와. 될 수가 없어요. 그런 점을 가만히 많이 맛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제 그만둡시다.
묻고 대답하는 말씀
질문자: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와 명상은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선생님은 생각하실 때 기도는 어떤 걸로 생각을 하십니까? 보편적으로 이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기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닌가? 이렇게 우치무라 선생이 얘기했던 대로 꼭 큰소리로 기도해라. 그랬다면 말이란 건 누군가를…
함석헌: 아니 이것 보시오. 그런데는 이것 보라고. 그건 모든 말이 다 뭔가 하니 이게 이 구체적인 거예요. 내 그전에 또 들은 말 기억이 나는데, 왕양명의 말부터 배웠어. 왕양명의 글에 기록한 걸 전승록이라는 거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 제자들이 그걸 쓰는데 왕양명이 참 좋은 사람이거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선생님 말씀하신 거 이렇게 적어 가지고 책으로 만듭시다, 하니까 하지 말라. 왜 그런가 하니 성현의 말씀은 꼭 약 같은 건데 그 사람에게 그 병 나으라고 준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다가 먹이면 죽어. 죽는 수가 있어. 그러니까 성현의 말씀이라는 건 경위를 생각지 않고 어디나 다 적용을 하려면 반드시 그건 아니지. 내 말을 하는 거 옳은 말도 있겠지만, 그걸로 인해 후일에 반드시 잘못되는 일 있을 거다, 그랬기 때문에 책 만들지 말라, 그랬어요. 그게 다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든. 그런 모양으로 우치무라 선생이, 이제 그것도 그때 어느 때 그 필요가 있어서, 그건 왜 그래 내 추측으로 한다면 말이야. 대게 오는 사람이 누군가 하니 대학생 대학졸업생, 요 지식인들이니까 말이야. 나도 다 지내 본 거지만 뭐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만이지. 뭐 하나님 보이지도 않는데, 뭐 쭝얼쭝얼 기도한다고 그러고, 그 뭐 우스워서, 기독교 청년 집에 갈래도 지내봤는지 모르지만 기도 하라는 거, 제일 걸리거든, 어딘지 뭐인지 그 상식에 어그러지는 거, 그건 뭐 어떻게 뭐 머리를 서로 숙이고 뭐 어쩌구 어쩌구 하는 건데, 그렇지 않고 마음에 생각을 하면 그만이지. 그러는 줄 알기 때문에 말이야, 그걸 부수느라고 마음에 고런 생각이 있어 가지곤 도저히,
그래 또 하나 저기서 얘기를 더 옮기겠습니다. 실례로 자기 연구모임에 오면 말이야. 성경 찬송 꼭 가지고 오라. 안가지고 올 사람 오지마라. 그게 뭐 무슨, 난 그런 점은 도리어 내 성격에 맞지를 않아. 조건 안 붙이는 사람이지만 말이야. 그게 다 어느 그때에 어느 그 사람들에게 필요해서 그건 그렇게 봐야지. 그걸 일반화해서 언제든지 꼭 반드시 소리를 내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요. 상관없어요.
질문자: 지금 우리들이 기도하는 것도 상당히 방법이 바꿔져야 된다고 생각이 되는데, 왜 그러냐? 그러면 대화라 할 적에 사람들에겐 통신수단이 음성이니까 어쩔 수없이 말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음성으로 입으로 한다고 그래서 안 된다고 그랬겠어요?
함석헌: 나 혼자 기도하면 나 혼자 기도하는데도 그건 해보면 다 알 터인데, 혼자 기도하는데도 가만 앉아 마음에 내 생각으로 기도한다고 하던 것과, 내입으로 소리를 내서 하는 것과, 내입에서 하나님 하는 소리가 한번 나가면 내게 아주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질문자; 그렇습니다.
함석헌; 그런 데가 그게 다 생각할 점이라 그 말이야.
질문자: 그거야 불교에서 염불하는 사람도 다 할 수 있지요. 그 이상하게
함석헌: 그래 이거 보시오. 그러니까 나 혼자 있는 경우에도 물론 말로 하는 데가 의미가 있지만 혼자 있는 땐 그래요. 생각을 해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퀘이커 같은 사람들은 물론 소리도 안내고도 가만히 있어. 같이 기도도 합니다만 퀘이커도 또 소리 내서 기도하기도 하지 안하는 것도 아니요. 기도도 그런데 내가 하나 말하고 싶은 건 말이야. 하나님이 제게 다른 데 아니고 옆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데, 어떻게 소리를 안 내 하겠냐 그 말이야. 하나님이 저 하늘 저기 시퍼런 하늘에는 아마 없을 거예요. 하지만 이 사람의 여기 속에 있는 건 분명하거든. 그럼 거기도 우리가 잘하면 통신법이 말 안하고도 거기 전이 되겠지만 말이야.
질문자: 이제 기도를 하면 누가 그러던지 힘을 준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인데 제 생각으로는 오히려 기도는 정신을 일집 시키는 거고, 힘은 정신이 일집 되는 데서 나온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함석헌: 아니 모든 게 한가지로만 설명을 하려고 그러지 마세요. 이것도 있고 다 있어요. 여러 가지가 있지. 꼭 무슨 설명을 하려면 그러면 하나, 사람 어떻게 하면 삽니까? 어떻게 하면 살아? 밥도 먹어야하고 공기도 마셔야하고 일광도 쬐야 하고 수영도 해야 하고, 가지가지 다 해야 하지. 거 뭘 하면 살아난다면, 뭘 하면 하나님, 그래 신앙이라고 하는 게 마치 무슨 특효약 같아서 그것만 할 것만 같으면, 그런 거 아니예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기도라는 것도 가지가지로 설명을 할 수 있지 않소? 이렇게 되지. 하나님에 대하여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물론 그렇게 돼야 하는데, 하여간 그럴 때까지 기도 다르고 명상 다르고 그것도 꼭 경계선을 어디 긋겠소? 어떤 땐 명상 하다가 기도도 하는 때도 있고, 기도하다가 명상도 하는 때도 있지만, 뻔히 환히 경계가 다르지.
질문자: 그럼 지금 저 천당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요. 천당이라는 것 저희들도 물질적인 걸로 생각하는 천당은 부인을 합니다만, 생명이라고 하는 게 육을 벗는다고 해서 죽는 거는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싶은데, 영존하는 건데 육이 벗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다 끝나는 건가? 어떤 그게 어디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어떤 다른 형태의 그런 삶이 계속되는 건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함석헌: 그야 그럴지도 모르죠.
질문자: 그곳을 천당으로 생각 할 때에 어떻습니까?
함석헌: 아니, 그건 왜 그런 얘기를 하냐하면 지금 사람이 문제가 나길 과학발달로 인하여 과학이 발달이 되기 전에 이런 소리 없어. 우리가 믿기를 정말 땅속에 여기를 들어가면 유황불이 이글이글 하는 구덩이가 있다고 난 그렇게 믿었거든. 나 어렸을 때 정말 그렇게 믿었어. 그리고 하늘에 저기 올라가면 말이야, 저기 올라가면 어딘지 모르지만, 높이 올라가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그런 게 있다고 지금도 생각이 되는 사람은 믿어도 좋아요. 믿지 말란 말 아니야. 과학을 배워서 그거가 걸림이 되거든 그 때문에 못 믿지 말라고. 괜찮아, 없어, 없어도 없다고 괜찮으니까 난 그거예요. 난 그 소리지. 뭐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 할머니한테 가서 ‘천당 없습니다.’ 그 소리 하지 말라고 해. 할머니 고스란히 믿다 그대로 가면 좋은데 말이야. 그런데 이젠 뭐 거의 일반화 상식화 됐지만, 그런 거 현실적으로 없는 거 뻔히 알잖아? 아는데 왜 그런가 하니 이런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의 신앙이 깨지면 어떡하나? 그 걱정을 해. 그러는데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없어질건 어서 확 벗겨야지. 애의 옷을 벗기면 감기 걸리면 어떡하나? 그래도 벗기고 새 옷 입혀야지. 감기 들리까봐 낡은 옷 그대로 둘까? (녹음18, 3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