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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20. [역경의 열매] 두상달 (1-30) 어머니께 받은 사랑이 '복음의 멀티플레이어' 원동력
늦은 임신 부끄러워 유산하려다 실패
막상 태어나자 한없는 사랑 부어주셔
주님 품 같은 큰 사랑 평생 나누려 노력
두상달 서울 반포교회 원로장로가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가정문화원에서 자신의 삶과 신앙의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39년 전북 김제 광활면에서 태어났다. 고향 마을은 벽촌 중에서도 벽촌으로 바다를 막아 만든 거친 땅이었다. 지금도 서쪽으로 18㎞쯤 가면 새만금방조제가 나온다. 광활면 일대가 원래 모두 바다였던 셈이다.
일제강점기, 변두리 어촌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미 다섯 남매를 둔 어머니 문주복 여사는 무려 44세에 날 가지셨다.
지금도 40대 중반이면 노산이라 하는데 그때는 말해 뭣하랴. 평균 수명이 40대 후반에 머물러 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늦은 임신이 부끄러우셨다고 했다. 나를 지우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셨고 불러오는 배를 묶기도 하셨다. 태아를 지울 수 있다고 알려진 독초를 드시고 몇 시간 동안 혼절하신 일도 있으셨다고 들었다.
생명은 질겼다. 여러 사선을 넘고 넘어 빛을 본 게 바로 나다. 지금처럼 동네마다 산부인과가 있었다면 절대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 병원이 없던 시절 어머니가 날 가지신 게 감사할 뿐이다. 1970년대 정부가 주도했던 산아 제한 캠페인의 ‘산’자만 들어도 나의 과거가 떠올라 경기가 날 정도였다.
부모님은 신앙이 없으셨다. 형제들의 돌림자는 ‘균’이었는데 아버지는 내 이름만 예외로 상달(上達)이라 지으셨다. 돌연변이 같은 이름이라 생각했는데 예수를 믿고 보니 그렇게 좋은 이름일 수 없다.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나의 성이 ‘두’ 아닌가. 기도가 두 번이나 하나님께 상달되니 얼마나 좋은가. 두고두고 아버지께 감사드린다.
대학에 진학한 뒤에야 예수를 알았다.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기도하면 할수록 내 삶 전체가 덤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나를 지우기 위해 그토록 애쓰셨던 어머니는 막상 내가 태어나자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셨다.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간척지의 끝자락에 살던 우리 가족에게 지독한 가난은 일상과도 같았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셨고 따뜻하게 안아 주셨다. 날 품으셨던 어머니의 큰마음이 지금도 날 감싸고 있는 듯하다. 어머니가 떠오를 때면 눈물이 나고 목이 멘다. 딱히 줄 게 없으셨던 어머니는 벅찬 사랑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셨다.
모질게 지우려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예수를 만난 뒤 느꼈다. 어머니의 사랑이 마치 예수님의 품과 같다고 말이다. 신앙이 없으셨던 어머니였지만 척박한 땅을 뚫고 피어나는 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내게 보여주셨다. 80년이 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일을 했다. 사업도, 복음 전파도, 방송과 사회봉사도 모두 받았던 사랑을 나누기 위한 노력 때문은 아니었을까. ‘복음의 멀티플레이어’라고 불린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약력=1939년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경제학 학사·석사, 미국 센티너리대 인문학 명예박사. 나사렛형제들 중앙회장, 십대선교회(YFC)·기아대책 이사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역임. 현 반포교회 원로장로, 칠성산업 대표이사, 가정문화원·인간개발연구원 이사장, 중동선교회 명예이사장. 보건복지부 가정의 날 대통령 표창
* [역경의 열매] 두상달 (1) 어머니께 받은 사랑이 '복음의 멀티플레이어' 원동력
* [역경의 열매] 두상달 (2) "잘 썼다" 선생님 칭찬에 멀리하던 공부 재미 붙여
* [역경의 열매] 두상달 (3) 뜨거운 복음 메시지에 매료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 [역경의 열매] 두상달 (4) 눈앞 수입보다 사회생활 선택… 도전은 축복의 여정
* [역경의 열매] 두상달 (5) 고연전 축구 중계에 정신 팔려 아내와 첫 데이트 폭망
* [역경의 열매] 두상달 (6) 위기가 기회 된 모험과 도전… 종합상사로 급성장
* [역경의 열매] 두상달 (7) 집사 신분에 술 접대 늘 마음에 걸려 “술 대신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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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두상달 (30·끝)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 원칙과 기본 철저히 지켜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역경의 열매] 두상달 (2) “잘 썼다” 선생님 칭찬에 멀리하던 공부 재미 붙여
성적 꾸준히 올라 우등상에 학비도 면제
대학 입학금 마련하려 서울서 좌판 행상
고대 경제학과 입학 후에는 과외 교사로
학업 성취도와 태도 모두 ‘불양(불량)’하다고 적혀 있는 두상달 장로의 초등학교 성적표. 오른쪽은 공부에 취미를 붙였던 중학교 때 성적표로 전 과목이 ‘수’다.
사랑만 받으며 살던 막내였다. 하지만 공부에는 영 취미가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두 달 동안 학교에 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놀다 이웃 아주머니에게 들켜 사달이 났다.
형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다고 나를 혼냈다. 그때 어머니가 “한 놈은 공부 안 해도 괜찮다. 상달이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고 하시며 내 편을 들어 주셨다. 천군만마까지 얻었으니 더욱 공부와는 멀어졌다.
그러다 죽산중학교에 진학했다. 공부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첫 수업이 마침 영어였다. 다행히 형들에게 미리 로마자 알파벳을 배웠다. “알파벳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손을 들었다. 배운 대로 칠판에 썼더니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잘 썼다”라고 칭찬해 주셨다.
선생님에게는 늘 혼만 났지 칭찬을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 칭찬이 나를 변화시켰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성적은 꾸준히 올랐다. 1학년 2학기 첫 시험에서 전교 3등을 했다. 2학년부터는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우등상을 독차지하며 학비까지 면제받았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0㎞ 거리였다. 먼 거리를 걸어서 등하교하며 공부했다. 공부의 기쁨이 무엇보다 커 멀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첫 수업에서 선생님의 칭찬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훗날 유명 강사로 무대에 오를 때마다 칭찬과 격려가 지닌 힘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청소년들을 만날 때마다 격려의 말을 많이 한다. 자녀의 미래를 보고 칭찬하고 기도해줘야 한다. 지금 부모들도 공부하라고만 하지 말고 칭찬의 씨앗을 자녀들에게 심어줘야 한다. 부모의 입술이 자녀를 축복하는 샘물이 돼야 한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경제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업을 하려면 경영학과가 좋다는 걸 모른 채 택한 길이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종로5가에서 좌판을 벌이고 껌과 담배 등을 팔았다. 한겨울에 장사하며 동상에 걸린 일도 있었다. 인생에 첫 사업이었던 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60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되지 않던 때였다. 대학에 갔다고 형편이 달라지지도 않았다. 낯선 서울에는 더욱 비참한 가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촌놈이 의지할 곳은 많지 않았다. 스스로 작아지는 날이 늘었다.
다행히 과외교사 자리가 생겼다. 그때는 종로에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그중에서도 가회동과 계동 등에 사는 정말 부잣집 자제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자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고대 경제학과 학생이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학생들이 날로 늘었다. 수입도 늘면서 생활도 안정을 찾았다. 낮에는 대학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상이 반복됐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3) 뜨거운 복음 메시지에 매료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여자친구 사귀려고 친구 따라 CCC 출석
김준곤 목사의 설교 들은 후 영의 귀 열려
다혈질이던 성격 진실한 기도 속에 변화
CCC를 설립한 김준곤 목사가 1960년대 대학생 회원들 앞에서 민족복음화의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대학 2학년 때로 기억한다. 한 친구가 강의실에 들어가던 날 붙잡았다.
“상달아. CCC라는 데가 있거든.” “뭐 하는 데야?” “무슨 선교회인데.” “나 교회 안 다닌다.” “거기에 여학생들이 많단다. 가보자.” 청춘에게 무슨 설명이 더 필요했겠는가. 여학생들이 많다는 친구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경계가 무너졌다. 그날부터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는 일념만으로 명동 거리 한구석에 있던 CCC, 한국대학생선교회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사랑만 받고 자란 나였다. 가난했지만 가족의 모든 사랑을 독차지하다 보니 이기적인 성격도 생겼다. 날카롭고 비판적인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다혈질이었다. CCC를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나뉘듯 CCC가 내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1960년대에는 히피 문화를 위시한 허무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나도 늘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살며 수시로 좌절했다. 주변에 상의할 사람도 없었다. 20대 초반, 수많은 유혹 속에 살던 시절 나는 극적으로 예수를 만난 뒤 성숙할 수 있었다.
1958년 한국 CCC를 설립한 김준곤(1925~2009) 목사님의 입에서는 늘 뜨거운 복음의 메시지가 터져 나왔다. 그 말씀이 벅차게 다가왔다. 땅으로 떨어지는 게 하나도 없이 가슴판에 박혔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비웃었을 나였지만 김 목사님을 만난 뒤부터 영의 귀가 열렸다. 완전히 매료됐다.
마포구 염리동 산꼭대기 자취방에서 새벽 미명에 눈을 떠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베개를 붙들고 서툰 언어로 나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드리던 나날이 다혈질이던 나를 변화시켰다. 첫사랑의 감격으로 일생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이런 고백을 한다. “걸레 같고 질그릇 같던 나, 다혈질이던 나를 변화시키고 위로와 소망이 되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하셨던 주님. 내가 만약 주님을 몰랐다면 탕자같이 살았을 겁니다. 나를 변화시켜 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하루 일을 알 수 없던 복잡하고 요란한 노도광풍의 시대를 살았다. 그 순간 찾아온 복음은 나를 칠흑 같은 어두움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더라도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게 했다.
모든 게 CCC와의 뜻밖의 만남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때때로 신앙이 무뎌지기도 한다. 신앙이 휘청거릴 때마다 CCC에서 복음의 열정을 불태우던 추억을 되새긴다. 복음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뭔가 울컥하는 것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다시 세운다.
내 안에 깃든 주님이 무뎌진 나의 신앙을 회복시켜주시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다. 지금 생각하면 ‘전설의 고향’ 같은 옛 추억이다. 하지만 그때 심어진 신앙만큼은 지금도 살아 내 안에서 불타고 있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4) 눈앞 수입보다 사회생활 선택… 도전은 축복의 여정
인기 과외교사로 월수입 직장인 10배
돈보다는 조직·인간 관계 배우고 싶어
직장생활 전념하다 어느 순간 창업 꿈
두상달 장로가 1970년대 초 칠성산업을 시작한 직후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1960년대를 관통하는 단어는 가난이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61년 5·16 직후 혁명 구호 1호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였을 정도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질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모두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대학생 과외교사가 인기 있었던 이유였다. 대학 입학 직후 한 지인의 소개로 종로에 살던 한 아이를 만난 게 과외교사의 출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이는 영특했다. 반에서 4~6등이던 아이는 날 만난 뒤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입소문이 빠르게 났다. 날 놓칠까 봐 그 부모는 입주 과외를 제안했다. 함께 살며 과외 교습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염리동 산꼭대기에서 안암동 학교와 종로를 오가던 고단한 삶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사이 내가 가르치는 학생도 7~8명으로 늘었다.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핵심을 잘 짚었고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쳤더니 아이들의 성적이 올랐다. 10등 밖에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5등 안으로 진입했고 경기·서울·경복·이화·숙명 등 명문학교에 진학했다. 부모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때 열심히 나를 따라 준 제자들과 학부모님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공부를 가르쳤지만 그분들은 내게 장학금을 대준 셈이어서다.
당시 수입은 매달 10여만원에 달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돈을 너무 많이 번 것이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학원을 차릴까 깊은 고민에 빠졌던 일도 있었다. 교재를 만드는 출판사를 차리면 더 많은 돈을 벌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큰 수익보다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사회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학부형 중 한 분이 회사를 추천해줬다. 한국마방적주식회사였다. 우리나라가 차관을 얻어 세운 다섯 번째 회사였다. 공채시험을 봐 당당히 입사했지만, 첫 월급이 8000원에 불과했다. 요즘 초봉을 200만원이라면 나는 과외로 달마다 2000여만원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장 생활에 전념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기업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 과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젊어서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 버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회사에서 조직과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돈의 흐름까지 배웠다.
경제학에는 창조적 파괴라는 표현이 있다. 10만원을 파괴하고 8000원을 택한 건 더 큰 전진을 위한 작은 후퇴였을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고속 승진했다. 영업과 기획을 비롯해 인사·생산·재무·조직관리 등 모든 부서를 거쳤다.
어느 순간부터 독립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무역을 하고 싶었다. 출퇴근하면서 실무 영어회화를 독학했다. 결국, 73년 칠성산업을 설립했다. 긴 인생을 돌아보니 ‘떠나고 버린 뒤’ 더 큰 복을 받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고려대에 입학했고 과외 교사로 큰 돈도 만져봤지만, 박봉의 회사로 옮겨 인정받으며 세상을 배웠다.
도전이 나를 축복의 길로 인도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의 여정들이다. 안주하지 말고 떠나 도전하라. 그게 바로 성공의 시작이니.
***[역경의 열매] 두상달 (5) 고연전 축구 중계에 정신 팔려 아내와 첫 데이트 폭망
첫인상 좋았지만 기약 없이 헤어졌다
친구들 권유로 다시 만나 사랑 키워
결혼 후 아내는 재소자들 섬기며 봉사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1969년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결혼식 후 친구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앞줄 왼쪽 세 번째와 맨 뒷줄 왼쪽 네 번째가 각각 홍정길, 하용조 목사.
첫 회사는 충무로 한일빌딩 10층에 있었다.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던 중 CCC 간사로 활동하던 친구 강용원이 “같은 건물 2층에 근무하는 김영숙씨 만나 볼래? 둘 다 CCC 회원이라 잘 통할 것 같다”며 데이트를 권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안면이 있는 회원이었다.
미래의 아내가 될 김영숙은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로 영진약품에 다니고 있었다. 여러모로 인연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어 데이트를 신청했다. 1967년의 일이었다. 회사 근처의 다방에서 만났는데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마침 그날 정기 고연전 축구 경기 중계가 있었다. ‘다른 날 만났으면 오늘 경기장에서 축구 봤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반쯤 축구 중계에 빠져 버렸다.
이런 날 보고 아내는 적잖이 실망했던 것 같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고 말했지만 “바쁘다”는 차가운 답이 돌아왔다. 첫 데이트가 이토록 싱겁게 끝나고 무려 1년이 지났다. 물론 회사가 같은 건물에 있다 보니 로비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일도 적지 않았다. 우리의 사연을 알게 된 CCC 친구들이 다시 만나보라고 권했고 결국 다시 만났다.
사실 나나 아내나 결혼할 나이가 꽉 찼다.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났더니 서로 전기가 통했다. 무엇이든 마음이 동해야 통하는 법이다. 우리는 점심시간마다 만나 눈 덮인 덕수궁과 남산을 걸으며 사랑을 키웠다. 68년 10월에 다시 만나 이듬해 3월 종로구 태화관에서 김준곤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을 했다.
CCC 활동을 함께 했던 아내와는 언어와 생각, 비전이 통했다. 결혼 전 아내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버리지 않으실 거죠”라고 물었다.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었다. 내가 주님을 버릴 일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아내가 둘 다 절대 버리지 말라는 다짐을 받기 위해 물어본 것이었다. 지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결혼한 뒤 아내가 약사로 일하면 생활이 안정적일 거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내는 일생 약국을 해 본 일이 없다. “여보. 나는 당신이 약사로 일할 줄 알았지”라고 하면 “그래요? 나는 신약과 양약을 처방하지 않고 신약과 구약으로 처방을 바꿨을 뿐이에요”라고 답한다. 우문현답이다.
아내는 실제 다른 처방으로 사람을 살렸다. 36년 동안 안양교도소를 찾아 재소자들에게 성경과 한글, 영어를 가르치고 섬기고 봉사를 했다. 수십년 교도소를 들락거린 최장기수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아내는 이 일로 국민훈장 포상까지 받았다.
신앙 안에서 아내와 만난 것은 기막힌 연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부부가 그렇듯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의견 차이로 갈등하기도 하고 속상해 눈물지을 때도 있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이런 경험은 훗날 부부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강사가 되는 큰 자양분이 됐다. 또 강의의 좋은 소재가 됐다. 갈등이 사랑을 키웠고 우리 부부가 겪은 어려움이 다른 부부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특효약이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6) 위기가 기회 된 모험과 도전… 종합상사로 급성장
무역회사 창업 후 석유 파동으로 경영난
지인 제안으로 수세미 공장 인수해 대박
사업 자리잡으며 복음적인 활동도 감당
두상달 장로가 1983년 사업차 쿠웨이트를 방문해 아내 김영숙(가운데) 권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꿈 많은 대학 신입생 시절,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염리동 자취방에서 룸메이트가 자주 암송하던 영어 구절이 있었다. “더 로드 이즈 마이 쉐퍼드, 아이 쉘 낫 원트(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내용도 모르고 친구 따라 외우게 됐고 그때부터 늘 입가를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손을 꼭 잡고서 “상달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뒤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 말씀을 따라 쌀 한가마니 값만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고립무원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해 오늘이 있기까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시편의 시를 암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중견기업에 다니며 회사 업무 전체를 배울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번민이 생겼다. 이대로 종업원으로 살 것인가, 경영자가 될 것인가. 인생의 향방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직장에 묶여 있다 보니 CCC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흙수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정부도 많은 지원을 해줬다. 시대의 흐름은 분명 수출이었다. 73년 사표를 내고 무역회사인 칠성산업을 시작했다.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바이어를 만나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 무역 관련 기관을 수시로 찾았다. 외국 바이어에게 수출 물품을 소개하는 편지도 수시로 썼다. 한창 재미있게 일하던 때 사달이 났다.
그해 말 1차 석유 파동이 났다. 중동전쟁으로 석유 값이 일시에 폭등해 세계 경제가 마비됐다. 무역 업무도 암초를 만나 힘들어 하던 중 한 지인이 날 찾아와 수세미 공장을 헐값에 인수하라고 제안했다. 또 도전하기로 했다.
인수 직후 홍콩의 잡화상을 만났고 수출 길이 열렸다. 다행히 주문량이 많았다. 우리 공장 생산량으로는 납기를 맞출 수 없어 하청까지 줘가며 수세미를 실어 날랐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었다. 이후 칠성산업은 종합상사처럼 모든 걸 수출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샘플가방을 들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는 수출역군으로 살았다. 건축과 부동산 개발, 심층수와 의료기 사업 등으로 비즈니스 영역도 다변화됐다.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했다. 사업이 자리잡으며 복음적인 활동도 감당할 수 있었다. 살아온 여정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선한 목사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7) 집사 신분에 술 접대 늘 마음에 걸려 “술 대신 초콜릿…”
양주 선물·술 접대 끊기로 마음먹고
바이어들 집으로 초대해 정성껏 대접
신뢰 쌓이며 안정적 거래로 이어져
두상달(오른쪽) 장로와 아내 김영숙 권사가 1970년대말 독일에서 바이어 가족을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위해 지금이나 그때나 술자리 접대가 따라다닌다. 외국 바이어들도 한국에 오면 당연히 그런 접대를 받는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나도 그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체질적으로 술이 약했다.
회사에서 영업과장을 하던 시절 이야기다. 경찰복 납품 때문에 내무부 담당 과장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 술고래였다. 양주와 맥주를 섞은 ‘양폭’을 돌리기 시작했다. 잘 보여야 하는 자리여서 안 마실 수가 없었다. 술자리가 끝나고 회사 차에 실려 집에 왔는데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아내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집에 들어오며 “이 세상에 어떤 자식이 술을 만들어 날 이렇게 괴롭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었다. 아내가 겁이 나 술 깨는 약을 사러 나간 사이 잠들었다고 했다.
술도 못 마시는 데다 교회 집사인데 술 접대하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 바이어들도 한국에 올 때마다 양주를 선물로 사 오다 보니 주변에 늘 술이 있었다. 지금이야 양주가 흔해도 그 시절에는 정말 귀했다. 잘 보관했다 연말에 거래처들에 선물하면 정말 좋아한 기억이 난다. 나는 이것부터 끊기로 하고 바이어들에게 “술 대신 초콜릿이나 너희 나라 기념품을 선물해 달라.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할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외국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평범한 가정식을 먹고 싶은 바람이 생긴다. 호텔 음식은 세계가 다 똑같다. 술 접대를 끝내기로 마음먹은 뒤 생각해 낸 방법이 집으로 바이어를 초대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인도, 홍콩 바이어가 중요한 파트너였다. 이들이 주로 동작동에 있던 우리 집에 자주 왔었다. 주방에 딸린 식당이 있었지만, 상은 늘 안방에 차렸다. 된장찌개부터 김치와 불고기, 생선구이 등을 정성스럽게 대접했다.
서양 사람들은 좌식 문화가 없어 양반다리로 앉는 걸 어려워한다. 옆으로 앉았다가 다리를 폈다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고통을 겪어보라고 그냥 내버려 뒀었다. 20분쯤 가만히 뒀다가 “다리를 뻗고 등을 벽에 기대라”라고 팁을 알려줬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바이어와 친구가 됐다. 나중에는 가족들끼리 서로 가정을 방문했다. 아이들끼리도 교류가 있었다.
술 접대 대신 선택한 가정식 접대는 나와 바이어 사이에 든든한 신뢰를 쌓아줬다. 신뢰는 안정적인 거래로 이어졌다. 은행에서 수출입 업무를 위해 발행하는 신용장도 회전신용장을 열어줬다. 이를 담보로 무역금융도 쓸 수 있었다. 현금이 융통되다 보니 하청 업체에도 선적한 뒤 4~5일이면 바로 현금으로 결제해 줬다. 바이어나 하청 업체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늘 우리 회사를 찾았다.
요즘에도 술 때문에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불이익을 받을까 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거절하지도 못할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구태를 버리고 창의적인 접대 방법을 통해 신뢰를 얻었다. 결국, 예수 믿어 신뢰를 얻고 사업을 확장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신뢰는 사회적 자산이자 사업의 자본이다. 여건을 탓하지 말고 새길을 열면 더 큰 기회가 생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8) 평신도 정성 모아 ‘복음화 센터’ CCC회관 세워
CCC 출신들 건립 의기투합
1968년 ‘나사렛 형제들’ 조직
열정의 기도·기부로 2년 만에 완공
1971년 완공된 서울 중구 정동의 CCC회관 전경. ‘월간 CCC’ 표지로도 수 차례 사용됐다.
한국이 20세기 최대의 영적 부흥을 이룩한 데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지금도 계신 게 감사할 뿐이다. 순수하게 기도와 전도로 민족 복음화의 불씨로 살아온 수많은 평신도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한국CCC 운동에도 평신도들의 헌신이 녹아 있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구호 아래 한국CCC는 1958년 시작됐다. 학생 운동은 돈이 투입되는 곳이지 나오는 곳이 아니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모금을 위해 김준곤 목사님이 66년 미국에 갔지만 68년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허탈해진 CCC는 존폐 위기에 놓였다.
그해 8월 경기도 하남에 있는 영락양로원에 CCC 출신 108명이 모여 밤새도록 토론하고 울부짖는 기도 끝에 우리 힘으로 다시 해보자고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만들어진 게 ‘나사렛 형제들’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요람으로 쓰일 회관을 짓자. 이 자리에서 1000만원 헌금을 작정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몇 개월분의 급여나 반년 또는 연봉을 바치는 회원들이 나왔다. 전세금을 내놓거나 집을 팔아 헌금한 이들도 있었다.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의 마음은 순수했다. 민족 복음화의 소명 속에 부름을 받은 형제들이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제3 집단이라 자부했다. 3대 헌신, 5대 강령도 만들었다.
그런 뒤 회관을 짓기 위해 땅을 수소문했다. 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형제들은 퇴근 후 달려가 그 땅의 돌덩어리라도 붙잡고 기도했다. 남산으로, 수유리로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정동 이화여고 맞은편 넓은 땅이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보니 너무 좋은 땅이었다. 러시아 대사관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형제들은 여러 달 동안 저녁마다 그곳에 모여 기도회를 했다. 결국, 정부 소유이던 땅을 시세보다 싸게 불하받을 수 있게 됐다.
이것만도 기적이었는데 부족했던 건축비 중 일부를 미국의 기독 실업인 아서 디마스가 쾌척했다. 건축은 명지건설이 맡았다.
김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의 큰 그림을 그리셨다. 현장 책임자에게 한번은 센터에 담겨야 할 정신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곳은 나라 살리는 장병 중에서도 핵심 요원이 훈련받고 세포분열해 전국을 조직화한 뒤 또다시 핵분열하고 들불처럼 번져 민족 복음화를 이룰 사령부입니다”라고 하셨다. 현장 책임자는 중요한 말이라 생각하고 설계도면 구석에 그 내용을 받아 적어뒀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메모가 적힌 도면을 택시에 두고 내렸는데, 택시기사가 뭔가 살펴보니 형이상학적인 그림이 그려진 종이 구석에 ‘세포분열’ ‘복음의 밀수꾼’ ‘전국 조직화’ ‘핵심 요원’ ‘핵분열’ 등의 단어가 기록된 걸 보고 간첩의 물건으로 여겨 영등포경찰서에 전달했다. 이 일로 건축을 담당했던 직원이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풀려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71년 21층 높이의 CCC센터가 문을 열었다. 본관 옆에는 1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까지 마련했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9) 한국 CCC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한 민족복음화운동
김준곤 목사의 ‘복음화 운동’ 선포 후
우리나라 최초 대규모 학생 전도 훈련
힘든 경험이었지만 이후 집회 자양분 돼
두상달 장로가 지난 16일 경기도 양평 자택에서 ‘민족 복음화의 환상과 기도’라는 제목의 김준곤 목사의 기도문을 앞에 두고 CCC 운동의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1971년 정동에 한국CCC 회관 건물이 마련된 뒤 민족 복음화 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외부 골조만 세워진 미완공 상태일 때부터 전국에서 핵심 요원이 1000명 단위로 참여해 전도 요원 훈련을 했다.
나사렛 형제들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 매년 여름에는 전국대회를 열었고 겨울에는 원단 금식기도회를 진행했다. 이 기도회는 매년 12월 31일에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는 자리였다. 가장 많을 때는 수만명에 달했던 나사렛 형제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긴 세월 헌신한 복음의 행동대원들이었다.
71년은 CCC 역사에 있어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CBS 방송을 통해 김준곤 목사님이 ‘민족 복음화 운동’의 큰 비전을 선포하셨던 일도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 타종 직후 선포된 메시지였다.
우리에게는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꿈을 심어주셨다. 이 말씀이 결국 젊은이들의 마음을 복음으로 불타게 만들었다. 그해 8월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열린 대규모 학생 전도 훈련이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렸다.
민족 복음화 운동에 소명을 받은 요원들과 젊은이 1만여명이 모여 훈련을 받았다. 숙소는 체육관 인근 6개 초등학교 교실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겠지만 책상과 걸상을 치우고 교실 바닥에서 잤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는 체육관으로 이동해 집회했다.
나는 한 초등학교에 모인 이들을 책임지는 총순장으로 봉사했다. 1000여명을 인솔하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시설이 너무 낙후했다.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화단 옆에 하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이 씻어야 하는데 너무 황당했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온 동네를 다니며 드럼통을 여러 개 산 뒤 종일 물을 받았다.
물은 확보했지만, 배수가 문제였다. 물이 화단으로 넘쳐 교장이 가꾼 꽃밭이 망가져 버렸다. 교장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예의를 다해 사과드린 뒤 싹싹 빌었다.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지금 같으면 도시락을 주문해 나눠줬겠지만, 당시는 플라스틱 용기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마침 대전에 부도가 난 대형 밥솥 공장이 있어 그걸 사다 야외에 걸었다. 여기에서 밥을 해 간단한 반찬과 함께 각 학교로 배달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열정만 가지고 대형 행사를 치른 셈이었다.
이 경험은 이후 더 큰 집회를 준비하는 자양분이 됐다. 같은 해 진행한 춘천성시화 운동과 74년 ‘엑스플로74’, 80년 비상구국 금식 운동과 세계 복음화대회, 84년 기도성회까지 CCC 회원들은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하기 위해 나사렛 형제들은 언제나 헌신했다. 형제들은 자신의 삶과 젊음을 바쳐 CCC를 사랑했다. 이들을 생각하면 늘 눈물겹도록 고맙고 또 그립다. 물론 CCC 간사들도 같은 수고를 했다. 모두의 노력이 모여 복음이 조금씩 확산했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0) 계획 없던 ‘엑스플로74’ 서울 개최 깜짝 발표에…
필리핀 본부서 대회에 필요한 교육 받고
나사렛 형제들은 수련회서 홍보비 마련
집회 때마다 마음 다잡고 헌금도 작정
두상달(왼쪽 네 번째) 장로가 197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엑스플로72’ 대회에 참석해 외국 참가자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7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엑스플로72’ 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전도훈련 집회였다. 56명의 한국대표단도 참석했다. 나도 나사렛 형제들 10여명과 함께 했다. 전 세계 CCC가 2년 동안 준비한 엄청난 규모의 집회였다.
미국은 대단한 선진국으로 별천지였다. 미식축구가 열리는 댈러스 코튼볼 운동장에 8명이 모였다. 숙소도 번듯한 호텔이었고 뷔페에서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교실 바닥에 자면서 주먹밥 먹으며 집회하던 한국 상황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와 달리 자유분방하게 옷을 입었지만, 간절히 찬양하고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문화충격도 받았다.
마지막 날 김준곤 목사님이 인사하러 단상에 올랐을 때 ‘사고’가 났다. “한국의 서울에서 2년 뒤 30만명이 모이는 ‘엑스플로74’ 집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귀를 의심했다.
“30만명이라니요. 3만명도 어려운데 목사님 숫자 실수하신 거 아니세요”라며 수군거리는 우리에게 김 목사님은 “내 말이 다 맞는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원래 목사님이 숫자 개념이 없으시긴 하셨지만, 사전에 상의도 없이 하신 갑작스러운 발표에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물은 쏟아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목사님은 나와 장만기 박사를 필리핀에 있는 CCC 동아시아 본부로 보냈다. 큰 대회 준비에 필요한 모든 걸 배워오라고 하셨다. 한 달 반 동안 교육을 받았다. 아쉽게도 필리핀 연수 후 장 박사는 진로를 바꿨다. 훗날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총무로 봉사하다 인간개발원을 세웠다.
나사렛 형제들도 또 나섰다. 73년 여름 수련회에서 1억2000만원의 헌금을 작정했다. 800여명이 참여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메일 복음 메시지를 담은 ‘순 칼럼’을 싣는 데 필요한 홍보비였다. 일간 신문에 실린 최초의 복음 칼럼으로 2년 동안 연재했다. 지금 생각해도 파스칼의 명상록 ‘팡세’에 필적할 만한 현대적 고전으로 간결하면서도 복음의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집회 때마다 ‘절대 신앙’ ‘절대 헌신’ ‘절대 행동’을 다짐했고 헌금도 했다. 헌금을 계수하는 이들이 가끔 눈물을 쏟을 때도 있었다. 헌금 주머니에서 “바칠 게 없습니다. 대신 머리를 잘라 바칩니다”라는 글과 함께 머리카락 뭉텅이가 나오기도 했다. 반지와 시계도 나왔다. 계수 요원들은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울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족 복음화의 불씨를 품었던 나사렛 형제들 모두가 너무 소중했다.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예수에 취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나는 나사렛 형제들 서울 지구 회장과 전국 중앙회장으로 봉사했다. 20여년 동안 여름에는 전국대회, 겨울에는 원단 금식 기도회에 참여하느라 한 번도 휴가를 못 갔다.
때론 어딘가에 미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든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미쳐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차피 미쳐야 한다면 똑바로 미치자. 예수에 취하고 예수에 미쳐보자.
***[역경의 열매] 두상달 (11)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뤄낸 큰 역사 ‘엑스플로74’
당시 교계 지도자 모두 참여한 대회로
30만명 모여 6일간 진행한 초대형 행사
숙소·배식 사고에도 기도 열기 드높아
1974년 ‘엑스플로74’가 열린 서울 여의도광장에 마련된 텐트촌 전경.
‘엑스플로74’는 한국 교계 전체가 참여해 이뤄낸 큰 역사였다. 한경직 목사님이 대회장이셨고, 김준곤 목사님은 준비위원장을 맡으셨다. 당시 교계 지도자들도 모두 참여했다. 이들 모두 대회의 주역이었다.
무려 30만명이 모이는 집회였다. 행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초대형 행사를 준비하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다.
우선 여의도광장에 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를 쳤다. 이걸로 부족해 영등포구와 마포구 용산구 서대문구에 있는 학교까지 빌려 숙소로 사용했다. 행사는 1974년 8월 13일부터 엿새 동안 진행됐다. 낮에는 숙소에서 사영리 전도훈련을 했고 오후에는 여의도광장에 모여 철야 기도회를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막상 행사가 시작하자 숙소를 옮겨달라는 민원이 줄을 이었다. 권력 기관까지 앞세운 청탁도 있었다. 마침 내가 숙소를 담당하며 진행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모든 부탁을 무시했다. 한 명의 편의를 봐주기 시작하면 이미 배정해 놓은 모든 숙소와 질서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배식도 문제였다. 이형자 권사를 통해 많은 양의 ‘콘티빵’을 기증받았다. 이를 각 학교로 배달했는데 기사들이 상자째 이리저리 팔아버리면서 참석자들이 쫄쫄 굶게 된 것이었다. 시시비비를 따질 새가 없었다. 배달사고를 막으려고 둘째 날부터 고등학생 CCC 회원을 배식 트럭에 태운 뒤 기사들이 행선지를 바꾸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밥도 한 곳에서 지어 숙소로 날랐다. 반찬은 새우젓과 단무지가 전부였다. 허름한 반찬이 기가 막혀 “짠 걸 먹어야 복음을 토해 낼 수 있다”는 농담도 했다.
8월 15일 아침이 밝았다. 이날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하지만 이와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육영수 여사께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겨우 48세였다. 불우이웃을 도왔고 청와대 안의 제1야당이라 불릴 만큼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심을 직언했던 육 여사였다. 온 국민이 슬픔에 빠졌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영부인을 잃었다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여의도광장 텐트촌을 담당하는 총순장들이 나한테 달려와 울면서 호소했다. 텐트촌에 물이 들어찬 것이었다. “텐트촌이 물바다가 돼 텐트가 물에 뜹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사람의 힘으로 할 일이 없었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회사에서 관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행사 진행에 자신이 있었다. 자만이었다. 너무 괴로워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밤이 되면 기도회가 시작됐다. 장대비가 쏟아진 15일 밤에도 10만명이 넘는 참석자들이 빗속에서 무릎을 꿇었다. 빗소리와 뒤섞인 기도 소리는 장엄한 느낌을 줬다.
엑스플로74에 참석했던 외국인들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스플렌디드(splendid)’라고 했다. 훌륭하다는 찬사였다. 이들은 “이토록 간절히 기도하는 민족을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하신다”고 입을 모았다. 나사렛 형제들과 여러 간사, 회원들이 눈물을 흘리며 온몸을 바쳐 진행한 행사였다. 눈물의 씨앗은 전도 폭발로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2) 부부생활 세미나에 함께 간 아내, 갑자기 오열을…
그동안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실 깨닫고
서서히 변화… 가정사역까지 하게 돼
부부는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해야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2000년대 초 한 기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부부생활 강의를 하고 있다.
“결혼은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조화를 이뤄가며 사는 종합예술이다.” 물론 나도 처음부터 이 비밀을 알았던 건 아니다. 미숙한 남편일 뿐이었다. 진리를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늘 후회한다.
1985년쯤의 일이었다. 부부생활 세미나를 진행하던 김인수 김수지 교수 부부가 우리 부부를 세미나에 초청했다. 우리 부부 사는 걸 보고 부부생활 강사로 만들고 싶었던 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나는 참석을 거부했다. “거길 뭐하러 가. 문제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거지.” 아내도 물러서지 않고 졸랐다. 결국, 따라갔다.
첫 시간 강의가 끝난 뒤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는데 갑자기 아내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너무 깜짝 놀랐다. 주변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용한 곳으로 가 대화를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나의 말과 행동, 표정들로 아내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았는지 말이다. 내가 문제였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그날부터 나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부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문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 국제CCC의 가정 사역 전문가 대니스 레이니의 가정사역 세미나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여기에도 참석했다. 그런 뒤 우리 부부는 87년부터 가정사역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친구들 가정을 모아놓고 했지만 이내 소문이 나 큰 무대에 서게 됐다.
우리의 아픔과 갈등을 고스란히 전하니 청중 반응은 뜨거웠다. 강의하며 돌아보니 참 맞는 게 없는 부부였다. 나는 열이 많아 아침부터 온 집의 문을 활짝 연다. 차에 타도 에어컨을 튼다. 아내는 완전 반대다. 나는 김치찌개 같은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지만, 아내는 담백한 쪽이다. 세수만 하고 나와도 나는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든다. 완전 반대인 아내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건 엄청난 축복이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일 뿐이다. 부부가 서로 달라야 자녀들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다. 부부의 다름 때문에 후세가 건강한 것이다.
우리 때는 결혼 교육이란 게 없었다. 나는 오직 ‘신혼 때 잡아야 한다’는 아무짝에 쓸데없는 말만 듣고 결혼했다. 잡아야 할 건 상대의 마음이었는데 그걸 몰라 늘 서툴렀다. 두고두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미안하다.
“결혼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멋진 남편,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아쉬움을 책의 서문에 쓰기도 했다.
가정사역을 하면서 바라는 게 한 가지 있다. 그건 바로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사람들, 갈등과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가정들이 해답을 얻고 축복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 위해 34년 동안 우리 부부가 도구로 사용 받았다면 그거로 만족한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여. 다름을 인정한 뒤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라.
***[역경의 열매] 두상달 (13) ‘부부 무면허’로 살다 보니 항상 티격태격
가부장적 문화서 자라 아내 이해 못 하다
내가 먼저 변해야 가정 행복해진다는 걸
부부 세미나에 참석해 배우면서 깨달아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가 지난 16일 경기도 양평 자택 마당에서 손을 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여자와 남자의 입맞춤은 사랑의 시작인 동시에 싸움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의 시작인 키스가 갈등의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아내와 부부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사랑과 갈등의 틈을 잇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한 세미나가 끝난 뒤 한 여성이 내 아내에게 다가왔다. “원장님. 멋진 남편분과 사셔서 행복하시겠어요.” 그 말을 들은 아내가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한 번 같이 살아 보실래요”라고 말해 모두가 크게 웃었다.
오래전 일이다. 세미나가 끝난 뒤 한 저명인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장로님. 언제 우리 집 와 보셨죠. 오늘 말씀 들어보니 우리 집 이야기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 ‘405호’나 ‘406호’가 다 똑같다는 말이다. 콩깍지가 벗겨지면 ‘환상 커플’이 ‘환장 커플’이 되는 법이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실패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혼 생활에 시행착오가 많은 건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한 무면허 부부이기 때문이다. 부부 학교 마지막 시간에 이미 써 놓은 이혼 서류를 찢으며 흐느끼셨던 분들이 기억난다.
“아내가 원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가 죽일 놈이었습니다”라면서 부부가 부둥켜안고 울며 하나 되는 모습을 봤다.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며 아내를 비난했던 과거를 뉘우치며 깨닫게 된 것이다.
부부 강의를 하면서 이혼 직전의 수많은 부부를 만났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시시한 것들로 싸우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그게 감정싸움으로 번져 결국은 파경을 맞는다.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나 신문을 본 다음 아무렇게나 던져 놓거나 양말을 뒤집어 벗는 것 등으로 다툼이 시작된다. 이혼하는 부부 중 남북통일이나 인류 평화 같은 거대한 문제로 헤어지는 부부는 없다. 나도 그런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부부 교육이 중요하다.
‘부부 무면허증’으로 살다 보니 가장 가까워야 할 사람들이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나도 어른이 된 뒤 가장 많이 싸운 상대가 아내다. 사랑하면서 사랑에 실패했다. 사랑의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무면허 남편이자 무면허 아버지인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부장적 문화에서 자랐다. 내 몸에 처음부터 ‘가부장적 DNA’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나도 이런 내 모습을 부부 세미나에 참석해 배우면서 알게 됐다. 가정 사역을 하면서 제일 수지맞은 사람은 결국 나다.
내가 바뀌니 아내가 변했고 자녀들이 바뀌었다. 내가 바뀐 만큼 우리 가정이 행복해졌다.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는 것은 한 우주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장점만 아니라 결점까지 수용해야 한다. 배우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버리자. 배우자가 60~70점이면 좋다. 나머지는 내가 채워야 한다. 이것을 터득하는 데 몇십년이 걸렸다. 배우자가 훌륭하길 바라지 말고 내가 훌륭한 배우자가 되는 게 먼저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4) 첫 방송 출연에 시청률 대박… 단번에 고정 패널로
부부의 날 특집으로 공중파 방송 출연
8%대 시작해 12%까지 시청률 오르자
강의 끝난 후 방송국 CP로부터 러브콜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지난해 CTS기독교TV의 간증 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에 출연해 행복한 부부가 되는 노하우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 부부의 강의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교회는 물론이고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체에서 더 큰 반응을 받았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출연 제의가 이어졌다.
2009년 5월 21일 아내와 함께 KBS 아침마당에 출연했다. 부부의 날이었다. 김재원 이금희 아나운서가 우리를 맞았다. 강의하는데 앞에 앉은 관객은 물론 제작진들의 반응도 좋았다. 강의가 끝나자 CP(프로그램 총괄 프로듀서)가 우리 부부를 점심에 초대했다. 작가가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아침마당 시청률이 대박을 쳤다는 것이다.
8%대에서 시작했는데 시청률이 점점 올라가더니 12%까지 갔다는 것이다. 그 후 2년이 넘도록 패널로 매주 방송에 출연했다. 이외에도 생방송 오늘 아침, 여성 공감, 열린마당, 황금알 등 셀 수 없이 많은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도 많았다. 부부가 함께 출연하니 사는 이야기를 꾸미는 게 불가능했다. 아내만 혼자 출연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날 ‘디스’했고 그 순간 내 사진이 화면에 떴다. 방청객들은 일제히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래도 좋았다. ‘내가 망가져도 많은 가정이 회복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했다.
방송에 나가면 ‘국내 1호 부부 강사’라고 소개한다. ‘업그레이드된 고춘자 장소팔’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1950년대 최고의 만담가였다. 복음을 전하고 사업을 하면서 방송인이 될 거로 생각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강의를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전문가가 돼 지금은 어딜 가도 원고 없이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만큼 아내와 죽이 잘 맞는다. 아내는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가정회복을 주제로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강의 밑바닥에는 항상 이론이 깔려있다.
평화방송과 불교방송까지 출연했다. 가톨릭 평화방송의 ‘오 축복’이라는 프로그램에 2~3차례 출연하자 담당 PD가 6개월 고정 출연을 간청했고 우리 부부는 그러기로 했다. 평화방송 라디오 전체 프로그램 중 청취율 1~2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 있었다. 약속된 기간이 끝날 때쯤 6개월을 더 출연해 달라고 요청해 결국 1년 동안 출연했다.
‘가정 행복 전도사’로 나선 뒤 수천회가 넘는 특강을 했다. 실제로 ‘남편이 바뀌었어요’ ‘부부 관계가 너무 행복해졌어요’ ‘꿈인지 생시인지, 지금의 변화가 믿기질 않아요’라는 반응도 줄을 이었다. 우리는 갈등하는 부부들과 ‘만지며 살라’ ‘표현하며 살라’ ‘마주치면 웃으라’ ‘잘 싸우며 살자’ 등 수많은 구호를 외치며 강의했다.
누구나 1등을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행복해질 수는 있다. 생각을 바꾸면 오늘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나부터 변하는 게 출발점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5) 우리 부부 이색 주례에 결혼식장은 웃음바다
결혼 전 서약서 쓰고 하객 앞에서 서명
흔한 주례사 대신 부부 갈등 사례 조언
결혼 생활 요령과 백미 등 알짜만 전수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가 2012년 서울 오륜교회에서 주례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강의도 같이하지만 주례도 함께한다. 주례사도 색다르다.
한편의 토크쇼와 같은 주례를 전한다. 두 명이 주례하는 것도 신기한데 주례사마저 귀에 쏙쏙 들어오니 큰 인기를 끌었다. TV 뉴스에서도 우리 부부의 이색 주례를 다뤘을 정도였다.
우리는 예비 신랑 신부에게 결혼 전 서약서를 쓰게 한다. ‘평생 설거지를 하겠다’ ‘밤마다 안마를 해 주겠다’는 등 결혼한 뒤 지킬 약속과 다짐을 각자 쓰도록 한다. 서약서는 식장에서 낭독하고 이를 녹음해 일생 간직하도록 한다. 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한다. 서명하기 전에는 늘 “지금 마음을 바꿔도 된다”고 기회를 준다. 아직 변심했던 커플은 없었다.
주례사도 사랑하며 살라거나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등 공자님 말씀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결혼 적령기의 성인이라면 이런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신 우리 부부가 살면서 다투게 됐던 여러 갈등 사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우리는 맞는 게 없다’ ‘식성이 다르고 기질도 다르다’ ‘냉난방조절 문제로 평생 견해차가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너무 다른 주례사에 식장에 있는 모두가 흥미로워하며 웃는다. 하지만 그 속에 결혼 생활의 요령과 백미가 담겨 있다. 이런 질문도 한다. “신랑은 지금부터 지구상 35억명의 여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죠?” 그러면 신랑과 신부는 “네”라고 답한다. 그런 뒤 ‘싸우라’고 권한다.
주례사 중 싸우라고 하는 건 우리 부부 밖에 없다. 싸울 수 없거나 안 싸우는 게 문제다. 다만 싸우되 지켜야 할 금도가 있고 원칙이 있다. 그 원칙을 지키고 잘 싸우면 부부의 관계가 친밀해진다. 잘못 싸우면 멀어진다. 정 관계 개선이 안 될 때는 우리 부부를 찾아오라고 말한다. 애프터서비스를 하기 위해서다.
원래 ‘러브 파트너’는 행복하지만 ‘라이브 파트너’는 힘든 법이다. 주례사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셈이다.
자녀도 많이 낳으라고 권한다. 성경에는 자녀를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고 했다. 어차피 기업가가 될 바에야 대기업가가 되라고 조언한다. 신랑 신부에게 원하는 자녀 수를 물으면 대부분 한두명이라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부부는 “두 명이 만나 결혼했으니 셋넷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순간 식장에는 웃음꽃이 핀다.
양가 부모들에게도 전하는 말이 있다. “자녀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잘 압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자녀도 부모를 떠나고 부모도 자녀를 떠나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 결혼생활 중간에 끼어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그게 결국 문제가 됩니다. 사이에 끼지 말고 옆에서 지켜보란 말이 있습니다. 밥을 먹든, 굶든 관여하지 마세요. 그래야 훗날 효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모두 공감을 한다. 이런 메시지, 우리 부부의 주례가 인기를 끄는 이유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6) 부부생활 노하우 담은 책 ‘아침 키스가 연봉을 높인다’ 인기 폭발
방송 출연, 가정 사역하며 생긴 전문성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 책 출간 시작
하루 기분 결정되는 아침의 중요함 강조
‘아침 키스가 연봉을 높인다’ 표지 모습.
방송에 출연하고 가정 사역을 하며 책까지 쓰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분야에 몰입하다 보니 전문성이 생겼고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부부생활의 비밀을 전하고 싶어 책을 썼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십니까’가 첫 책이었고 뒤이어 ‘아침 키스가 연봉을 높인다’를 썼다. 세 번째 책에는 ‘결혼 1000일 안에 다 싸워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중 ‘아침 키스가 연봉을 높인다’가 가장 많이 팔렸다. 사실 책 제목이 많은 화제가 됐다. 설교에 인용된 일도 많았다. ‘사느니 못 사느니’ 갈등하던 부부가 이 책을 두 번 읽고 완전히 하나 된 일도 있었다. 그만큼 부부 생활에 필요한 실전 노하우가 가득 담겨 있다.
책이 인기를 끌면서 나와 아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많은 사람이 내게 매일 아침 키스를 하냐고 물었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한다. 나는 매일 아침 키스를 한다. 책 저자가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건 큰 문제다.
이 책은 건강한 가정생활을 위한 교과서로 남녀의 차이와 소통 방법, 갈등의 해법 등을 제시하고 있다. 어느 날 아침 키스를 하라고 강의했더니 상처를 한 저명인사가 나와 “저는 누구하고 키스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아침에 거울을 보면서 웃으세요. 그러면서 머리를 만지면서 이만하면 됐다고 해 보세요”라고 대답했다.
‘프렌치 키스’를 하라는 조언이 아니다. 그저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하라는 말이다. 따뜻한 포옹이나 볼 키스도 좋다. 하루의 기분은 아침에 결정된다. 아침에 웃고 시작하면 대박이고 찌푸리면 쪽박이다. 하루를 즐겁게 시작하면 일터에서도 즐겁고 창의적이다. 동료들과 협력도 잘 된다.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일할 수 있어 정착률도 높다. 그러니 연봉이 20~30% 높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어쩌다 말다툼이라도 하고 출근한 날은 온종일 일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
행복한 가정이 나의 경쟁력이고 기업체의 경쟁력이다. 한 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운수 회사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버스가 6000여대에 기사가 1만여명인 회사였다. 그런데 수강자들이 모두 여자라고 했다. 알고 보니 기사 아내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다.
장시간 운전해야 하는 기사들이 기쁜 마음으로 출근하는 건 모두에게 중요하다. 우리 부부는 정성껏 강의했다.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면 교통사고가 자주 납니다” “과속을 하거나 승객들에게 불친절하게 돼 민원도 발생합니다” 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아침 키스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 부부는 서울의 한 특급호텔에서 700여명씩 초청해 10차례 강의를 했다.
‘베사메 무초’. 스페인어로 ‘내게 더 키스해 줘요’라는 의미다. 아침 키스는 행복한 부부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성공하고 싶다면 아침에 키스해야 한다. 아침 키스가 부부의 능력을 키우고 결국 연봉을 높이는 법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7) 청소년 사역은 예방이 중요… 시기 놓치면 회복 어려워
사춘기는 예민한 시기이자 위기의 때
젊은 시절 주님 만나 변화했던 나처럼
예수 안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지길
청소년들이 2017년 충남 천안 고려신학대에서 열린 서울YFC 여름캠프에 참가해 찬양하고 있다.
장충체육관 옆을 지나던 때 이야기다. 수많은 10대가 모여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체육관에 들어가지 못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여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들어갈 수 없게 됐으니 집에 가서 공부나 하지”라고 권했더니 “지금 우리가 공부할 형편이에요”라며 정색을 했다.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생일잔치가 열리느라 벌어진 일이었다.
사춘기는 예민한 시기이자 위기의 때이기도 하다. 이때 방황하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놓치고 만다. 회복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청소년 사역은 예방이 중요하다. 절벽 밑에 구급차를 대기 시킬 게 아니라 낭떠러지 위에 방어벽을 치는 게 더 중요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나도 청소년기에 방황할 뻔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가 나를 깨웠고 공부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됐다. 또 약관 20대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곡점이 됐다.
청년 시절에 예수를 만나 학생 선교단체에 참가하다 보니 직장 생활이나 사업을 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청년 사역에 관심 갖게 됐고 많은 시간을 바쳤다. 1980년 초 극동방송·아시아방송 이사로 취임한 걸 계기로 김장환 목사님의 권유로 한국십대선교회(YFC) 이사로 참여하게 됐다.
YFC는 ‘유스 포 크라이스트’(Youth for Christ)의 약자로 1945년 미국에서 시작된 국제 청소년 선교단체이며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전임 순회 전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해방 후 시작됐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다 1960년대 초 김 목사님이 정식 창립하면서 활성화됐다. 나는 오랫동안 이사로 활동했고 그중 12년 동안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단체를 법인으로 전환했고 본부 사무실을 마련했다. 대형집회도 여는 등 온 힘을 다해 봉사했다. 또한 최낙중 목사님의 권유로 ‘청소년 지도자 대학’ 이사장으로도 활동했다.
지금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학생은 반 토막 정도가 아니라 80~90%가 감소한 교회도 있을 정도다. 성인과 달리 청소년 복음화 비율은 5% 미만이다. 국가의 20~30년 후 변화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공부하는 교실을 보라는 말이 있다. 청소년 사역은 그만큼 한 국가의 미래이자 희망이며 자원이기 때문이다.
50여년 전만 해도 교회 교육이 사회 교육보다 앞서 있었고 매력적이었다. 프로그램도 좋았고 배울 게 넘쳐났으며 먹을 것도 줬다. 지금은 역전됐다. 사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이나 놀거리가 훨씬 매력적이다. 과거 어린이들이 모이는 집회는 폐회 예배가 끝난 뒤에도 집에 가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집에 가자’는 노래까지 만들어 함께 부르며 귀가를 권했다.
지금 교회학교 예배와 반별 성경공부는 지루하고 재미없어져 버렸다. 복음은 바뀌지 않아도 복음을 전하는 방법과 도구는 변화돼야 한다. 인생의 젊은 시절 나를 변화시켰던 예수님께 늘 기도한다. “주님.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가고 세워지게 해 주옵소서”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8) 수많은 복음집회서 은혜 체험… 입소문에 참여자 줄 서
집회에 참석했던 청소년들 큰 변화
지금은 30∼40대로 각계각층서 역할
청소년 사역, 기성세대의 중요 책무
1995년 ‘기독교 21세기 운동’이 주최한 청소년 부흥집회 참석자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모습.
수많은 복음 집회를 섬겼다. 1995년 ‘기독교 21세기 운동’이 시작됐다. 나는 청소년 분과위원장으로 수년 동안 봉사했다. 여름에는 대학 캠퍼스를 빌렸고 겨울에는 난방을 위해 큰 기도원을 빌렸다. 강남기도원을 주로 찾았다. 기도원을 관리하던 책임자가 말했다.
“두 장로님이 진행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달라요. 첫째 날 다르고 둘째 날 더 달라지고 집에 갈 때는 너무 달라져 기도원 직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사용료까지 할인해 주셨다.
한양대에서 집회할 때였다. 당시 전국에서 8000여명이 모였다. 강사로 온 목사님은 “어떻게 이렇게 많이 모았느냐”고 놀랐다. 나는 “제가 모을 테니 목사님께서 아이들 변화만 시켜주세요”라고 답했다. 그런데 집회를 시작하자마자 난리가 났다. 개회예배 순서자로 단상에 올라가 있는데 진행 요원이 작은 쪽지를 건넸다.
“운동장에서 배식과 식사를 해야 하는데 폭우가 내립니다. 식사를 할 수 없게 됐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강한 빗소리가 들렸다. 천둥·번개가 치더니 강당 옥상의 환기구 뚜껑마저 날아가 버렸다. 큰일이었다.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짧은 기도 후 확신이 생겼다. “염려 마세요. 예배가 끝나면 비가 그칠 겁니다. 그대로 준비해 주세요”라고 전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억수로 쏟아지던 비가 시간에 맞춰 뚝 멈춰 순조롭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기적 같았다.
명지대 용인 캠퍼스에서 집회할 때 일화도 기억난다. 이때도 7000여명이 등록을 했는데 큰 사달이 났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후 정부가 대형 건물에 대한 안전점검을 까다롭게 했다.
행사 직전 체육관을 사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행사를 취소할 수도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운동장에 3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텐트를 치고 두 번에 걸쳐 집회하기로 했다. 다행히 1차 집회를 마쳤다. 그런데 문제가 많았다. 텐트 위로 비가 떨어지면 소음 때문에 강사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천막 위에 물이 고여 수백 개의 물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안전에도 문제가 있었다. 별수 없었다. 2차 집회 전까지 튼튼한 천을 구해와 다시 텐트를 쳤다. 많은 간사의 눈물겨운 헌신과 노력으로 겨우 다시 행사장을 정비하고 겨우 집회를 진행할 수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아이들은 큰 은혜를 받고 놀랍게 변했다.
은혜를 체험한 아이들이 교회로 돌아가 교인들에게 자신들의 받은 감동과 은혜를 담아 보고회를 했다. 변화된 아이들을 본 교인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입소문 덕분에 참여 인원이 넘쳐 매번 집회 시작 훨씬 전 마감을 해야 했다.
청소년 사역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 사역이다. 그러나 확실히 남는 장사다. 1990년대 집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지금은 30~40대가 돼 각계각층에 포진해 있다. 새벽이슬 같은 10대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 건강한 성인으로 길러내는 과업은 기성세대가 해야 하는 중요한 책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19) 독특한 평신도의 삶… 유혹 많았지만 분수 지키며 살아
예수 믿고 보니 주님 사랑받는 귀한 존재
자존감 높아지며 하는 일에도 여유 생겨
일상 속에서도 늘 주님 일임을 잊지 않아
두상달 장로가 1980년대 ‘직장인 초청의 밤’ 행사에서 인사하고 있다.
잔디를 덮고 누워 있어야 할 나이인데도 아직 건강해 잔디를 밟고 다닌다. 엄청난 축복이다. 건강의 비결은 어렵게 살았던 어린 시절 때문이다. 중학교 때 통학 거리는 무려 10㎞에 달했다. 자전거 한 대 살 돈이 없어 그 먼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걸었다. 당시는 고난의 길이었지만 돌아보니 축복의 시간이었다. 건강의 기초를 다지고 다리의 힘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고2 때 교장 선생님께서 당신의 중3 아들의 공부를 봐주라며 입주 과외를 제안했다. 신나는 희소식이었다. 1년 동안 교장 선생님 댁에 머물며 편안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때 1년 만에 키가 15㎝나 자랐다. 잘 먹고 편안했던 모양이었다. 고3 때 180㎝를 넘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시대상에만 비춰보면 장애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와서는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시골 깡촌 출신에 키는 크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립무원이었다. 황량한 광야에 던져진 존재라는 생각에 움츠러들고 허리는 굽고 자신감은 사라졌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예수를 믿고 보니 내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사명감을 느끼게 되니 나도 모르게 열등감은 사라지고 자존감은 높아졌다.
자존감을 느끼게 되니 성격도 적극적이고 생산적이며 도전적으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때 반 대표를 했지만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얼굴이 붉어졌다. 가슴도 두근거려 제대로 말도 못 했다.
그런데 많은 단체를 섬기다 보니 대중 앞에 설 기회가 많아졌다. 지금은 사람이 많을수록 신바람이 난다. 생방송을 해도 여유가 생겼고 편안하다. 아내와 가끔 “우리 참 독특한 삶을 살았지”라고 대화한다.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그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선교단체를 섬겼다.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심는 운동을 했다. 부부가 강의와 상담도 수없이 했다. 방송에도 많이 출연했다. 글도 쓰고 책도 발간했다. 지금도 6년 동안 한 신문에 매주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정말 독특한 평신도의 삶을 살았다.
물론 긴 세월을 살면서 진로가 바뀔 뻔했던 기회가 많았다.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신학교에 가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다. 정치권에서도 유혹했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평생 정당에 가입하지 않기로 하고 담을 쌓았다. 내 분수를 알고 내가 하는 일에서 큰 보람을 느꼈기 때문에 다른 쪽은 포기하기로 했다.
때론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다른 것까지 챙기려니 사달이 나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반세기 동안 사업을 하면서 유혹과 올무도 많았다. 99섬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의 것을 탐내는 게 나의 욕심이다. 사무실에 있으면 별별 사람이 다 찾아온다. 각종 특허에 별별 신기한 아이템을 들고 온다. 재정 문제로 날 찾거나 그럴듯한 사업 계획서도 가지고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제한다.
이유는 하나다. 나는 일터로 파송 받은 그리스도의 대사여서다. 내가 잘못되면 예수님이 욕먹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20) 복음화 위해 사회·경제 등 각 분야서 활약한 평신도들
일터 복음화 뜻 모아 한국직장선교회 설립
경제인 조찬기도회 자리 잡는 데도 큰 역할
평신도는 삶을 통해 신앙 표출하는 선교사
두상달 장로와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6년 서울 고려대 교우회관에서 열린 고대 조찬기도회에서 기도하고 있다.
평신도는 일터로 파송 받은 선교사다. 주일보다 중요한 건 6일 동안 일터에서의 삶이다. 일터를 통해 신앙이 표출돼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을 강사로 초대한 일이 있었다. 강의가 끝난 뒤 “목사님 평신도를 깨운다고 하시는데 평신도를 재운 사람은 누굽니까. 언제는 재우더니 이제는 깨운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 목사님이 크게 웃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민족의 입체적 구원을 바라며 기도했던 믿음의 동료들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하며 일터 복음화를 위해 마음을 모았던 평신도들이다.
이런 바람이 모여 많은 선교회가 만들어졌다. 1980년에는 박흥일 장로가 한국직장선교회를 창립했다. 나는 6년 동안 이 선교회의 이사장으로 봉사했다. 이 기간에 자체 사무실을 마련하고 후원회도 조직했다.
1979년 10·26 사태 이후 이 나라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렸다. 경제인들이 국가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이듬해인 1980년 12월 초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경제인 조찬기도회’가 출범했다. 초대회장은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이 맡았다. 최 회장은 교회 장로로 일생 일터에서 기독교인으로 산 신앙인이었다. 마침 ‘나사렛 형제들’ 회원 두 분이 전경련 임원으로 일하고 있어 경제인 조찬기도회를 발족하고 안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모임을 위해 황영시 장군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돕기도 하고 때때로 참석하기도 했다. 나는 16년 동안 경제인 조찬기도회의 운영을 도왔다. 연말이 되면 경제인 조찬기도를 중심으로 국회조찬기도회와 예비역장교회 기독법조인회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등 5개 평신도 단체가 모여 함께 기도 모임을 가지며 일터 선교의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고려대 기독교우회도 기억에 남는다. 고려대는 ‘막걸리 찬가’를 즐겨 부르는 등 기독교 정서와는 거리가 먼 교풍이 있다. 그런데도 민족 고대가 예수 믿는 고대가 되기를 염원하는 교우들이 의기투합했다.
졸업생 중 노정현 연세대 교수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을 중심으로 7개의 기독 단체가 산발적으로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93년쯤 이들 단체를 통합해 고려대 기독교우회를 창립했다.
안암동 캠퍼스 안에 있는 교우회관에 정식 사무실도 마련하고 매년 큰 행사도 열었다. 교우회 안에 고대 출신 목사와 장로들의 모임인 ‘고목회’와 ‘고장회’ 활동도 활발했다. 내 뒤를 이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서울시장 취임 직전 회장이 된 뒤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기 전까지 5년여 동안 봉사했다.
회원들은 고대에 장로 총장이 나오길 바라며 기도했는데 김병철 염재호 장로가 연이어 총장이 됐다. 민족 고대가 예수 믿는 고대가 되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실 걸 믿는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 내일의 세계 선교, 이 땅의 캠퍼스마다 예수의 계절이 오게 해 주소서”.
***[역경의 열매] 두상달 (21) 아내는 36년간 재소자들에게 성경 가르친 ‘최장기수’
동네 주민과 공부하던 ‘어머니 순모임’
소문 나 교도소에서 성경 공부 부탁
아내 덕에 강도 위기 면한 해프닝도
김영숙 권사가 2019년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제8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재소자들에게 한글과 영어를 교육한 공로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국민포장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1970년대 들어 성경공부와 신앙 양육을 위한 소그룹인 ‘순모임’이 점차 확대됐다. 나사렛 형제들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도 순모임을 가졌다. 1980년 정·재계 인사를 비롯해 군인과 언론인을 망라한 12명의 동료가 의기투합해 새로운 순모임을 만들었다.
마침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이 여의도의 한 아파트를 모임 공간으로 제공했다. 이곳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6시에 모여 2시간 동안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한 뒤 출근했다. 몇 명이 더 참여해 20명을 넘었고 ‘한국성서연구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열심히 참여했다. 몇년이 지나자 회원 중 장·차관과 군 장성이 나왔다. 이뿐 아니라 국회의원과 대사 교수 대통령비서실장과 주치의 등 각계 요직에서 큰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배출됐다.
비슷한 시기, 아내가 집에서 동네 주민과 함께하던 ‘어머니 순모임’도 있었다. 이게 소문이 났는지 어느 날 안양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재소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내는 이를 계기로 2019년까지 주말마다 재소자들을 만났다. 나도 수시로 따라가 메시지도 전하고 여러 일을 도왔다.
아내는 36년 동안이나 봉사를 하며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최장기수’다. 교도소에 갈 때마다 간식거리도 풍족하게 사 갔다. 한 교도관이 “그 돈이 어디서 나와요”라고 물었다고 했다. 아내가 “남편 것 훔쳐와요”라고 해 다 같이 웃었던 일화도 있다. 여러 교회 여전도회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줬다.
아내에게 한글을 배운 한 재소자가 “선생님 눈앞이 환해졌어요. 딴 세상 같아요”라고 인사할 때는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영어 시간에는 주기도문과 시편 23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무지개’를 암송하게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A라는 재소자의 어린 자녀가 늘 “아빠 어디 갔냐”고 묻자 아내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A씨가 출소 후 집에 가자 반갑게 안긴 자녀가 “아빠 영어 좀 해보라”고 보채자 잠시 당황하다 문득 교도소에서 외운 게 생각나 시편 23편과 무지개를 영어로 암송해 위기를 모면했다. 자녀는 “아빠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었다고 했다.
12년 전쯤 일이다. 반포교회 한 교인에게 연락이 왔다. 귀금속 관련 사업을 하는 교인인데 지난 밤 집에 강도가 들었다는 것이었다. 무서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갑자기 강도가 교회 달력을 보고 “반포교회 교인이냐”고 묻더란 것이었다. 그렇다고 하니 “김영숙 전도사 아느냐”고 재차 물어 그렇다고 하니 “당신 김 전도사 덕 본 줄 알라”며 조용히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아내는 재소자를 만날 때마다 “예수 믿고 다시는 ‘별 달 일’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날 밤 그 강도가 아내의 말을 회상하며 뉘우친 셈이었다.
우리는 모두 담벼락 위를 걷는 사람들이다. 어쩌다 잘못해서 담 안으로 떨어지면 재소자, ‘담 안의 사람’ 되는 것이고 밖으로 떨어지면 일반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나 마찬가지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역경의 열매] 두상달 (22) 향락의 카페 골목… 믿음의 형제들과 거리 정화 나서
목회자 등과 ‘우리 동네 기도회’ 결성
업소에 전도용 회보 돌리고 동네 청소
문 닫는 술집 대신 식당·편의점 입점
방배동 카페 골목에 각종 유흥업소가 가득하던 시절 모습.
1989년 음란과 퇴폐, 향락과 폭력이 지배하는 거리가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 시절 방배동 카페 골목이 그랬다.
500명이 넘는 ‘삐끼’들이 호객을 했고 수시로 범죄가 일어났다. 당시 방배동에 살던 동료 집에 강도가 들었던 일이 있었다. 동료 가족은 이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나와 또 다른 방배동 주민까지 믿음의 형제 3명이 모여 성시화 운동의 일환으로 동네를 변화시키기로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은 세상을 뒤집었는데 죄악에 밀려 믿는 사람이 이사를 하여서야 되겠냐”며 의기투합했다.
이사를 하려고 했던 사람은 당시 지검장이던 전용태 장로였다. 나머지는 나와 정정섭 전 기아대책기구 이사장이었다. 지역의 13개 교회 목사님도 초청해 함께 거리를 정화했다.
사실 목사님들의 고민도 컸다. 새벽기도 마치고 나오면 삐끼들이 다가와 “물 좋은 데 있다”며 유혹하는 게 다반사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모임의 이름을 ‘우리 동네 기도회’로 정했다. 청년들도 다수 참여했다. 매주 전도용 회보를 만들어 지역의 업소와 주민에게 나눠줬다. 주말 새벽이 되면 50여명이 빗자루를 들고나와 동네 청소도 했다.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구호를 외쳤다. 찬송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를 개사한 캠페인 송도 힘차게 불렀다. 점점 카페 골목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문을 닫는 술집이 생겼고 그 자리에 일반식당이나 의상점, 편의점이 대신 들어왔다.
90년 말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유흥업소들이 철퇴를 맞았다. 당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김승연 강력부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범죄와의 전쟁에 성과를 내야 하는데 방배동 카페 골목 정화 캠페인을 모델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장 검사님. 경찰이 단속 나오기 전 정보가 미리 셉니다. 구청과 경찰이 모두 한통속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평검사 한 명을 방배동 골목에 상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실제 이 일로 방배동 유흥가의 먹이사슬에 큰 균열이 생겼다.
KBS 방송에도 방배동의 상황이 소개됐다. 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국제 유가가 요동쳤다. 정부가 10시 이후 네온사인을 켜지 못하게 했고 심야 영업도 금지했다. 담배꽁초나 오물을 버리는 이들에게 벌금도 물렸다. 우리에게는 기쁜 일이 연속해서 일어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까페골목에 홍수가 났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던 곳이었다. 이 일로 지하에 있던 유흥업소들이 모두 침수됐고 결국 무더기 폐업으로 이어졌다. 업주들은 울상이었지만 우리는 장화를 신고 거리로 나와 싱글벙글 웃으면서 걸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결국, 방배동 골목에서 유흥과 향락을 자취를 감췄다. 이 운동은 2006년까지 지속했다.
교회가 가까이에 있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무력한 상태에 머문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주여. 지역교회들을 통해 범죄형 거리가 건전한 기독교 문화거리로 변하게 해 주소서”.
***[역경의 열매] 두상달 (23) 중동선교 37년… 잠자던 기독교인에 복음의 꽃 활짝
열사의 땅서 신앙생활 했던 한국청년들
귀국 후 ‘중동선교회’ 세우고 선교사 파송
초대 회장 맡아 25년간 선교의 문 두드려
중동선교회가 2015년 연세대 언더우드선교상 단체부문을 수상한 뒤 두상달 이사장과 관계자들이 연세대 루스채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장로님은 왜 ‘3D업종’만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청소년 사역과 중동선교, 교도소 사역 등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봉사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이슬람권 선교에 도전한 지 37년 됐다. 중동선교는 달걀로 바위 치는 격으로 힘들다. 그러나 누군가는 두드려야만 하는 절대적 사명이다. 나뿐 아니라 중동선교에 투신하겠다던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1970년대 20만명이 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열사의 땅에서 일했다. 그들 중 기독교인들이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했다. 이들이 귀국해 1984년 8월 마포 극동방송국에서 ‘중동선교회’를 창립했다.
원래 회장을 하기로 예정된 분이 계셨는데 갑자기 현장에서 내가 회장이 됐다. 극구 사양했지만 구레네 시몬처럼 무거운 짐을 지기로 했다. 1년만 봉사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게 ‘장기집권’을 했다.
목수는 집을 지으면 집을 떠나는 것이다. 계속 책임 있는 역할을 해 달라는 요청을 가까스로 설득하고 회장이 된 지 25년이 되던 해 조남홍 목사를 이사장으로 세운 뒤 물러났다. 지금은 명예이사장이다.
선교회는 100여명의 선교사를 중동으로 파송했다. 중동 선교사는 아무나 할 수 없다. 핍박과 추방, 심지어 죽음이 늘 도사리고 있다. 아랍어도 보통 어려운 언어가 아니다.
중동선교에 관여하면서 사담 후세인 정부의 초청을 받아 이라크를 두번이나 방문했었다. 95년과 2000년의 일이었다. 희한하게도 이라크가 크리스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경제 봉쇄로 피폐해진 나라의 참상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빌론과 갈대아우르, 니느웨성 등 수많은 기독교 유적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유적지만 해도 엄청난 자원이다. 거기에 석유나 가스 자원도 세계 2~3위다. 광활한 평야도 있다. 그런데도 잘못된 지도자 때문에 국가적 재앙에 빠진 게 이라크였다.
이라크 종교성 차관인 사미라와는 친구가 됐다. 그를 한국에 초청해 국회·국가조찬기도회에 함께 참여했다. 그의 집안은 도마가 살던 때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지만 명목상 신앙인이었다. 기도도 할 줄 몰랐다. 그와 함께 오산리기도원과 명성교회 새벽기도에도 갔다. 그런데 두 번째 이라크를 방문했을 때 그가 우리를 보자마자 “주여 주여”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기도하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중동선교가 어렵지만 이처럼 잠자던 기독교인을 깨우는 열매도 맺을 수 있다. 2002년에는 김상복 김명혁 목사님 등 여러분의 도움으로 이라크에 신학교도 개교했지만 정세 불안으로 운영이 중단됐다.
중동선교에는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까지 막을 수는 없다. 인터넷의 발달로 개방의 물결을 막을 수도 없다. 오랜 기도 덕분인지 지역에 따라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곳이 생기고 있다. 하나님의 계절을 어찌 막겠는가. 하나님이 여시면 닫을 수 없다.
중동에 복음의 장미꽃이 활짝 피고 생수의 강이 흐를 날을 믿음으로 바라본다. 무슬림은 적이 아니다. 인생의 안내자를 잘못 만난, 구원받아야 할 불쌍한 영혼들이다. “주님. 중동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해 주옵소서”.
***[역경의 열매] 두상달 (24) 굶어 죽는 생명 살리려 구슬땀… 도덕·투명·정직 강조
기아구제 위한 한국기아대책 설립에 기여
10년간 전국 다니며 아이들 구호 참여 호소
잉여와 결핍 이어주는 기구로 크게 성장
두상달(왼쪽 다섯 번째)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이사장과 기아대책 관계자 및 후원자들이 2014년 서울 종로 서울극장에서 열린 창립 25주년 행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제인조찬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경제계 어른들과 교제할 기회가 많아졌다.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님 소개로 1989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에 참여하게 됐다. 기아대책은 71년 미국에 설립된 국제 기독교 구호단체다.
최 회장님이 초대 이사장이었고 나는 창립 이사였다. 창립 때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이 원조를 받기만 했지 누굴 도와본 일이 없었다. 받는 규정은 있어도 해외를 돕는 규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구에는 70억명이 먹을 식량이 충분하다. 하지만 지구촌 한 모퉁이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생명이 굶어 죽고 있다. 한 통계에는 1년에 전 세계에서 1000만명 가까운 사람이 아사한다고 한다. 그중 75%가 5세 미만의 어린이라는 사실이 늘 안타깝다.
기구를 창립한 후 10여년 동안 나는 홍보를 위해 전국을 다녔다. 교회마다 찾아다니면서 기아현장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며 구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다녔다.
창립 초기 한 교회에서 설명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여성이 다가와 봉투를 건넸다. 안에는 낡은 5000원짜리 지폐가 들어있었다. 파출부로 일하며 지하 단칸방에 사는 집사님이라고 했다. 일당이 3만원도 되지 않는 분이었다. 봉투를 쥔 손이 떨렸다. 가슴이 찡하더니 이내 눈물이 흘렀다. 과부의 두 렙돈 보다 더 크고 귀한 돈이었다. 기증자들이 주시는 사랑을 천하보다 귀하게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날이었다. 구제는 돈이 많아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나는 창립자 윤남중 이사장의 뒤를 이어 이사장으로 6년 동안 봉사했다. 이사로 봉사했던 기간까지 합치면 25년 동안 섬겼다. 기아대책기구가 한 의료기관 인수에 관여하다 어려움을 겪으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사회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기구의 정체성과 비전을 함께 읽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도덕성과 투명성, 정직성은 NGO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돈을 모으는 게 기술이라면 잘 쓰는 것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명품 NGO’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최빈국에 가보면 문명의 역사를 과거로 되돌린 것만 같다. 하나 같이 비기독교 문화권이었다. 먹을 게 없는 이들의 일상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은 울 힘조차 없어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 파리가 덕지덕지 붙어도 쫓지도 못한다.
기아대책은 떡과 복음을 전하는 단체다. 생선만 주는 게 아니라 생선 잡는 방법도 가르쳐준다. 지역사회 개발을 돕는 공동체 비전(VOC)을 각 나라에서 실현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창립 15년 만에 연 예산이 1000억원을 돌파했다. 수많은 어린이가 고사리손으로 동전을 모아 보내줬다. 교회들의 기여도 큰 몫을 차지했다. 국민일보의 도움도 컸다. 전국 이사님들과 초기 직원이었던 이성민 캄보디아 선교사의 공로도 크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구제는 잉여와 결핍이 만나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사랑으로 가장 아름다운 공생 사역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25) 기독실업인회 중앙회장 맡아 변화 통한 성장 이뤄내
무리하게 추진 중인 센터건립 백지화
저항 심했지만 변화 위해 각고의 노력
점차 반등하기 시작 3년 연속 흑자로
두상달(왼쪽) 장로가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과 2016년 서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한국기독실업인회 신년하례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한국기독실업인회(CBMC)는 예수 믿는 사업가와 전문가들의 모임이다. 나는 오랫동안 CBMC 활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가끔 지회가 주최하는 VIP전도집회 강사로 선 일이 전부였다.
그러던 중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이 나를 이사로 추천해 주셨고 ‘CBMC 새서울지회’ 창립 때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열심히 활동하다 CBMC 중앙회장 제의를 받았다.
어떤 모임이든 자원해서 대표를 맡았던 기억이 없었다. 구레네 시몬처럼 떠밀려 맡았지만 책임을 맡으면 힘을 다해 섬겼다. CBMC 중앙회장도 그렇게 하게 됐다. 물론 아내가 많이 반대했다. 2~3개월 동안 서로 대화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2015년 CBMC 중앙회장이 됐다.
그동안 CBMC는 한국 교회와 더불어 크게 성장했다. 물론 많은 분들의 기도와 헌신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조직은 퇴보한다. 소니와 코닥, 노키아와 모토로라, 브리태니커 등의 부침이 그걸 말해준다. CBMC 회장이 되면서 변화를 통한 성장을 바랐다. 하지만 기득권층은 변화에 저항하는 법이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게 ‘CBMC 훈련센터 건립’의 발전적 방향 전환이었다. 제대로 된 타당성 조사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다 보니 훈련센터 건립이 벽에 부딪혔다. 무려 14년 동안 거기에 매달리면서 막대한 금액을 투입했지만 더 이상 추진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회원들의 공감도 적었다. 건축비는 물론 완공 후 유지비조차 준비돼 있지 않았다.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실에 근거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저항한다. 쉽지 않았지만 훈련센터는 건축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변화를 위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몇 사람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었다. 늘 미안한 생각을 한다.
내림세에 있던 CBMC는 점차 반등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재정이 들어왔지만 3년 연속 흑자를 냈다. 전국대회도 3년 동안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복음적인 일을 지원할 수도 있게 됐다.
나는 수많은 단체를 섬겼지만 회계 장부를 보거나 결재를 하지 않는다. 전결 위임하고 책임까지 전적으로 지도록 조치한다. CBMC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재정위원회에 일부 기금을 전적으로 위임 관리했지만 결과적으로 피해가 발생했다. 하지만 나는 재정위원회의 손실을 적절한 투자를 통해 보전했다. 손실을 본 금액을 되찾은 것뿐 아니라 원금의 1.4배까지 불렸다.
여러 기독교 행사를 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집회들이 때로 정체성을 잃고 목적이 모호해질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행사를 위한 행사가 많다는 뜻이다. 이 틀에서 벗어나 행사와 정치를 배제하면 그때야 비로소 복음이 보이는 법이다.
세상은 광속으로 바뀌고 있다. 종전에 해오던 형식이나 틀, 프로그램만 고집해서는 지속적인 성장은 물론 유지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다. 개인도 변해야 발전한다. 변하는 가정에도 행복이 있다. 변하는 단체에는 위기가 사라지고 결국 축복이 깃든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26) 민·군 화합의 장… “여러분은 예수 십자군” 사기 북돋워
훈련소 내 교회 건축비 모금 협조 요청에
CBMC 대회 육군 훈련소서 열기로 결정
내무 생활 체험하며 통 큰 기부 이어져
제44차 CMBC 한국대회 참석자들이 2017년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 연무대군인교회에서 팔을 들고 기도하고 있다.
2016년 초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훈련소에 6000석 교회를 짓는데 모금이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별 흥미 없이 시큰둥하게 듣다 매년 8만명이 세례를 받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돕기로 마음먹었다.
김장환 목사께 상의 드렸더니 추진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우선 육군훈련소에서 CBMC 한국대회를 열기로 추진했으나 반대가 많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임원회에서 2017년 44차 한국대회 장소를 육군훈련소로 정했다.
마침 CBMC 김수웅 명예회장이 한국대회 장소가 육군훈련소로 정해지면 1억원을 내겠다며 힘을 실어줬다. 박래창 회장도 앞장섰고 그 외 뜻있는 여러분이 거금을 약정해 줬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오랫동안 대회를 열었던 컨벤션이나 호텔이 아닌 군대 내무반에서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훈련소 목욕탕을 기업체 대표 부인들이 사용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CBMC는 사명과 비전 공동체라고 설득했다. 1년에 12만명의 젊은이가 입소해 8만명이 세례를 받는데 이런 황금어장이자 가두리 어장이 어디 있겠느냐며 설득했다. 대부분은 공감하고 따라줬다.
장소가 결정된 뒤 난관이 생겼다. 대회 기간이 8월 중순이라 더위가 큰 문제였다. 불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300억원의 예산을 배정해 훈련소 내무반에 에어컨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귀를 의심했다. 할렐루야를 외쳤다. 에어컨 설치는 대회 직전 마무리됐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국민일보에 전면광고를 냈다. “세대절벽, 교인절벽, 차세대가 답이다”라는 문구를 크게 썼다. 대회 며칠 전 등록도 마감했다. 그날 현장에 왔다 돌아간 사람도 많았다.
훈련소 영내에서 대회를 연 건 파격적인 일이었고 사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서도 없는 일이었다. 민간인이 영내 생활을 체험하면서 군을 이해하고 민·군이 협력할 수 있는 화합의 장이었다.
참석자들에게 ‘군번줄’도 제공했다. 저녁 9시면 현역 군인이 취침 점호를 했다. 내무반 안에서 군복도 입어 볼 수 있도록 했다. 대회 중간에 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나는 개회사에서 “여러분은 예수 십자군이다. 중간에 돌아가면 탈영병으로 간주해 수배하겠다”고 해 큰 박수를 받았다.
CBMC 회원과 군인 등 5000여명이 어우러져 실로암 찬양을 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런데 첫 시간이 끝나자 쪽지가 전달됐다. 대회에 처음으로 초대된 어떤 분이 건축헌금 1억원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김귀열 부회장이 5억원을 헌금하겠다고 했다. 회원들의 정성이 모여 16억원이 모였다. 서상국·구재서 소장과 군선교연합회 관계자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한다.
44차 CBMC 한국대회는 역대 최고의 대회이자 사명 공동체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대회였다. 지금도 집회 장면을 회상하면 큰 감동과 울림이 밀려온다. “교인절벽, 세대절벽을 맞이한 한국교회에 차세대가 답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27) 북, 최신 유행 청바지 받아보곤 “우리가 거지냐” 항의
계속된 흉년으로 식량과 옷 고갈된 북한에
여러 단체서 기증된 옷과 간장 실어 보내
교류 통해 ‘통일의 묘약’ 바라는 마음 전달
‘북한 동포 겨울나기 사랑의 옷 보내기 운동본부’ 관계자들이 거리에서 옷 보내기 운동을 알리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97년 10월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전국에서 보내온 옷을 컨테이너에 싣는 모습.
우리나라도 6·25 전쟁 후 구호물자를 받아 연명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던 가난한 시절을 살았다. 1990년대 북한은 계속되는 흉년으로 식량뿐 아니라 입을 옷이 없어 혹한을 피할 길이 없었다. 비닐과 나일론을 섞어 만든 ‘비날론’이라는 섬유가 있었는데 이마저도 전력난으로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생산이 중단됐다.
우리나라는 옷장을 열어보면 유행이 지났거나 치수가 맞지 않은 옷이 몇 벌씩 있다. 이런 옷을 폐기하거나 소각하려면 공해는 물론이고 비용까지 발생한다. 이런 옷을 모아 북한에 보내면 겨울을 나는 데 소중한 방한 물품이 된다. 북한에 옷 보내기 운동이 시작된 이유다.
97년 10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앞장서서 기독교와 불교 등 6대 종단과 28개 시민단체가 ‘북한 동포 겨울나기 사랑의 옷 보내기 운동본부’를 출범했다. 나는 본부장을 맡았다.
많은 교회와 단체가 호응했다. 마침 나는 삼성물산의 한 의류 브랜드의 대형 할인매장도 운영하고 있어 그 관계로 삼성물산이 컨테이너 3개 분량에 해당하는 의류 3만5000점을 기증해 줬다.
남북한은 정치적으로 수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옷을 통해 전하는 사랑의 메아리가 저들의 마음을 녹여 통일의 묘약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하지만 북한은 절대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다 나진항을 통해 한 컨테이너 분량의 옷을 보냈는데 그걸 받은 뒤 저들의 마음이 바뀌었다. 옷이 너무 좋았던 것이었다.
결국 40피트 길이의 컨테이너 37개에 의류 120만벌을 실어 보냈다. 간장도 한 컨테이너 보냈다. 서울 사랑의교회는 새 옷을 사 주머니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쪽지를 넣었다. 무채색의 칙칙한 색깔의 옷만 입다가 화려한 색상의 좋은 재질의 옷들은 그 자체로 저들에게는 문화충격이었다.
북한에 대표단이 갔을 때 큰 항의가 있었다. “우리를 뭐로 아느냐. 우리가 거지냐”는 것이었다. 보낸 옷 중 청바지가 있었는데 무릎이 찢어져 있거나 바지 끝단이 너덜너덜해진 옷들이 문제였다. 젊은이들이 멋을 내려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인데 그걸 몰랐던 것이었다. “젊은이들이 일부러 그렇게 해서 입는다”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청바지를 염색한 뒤 작업복으로 만들면서 겨우 수습했다.
한번은 5개 은행 노조위원장들과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나는 단장으로 이들을 인솔했다. 농협에서 2억원을 들여 젖염소 착유기를 기증했는데 일정 중 이 농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기계가 작동하지 않았다. 전력난 때문이었다. 그걸 본 한국 방문단 모두가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심지어 묘향산 지하에 있는 김일성기념관을 구경하던 중 정전이 돼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탈출했던 일도 있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북한을 방문하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다. 북한의 모든 문제는 체제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무조건 지원하는 게 해답이 아니라고 생각해 대북사업을 접었다. 공산주의는 불행과 가난을 나누어주는 결정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주여. 총과 칼을 쳐 보습을 만들고 복음으로 한반도가 하나 되게 해 주옵소서.”
***[역경의 열매] 두상달 (28) “나 교회 다니기 시작했어” 형수 말에 감격의 눈물
어린 시절 토속신앙 부모 아래서 성장
나로 인해 집안에 복음의 씨앗 심어져
제사 지내던 형 내외까지 모두 복음화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 부부의 세 자녀와 며느리, 사위를 비롯해 손자·손녀 등 3대가 한 자리에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내를 만나기 전 ‘김영숙’이라는 여인과 데이트를 했었다. 그러다 동명이인인 아내를 만나 연애를 했다. 결혼을 약속한 뒤 청첩장이 나왔는데 그걸 보고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지인들이 청첩장 받으면 내가 전에 만나던 ‘김영숙’인줄 알겠네.” 무심결에 한 말이었는데 큰 실수였다. 그날 찍혀서 평생 구박받으며 살고 있다.
1969년 3월 22일 결혼식이 끝나고 호텔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예배 순서를 꺼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고 찬송을 부른 뒤 함께 기도했다. 믿음이 충만해서가 아니었다. 처음 하는 결혼이었고 으레 이렇게 하는 거로 알았다.
어린 시절은 토속신앙을 믿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큰 형님과 형수가 차례와 제사를 열심히 드렸다.
하지만 나로 인해 우리 집안에 복음의 씨앗이 심겼고 점점 복음화돼 갔지만, 형수님은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제사를 지낼 때면 막내라 발언권이 없었다. 그러다 40여년 전 어느 추석 때 계속 끌려다닐 수 없어 형수님이 차린 제사상을 안방으로 옮긴 뒤 거실에서 온 가족이 예배를 드렸다. 형수님은 너무 화가 나 다른 방에서 울고 계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배드렸고 형수님을 위해 기도했다.
몇 달이 지난 연말, 형님 내외 분이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형수가 “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어. 새벽기도회도 다닌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변화한 형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새해 첫날 아침 온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한 집안이 완전 복음화가 이뤄진 감사와 감격의 메시지를 전할 때 끓어 오르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목이 메 찬송가를 부를 수 없었다. 온 가족이 울었다. 기도는 결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단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가족에게 미숙한 사람이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다 큰 자식들에게 여러 번 사과했던 일도 있다. 그래도 새벽마다 곤히 자는 사춘기 아이들을 껴안고 20~30초 정도 기도해 줬다. 기도의 품에서 자란 아이는 결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이런 일화도 있다. 수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다. 한번은 우리 부부가 외출했다 돌아오니 막내딸이 “아빠 친구가 왔다 갔어. 보석이랑 귀중품이 어디 있느냐 묻길래 다 알려줬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도둑인 든 것이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자 뭔가 잘못했다는 걸 느낀 아이가 크게 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는 아이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 집에 귀중품이 있었더라면 오히려 아이가 어떤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우리 집에는 보석이 없다. 가족과 신앙이라는 보석만 남았을 뿐이다.
약사인 아내는 40세가 넘어 신학을 공부했고 60세가 넘어 가정 회복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창 공부할 때 친구들이 “그 나이가 돼 뭐 하려고 공부하냐”고 핀잔하면 아내는 “남 주려고 그런다”고 답했다. 실제로 환갑 넘어 받은 박사학위를 15년 넘게 사용하고 있다. 늦은 나이는 없다. 나는 곧 ‘바보야. 결론은 후반전이야’라는 제목의 책을 낸다. 경기도 인생도 후반전이 중요하다. 연극도 클라이맥스가 중요한 법이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29) 기도하는 민족에 미래·희망 있어… 지도자 복음화에 노력
대통령조찬기도회로 시작했던 게 효시
그 후 국회조찬→ 국가조찬으로 바뀌어
미국 이어 세계 2번째 규모로 크게 성장
두상달 장로가 2019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51회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2019년 2월 초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 국가조찬기도회에 몇몇 분과 함께 참석했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평신도가 거의 모든 것을 주관했다. 160여개국에서 온 대표단을 비롯해 3500여명이 기도회 장소에 비좁게 앉았다.
테이블마다 여야 국회의원이 1~2명씩 동석했다. 기도회 사회는 여야 상원의원이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했다. 1박 2일 동안 진행된 기도회에 각계 지도자들의 간증과 특송, 각국 지도자들의 간증이 계속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간증 메시지가 끝나자 사회를 보던 여야 상원의원이 대통령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는 1960년 3월 8일 옛 조선호텔에서 대통령조찬기도회로 시작했던 게 효시다. 미국보다 9년 늦게 시작됐지만, 아시아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시작됐다.
이후 국회조찬기도회로 모였다.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자는 의견이 나와 김종필씨를 통해 대통령의 의사를 타진했다. 대통령도 기쁘게 참석하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도회 직전 긴급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셨다.
여야 간사로 김종필, 김영삼 의원이 봉사했다. 기도회 참석자 중에는 여야 국회의원과 이효상 국회의장, 정일권 국무총리, 주한 미국 대사를 비롯해 해외 사절과 삼부 요인 등 267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1회부터 3회까지 설교는 김준곤 목사님이 전하셨다. 이때 나사렛 형제들이 모두 출동했다. 비상이었다. 퇴근한 뒤 철야기도를 하며 기도회 준비를 도왔다. 윤남중 목사님이 국회조찬기도회의 실무를 맡아 20년 동안 봉사하셨다. 그 후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사무국이 14년 동안 조찬기도회 업무를 도왔고 2003년 법인으로 바뀌면서 법인 사무국을 통해 업무를 관장한다.
70년대 중반에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53회를 맞이한 국가조찬기도회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당을 초월해 국가 지도자들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할 뿐 아니라 국가의 안정과 번영, 발전을 위해 기도하는 선교단체다. 이 모임 역시 영적 스승이신 김준곤 목사님이 시작했고 초창기 창립 정신을 생각해 떠밀리듯 회장을 맡았다.
내가 봉사했던 또 하나의 단체가 있다. 사단법인 인간개발원이다. 나는 이곳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단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포럼으로 롯데호텔에서 47년 동안 계속 모이고 있다.
역대 대통령을 비롯해 기업 총수와 대학 총장, 사회 지도급 인사 등 우리나라의 지도자 중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인문학의 발전은 물론 첨단 과학기술 정보와 산업 발전, 경제 부흥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 다음세대를 이끌 대학생을 세우는 것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도하는 민족의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한 법이다. 다음 선거에 표만 바라는 패거리 정치꾼이 아니라 나라를 미래를 생각하고 애국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많은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겠다.
***[역경의 열매] 두상달 (30·끝)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 원칙과 기본 철저히 지켜
바쁜 것을 핑계로 주님의 일 하지 않고
남는 시간에 봉사하려면 아무 것도 못 해
내 자리·유익 내려놓으면 자유로워져
두상달 장로와 김영숙 권사가 지난해 봄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자택 마당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영화 ‘박하사탕’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첫사랑으로부터 배반당했고 아내에게도 이혼당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한 뒤 인생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철로 위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마주 보고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하지만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연한 기회에 양수리와 가까운 문호리에 주택을 마련했다. 그동안 바빠서 잘 이용하지 못했지만, 코로나19가 온 뒤 자주 찾는다. 계절 따라 피는 꽃이며 자연이 너무 아름답다. 물과 바람, 새와 벌레 소리를 종일 들을 수 있다.
이렇게 좋은 걸 모르고 살았다. 아니 못 보고 놓치고 살았다. 자연 속에 살며 나를 찾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이 아름다움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든다. 무엇 때문에 그리 바빴고 시간에 쫓기며 살아왔을까.
청명한 가을 하늘, 허공을 바라본다. 참 좋다. 문호리에 와서 요즘도 일주일에 1~2회 칼럼을 쓰고 있다. 여전히 사업에서 은퇴하지 못했다. 몇 개의 단체도 돕고 있다.
어떤 사람은 내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어떻게 시간을 내느냐고 묻는다. 바쁘게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 바쁜 게 없다.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 일 하고 남은 여분의 시간이 아니다. 한가한 시간에 봉사하겠다면 평생 아무것도 못 한다.
나는 허물이 많다. 함정과 유혹도 많았다. 그때마다 말씀을 읽고 믿음의 동료들과 만남을 통해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집회를 준비하다 보면 항상 강사 섭외로 고민한다. 집회가 시작되면 ‘사회자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 ‘강사를 잘 세웠구나’ ‘잘못 세웠네’ 등 평가를 하는 나쁜 타성이 생겼다. 마음속으로라도 늘 선별된 언어를 써야 한다.
힘들 때 같이 일해 보면 일꾼인지 훼방꾼인지 구분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훼방꾼이다. 하나님의 곳간에 너무 큰 빨대를 꽂고 있다.
나는 한 단체의 책임을 맡으면 창립 목적이나 정체성을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원칙과 기본을 지켰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거나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면 꼭 고쳤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는 것뿐이다. 또한, 내 자리와 내 유익을 내려놓으려고 애썼다. 내려놓으면 자유로움이 있다.
공금을 무섭게 알았다. 공금은 공돈이 아니라 독약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사업을 하기 때문에 많은 단체를 섬기면서도 단돈 10만원, 아니 만원도 쓴 일이 없다. 공무로 세계 어디를 가도 항공비와 호텔 등 일체 비용을 자비로 부담했다.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니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주를 위해 순교하는 건 어렵다. 그러나 평생 변함없이 주를 위해 사는 건 더욱 귀하다. 사나 죽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것임을 날마다 고백하며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길 바란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레슨 받은 복음의 예술가가 돼 민족과 열방을 향해 그 감격을 전하리라. “홀연히 오시는 주님. 내가 무엇을 하다 주님을 뵈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