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처음이야 / 최미숙
누구나 부모는 처음이다. 아이만 낳으면 우리네 엄마, 아버지처럼 부모 노릇이 그냥 되는 줄 알았다. 스물 다섯에 결혼해 아이 셋을 낳았다. 부모 교육을 따로 받지도 않았고 육아 도서 한 권에 의지해 실수가 많았다. 아이를 키울수록 지혜가 는다지만 경우의 수가 많아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큰애가 가장 큰 희생양이다. 육아가 어려운 것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괜찮아’가 통하지 않는다. 내 실수가 아이 성장의 일부분이 되기 때문이다.
1985년, 시아버님이 준 이층 주택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방 세 개, 거실, 부엌, 화장실이 있는 일층은 우리가, 좁은 방 두 개가 있는 이층은 다른 신혼부부가 사용했다. 마당에는 창고, 바깥 화장실, 보일러실이 있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연탄보일러를 사용할 때라 남편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현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 연탄불을 죽이기 일쑤였다. 또 버스 정류장이 멀고 자가용도 없어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택시 한 대 잡는 것도 애를 먹었다. 아이 둘 데리고 손을 들면 그냥 가 버린다. 이곳에서 딸과 아들을 낳아 큰딸이 다섯 살, 둘째가 세 살 될 때까지 살았다.
마침 순천에 첫 민간 아파트를 분양했다. 경쟁률이 센 편이었는데 당첨됐다. 주택을 팔고 이사하기로 했다.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아파트를 보니 빨리 새집으로 가고 싶었다. 드디어 1992년 8월 기다리던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전세가 아닌 내 집이었지만 새집으로 옮긴다니 설렜다. 침대, 커튼, 아이 책상만 사고, 웬만한 것은 그냥 쓰기로 했다. 지금은 청소 업체에게 맡기면 되지만 그때는 없었다. 우리가 직접 하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두 아이를 맡기러 시어머니에게 갔다. 큰동서가 와 있었다.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다고 해 왔다며 큰 찜통에 곰국을 끓였다. 잘됐다 싶어 아이를 부탁하고 고무장갑, 걸레, 수세미, 세제, 비, 쓰레받기를 챙겨 아파트로 갔다.
새 아파트는 입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구가 없어서인지 넓었다.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찔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청소를 시작했다. 몇 번을 쓸고 닦아도 한없이 먼지가 나왔다. 붙박이장 구석구석까지 닦고 나니 몸이 녹초가 됐다. 남편과 점심을 먹고 다시 어머니 집으로 갔다.
후련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부엌 바닥에 소주병이랑 그릇들이 널려 있다. 어머니랑 형님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구나!’ 불길한 생각에 거실로 뛰었다. 다섯 살 딸이 놀란 얼굴로 “엄마, 주엽이가 곰국에 데어 할머니랑 큰엄마가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라고 말한다. ‘펄펄 끓었을 텐데!’ 눈 앞이 캄캄했다.
남편과 밖으로 뛰어나가 택시를 잡았다. 의자에 앉아 몸부림치며 소리 내어 울었다. 기사님이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남편은 차분하게 설명한다. 빨리 가자며 재촉했다. 시청 옆 병원까지 채 십 분도 걸리지 않는데 천 리 길이다. 이런저런 상상으로 미칠 것 같았다. 응급실로 냅다 뛰었다.
아들은 맨 몸으로 얼굴과 팔은 흰 붕대를 감고, 왼쪽 머리 앞부분엔 링거를 꽂고 있다. 주렁주렁 단 장비가 더 충격이었다. 어머님과 형님도 많이 놀랐던지 정신이 나간 얼굴이다. 나는 발을 동동거리며 병원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울었다. 남편은 진정하라는데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체면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어떠냐고 물었다. 걱정 말라며 치료하면 괜찮다고 위로한다. 어머님이야 몸이 아파 누웠다 치더라도 형님이 원망스러웠다. 내 부주의로 이런 일이 생겼는데 누구를 탓할 것인가? 다친 상처야 새살이 돋으면 되지만, 덴 흉은 흉측하게 남는다. 약 기운 때문인지 아들은 잠이 들었다. 쳐다보고 있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어머님은 큰방 침대에, 형님은 작은방에 누워 있느라 아들이 부엌 쪽으로 가는 걸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가 나서 가 보니 펄펄 끓는 국물이 넘쳐 아들 왼쪽 머리 위부터 팔과 배 위까지 덮쳤다고 한다. 소주를 들이붓고 병원으로 달려왔단다.
‘많이 데었으면 어쩌지?’ 상처를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소독할 때 보니 얼굴과 팔보다 왼쪽 가슴 아래로 범위가 넓었다. 다행히 방학이 되어 아이를 돌볼 수 있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상처가 곪을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날마다 소독하고 시원하게 했더니 딱지가 생겨 꼬들꼬들했다. 비로소 한숨 돌렸다.
다행히 좋아져 계획했던 날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얼굴과 팔은 희미하게, 왼쪽 가슴 아래는 선명하게 큰 흉이 생겼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라 여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쭈삣 선다.
작년 10월. 결혼하기 전 큰아들에게 흉이 어떤지 보자고 했다. 다행히 얼굴과 팔은 안 보이고 가슴 아래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엷었다.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또 울먹였다. 아들은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지나간 일이라 쉽게 말하지만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많이 겪는다. 엄마가 처음이다 보니 더 어렵다. 정해진 답도 없다.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보이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그래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부모로서 더 단단하고 성숙해졌다. 손자 녀석에겐 그런 실수 안 할 자신 있다. 실은 그것도 교만이다. 예기치 않게 생기는 경우 수를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