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동준비 / 정선례
농협에서 김장 배추 모종이 나왔으니 회관에 찾아가라는 8월 중순쯤 김장배추 모종 심을시기에 이장님의 방송 내용이다. “아유 축사 일 하기도 바쁜데 왜 또 나온 거야 언제 심으라고", 혼자 두런거리며 회관에서 105구 한 판을 찾아와 삽으로 두둑을 만들어 검정 멀칭을 씌운 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드물게 심었다. 우리 지역은 몇 년 전부터 농협 육묘장에서 길러낸 김장 배추 모종을 조합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 사료작물 뿌리려고 퇴비를 듬뿍 넣고 갈아놓은 밭이라 그런지 나날이 초록이 짙어지고 속이 차오른다. 비 온다는 예보에 서둘러 배추와 배추 사이 중간쯤 요소를 묻어주었다. 땅속 깊이 뻗은 뿌리에 영양분이 충분했는지 가을로 접어들고서부터는 평창이나 해남에서 배추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분들의 배추처럼 실하게 자란다.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며 벌레를 잡고 있노라면 지나가는 이들이 배추 농사 잘 지었다며 말을 건넨다. 올해는 뿌리혹병이나 무름병도 없어서 좋다고 했는데 수확기에 접어든 어느 날부터인가 진딧물이 배춧잎 끝에 생기더니 까맣게 붙는다.
김장철이다. 해마다 품앗이로 하는 마을 언니 집 창고에서 하는데 하나도 춥지 않고 포근해서 이렇게 따뜻할 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바빠졌다. 추울수록 배추에 단맛이 들지만 날이 추워질까 봐 받아놓은 김장 날을 일주일 앞당겨 밭에 가서 배추 밑동을 도려내 진딧물 있는 이파리를 떼어 손질해 놓고 돌아와 저녁 축사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뒷날 자고 일어났더니 기온이 뚝 떨어져 뉴스는 앞다퉈 한파주의를 보도하고 노약자는 외출 자제와 수도계량기 동파 주의하라는 안전 안내 문자가 연이어 들어온다. 며칠 뒀다 해도 괜찮으니 날 풀리면 하라는 남편의 성화를 뒤로 하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얼기라도 하면 어쩌나 염려되어 모자에 목도리까지 두르고 서둘러 밭에 가서 트럭에 배추를 싣고 왔더니 남편이 가마솥에 한가득 물을 데워 놓았다. 손마디 굵어지는 마누라가 조금 안쓰럽게 생각 되었나보다.
수돗가에 배추를 쌓아 놓고 세어보니 60포기다. 한 통이 얼추 3kg은 될 것 같다. 절반으로 갈랐더니 노란 배춧속이 옹골지게 꽉 들어차서 실하다. 절반으로 가른 반쪽 배추 머리에 살짝 칼집을 낸다. 오후 2시에 큰 통에 팔팔 끓은 물에 찬물을 섞어 20kg 소금 반가마니를 붓고 녹여 배추 한 줄 놓고 바가지로 골고루 뿌린 후 자른 부위에 소금 한 주먹씩 가만히 얹어 놓는 걸 반복하니 절이기가 식은 죽 먹기처럼 수월하다. 저녁 8시쯤 위에 있는 배추와 밑에 있는 배추를 뒤집어줘야 골고루 절여진다. 맏며느리로 살아온 지난한 삶이 아득하지만, 덕분에 살림 노하우가 축적되었는지 이럴 때 발휘되는 것 같다. 17시간 동안 절인 배추를 건져서 한나절 짠물을 뺀 후 미리 통에 가득 받아놓은 물에 잘 절여진 배추 밑동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좌우로 흔들어 네 번 씻는다. 여러벌 씻는 사이 짠기도 빠지고 흙이며 아이손가락만한 벌레나 진딧물이 씻긴다. 빠레트위에 모기장을 깐 후 차곡차곡 쌓아 비닐을 덮고 고무대야에 물을 받아 눌러 물이 잘 빠지게 한다. 김치통도 전부 꺼내 씻어 엎어놓아야 물기가 마른다.
그 다음에는 육수에 들어가는 재료는 먼저 가마솥에 무 듬뿍 넣고 미리 끓여낸 물에 통황태, 황태 머리, 말린 새우, 건표고, 대추, 디포리를 넣고 푹 삶다가 다시마를 넣고 30분 정도 더 끓인다. 국물이 좀 식으면 바구니에 건더기를 건져내고 미리 불려놓은 찹쌀을 넣고 불을 때면서 커다란 난무 주걱으로 자주 저어야 눌어붙지 않는다. 잠시 방심하면 금방 솥 바닥에 죽이 눌러 붙어 벼르고 있으면서 저어야 실수가 없다. 쌀알이 충분히 익으면 잔불에 푹 퍼지도록 놔두고 가끔 저어준다. 찹쌀죽은 묵직하게 쒀야 다른 재료와 잘 섞인다.
물이 빠지는 동안 김칫소에 들어갈 양념 재료를 배추 양에 알맞게 눈대중으로 가늠해서 준비해야 한다. 마늘은 일주일 전에 까서 씻어 물기 말린 후 냉장 보관 해야 하고 잘 삭은 멸치젓과 농협에서 우리 면 마을별로 단체로 주문한 새우젓을 갈지 않고 바로 넣어야 한다. 가을에 미리 사다 냉동실에 넣어둔 생새우, 마늘, 생강, 사과, 손질해서 불린 청각을 갈아 놓고 재래종 홍갓, 미나리, 쪽파, 대파는 곱게 채를 썰어 식은 찹쌀죽에 고춧가루 등 재료를 큰 통에 전부 넣고 버무려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덮어 놓는다. 이때 주의할 것은 생강은 많이 넣으면 김치가 쓴 맛이 나기 때문에 재래종 생강을 구입 조금만 넣어야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잠이 많아 어머니가 아침마다 몇 번을 깨워야 일어나곤 했다.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해 얼추 마무리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이날은 정신 바짝 차려 알람을 맞춰놨다. 농촌에서는 일과가 이른 시간에 시작되기에 공동으로 하는 일은 그들과 똑같이 부지런히 움직이어야 흉이 잡히지 않을뿐더러 일도 빨리 마무리가 된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축사 일을 하고 막 씻고 나왔더니 벌써 두 분이 걸어서 오고 고모님도 뒤이어 들어오신다.
김장 전용 긴 탁자에 비닐을 깔아 양념 재료 준비할 때부터 도와주셨던 세 분의 여인들이 둘러서서 배추 겉 부분부터 한 잎씩 가닥가닥 비벼 겉잎 두 장으로 감싸 단정하게 김치통에 차곡차곡 중간까지 담고 굵직하게 썰어 미리 절여 물기를 뺀 무 섞박지를 한 줄 넣고 마저 배추김치를 채운다. 통에 넣을 때는 10분의 8 정도만 채우고 나머지는 미리 준비해놓은 우거지를 덮고 그 위에 비닐로 한 번 더 덮어주어야 공기가 차단되어 오래 두고 먹어도 하얗게 골마지가 생기지 않는다. 글로 읽기에는 김장하는 절차가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해보면 보기보다 수월하다. 김치 비비는 날은 주인은 주로 심부름을 하고 밥을 준비한다. 수시로 통을 옆에 갖다놔야 하고 채워진 통은 내려서 겉에 고춧가루 묻은 부위 닦아야 하는 등 같이 비비지는 못한다. 미리 가마솥에 통삼겹살 돼지고기를 넣고 된장, 대파, 강황 가루, 생강, 마늘을 넣고 장작불을 지펴 삶아놓고 이날만큼은 잡곡밥 아닌 흰 쌀밥을 고슬하게 지어야 맛있다. 배춧속을 다 넣고 남은 양념으로 총각김치까지 버무린 후 잘 삶아진 수육에 갓 버무린 김치 찢어 통깨 듬뿍 뿌려 큰 접시에 내놓았다. 고춧가루가 칼칼하니, 단맛이 난다며 김치로 수육을 싸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정겹다.
지금 먹어서 간이 딱 맞으면 내년 여름까지 두면 맛이 덜하고 너무 짜면 건강에 해롭다. 여름과 가을에 비가 적게 와서인지 올해 배추는 유난히 달고 맛있어 어느 해보다 간도 적당하게 되어 성공이다. 시골에서는 김장을 7, 80포기는 기본이고 많게는 150포기 정도 하는 집도 있다. 농촌 일이 전부 몸으로 하는 일이고 김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제는 힘들어서 못 하겠어, 내년에는 20포기만 해야겠어요.” 내 말에 남편과 여인들이 “해마다 그 말 듣는다며 내년 돼 봐야지” 하며 안 믿는 눈치다. 먼저 먹을 김치는 생굴과 섞어서 담아 표시해두었다. 통에 담은 김치는 전부 저온저장고에 넣고 택배 보낼 박스는 따로 포장한 후에 만세 삼창을 외쳤더니 귀엽다며 김장 도와주신 분들이 웃는다.
저온저장고에 그득 쌓아놓은 김치통을 보니 든든하고 행복하다. 사람 사는 일이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한번 경험했다. 오후에는 단체로 읍내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도 밀어주고 한증막, 찜질방 오가며 김장의 고단함를 푼다. 자주 가는 속옷 가게에 들러 따뜻한 버선 두 켤레씩 안겨 드렸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 아닐까 생각하니 3일간의 김장하기의 피로가 사라지는 듯하다. 방아 찧어 쌀도 그득 있고 나무도 제재소에서 두 둥치 가져다 쌓아놨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 더군다나 김장 김치도 통마다 채워 저온저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여러 날 눈이 내려 고립되어도 상관없으니 부러울게 없는 계절이다.
나를 돌아본다. 지난 시절 가족과 주변을 위해 분주하게 시간을 쓰느라 나만을 위한 시간을 쓰는 일에는 늘 뒷전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 돌보는 일에도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시도해봐야겠다. 한 해의 끝자락 겨울의 길목에서 호랑이해 연초에 세웠던 계획들을 잘 실천하였는지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며 스스로 묻는다. 허리사이즈와 커피 줄이기는 작심삼일로 그쳤고 말하기보다 듣는일에 열중하기는 습관이 안되어 지키지 못했고 저축은 거의 하지 못했다. 또 하나 외유내강 실천하기는 그 반대였으니 한심하다. 그나마 부지런한 글쓰기는 문학관에서 시집 동인지가 두 권 군립도서관에서 수필 동인지 한 권 나와서 면목이 선다. 내년 봄까지 농한기라 축사 일 하며 틈틈이 글쓰기에 전념해서 내년에는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도록 훈련해야겠다. 남편이 여름에 우시장에서 다쳐서 병원 생활을 하는 시련이 찾아와 둘이 할 일을 혼자 해내느라 어느 해보다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바라건대 내년에는 내 마음이 고요하고 미소 짓는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다가오는 2023년 토끼띠해가 설렌다.
첫댓글 벌써 김장하셨다니 부지런도 하시네요. 전 열심히 마늘 까고 있는데.
힘든 김장 준비 과정보다 맛있는 김치에 수육,
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시작이 반이라서 처음 맘 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주부들에게 김장은 일년 농사라고 할 수 있지요.
김장을 끝냈으니 월동 준비가 다 되셨네요. 김장 김치가 맛있을 것 같아요. 바라시는 대로 내년에는 원하시는 그런 시간이 오겠지요?
선생님 댓글에서 힌트 얻어 교수님이 내 주신 글감에 더 적절할 것 같아
제목을 '김장'에서 '월동 준비'로 바꿨어요. 고맙습니다.
글을 읽으며, 김장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는 것 같습니다. 생김치에 막 삶아 건진 따뜻한 돼지고기는 입 안에 고인 침 삼키는 걸로 대신 합니다.
김치 한 보시기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정성과 힘을 쏟는지 다시 느낍니다. 올해도 김장해서 보내 주신 분께 더 감사하며 먹어야겠습니다.
근처에 살면 선생님께도 한 접시 갖다 드리고 싶어요.
나눔의 기쁨이 너무 커서 아마 내년에도 또 이만큼 할 것 같습니다.
김장은 정성 그 자체라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정성을 다해 담그는 일이라 국물도 버리면 안 됩니다. 하하
생김치 생각하면 침이 꼴깍 넘어가고 배가 고파옵니다. 오늘은 너무 생각나 손위 형님께 전화해 한 쪽만 얻어 먹었습니다. 2023년엔 원하시는 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종강모임 오시는지 명단 확인했는데 못 오시네요.
한 포기 가지고 나가려 했는데 아쉬워요.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와! 감장 담그는 데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네요. 지금은 어머니가 아프셔서 김장 하지 않는데, 정 선생님의 글로 그리움을 대신해야겠어요. 종강 모임에서 뵙겠습니다.
와, 이렇게 들어가는 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30년 간 엄마가 담아 주셨는데 이제는 손 큰 둘째시누이가 담아서 보냅니다.
먹을 때마다 고마워해야 되겠네요.
지금은 어머니 김치를 먹고 있지만 먼 훗날을 위해 정선생님 김장 레시피를 따로 간직해서 저도 한번 도전해 볼까 싶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절로 입니다.
그렇게 김장을 많이 하시네요. 올해는 진딧물이 심해서 나도 애를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