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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동행하는 포도원의 노래. 主と共に歩むぶどう畑の歌。(2026년 10월 4일 주일예배)
본문: 이사야서 5장 1절~7절
1 내가 사랑하는 이에게 노래를 해 주겠네. 그가 가꾸는 포도원을 노래하겠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기름진 언덕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 내고, 아주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한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거기에 포도주 짜는 곳도 파 놓고,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뿐이었다네. 3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4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를 너희에게 말하겠다. 울타리를 걷어치워서, 그 밭을 못쓰게 만들고, 담을 허물어서 아무나 그 밭을 짓밟게 하겠다. 6 내가 그 밭을 황무지로 만들겠다. 가지치기도 못하게 하고 북주기도 못하게 하여,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만 자라나게 하겠다. 내가 또한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겠다." 7 이스라엘은 만군의 주님의 포도원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1わたしは歌おう、わたしの愛する者のために そのぶどう畑の愛の歌を。わたしの愛する者は、肥沃な丘に ぶどう畑を持っていた。2よく耕して石を除き、良いぶどうを植えた。その真ん中に見張りの塔を立て、酒ぶねを掘り良いぶどうが実るのを待った。しかし、実ったのは酸っぱいぶどうであった。3さあ、エルサレムに住む人、ユダの人よ わたしとわたしのぶどう畑の間を裁いてみよ。4わたしがぶどう畑のためになすべきことで 何か、しなかったことがまだあるというのか。 わたしは良いぶどうが実るのを待ったのに なぜ、酸っぱいぶどうが実ったのか。 5さあ、お前たちに告げよう わたしがこのぶどう畑をどうするか。 囲いを取り払い、焼かれるにまかせ 石垣を崩し、踏み荒らされるにまかせ 6わたしはこれを見捨てる。 枝は刈り込まれず 耕されることもなく 茨やおどろが生い茂るであろう。 雨を降らせるな、とわたしは雲に命じる。 7イスラエルの家は万軍の主のぶどう畑 主が楽しんで植えられたのはユダの人々。 主は裁き(ミシュパト)を待っておられたのに 見よ、流血(ミスパハ)。正義(ツェダカ)を待っておられたのに 見よ、叫喚(ツェアカ)。
지난 주일에는 모세의 초라하고 메마른 지팡이를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통해 아무리 초라한 일상의 현실과 수단이라도 주님께서 쓰시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그 밋밋하고 단순한 일과들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성실하고 진득하게 지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살 때, 주님의 손에 붙들린 능력의 지팡이가 될 것을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하듯이 말하는 음성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특히 시적인 표현과 비유로 노래하는 내용인데요. 그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정성을 들여 포도원을 만들었지만, 그 정성과 노력이 무색하게 포도는 아주 신 포도(들포도)가 열매 맺어서 아무 쓸모없는 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시적인 비유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정성 들여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어 본보기를 보이셨지만, 오히려 그들은 포학하게 되고, 불의를 자행하기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모범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그 자비로우심을 악용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노래입니다. 본문의 문학적인 내용은 이렇게 단순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주님의 음성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1-2절에 기록된 포도원 주인의 정성과 노력입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기름진 언덕에 가꾼 포도원. 이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에덴동산에 살게 되었던 인간의 원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인간에 대한 축복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7-28)
그렇게 창조된 사람에게 태초에 허락된 곳이 곧 에덴동산이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2:8)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아름다운 존재인지, 그리고 놀라운 존재인지를 증언하고 증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류가 역사 이래로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와 사악함의 활동들은 굳이 예화를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단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서도 그런 우리의 사악함과 더러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본문의 3-4절은 앞선 내용을 역지사지하여 판단해 볼 것을 말하며 백성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에 인간적인 상식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에도 이해할 수 없거나, 수용할 수 없는 것인지를 판단해 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상식의 가치관으로 보더라도, 이 포도원의 주인이 포도원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정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5-6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그 포도원을 폐쇄하고 정리한다는 내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대응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손해만 보는 사업을 지속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저와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고, 자신이 의도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라면 그것을 포기하고 정리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원칙적으로는 모든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하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부정한 것은 정결하게 하고, 불의한 것을 바로잡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지요. 단지 인과응보의 원리에 힘없이 끌려 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온전하게 지키시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죄와 불의에 대한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경은 그 마지막 심판의 날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 20:13)
이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 앞에 이루어질 예언입니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과 죄를 심판하시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믿습니다.
7절의 내용은 이 비유의 의미를 짤막하게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기에 드러난 들포도와 같이 도무지 먹을 수 없는 열매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본어 성경은 괄호 안에 원어의 발음을 넣어서 이 노래의 뉘앙스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올바른 심판인 공의, “미쉬파트”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살육 혹은 유혈을 뜻하는 “미쉬파흐”를 열매로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인 “체다카”를 원하셨지만, 사람들은 “체아카” 즉 희생자들의 울부짖음과 비명소리를 열매로 맺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로서 요즘 말로 하면 라임을 맞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비슷한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열매를 맺었고, 정반대의 모습으로 행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과 탐욕으로 행하는 일들에는 이렇게 오류가 생기고, 악한 영이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 가장 선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결과물들을 품어 내고 있는 세속사회의 형편을 우리의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 또한 우리도 그 죄와 허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먼저 이런 영적인 현실에 대해서 인정하고 반성하며,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죄와 허물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고, 염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육신을 좋게 하려는 자기자신의 판단과 기분과 욕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인됨을 잊지 않는 것이 겸손이며, 회개의 기본 자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겸손과 회개의 태도로 나아오는 자들을 위해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마음과 약속이 성취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11:10)
여기서 고백하는 구원의 기치, 즉 구원의 깃발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을 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미 아무런 소망도 없고, 구원의 자격이 먼지만큼도 없는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완벽하고 유일한 소망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시편의 기자는 노래하며 말씀하십니다.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시 33:16-17)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믿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현실적으로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막대한 힘을 들이는 노력이나 우주를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 그리고 가을 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선한 성품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한 의도와 마음으로 선택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악한 일을 부추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난민을 돕기 위해서 현장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일행 중에 한 분이 둘러싼 어린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자기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주위에서 수많은 어린이들이 동전을 구걸하기 위해 갑자기 몰려 오다가 큰 아이들 사이에 작은 아이가 깔려서 다치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방문자는 선한 일을 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악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지요.
단순한 예화이지만, 실제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적지 않은 경우가 이렇게 명백하게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어떤 누군가의 선한 행실, 혹은 악한 행실에 대해서 가치를 판단하고 헤아리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런 모호하고 모순적인 삶의 현장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혹은 악행에 대한 값을 대신 치르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죽음의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순 덩어리 죄악의 현실에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인간인 우리는 선과 악을 구별하여 행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나름대로 선악을 구별하여 행한다고 해도 나의 선한 행실이 누군가에게 악한 결과로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악한 세속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뿐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믿고, 의지하여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주님께 맡기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도리를 해 나아가는 것이지요. 나의 할 도리와 사명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 15:4)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면, 주님께서도 내 안에 거하신다는 약속인데요. 우리는… 어떤 착한 일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떤 훌륭한 인품을 갖출 것인가? 어떤 실력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주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순종이며, 유일한 순종임을 믿습니다.
주님과 연결된 채로 살기 위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연습을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그리고 그 연습에 대해서 우리는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일기를 서로 나누며 주님과의 동행을 연습하는데 격려하고, 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 음성에 겸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아무리 선해도 악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악한 행동이 오히려 선하게 포장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선함과 악함은 허망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허망한 현실의 삶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임재 안에 머무는 것이 최선의 일상인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비록 단맛은 전혀 없이 신맛을 내는 들포도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지라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회복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영생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그릇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악한 죄의 역사로 인해 우리는 죄인의 일상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선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이미 악의 먼지로 가득한 세상에서 범죄에 오염되지 않은 인생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한 채로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사는 것은 결코 우리답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시고, 거룩한 영생의 삶을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그 보혈로 내 죄를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여기 예배하는 우리에게 임재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임하신 주님과 일상생활에서 동행함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나와 동행하고 계심이 분명히 믿어지는 행복하고 든든한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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