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쿵 저리 쿵 / 이임순
서너 평 남짓한 주방은 쓰임새가 여럿이다. 주로 식사를 하지만 밥이 뜸 드는 동안 찬장 한편에 있는 책을 꺼내 읽으면 간이 서재가 된다. 밭작물을 둘러보러 간 남편을 기다리면서 수세미를 뜨개질하고, 가끔 창문으로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내 삶의 여정을 그릴 때는 독백의 장이 된다.
하천 쓰레기 줍기 봉사활동이 있는 주말이다. 마치고 나니 나른하다. 쉬고 싶은데 집에 오던 길에 보았던 고추와 가지 나무가 눈에 밟힌다. 밭으로 간다. 초입에 있는 가지와 토마토 곁순을 따고 고추가 심긴 데로 간다. 풀을 뽑으며 필요 없는 순도 없앤다. 아직도 한참은 더 해야 하는데 정수리가 따갑다. 두 마음이 티격태격할 때 쉬자는 마음을 누르느라 서둘러 오면서 미처 모자를 챙기지 못한 탓이다. 목이 마르고 배도 꼴짝하다. 그만하라고 몸이 신호를 보낸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여기서 손 털고 일어나면 나머지는 언제 할지 모른다. 참고 마무리 짓자고 자신을 토닥거린다.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린 상상을 하며 손을 바삐 움직인다. 눈이 게으르다. 고추 고랑이 환하다. 들깨 순을 한 움큼 따는데 문득 시장기가 몰려 온다.
얼른 밥을 안치고 들깨 순을 데친다. 조물조물 무치면서 참기름을 평소보다 두어 방울 더 떨어뜨린다. 참고 끝까지 한 내 자신에게 내리는 보상이다. 냉장고에서 삶은 죽순을 꺼내 들깻가루를 넣고 볶는다. 지난주 자전거 타기 모임에 참석했을 때 사 온 낙지젓에 땡초와 마늘을 썰어 버무려 식탁에 올린 후 .깨를 고명으로 뿌린다.
밥이 뜸 들기를 기다리면서 며칠 전에 배달된 서순초 수필가의 ‘봄날은 간다’ 책을 찬장에서 꺼낸다. 옆의 의자에 발을 얹고 편히 앉아 수필집을 펼치려는 순간 까마득한 지난 일이 떠오른다.
애시당초 과수원에 집이 없었다. 신혼 초, 야산을 사서 과수원을 일구면서 밤나무 밑에서 점심을 먹으니 개미가 들끓었다. 잠시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방과 부엌에 창고 하나를 넣어 집 지을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잡았다. 경험도 기술도 없는 우리 부부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임신 중인 나를 보고 주위에서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방이 하나 더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듯한 조언이었다. 계획을 바꾸니 부엌이 ㄱ자 형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임시 휴게소로 쓸 용도였지 우리가 여기서 뿌리내리고 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밤수확이 시작되었다. 날마다 집에서 다니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수확할 때까지만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리어카에 간단한 가재도구를 싣고 와서 생활했다. 1970년대 후반, 당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없었고 아궁이에 불 때 해 먹었다. 젖을 먹여 재워 놓고 일을 갔다 올 때까지 아기가 자고 있었다. 어쩌다 늦은 날은 눈을 깜박이며 천정을 보고 놀고 있었다. 혼자 두고 일을 한 것이 미안해 젖을 먹여 업고 저녁밥을 했다. 나만 있을 때는 불편이 없었는데 아이를 포대기로 업고 움직이면 어린 것의 머리가 쿵쿵 찧었다.
남편은 과수원 일은 해도 아기 볼 줄은 몰랐다. 같이 일하고 저녁을 지을 때면 업고 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든지 아기를 보든지 둘 중에 선택하라고 했더니 밥상을 들고 나갔다. 업고 쭈그리고 앉아 불을 때면 등에서는 좋아서 까불거리는데 움직이면 아기 머리가 수난을 당했다. 차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넓히고 나무 아궁이를 연탄으로 바꾸고 석유곤로도 샀다. 지금은 전기나 가스로 연료를 대신할 수 있는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 내게도 있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과수원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젊은 내 청춘 고스란히 바쳐 지금까지 45년을 살고 있으니 굽이굽이 웃지 못할 사연도 많았다. 언제부턴가 직장에 숙직이 없어졌는데, 남편이 숙직하는 날이면 무서워 시어머니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고 갔다. 그런 날은 과수원에 심어 놓은 감나무가 없어졌다. 세 차례에 120주가 자취를 감쳤다. 집을 비운 날은 연장이나 수확기에 접어든 곡식까지 밤손님이 손을 댔다. 하는 수 없이 새로 짓다시피 집수리를 하면서 불편하기 짝이 없던 주방을 큼지막하게 입식으로 바꿨다.
사촌들끼리 놀다 머리를 찧으면 미련해진다고 할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아이가 이리 쿵 저리 쿵 하면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나 은근히 걱정되었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반장이 되었다. 희망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새마을어머니회 회원이라고 했다. 반장 엄마라 그런가 싶었지만 어머니회 회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들이 반장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형편이 아니라고 했다. 1학년 반장은 각 반에서 입학시험 성적이 제일 좋은 학생이라면서 우리 아이가 학년에서 최고 점수라고 했다. 반장 어머니가 주축이 되어 어머니회도 이끌어야 하니 아들이 공부 잘한 죗값을 치뤄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의 시름이 기우였다는 것이 드러나 후련했다.
내 친구 순영이 할머니는 나이 많은 것이 한 된다고 하셨다. 길쌈하여 베틀에 앉아 베 짜고, 보리 방아 찧어 불 때서 밥 지어 식구들 건사했는데 요즈음은 힘들이지 않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되는 세상이라고 한다. 땔감이며 빨래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스위치만 눌러 놓으면 밥이 탈 염려가 없으니 시어머니 지청구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갈수록 세상은 좋아지는데 문명의 혜택을 더 누리고 싶어 나이를 탓하는 그 마음 이해가 된다.
지금은 업을 아이도 없고 불을 때서 밥도 하지 않는데 부엌은 훨씬 넓다. 아이를 업고 춤을 추어도 될 성싶다. 그 넓은 땅을 두고 부엌은 왜 작게 했는지 지혜롭지 못했다. 순영이 할머니 말씀이 귓전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