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평온한 일상을 보장받지 못하는가? / 송덕희
화상 수업이 막 끝난 후에 긴장을 풀고 리모컨을 누른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2024. 12.03. 22:23) 윤석열 대통령의 불콰한 얼굴이 티브이(TV) 화면을 메운다.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화풀이하는 어투와 과격한 단어들, 한쪽으로 치우친 그의 사고에 기가 막힌다.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멍해진다. 잠시 후 헬기가 뜨고 무장한 280여 명의 계엄군이 국회 의사당을 에워싸며 몸싸움이 벌어진다.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다. ‘금지’, ‘처단’이라는 막가파식 포고령이 나온다. 45년 전, 1980년 5월 광주의 공포가 겹쳤다. 수면제를 먹었다. 약은 잘 들지 않고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군에서 근무하는 사위는 연락이 안 됐다. 어린 손주와 임신한 딸은 괜찮을지 신경이 곧추섰다. 서울에 사는 아들과 딸 걱정까지 더해 불안에 휩싸였다.
계엄 선포 해제안을 발 빠르게 가결한 (2024. 12.04. 01:01) 국회의원들이 고마웠다. 새벽에 해제되기까지 (2024. 12.04. 04:27) 급박하게 돌아간다. 이 모든 과정은 고스란히 생중계되어 역사로 기록된 셈이다. 군인과 민간인 모두 크게 다친 사람 없이 일단락되어서 천만다행이다. 더 큰 혼란 없이 끝나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 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섯 시간의 혼란을 가져온 그는 정상인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일을 일으킨 자가 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 뒤척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참담한 밤이 지나고 빈속으로 집을 나선다. 여느 때처럼 길은 막히고 별일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났다. 또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운전대를 잡은 손이 떨린다.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게 부끄럽고 창피했다. 내 기분처럼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곧 비라도 쏟아질 것 같다. 말없이 서 있는 가로수는 어젯밤 소란을 지켜보았을 거다. 은행나무 가지 끝자락에 남은 잎 몇 장이 흔들림 없이 매달려 있다. 끝까지 버티려는 비장한 각오를 보여주는 듯하다.
한 달 전부터 30분 일찍 출근해서 운동장을 걷는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소처럼 시작하려고 애쓴다. 평화로운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다. 참 좋고 소중하다. 빙 둘러보니 아이들이 어제 해가 기울 때까지 놀았다. 시소에 올라 하늘을 보고,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눈을 맞췄을 거다. 아빠도 깔깔깔 웃는 아이와 발을 굴렀겠지. 모래 위에 연분홍색 반지 하나가 떨어져 있다. 먹다 만 물병도 보인다. 모래 놀이터를 도화지 삼아 어려운 추상화를 그려 놓았다. 날쌘 얘들은 축구하며 넓은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숨이 턱에 차도록 공을 쫓아 달렸다. 흙바닥에 찍힌 운동화 자국은 그들의 기쁨과 환호의 표시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아이들이 그려진다. ‘이리저리 뛰어다닌 신발 주인은 밤새 잘 잤을까? 어린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밤이 될 뻔했구나.’ 아무 일 없는 아침이 고맙다. 왼편 귀퉁이 수돗가에 색종이가 흩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너 명이 모여서 종이를 접고 놀았다. 빨강, 녹색 비행기를 만들어 날렸다. 높이 날아올랐을까? 아니면 곧 떨어져 실망하여 돌아섰을까? 이것들은 밤새 서리를 맞아 다 젖었다. 한 바퀴를 돌면서 운동장에 떨어진 흔적을 정리한다.
가장자리에 즐비한 나무를 살피며 두 바퀴째 걷는다. 봄에 화르르 꽃 핀 벚나무는 일찌감치 잎을 떨궜다. 여름내 울타리에 점점이 붉던 장미 덩굴도 가시만 남았다. 올해 초가을 날씨가 따뜻한 탓인지 느티나무 잎은 물들기 전에 힘없이 떨어졌다. 그 사이마다 한 그루씩 서 있는 단풍나무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멀리서 보면 둥그스름하고 커다란 꽃봉오리 같다. 작년보다 색이 더 곱다. 잎이 지기 전에 함박눈이 소복이 앉는다면 참 예쁘겠다.
여덟시 10분쯤,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들린다. 학교는 그제야 기지개를 켜고 맞는다. “어젯밤, 난리 났어.” “비상계엄이 뭐야?” 어울리지 않는 대화가 오간다. 이미 뉴스를 보고 들은 모양이다. ‘너희들은 걱정과 소란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어른으로서 미안하다. 어제와 다름없이 등교하는 오늘이 얼마나 소중한가. 마음 편히 밥 먹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도록 받쳐주는 흔들리지 않는 경제. 식구들과 오순도순 대화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화로운 시간을 지켜 주는 정치. 가끔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음악을 즐기는 문화. 이런 기본적인 권리가 온전히 보장되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어우러져서.
대여섯 바퀴를 돌자, 몸에 열이 오른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지만, 의문 한 가지는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되돌아보면 지난 8월에 곧 계엄을 선포할 거라는 야당의 김○○ 의원 말이 맞았다. 그때 여당과 대통령실에서 터무니없는 정치 공세라며 발끈했다. 떠도는 소문쯤으로 일축할 일이 아니었다. 방송 보도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낌새가 곳곳에 있었고, 스멀스멀 기어 나와 준비했단다. 예전 동네 빨래터에서 무성한 소문은 언젠가 여지없이 사실로 드러났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이 글을 마무리한 지금(2024. 12.07. 08:34) 국회는 윤석열 탄핵 소추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 의원 대부분이 투표를 거부하고 회의장을 나갔다. 슬프고 비참한 시간이 흐른다. 매서운 추위인데도 맨바닥에 앉아 ‘윤석열을 탄핵하라.’고 시민들이 계속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