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씨의 연원과 전승
오명원 오씨 천지닷컴 2024-07-03 17:27 전문 듣기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가족의 이동과 번식은 별처럼 빛나면서도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역사적 인연이 깊고 방대한 인구 기반을 갖춘 가족인 오 씨의 이야기는 전설적이고 끈질기다.
사서와 족보에 따르면 한국 오씨의 시조는 중국 남제(南齊)시대 상인 오첨(吳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서기 501년, 오첨은 원대한 의지와 희망을 품고 귀중품을 가득 싣고 풍랑을 헤치며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내려갔고, 머나먼 중원에서 동쪽으로 오다 신라 남쪽 해안을 밟았다.그러나 구속까지 됐지만 다행히 면죄부를 받을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이때부터 오첨의 운명은 낯선 땅과 얽혀 있었다.
사면을 받은 오첨은 위양 천령산 아래 괘관동에 살면서 김종의 딸을 맞아 3남 1녀를 두었다.그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일하면서 한국 오씨 가문의 화려한 장을 열었다.921년에 이르러 고려 태조 왕건은 오첨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증하고 시호를 무혜공(武惠公)이라 하였는데, 이는 오첨과 그 가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1,500여 년의 세월을 거쳐 오씨 가문은 50여 대를 이어 60여만 명의 인구가 번성하였다.이들의 발자취는 나주 해주 장흥 흥양 광주 보성 위양 대동 대전 고창 옥원 영광 기원 위평 울산 동복 평해 화순 의성 군위 영원 낙안 낭산 연일 은봉 기계 장평지 등 한국의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땅 구석구석을 촘촘히 연결하는 촘촘한 네트워크처럼 넓게 퍼져 있다.
고려 고종조 때 오첨의 23대손 오수권의 셋째 아들이 분가하여 입적하고, 장남 오현보(吳賢辅)가 해주 오씨(海州 吳氏), 차남 오현좌(吳賢佐)가 동복 오씨(同福 吳氏), 3남 오현필(吳賢弼)이 보성 오씨(寶城 吳氏)의 시조가 되면서 '3본관' 구도가 형성되었다.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씨 가문은 계속 번영하고, 인원도 나날이 증가하였으며, 각 분파도 점차 원래의 본관에서 분리되었다.해주오씨에는 나주·울산·낙안·고창·함평·평해오씨 등이, 동복오씨에는 군위오씨, 보성오씨에는 화순·위양·장흥·흥양오씨 등이 각각 분적되었다.
오씨족은 가문의 결속력이 사라지지 않도록, 자신의 세습 혈연관계를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또렷이 알 수 있도록 세습의 맥락을 정성껏 기록했다.시조부터 자손까지 대를 이어 족보로 자세히 쓰여 있다.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한국 오씨 족보 서문 중 가장 오래된 부분은 마치 우리가 시공간을 초월해 그 전설적인 시초로 돌아가는 듯하다.
한국 오씨의 발전 과정은 한 가족의 전승사일 뿐만 아니라 중한 문화 교류와 융합의 생생한 묘사이기도 하다.수많은 선배들의 분투와 투쟁을 지켜봤고, 대대로 희망과 꿈을 담았다.오늘날, 우리가 이 무거운 족보를 펼쳤을 때, 그 이름과 이야기 한 토막 한 토막, 모두 가문의 영광과 강인함을 말하고 있으며, 후세 사람들이 계속 전진하여, 더욱 휘황찬란한 장을 쓰도록 격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