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종기 정답게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나지막한 집들. 정영주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집들은 누가 높은지, 누가 큰지 위용을 다투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어 마을을 이룬 고만고만한 집들이 산등성이까지 아스라이 이어진다. 빛이 사그라지는 해 질 녘일까, 아니면 뿌옇게 동터오는 새벽녘일까. 집집마다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다. 그 빛이 작품 전체에 밝고 따스한 기운을 심어놓는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판자촌을 연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한국인의 정서에만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외국인들도 그의 작품 앞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특정 지역의 풍경을 묘사한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그리워하는 마음속 풍경을 담았기 때문이다.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가치를 그림에 두었죠. 그림을 인정받지 못하자 제 존재 가치조차 없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때 바람이나 쐬려고 올라간 남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해 질 무렵이었죠. 빌딩 사이에 파묻혀 있는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따뜻하고 행복하고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그곳이 이제는 사라져야 할 존재로 취급되잖아요? 초라해진 제 모습 같았습니다. 빌딩 숲에 가려진 판잣집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게 가치 없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집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해왔던 추상 작업에서 구상 작업으로 전환한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소통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사람 없는 어두운 골목에 빛을 그려 넣으면 그림이 밝아지면서 생동감이 생깁니다. 생명을 주고 희망을 심는 듯한 기분이 들죠.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