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규장각 소장- "列邑院宇事蹟"은 1759년과 1760년경에 중앙의 지시에 따라 전국 각 읍에서 읍에 있는 書院·祠宇·影堂의 事蹟을 조사·정리하여 보고한 것을 중앙에서 各道別로 合編한 책이다. 조선중기 書院에 관한 종합적인 官邊資料의 하나이다.
몇 해 전 경주 옥산서원의 東齋와 西齋인 민구재와 암수재 편액을 모정공께서 쓰셨다는 기록을 보았으나 원전을 확인하지 못하여 모정공의 친필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였는데, 최근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된 "列邑院宇事蹟"(경상도/경주편)에서 이와 관련한 기록을 발견하였다. 列邑院宇事蹟의 기록에는 모정공께서 옥산서원의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편액을 쓰신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아울러 경주의 서악서원의 조설헌(澡雪軒), 절차헌(切磋軒), 도동문(道東門) 편액 또한 모정공께서 쓰신 것임을 새롭게 알게되었다. 열읍원우사적에는 서악서원에 이어 옥산서원 순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순서에 따라 소개한다.
서악서원西岳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615.
경주 서악서원은 1561년 창건하여 김유신, 설총, 최치원을 배향한 서원으로 1623년 사액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1873년에 중수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모정공께서 쓰신 절차헌(切磋軒)은 서악서원의 東齋이며 조설헌(澡雪軒)은 西齋이다. 도동문(道東門)은 서원의 외삼문(外三門)이다.
옥산서원玉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옥산서원은 1572 창건하여 회재 이언적 1491-1553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1574년 사액되었다.대원군의 서원 철폐시에도 존속한 서원이며 영주의 소수서원, 달성의 도동서원, 안동의 도산서원, 병산서원과 함께 5대 서원으로 손꼽히는 서원이다.196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모정공께서 쓰신 옥산서원의 민구재(敏求齋)는 東齋이며 암수재(闇修齋)는 西齋이다.
서원의 이름과, 당(堂)의 이름, 재(齋)의 이름, 문(門)의 이름.
서악서원(西岳書院), 시습당(時習堂)은 고을 사람 유학(幼學) 臣 최석신(崔錫信)이 썼으며 영귀루(詠歸樓)는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썼으며, 조설헌(澡雪軒), 절차헌(切磋軒), 도동문(道東門)은 참의(參議) 배대유(裵大維)가 썼다.
列邑院宇事蹟 -서악서원편- 서악서원 전경 서악서원 道東門 편액(사진출처:블로거 감래킹) 현재 서악서원에 걸려있는 도동문 편액. 左 서악서원 道東門 편액과 右 道東書院 편액.
모정공께서 쓰신 道東書院의 편액과 道東門 편액을 비교해 보면 글씨체와 획의 운용에 있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지금 전하는 道東門 편액이 모정공의 친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차후 서악서원의 조설헌, 절차헌과 함께 관련자료를 바탕으로 이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현재 서악서원의 동재와 서재인 조설헌과 절차헌은 편액이 걸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의 사액 현판은 영의정 이산해(李山海)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쓴것이며, 사우인 체인묘(體仁廟), 구인당(求仁堂), 양진재(兩進齋), 해립재(偕立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은 모두 영의정 노수신(盧守愼)이 이름을 짓고 현판의 글씨는 목사 한호(韓濩:한석봉)가 썻으며, 동쪽 아래의 민구재(敏求齋)와 서쪽 아래의 암수재(闇修齋)는 모두 대사성 허엽(許曄)이 이름을 짓고 현판은 승지 배대유(裵大維)가 썻다.
列邑院宇事蹟 -옥산서원편-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 西齋 암수재闇修齋 闇修齋 편액(사진출처:마미야 박창완) 옥산서원 東齋 민구재敏求齋 敏求齋 편액(사진출처:마미야 박창완)
암수재와 민구재 현판은 모정공께서 쓰신 것임은 분명하지만 현재 전하는 옥산서원의 암수재와 민구재 의 편액이 모정공의 친필인지는 알 수 없다. 차후 이에 대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상 列邑院宇事蹟을 바탕으로 서악서원과 옥산서원의 편액의 서자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다. 처음 옥산서원의 암수재와 민구재 편액을 모정공께서 쓰셨다는 원전 기록을 찾고자 하여 관련 자료를 찾던 중 列邑院宇事蹟을 발견하여 그 기록 속에서 옥산서원의 암수재와 민구재 편액을 모정공께서 쓰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생각지도 못했던 서악서원의 편액을 새롭게 발굴하여 그 기쁨이 더욱 크다.
24년 6월 초 후손 종만 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