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714/ 탄식할 건가, 기도할 건가 (롬8:18-25)
예전에, 가난에 지친 19세 소녀 가장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새벽엔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6식구를 부양하던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어린 소녀가 자살이라는 가장 절망적인 길을 택해야 했을까요?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누군가 자신의 탄식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적어도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탄식해야 할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에서 보면 사도 바울에게서 배울 점이 많이 있지만 특히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탄식 소리를 듣는 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22절에서도 기록하기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대부분의 사람이 겉으로는 아닌 것 같아도 속으로는 탄식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젊은 여자분이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하던 중에 남편 얘기가 나오자 ‘목사님! 저의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 빼고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목사님은 여인의 말에서 탄식이 배어 있는 것을 알고는 슬쩍 물었다고 합니다. ‘자매님! 실제로는 마음이 힘들죠.?’리고 하자 여인이 ‘목사님! 정말 힘들 때가 많아요. 성격이 다르고, 의견이 다르면 함께 고쳐 가면 되지만 신앙이 다르면 참 힘듭니다.’라고 울먹이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도 곳곳에서 탄식 소리가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우린 주위의 그런 탄식을 듣고 같이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웃의 탄식 소리에만 집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당장에 나에게 있는 탄식은 또 어떻게 할 겁니까?
역시나 내 안에서 들려오는 탄식 소리를 듣고 나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탄식’과 ‘기도’를 연결시켜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웃과 내 안의 탄식 소리를 들을 귀가 예비 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탄식 중에 기도해야 할 가장 큰 이유입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그걸 아는 방법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만 붙잡게 되면 탄식을 탄성으로 바꿔주시는 분은 내가 믿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린 믿어야 기도할 수 있고, 또한 기도해야 믿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주변 상황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한숨만 쉬고 불평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탄식 중에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일은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보다 우리의 기도 소리를 더 크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턴 이렇게 해보세요. 탄식의 순간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라고 외쳐보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의 사도 바울의 권면이 바로 그겁니다. 19절에서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때로 현재의 모습이 참담해도 소망을 가지고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도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서두에 ‘생각하건대’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해서도 이젠 좀 생각을 하면서 믿으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부턴 ‘생각의 전환’ 또는 ‘생각의 확대’를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믿음이 되고 우리가 생각한 대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제부터의 모든 생각을 그저 ‘내 생각으로만’ 그치게 하지 말고 생각에서부터 ‘하나님이 계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하건대’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믿음으로 보자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턴 ‘생각만으로’ 살지 마시고 생각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생각’과 ‘믿음의 생각’은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생전에 정주영 회장은 ‘할 수 없다.’는 직원들을 향해 ‘해보기는 했어?’라고 했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린 어때야 할까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차분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고난이 정말 크게 느껴지고, 답답함으로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믿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고,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내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더 많을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선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단지 구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슴을 요한복음 14:14절에서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연계해 보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간에 다 이루어 놓으셨기에 언제고 기도하기만 하라 그러면 내가 행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은 대로의 기쁨과 응답을 다 이루셨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과연 믿기만 한다고 될까?’라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여러분이라면 생각을 전환하고 생각을 확대해서 현재의 탄식을 기도로 바꾸시고, 현재의 고난을 장차 있을 소망으로 바꾸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생각의 전환이나 생각을 확대하는 것이 단지 믿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건 쉽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 중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누구인지부터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는 자다.’라는 확신 속에서 스스로를 비관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고백이 믿음과 모든 응답의 시작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은 바꿔 말하자면 ‘하나님이 내 아버지다.’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 최고 재벌의 자녀라고 한다면 세상을 사는 여러분의 태도와 자세는 어떨까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제부터 우린 인생을 살며 ‘내겐 왜 응답이 없을까?’를 생각할 시간에 ‘내겐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내가 하는 일은 왜 잘 안될까?’를 생각할 시간에 ‘다 잘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는 믿음으로 생각을 전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가요?
사전적으로는 믿음의 반대말이 불신이지만, 신앙적으로는 믿음의 반대말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니까 ‘할 수 없다’고 낙심하게 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의심하니까 ‘길이 없고 방법이 없다.’고 포기하게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의심하니까 ‘내겐 안 좋은 일만 있다.’며 비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좌절하고 비관을 느낀다는 것을.
사막에 사는 동물들이 ‘나는 왜 이렇게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야 하나?’라며 좌절하고 탄식할까요?
피조물로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순종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지만, 사실 ‘영광’은 사람이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사람에게 영광을 주셨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왜 우린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영광스럽다고 여겨지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3: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들어온 죄가 인간에게 미친 가장 큰 피해는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란 뭘까요?
신학적으로 많은 학설들이 있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 없이 혼자인 상태’가 바로 죄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비쳐지는 것이 없으면 드러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거울 앞에 있는 것이 사탄이라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탄이 비쳐졌기에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시면 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우리 앞엔 사탄이 설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결과는 우리 인생에는 매 순간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 없이 혼자인 상태로 사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영어로 타락을 ‘fall’ 즉 ‘떨어지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떨어져 나간 영광으로 인해 비참함과 자존감의 상함을 느끼게 되며, 떨어져 나간 영광을 대신하고자 세상에서의 명예를 추구하고 하는 것들이 다 잃어버린 영광에 대한 갈망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앞서도 비유를 들었듯이 사람은 거울과 같은 존재이기에 스스로가 영광을 추구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통해 영광을 얻으려 한다면 결국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영광스런 인생이 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고린도후서 3:18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 앞에는 늘 하나님이 계시게 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계시면 우리에겐 늘 하나님이 비쳐지실 것이기에 죄의 시작과 같은 논리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태’가 바로 영광의 시작인 것입니다.
때때로 사는 게 힘이 든다 해서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세상 사람에게서의 어려움은 ‘기득권의 상실’이지만 성경에 이르기를 믿는 사람에게서의 어려움은 ‘해산의 진통’이라 했습니다.
해산의 진통이야말로 고통 중에 가장 극심한 고통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어찌 보면 해산의 고통은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기쁜 고통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인해 성도에게 있게 되는 ‘고난의 체험’을 오히려 ‘희망의 체험’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장엔 ‘고통의 통로’로만 보일지라도 빠져나오고 보면 ‘축복의 통로’일 것이기에, 이 사실을 믿는다면 ‘참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24-25절에서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탄식할 일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성도에게는 탄식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앞서 드린 말씀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나의 탄식’이 ‘나의 기도’가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걸 어떻게 하지?’라는 상황에서 혼자서만 ‘이걸 어떻게 하지?’라고 하게 되면 탄식일 뿐이고 해결할 방도도 없을 뿐이지만, 하나님께 나와서 ‘이걸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게 되면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구약의 예를 보면 여호수아가 아이성에서 전멸했을 때 그 후속 조치가 무엇이었습니까?
‘어떡하지?’ ‘이젠 뭘 해야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배한 자리에서 여호수아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
이젠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나와 그렇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혼자 ‘어떡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하시려나이까?”라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으니, 걱정도 하지 말고 염려도 탄식도 분노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걸 억지로 안하려고 하다 보니 믿음에서 실패하는 겁니다.
하세요. 하되, 혼자 하지 말고, 사람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할 때면 그건 기도가 되는 것이기에 응답도 있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뭘 하든 혼자 하지 않는 것.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믿고 기도하면서 하는 것이 현재의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할 건가, 기도할 건가의 갈림길에서 기도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사람이시기에 탄식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왕에 믿음이 있으시기에 이제부턴 세상적으로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으로만 살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소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해보기는 했어?’라고 했던 정주영 회장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여러분! 해보기는 하셨습니까?’
이제부터는 기도든, 소망이든, 믿음이든, 기다림 등의 모든 신앙적인 노력들을 해보기나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든 기억하셔야 할 것이, 컵에 물이 비워진 만큼 공기가 들어차듯이 우리 인생에서도 믿음이 빈 공간에는 늘 시험이 들어찬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면 실패는 있어도 실망은 없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실수 한 번 안 하고 실패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렇더라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는 복음성가의 가사를 보면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없고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성가의 이 고백과 확신이 여러분의 고백이자 확신이고 또한 간증이 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껜 실패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믿든 무엇을 소망하든 모두 힘 내세요.
하나님께 올린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제부터는 사는 중에 때론 탄식할 어려움이 있다 해도 장래의 영광을 생각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여 더욱 ‘믿음의 분발’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