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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t Is Still a Difficult Transition Today 오늘날도 변화가 여전히 어려운 이유 In the first century many obviously did make the needed transition and learned that service to God, worship, did not consist of, depend on, or gain special merit from, attendance at some special place, some “sacred” building. Even the act of gathering together was not to be viewed as distinctively “religious,” that is, more so than other facets of their lives. They came to appreciate that their gathering together was for mutual edification and expression of brotherly love, in encouraging one another, manifesting appreciation for one another as part of a family relationship under God’s Son, not to give them a special feeling of “religiousness” or a sense of being “religiously cleansed” by the act of gathering. 1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필요한 전환을 했고,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어떤 특별한 장소나 "신성한" 건물에 참석하는 것으로 구성되거나,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거나 하는 것이 특별한 장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모이는 행위조차도 그들의 삶의 다른 면으로부터 특별히 구별시키게 하는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들이 함께 모인 것은 상호 격려를 위해 서로간의 친목도모와 형제애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아래서 같은 가족관계의 일원으로 모이는 일은 특별한 종교감을 주거나 종교적으로 거룩하기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Whatever progress was made in viewpoint in apostolic times, in subsequent periods professed Christians made a gradual but steady return to much of the old. They returned in large measure to that which appeals to the physical senses. Over a period of centuries they reverted once more to sacred buildings, visible altars, a separate class of special “servants of God” (whether priests or ministers) distinctively dressed, and to many similar things that impress the eye, that appeal to the ear, and that can be touched. Under the seductive influence of such things, understanding was all too often supplanted by mere emotional feeling. The Lord’s evening meal, initially characterized by informal closeness and warm fellowship in an expression of a faith shared in common, was often converted into a largely ceremonial observance, the partaker going up to a church official who, in priestly fashion, administered the “sacrament.” The people, the laity, felt “comfortable” in their relationship to God by virtue of their regularity at religious services, or by performing certain religious acts on a regular basis. This, coupled with the knowledge that they were generally part of a large religious system and affiliation, gave them a sense of security and of righteousness. They failed to appreciate the excelling spiritual value of the new because of its “bareness” and showed a preference for an outward glory like that of the old. And, despite their claiming great distinctiveness from “other religions,” I believe that Jehovah’s Witnesses manifest many of these same evidences of a return to the old. Those associated with Jehovah’s Witnesses are repeatedly reminded of their being part of a large organization, it even being pointed out that their numbers surpass that of some of the smaller nations of the world. They are frequently told that at certain stages of the organization’s history God has brought forth revelations, “revealed truth,” “new light,” through it, as He did by speaking through his prophets of old. They have been taught to live in strict obedience to a remarkably extensive code of laws, handed down to them by men who claim to represent God in doing so, with rejection of their rulings being likened to Miriam and Aaron’s rebellion against Moses. A steady flow of figures of numerical increase comes to them through the organization’s publications; they periodically see pictures of large impressive buildings in different countries built or purchased by the organization, places designated “Bethels,” from the Hebrew beth´el meaning “house of God.” Many of these structures equal or surpass the Jerusalem temple grounds in size and area. Some make group pilgrimages to the international headquarters at Brooklyn, the principal “House of God,” where the organization has very large, multi-storied properties covering many entire city blocks, or to the Bethel structure of their own country. They there see “House of God” staffs numbering perhaps into the hundreds, sometimes into the thousands, engaged in what is officially designated “sacred service,” thus comparable to the service of the Levitical workers at the temple of old. The impact on their sight and minds conveys a sense of power, visible strength. They feel drawn to it and fear being separated from it. 사도 시대에 어떤 진전이 있었든 간에, 그 이후에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한 자들은 꾸준히 퇴보되어 옛 것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대다수 물성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것으로 돌아갔다. 수세기에 걸쳐 그들은 다시한번 신성한 건물, 눈에 보이는 제단, 특별한 "하나님의 종들"(사제나 목사들)을 별개의 계급으로 인정하게 하는 구별되는 옷을 입고, 눈에 잘 띄고, 귀에 호소하며, 감각적일 수 있는 여러가지의 비슷한 형태로 돌아갔다. 그러한 것들의 유혹적인 영향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은 단지 감각적인 부류에 의해 대체되었다. 처음에는 비공식적인 친밀함과 따뜻한 화목함 그리고 공유된 신앙의 표현으로 특징지어지던 '주의 저녁 식사'는 점차적으로 큰 의례적인 행사로 바뀌었고, 참여자는, 사제의 옷을 입고 "성체"를 행하는 교회 성직자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백성, 즉 평신도들은 종교 예배에서의 규칙성이나 일정한 종교적 행위를 정기적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편안한 넓은 길'을 걸었다. 이것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큰 종교 시스템에 소속된 일부라는 인식과 함께, 그들에게 안정감과 의로움을 부여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의 '보잘 것 없음' 때문에 새로운 것의 탁월한 영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고, 옛 것과 비슷한 외형적인 영광을 선호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큰 특징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옛 것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 동일한 증거들을 많이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큰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거듭 상기받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의 수가 세계의 몇몇 작은 나라들의 인구를 능가한다는 지적까지 받고 있다. 그들은 종종 그들 조직의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옛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듯이 그 조직을 통해 "진리를 밝히셨다", "새로운 빛"이라는 계시를 내렸다는 말을 주입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해받은, 놀랄 만큼 광범위한 율법과도 같은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교육받고 있으며, 그들의 판결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에게 반항하는 것에 비교된다. 지속적인 수치적 증가의 흐름은 이 조직의 출판물을 통해 그들에게 제시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히브리 베텔에서 "베델"이라는 명칭의 건물이 건설되거나 매입되어 주기적으로 인상적인 큰 건물사진을 출판물을 통해 보여준다. 이 구조물들 중 다수는 규모와 면적이 예루살렘 성전 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크다. 어떤 사람들은 브루클린의 국제 본부나 자국의 베델 건물로 단체순례를 하기도 하는데, 브루클린의 주 건물인 "하나님의 집"은 도시 전체의 한 구획을 망라하는 매우 크고 다층적인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아마도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에 이르는 "하나님의 집" 직원들이 공식적으로 "신성한 봉사"라고 이름 붙여진 일에 종사하고 있어, 옛 성전의 레위 노동자들의 봉사에 버금가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시각과 정신에 가시적인 엄청난 힘의 영향을 미치게 한다. 그들은 그처럼 외부적인 영향에 끌려 그 조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잠재력이 커진다. <지상낙원에서 영원히 살수 있다> 196-198면에서 발췌된 사진은 아래와 같다. |
Having worked at the international headquarters for 15 years, and having served on the Governing Body for 9 of those years, there is no question in my mind that the leadership has a virtual compulsion to be continually acquiring property and building new structures, that they draw from such physical expansion, not merely a sense of strength, but a reassurance of their unique position in the world as “God’s channel.” I also have no question, based on those same 15 years there, that in terms of what is actually produced—whether in literature or written communications or any other product—this could be accomplished far more efficiently by other organizations and with but a small fraction of the staff and holdings used by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The program of physical expansion (in property and number of workers) embarked on almost seems to feed on itself and generate a self-perpetuating need for more and more of the same. Since it is indeed impressive, and since the organization equates physical expansion with spiritual prosperity and blessedness, and since Witnesses provide the money needed, this unending acquiring and building has never been unwelcome to the leadership. (See the Appendix for additional details on the Watch Tower’s building program.) 나는 15년 동안 국제본부에서 일했고, 그 중 9년 동안 통치체에서 봉사했기 때문에, 내가 느끼기에 지도부가 지속적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세력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로"로서 전세계의 유일무이한 지위에 대한 확신을 그러한 물리적 팽창으로부터 이끌어내고자 하는 강박관념이다. 또한 그 15년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실제로 생산되는 것(간행물이나 서책, 기타 출판물 등)의 측면에서 다른 단체와 워치타워 조직의 직원 및 보유 인력의 일부만으로도 훨씬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재산 및 근로자 수에서) 개시된 물리적 확장 프로그램은 거의 자체적으로 먹고 살고도 남을 더 많은 것에 대한 자체-영구적인 필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외적 인상을 자아내는 물리적 팽창을 영적 번영과 축복으로 동일시하고, 증인들이 필요한 돈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러한 끝없는 매입과 건설은 지도부에 결코 환영받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워치타워의 빌딩 프로그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록을 참조하라.) As did ancient Israel, Jehovah’s Witnesses attend three “sacred” (by their definition) assemblies a year where large crowds at times numbering into the thousands flock together. Three times a week they attend five separate meetings, the major ones of these held at their Kingdom Halls, and they are assured that constant, faithful attendance at these meetings is a major factor in having a good standing before God. Of all the offerings they can make to God, none is assigned greater value and greater emphasis than their taking to the people the message found in the organization’s publications and inculcating this in their minds; to this the expression “sacrifice of praise” is almost exclusively applied, and great stress is laid on making regular weekly offerings of such sacrifice on their altar of service as a major, decisive factor affecting their standing with God.28 And, the vast majority are drawn to all this by the constant picture held out to them of all manner of physical, material rewards awaiting them in a near-at-hand paradise if they give their unstinting support to these things.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년에 세번 '거룩한 대회'(그들의 정의에 따르면)에 참석하는데, 이 대회는 때론 수천명의 군중들이 모여든다. 일주일에 세 번, 그들은 다섯 번의 별도의 집회에 참석하는데, 그 대부분 집회는 왕국 회관에서 열리며, 그들은 이 집회에 끊임없이 충실하게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좋은 신분을 갖는 중요한 요소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모든 제물들 중에서, 조직의 출판물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가져가 그들의 마음 속에 이것을 주입시키는 것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강조 받는 것은 없다; 이러한 것에 "찬양의 제물"이라는 표현이 거의 전적으로 적용되며, 그리고 정기적으로 매주 제물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그들의 봉사의 제단에 대한 그러한 희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결정적 요소로서,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면, 그들은 가까운 낙원에서 모든 물리적, 물질적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림을 지속적으로 제공받음으로써 이 모든 것에 끌리게 되는 것이다. After being immersed in such an atmosphere for any period of time, what would be the effect on these persons if they were to be transported—not into the physical surroundings—but into the kind of religious life lived by the early Christians? I think the vast majority would find the change as difficult as did those to whom the letter of Hebrews was addressed. They would find it difficult to accept the remarkable simplicity of that religious life, its lack of virtually any physical, material impressiveness, its calling for faith that draws its strength from the unseen, not from what is seen, from what is eternal and not from what is temporal, transitory. The apostle emphasized the difference in saying, “we walk by faith not by sight.”29 그러한 분위기에 어느 기간 동안 몰두한 후, 만일ㅡ그들이 물리적 환경의 변화가 아닌ㅡ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종교적 삶으로 옮겨진다면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히브리서 편지를 받은 사람들만큼이나 그 변화를 어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생활의 놀랄만한 소박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물리적, 물질적인 것의 보잘 것 없음으로부터, 믿음의 요구는 보이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영원한 것들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사도는 "우리는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걷는다."라는 점에서 차이를 강조했다.29 I believe this is at least one of the reasons why, when separating from the Watch Tower organization, many persons feel that they should search for something that offers similar things—not the same doctrines, but something that has some numerical strength, having special places where distinctive forms of religious service are carried on. Many seem unable to feel a sense of personal identity without “belonging” to a system, to some organization with visible, tangible features identifying it. They also feel they must be “doing something,” meaning, some type of activity that is “different,” distinctive. They still retain the outlook advanced by the Watchtower that service to God is sacred only if it involves what is “out of the ordinary.” They fail to see that Christianity changed people’s lives, not primarily by changing what they normally did from day to day, but primarily by virtue of giving a new outlook and new meaning to all that they did, giving a different quality, a different spirit, a different motivation, to all their activities. 나는 이것이 워치타워 조직으로부터 분리될 때, 많은 사람들이ㅡ같은 교리가 아니라ㅡ 어떤 수치적 강점을 가진, 구별되는 형태의 종교봉사가 이루어지는 특별한 장소(봉사 구역:역자해설)를 가지고 있어, 유사한 것을 제공하는 무언가를 검색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시스템을 구별시키는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특징을 가진 어떤 조직에 "소속"되지 않고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그들이 "다르고, 특색 있는" 어떤 종류의 활동을 의미하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낀다. 그들은 여전히 "일상사를 벗어나는 것"이 수반되는 경우에만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신성하다는 워치타워 조직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주로 그들의 모든 활동에서, 그들이 나타낸 다른 자질, 다른 영, 다른 동기를 주로 부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정신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정상적인 생활의 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 정신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The One Indispensable Essential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것 As to what Jewish Christians had earlier been part of, and the change they faced, we read this comment: 초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부분을 차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직면했던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이러한 논평을 읽게된다: |
The whole [Mosaic] dispensation [was] involved with things visible, tangible, material, evanescent. . . . It was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o come; and to these real, eternal things Christ introduces men. . . . In Him we have throughout to do, not with external ceremonies and temporal arrangements, but with what is spiritual; in Him we come in touch not with imperfect revelations of God made through symbol and human medium, but with the very image of God. He mediates between God and man in virtue of His connection with both. He leads men into the true relation to God by Himself perfectly fulfilling the human life in obedience to God’s will . . . . He is priest in virtue not of what is of the flesh, not by inherited office, but by virtue of His sympathy with men and His personal stainlessness . . . bringing men and God together by the pure and perfect surrender of Himself to God.30 모든 [모세의] 마련은 눈에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 물질적인 것, 그리고 일시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 . . 그것은 다가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였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실 참되고 영원한 것들. . . .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외적인 의식이나 일시적인 마련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숭배해야 한다; 그림자와 인간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불완전한 계시가 아니라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만나게 된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시며, 하나님과 사람을 서로 연결지어 주신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의 삶을 완전하게 성취함으로써 인간을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로 인도한다. . . . 그는 육체로 된 것이 아니며, 계승된 직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동정심과 그의 완전무결함에 의해서. . . 그리고 그의 순결하고 온전한 순종으로 인하여 인간과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제사장이다.30 |
All those visible, tangible things, and the men and special acts involved with their usage, had actually been only a shadow of the good things to come. Some clung to the shadow, to things that appealed to the senses, things that they could see, hear and feel, and this kept them from appreciating and genuinely embracing the far greater, grander, spiritual realities foreshadowed.31 They failed to realize that the common purpose of the old covenant and the new covenant was to bring men into fellowship with God, and that the old, for all its impressive material features, was not designed to accomplish this in the full, complete sense that the new alone was capable of.32 Contrasting the two, the apostle writes: 그 모든 가시적이고 만질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관련된 사람들과 특별한 행위들은 사실 앞으로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림자에 매달리고, 음영과 감각에 호소하는 것,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매달렸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훨씬 더 위대하고 웅장하고 영적인 실상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포용하는 것을 막았다.31 그들은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공통적인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친교를 맺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인상 깊은 물질적 특징 때문에, 오래된 것은 새로운 것만이 할 수 있는 온전한 의미에서 이것을 성취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는 것을 사도는 쓰고 있다.32 그 둘을 대조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If the ministry of the [old] covenant that condemned had glory, greater by far is the glory of the ministry that justifies. Indeed, when you compare that limited glory with this surpassing glory, the former should be declared no glory at all. If what was destined to pass away was given in glory, greater by far is the glory that endures . . . . We do not fix our gaze on what is seen but on what is unseen. What is seen is transitory; what is unseen lasts forever.33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있다 없어질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 . .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33 |
It took faith to accept that, to put excelling value on the spiritual rather than on the visible, to engage in worship that was not impressive to the eye, had no special appeal to the ear, was not subject to touch, but which appealed to the heart and to understanding; a worship that had no need of special places, special times, special forms and functions, but that found its place in the day-long, everyday life of the person. It took faith to accept that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his Son was the one and only essential, that all other things are secondary, even, if need be, dispensable. It takes the same kind of faith to make a similar placement of values in our time. 눈에 보이는 것보다 영적인 것에 뛰어난 가치를 두고, 눈에 인상적으로 보이지 않고 , 귀에는 특별한 호소력을 주지 않는 숭배에 참여하는 것, 접촉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과 이해력에 호소하는 것;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특별한 형태나 기능이 필요한 숭배가 아니라, 한 인격의 매일의 삶과 전시간 드리는 숭배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했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유일하고 본질적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필요하더라도 이차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했다. 우리 시대에도 비슷한 가치관을 만드는 데는 같은 종류의 믿음이 필요하다. |
The “Body of Christ,” a Religious Organization or a Family-like Community? '그리스도의 몸', 종교 조직인가, 아니면 가족 같은 공동체인가? If we enter into such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 faith in his Son and his Son’s sacrifice, we do not stand alone. We become part of that “free people” whose “law” is the law of love, written not on tablets but on human hearts.34 All of these are described as forming “the body of Christ.”35 Joining some religious organization, denomination or church has nothing whatsoever to do with entry into that body. We become members of that body of Christ in only one way, by our faith. Whoever has accepted God’s Son as his Head becomes part of that body.36 It is the individual, personal faith of each one that connects him or her to that Head, and the guiding headship of Christ always continues available to each one as a person. Though forming part of a collective body because of a mutually shared faith, no one is dependent on the intervention or mediation of another member or group of members to have access to that headship or to receive its direction. For “Christ is the head of every man” and, through Christ, God gives to “each one [to each man and to each woman]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for the common good,” allotting His gifts to “each one individually.”37 There are “varieties of gifts,” “varieties of services, and “varieties of activities,” but it is the “same Spirit,” the “same Lord,” and the “same God, who activates all of them in everyone.”38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과 그 아들의 희생에 대한 믿음으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홀로 외롭게 서 있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의 법인 "자유민"의 일부가 된다. 사랑의 법은 돌판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쓰여진다.34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으로 묘사된다.35 어떤 종교단체, 교단, 교회에 가입하는 것은 그 몸으로 들어가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성원이 된다. 하나님의 아들을 머리로 받아들인 사람은 그 몸의 일부가 된다.36 그 머리를 연결하는 것은 각자의 개인적인, 인격적 믿음이며, 그리스도의 머리직분의 안내는 각자에게 한 인격으로서 언제나 이용가능하다. 상호 공유된 믿음 때문에 집합적인 몸의 일부를 이루지만, 그 누구도 다른 성원이나 성원들의 집단적 개입이나 조정에 의존하여 머리직분에 접근하거나 지시를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이시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각자에게[각 남자와 각 여자에게]공동의 유익을 위해 성령을 주어 "각자 개인적으로" 선물을 할당하신다.37 다양한 봉사와 다양한 활동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선물이 있지만 " 각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활성화시키시는 같은 성령이요 같은 주이며 같은 하나님에게서 온다.38 This fact of personal relationship to God and Christ is stated in another way in Jesus’ words recorded at John chapter fifteen. He there represents himself as a vine and his followers as branches joined to that vine. He does not present himself as simply the roots of the vine and say that the congregation is the stem to which his followers must be attached. Neither is the vital connection an attachment to other branches. It is to Christ, the vine, and to Christ alone. It is by virtue of their holding firmly to him, and to him only, as the life-giving vine that they are all drawn into a unity. They remain in that vine by ‘abiding in his love.’ That love is the power that binds them into a unity, Christ’s body.39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이 사실은 요한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에 또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거기에는 그는 포도나무로, 그의 추종자들은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나타낸다. 그는 자신을 단순히 덩굴의 뿌리로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이 자신의 추종자들이 붙여야 할 줄기라고 말한다. 다른 가지에 접 붙이는 것은 생명을 얻게하는 연결이 아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곧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들을 모두 연합하게 한 것은, 오직 생명을 주는 포도나무로서, 그를 굳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사랑에 머물러' 그 덩굴에 남아 있다. 그 사랑은 그들을 단결하게 하는 힘,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39 As members of that body, it is also true that “individually we are members one of another.”40 Christians are shown to be, not members of a religious system, but members of a religious community, a family-like body of persons under a family head, God’s Son. The term “household” as in “household of faith,” is used to describe it and that term emphasizes the family-like nature of the community.41 Describing the effect of the good news for Gentile believers in opening up to them a new relationship, the apostle writes: 그 몸의 성원으로서,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다.40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시스템의 구성원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가장 아래 있는 인간의 가족 같은 몸인 하나님의 아들이다. "믿음의 가정"에서와 같이 "가정"이라는 용어는 그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그 용어는 공동체의 가족 같은 성격을 강조한다.41 신자들이 그들에게 새로운 관계를 여는 데 있어서 이방인에게 미치는 좋은 소식의 영향을 묘사하면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Now in Christ Jesus you who once were far off have been brought near by the blood of Christ. For he is our peace . . . that he might reconcile both groups [Jew and Gentile] to God in one body through the cross . . . through him both of us have access in one Spirit to the Father. So then you are no longer strangers and aliens, but you are citizens with the saints and also members of the household of God, built up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ornerstone. In him the whole structure is joined together and grows into a holy temple in the Lord; in whom you also are built together spiritually into a dwelling place for God.42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42 It is true that, while called God’s “household,” they are also spoken of as “citizens,” members of “a holy nation.”43 This might seem to lend support to a strong “organizational” aspect to the community. But although Christians are likened to a nation, no emphasis is placed on the concept of earthly, visible organization. They are reminded that thei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that they should be like those men of old who were looking forward to “the city with foundations,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to “a better country—a heavenly one.”44 (Compare Hebrews 13:14.) They are all “fellow citizens” of equal rank, and their only ruler is a heavenly one. Their being fellow citizens is, in fact, by virtue of all having Christ as their King, and they look to no earthly ruler, nor to any form of governing body serving as an earthly capital— at Jerusalem, Rome, Brooklyn or anywhere else—through which law and directives flow. The king’s channel is by holy Spirit, which guides, directs, instructs. Had the apostles wished to emphasize the concept of organization this analogy of nationhood would have been ideally suited for doing so. Instead, in their writings they only rarely refer to this aspect and never stress it as dominant. Rather it is the family relationship that is consistently given greatest prominence. When they address fellow believers it is never as “my fellow citizens,” but consistently and predominantly as “my brothers.” (Likewise, though they form a spiritual temple and a royal priesthood, they do not address others as “my fellow priests.”)45 They are all part of God’s household, brothers and sisters in the one family under Christ.46 Christ himself had laid the foundation for this family viewpoint, saying: 하나님의 "집안 식구"라고 불리는 동시에, 그들은 또한 "시민","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사실이다.43 이것은 지역사회의 강력한 "조직"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한 민족에 비유되지만, 눈에 보이는 지상조직의 개념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그들은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과 "설계하고 건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기초가 있는 도시"를 옛 사람들이 고대하던 "더 나은 곳 곧 하늘에 속한 거처"44 (히브리 13:14 비교)라는 것을 상기한다. 그들은 모두 동등한 신분의 "동료 시민"이며, 그들의 유일한 통치자는 하늘에 계시는 분이다. 그들의 동료시민은 사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으로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 로마, 브루클린 또는 다른 어느 곳에서든 지상의 도시에서 법과 지시가 흐르는 어떤 형태의 통치가 있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조직개념을 강조하고자 했다면 이러한 민족성의 비유는 그렇게 하는데 이상적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의 글에서 이러한 측면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며, 결코 조직이 지배적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 관계를 두드러지게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들이 동료 신자들에게 말할 때에, 결코 "나의 동료시민"이 아니라, 한결같이 "나의 형제"라 부른다.(마찬가지로, 그들이 영적 성전을 이루고,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나의 동료 제사장들"이라고 부르지 않는다.)45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 아래 한 집안에서 하나님의 집안의 형제와 자매이다.46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족적 관점의 기초를 세웠다: “Who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And looking around at those who sat around him, he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47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47 In the same spirit, Paul wrote to Timothy: 이 동일한 영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Do not speak harshly to an older man, but speak to him as to a father, to younger men as brothers, to older women as mothers, to younger women as sisters—with absolute purity.48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48 Why, in the face of all such evidence and the apostolic example, would a religious system favor placing dominant emphasis on an organizational concept rather than this family relationship? The evident reason is because the latter, if genuinely applied, does not lend itself to an authoritarian approach. For in this family, there is “only one Father, and he is in heaven,” and “only one Master, and you are all brothers.”49 이러한 모든 증거와 사도의 본을 앞에 두고도, 종교시스템이 가족관계보다 조직적 개념을 지배적으로 강조하는 것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한 이유는, 가족관계를 강조하여 진정으로 적용한다면, 조직의 권위주의적인 접근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가족의 구성은 '오직 한분의 아버지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한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나머지 모두는 형제이다.49 |
The Christian Ekklesia of the First Century 1세기 그리스도인의 에클레시아 The most frequent expression foun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to describe Christians collectively is the Greek term ekklesia, usually rendered “church” or “congregation.” It is notable, however, that this term of itself has no intrinsic religious meaning. Its common use in Greek was to describe an “assembly” of citizens called together to decide matters affecting their welfare. We find it used in this typical, secular, non-religious sense at Acts 19:32, 39, 41, in describing the hastily called gathering of silversmiths at Ephesus. It is evident that, of itself, it carries no idea of an “organization” in the sense of a structured arrangement, but simply that of a gathering of people to consider some matter of mutual interest, or of the people themselves so assembled.50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집합적으로 묘사하는 가장 흔한 표현은 그리스어 단어 "에클레시아"로 보통 "교회" 또는 "회중"으로 번역된다. 다만 이 용어 자체는 종교로서의 고유한 의미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어로 그것의 일반적인 용례는 그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결정하기 위해 함께 소집된 시민들의 모임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사도행전 19: 32, 39, 41에서 이 전형적이고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인 의미에서, 에베소에서 급히 초청된 은세공인들의 모임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을 보게 된다. 용어 자체로, 그것은 구조화된 마련이라는 의미에서의 "조직"이라는 뜻이 들어 있지 않고, 단지 상호 관심사를 고려하기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또는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 명백하다.50 In the first century Christians did not “belong” to a local ecclesia, church or congregation in the sense of belonging to, or having formal membership in, a religious organization. If they gathered with others they were, by virtue of the act of gathering, part of the local “gathering” or “assembly” (ekklesia ). The “call” that drew them together did not come from some religious authority. It was the call of the good news that drew them, a call not merely to share their own thoughts and views but primarily to hear God’s message. And throughout the first and second centuries when they gathered it was, not in special religious buildings, but in homes.51 Discussing the term ekklesia as used by Paul in his early letters, scholar Robert Banks states: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종교 단체에 소속되거나 정식으로 가입하는 의미에서 지방의 회당, 교회, 회중에 "속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였다면, 그들은 모이는 행위 때문에 지역적인 "모임" 또는 "집회" (에클레시아)의 일부였다. 그들을 한데 모이라는 "요청"은 어떤 종교 권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을 모이게 한 것은 좋은 소식을 들어라는 초대였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한 초대였다. 그리고 1세기와 2세기에 걸쳐서 그들이 사람들을 모았던 장소는, 특별한 종교 건물이 아니라, 가정이었다.51 바울이 초기 편지에서 사용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논하면서, 학자인 로버트 뱅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 never during this period is the term applied to the building in which Christians meet. Whether we are considering the smaller gatherings of only some Christians in a city or the larger meetings involving the whole Christian population [in that city], it is in the home of one of the members that ekklesia is held—for example in the ‘upper room’ [Acts 20:8]. Not until the third century do we have evidence of special buildings being constructed for Christian gatherings and, even then, they were modeled on the room into which guests were received in the typical Roman and Greek household.52 . . .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건물에 적용되는 용어는 결코 아니다. 우리가 한 도시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적은 모임이나 [그 도시에서] 또는 전체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더 큰 모임, 어느 것을 고려하든 간에, 에클레시아가 열리는 것은 성원들 중 한 사람의 집(예: '다락방')이었다. [행 20: 8] 3세기가 되어서야 그리스도인 모임을 위해 특별한 건물들이 지어졌다는 증거를 우리는 갖게 되었고, 심지어 그 때에도, 그들은 로마와 그리스의 전형적인 가정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방을 모델로 삼았다.52 Similarly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commentary states: <해설자의 그리스어 성서>는 이와 비슷하게 논평한다: Up to the third century we have no certain evidence of the existence of church buildings for the purpose of worship; all references point to private houses for this.53 3세기까지 우리는 예배의 목적을 위한 교회 건물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예배를 위해 언급된 모든 장소는 민가를 가리킨다.53 Since they themselves formed a spiritual “dwelling place for God,” they had no need of special buildings for worship (nor did God’s “dwelling” in them limit itself to certain times on certain days).54 As archeological evidence shows, homes at that time rarely had a room capable of holding more than about forty persons.55 The gatherings therefore were relatively small. Such home gatherings provided a context in which the sense of a family-like relationship could develop, for these provided an atmosphere conducive to the expression of the bonds that joined them in a brotherhood, and favorable for that sense of brotherhood to grow and to deepen. They could more readily come to know one another better, become more aware of mutual needs, interests and concerns. 건물이 아닌 그들의 모임 자체가 영적인 '하나님의 거주지'를 형성했기 때문에, 예배를 위한 특별한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들의 모임에 하나님이 '거주' 한다는 자체가 특정한 날에 특정한 시간으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었다.)54 고고학적 증거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집들은 40명 이상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이 거의 없었다.55 따라서 모임은 비교적 적었다. 이러한 가정모임은 가족적 관계라는 인식이 발전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형제애의 유대감을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형제애 의식이 성장하고 깊어지는 데 유리한 분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쉽게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상호간의 필요, 이해관계, 관심사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This picture of a congregation may be quite different from the prevailing viewpoint of most persons today, certainly different from what most are accustomed to. Yet it embraces what is perhaps an even more fundamental aspect of Christianity and of the essential meaning of the word “congregation” or “church” (ekklesia) in Christian terms. Pointing to this, well-known Swiss scholar Emil Brünner writes: 이러한 형태의 모임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해진 모임의 개념과는 확실히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훨씬 더 근본적인 측면과 그리스도교 용어로 "회중" 또는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스위스의 유명한 학자 에밀 브뤼너는 이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Where the Word of God is preached and believed, where two or three meet in the name of Christ, there is the Church. Whatever else may be said about the Church, this is fundamental. This statement has never—not even at the present day—been understood in all its revolutionary power. The meeting of two or three must be recognized to be the Church in however imperfect a form. When a father gathers his household round him to expound the Gospel to them in his humble simple way, or where a layman, out of a full heart, proclaims the word of God to a group of young people, there is the Church. Whoever departs from this rule, whoever thinks that something else has to be added to make this a real Church, has misunderstood the meaning of the very heart of the evangelical Faith.56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 믿음을 얻게 되는 곳,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교회가 있다. 교회에 대해 다른 어떤 말을 해도, 이것이 근본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는ㅡ심지어 오늘날에도ㅡ 그 모든 혁명적 힘이 이해된 적이 없다. 두세 사람의 만남은 아무리 불완전한 형태라도 교회로 인정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가족 식구를 모아 겸손과 소박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평신도인 사람이라도 온전한 마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한 집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그것은 교회가 된다. 이러한 규칙을 떠나거나, 진짜 교회로 만들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적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56 Most today do feel that “something else has to be added.” The very simplicity of the matter goes contrary to their concept of a “congregation.” Religions generally seek to superimpose the idea of “organization” or “denomination,” with an accompanying authority structure, as necessary to validate any gathering as a “real” Christian congregation. The Scriptural message does not support them. Christ’s promise does not support them.57 The gathering of two or three need not be all that one would wish, nor should it deaden the impelling force to reach out to yet others, but it is sufficient for Christ’s words to apply: “I am there among them.” The addition of a hundred or a thousand persons to the two or three, the transferal of the gathering place to some large building, or the presence of a dozen or more men viewed as organizationally appointed office-holders, would not add one whit to the “realness” of this being a Christian gathering or congregation. The presence of God’s Son, the Head of the congregation, is the sole validation needed.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문제의 단순함 바로 그것이 오늘날의 그들이 생각하는 "회중"이라는 개념과 배치된다. 종교는 일반적으로 "조직" 또는 "교단"이라는 개념을 수반하는 권위 구조와 더불어 "참된" 그리스도인 회중이라는 어떤 모임으로서 유효하게 하기 위한 필요한 요소를 추가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그러한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약속은 그런 점들을 지지하지 않는다.57 두세 사람이 모이는 것이 바라는 전부가 될 필요도 없고,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 접근을 위한 노력의 추진을 줄여서도 안 된다. 오히려, "그들 가운데 내가 있겠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두세명에게 백명 혹은 천명을 더하는 것, 혹은 어떤 큰 건물에 집결지를 이전하는 것, 또는 십여명 정도의 사람들의 모임에 조직적으로 사무실 관리자로 임명하는 것 등,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이나 회중의 "진정성"을 조금도 높이는 것이 아니다. 회중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임재가 진정성을 유효하게 하는데 필요한 유일한 요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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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The Watchtower, August 1, 1982, pages 18, 19.
28 1982년 8월 1일 파수대 18, 19 면.
29 2 Corinthians 5:7.
29 고후 5:7.
30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Vol. IV, page 239.
30 <해설자의 그리스어 성서> 제4권, 239면
31 Colossians 2:16, 17; Hebrews 9:11-14, 23-26; 10:1, 19-22; 12:18-24.
31 골 2:16, 17; 히 9:11-14, 23-26; 10:1, 19-22; 12:18-24.
32 Emphasizing that the basic purpose of his work was to bring men
into an approved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the apostle Paul described
it as “a ministry of reconciliation,” and stated: “We are ambassadors for Christ,
since God is making his appeal through us; we entreat you on behalf of Christ,
be reconciled to God.”—2 Corinthians 5:18, 20, NRSV.
32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의 기본 목적이 사람을 하나님과 승인된 개인적 관계로 끌어들이는 것임을 강조하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라고 진술했다.—고린도후서 5:18, 20 새번역.
33 2 Corinthians 3:9-11; 4:18, NAB.
33 고후 3:9-11; 4:18, 공동
34 James 2:8, 12; Jeremiah 31:33-34; Romans 7:6; Hebrews 8:10-13.
34 약 2:8, 12; 렘 31:33-34; 롬 7:6; 히 8:10-13.
35 Romans 12:4,5; 1 Corinthians 12:12, 13.
35 롬 12:4, 5; 고전 12:12, 13
36 1 Corinthians 10:16, 17; Ephesians 4:4-6, 15, 16. The Watch Tower doctrine of two classes of Christians creates an impossible situation for those not counted as in the “anointed” class. If not of that class, they are not included in the “body of Christ.” Yet, surely these accept Christ as their Head, and if so, how can they not be part of his body?
36 고린도전서 10: 16, 17; 에베소서 4: 4-6, 15, 16. 두 반열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워치타워 교리는 "기름부음" 받은 반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만약 그런 반열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의 머리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그의 몸에 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7 1 Corinthians 11:3; 12:6-11, NRSV.
37 고전 11:3; 12:6-11, NRSV.
38 1 Corinthians 12:4-6, 27-31, NRSV.
38 고전 12:4-6, 27-31, NRSV.
39 John 15:1-17.
39 요 15:1-17.
40 Romans 12:5, NRSV.
40 롬 12:5, NRSV.
41 Galatians 6:10; compare Ephesians 2:19.
41 갈 6:10; 엡 2:19 비교.
42 Ephesians 2:13-22, NRSV; compare also 1 Corinthians 6:19.
42 엡 2:13-22,개정 ; 고전 6:19과 비교.
43 Ephesians 2:19; Hebrews 8:11; 1 Peter 2:9.
43 엡 2:19; 히 8:11; 벧전 2:9.
44 Philippians 3:20; Hebrews 11:8-10, 15, 16.
44 빌 3:20; 히 11:8-10, 15, 16.
45 Ephesians 2:21, 22; 1 Peter 2:5, 9.
45 엡 2:21, 22; 벧전 2:5, 9.
46 1 Timothy 3:15; 2 Timothy 2:19-21; Hebrews 3:6; 1 Peter 4:17.
46 딤전 3:15; 딤후 2:19-21; 히 3:6; 벧전 4:17.
47 Mark 3:33-35, NRSV.
47 막 3:33-35, 개정
48 1 Timothy 5:1, 2, NRSV.
48 딤전 5:1, 2, 개정
49 Matthew 23:8, 9, JB.
49 마태 23:8, 9, JB.
50 See, for example, the discussion of the term in Paul’s Idea of Community, pages 34, 35.
50 예를 들면,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의 논의 34, 35 면
51 Compare Romans 16:3-5; 1 Corinthians 16:19; Colossians 4:15; Philemon 2.
51 롬 16:3-5; 고전 16:19; 골 4:15; 빌 2.
52 Paul’s Idea of Community, page 41
52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 41 면
53 Vol. IV, page 212 (commenting on Philemon verse 2.).
53 제 IV 권, 212면(빌레몬의 2절에 대한 주석)
54 Ephesians 2:21, 22.
54 엡 2:21, 22.
55 See Paul’s Idea of Community, pages 41, 42; St. Paul’s Corinth, Texts and Archaeology, Jerome Murphy-O’Connor (Michael Glazier, Inc., Wilmington, 1983) pages 153-159.
55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 41, 42 면 성 바울의 고린도 본문과 고고학, Jerome Murphy-O'Connor (Michael Glazier, Inc., Wilmington, 1983년판)를 참조.
56 The Divine Imperative, Emil Brünner (The Westminster Press, Philadelphia, 1937), page 529.
56 <절대 신성>, 에밀 브뤼너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37년) 529면.
57 Matthew 18:20.
57 마태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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