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그방송홈페이지의 프로그램소개인데
기가 찹니다. 방송보면 더 열받습니다.
이화여대에 동상있고 장난아닙니다.
20세기 한국인
20세기 한국인<여성교육의 선구자, 김활란>
방송: 3월 14일(목) 오후 8시
요즘 한국 여성의 사회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해지고 있는 실정이다.여성의 사회적 지휘는 점차 향상되어 가고 의식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 이를 증명해 주듯이 국내외 적으로 이름을 드높인 여류인사들을 주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의 하나로 이화여자 대학교 초대 총장 김활란을 소개한다
근대화 당시 신여성 교육의 발상지였던 이화여고는 오늘날까지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명문학교로 확실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1886년 11월 학생 35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식 기와집이 마련됐고 평소 신문물에 관심을 기울였던 고종은 백골처럼 깨끗하고 맑다는 뜻의 이화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여성의 사회 활동을 엄격히 제한해왔던 조선사회에서 당시 이화의 교육 내용은 가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1899년 인천, 김활란이 태어났다. 당시 제물포에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은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하여 조선인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자유와 평등, 사랑에 기초한 기독교 교리는 서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김활란의 가족들도 기독교 교리를 따르는 절실한 신자였다. 가세가 기운 김활란 가족은 좋은 환경을 찾아 서울로 오게 되고 김활란은 이때부터 이화학당과 평생 인연을 맺게된다. 당시 이화학당을 이끌어가던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 이곳에서 김활란은 열심히 학문에 매달렸고 독실한 신앙 생활도 계속해 나갔다. 그녀는 당시의 종교 체험을 통해서 교육자의 길이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교육을 통해 인습의 굴레에 갇혀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구해내겠다는 신념을 안고 더욱 학업에 매진하던 김활란은 1917년 이화 학당 최고의 영예인 메이퀸으로 뽑히는 영광을 얻는다. 드디어 김활란은 교사로써 첫 걸음을 내 뒷게 된다. 1922년 9월 그녀는 사회적 현실에 적응을 못하여 미국 행 배에 몸을 싣는다. 교육을 통한 의식개혁으로 독립을 찾아야겠다는 의지였다. 마침내 1931년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박사가 미국의 명문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탄생되었다. 그후 학교로 다시 돌아온 김활란은 부학당으로 재직하여 종교와 교육학을 강의하게 된다. 그녀는 여자들이 바로서야 자녀들이 바로서고 그래야 나라도 바로 설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정신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녀의 강의는 수많은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으며 학생들로부터의 존경과 동료들로부터의 신뢰를 받으며 하루하루의 평온을 누렸다. 일찍이 우리 나라 여성 교육의 산실로 자리잡아온 이화 학당은 1935년 3월 마침내 신촌으로 확장 이전하게되고 본격적으로 여성 교육의 장을 마련하게 되었다. 1939년, 김활란은 이화에 제 7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사회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그 즈음 우리 민족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비참해져 갔다. 또한 내선일체라는 미명아래 한국에 대한 착취와 박해는 점점 더 해만 갔다. 일제 시대에 접어든 때, 김활란은 일제치하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어야만 했는데… 그녀는 천성이라는 성으로 창시계명까지 하는데... 당시 그녀는 이화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김활란은 이화를 단순한 학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화를 잃는다면 여성 교육의 암흑기를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1945년 마침내 찾아온 조국애, 감격적인 해방과 함께 대한 의식 교육이 쌓여오면서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해방 직후부터 김활란은 반탁운동을 벌이며 자주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아래 지내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녀는 종합대학 설립이 우선 이라는 생각아래 첫 번째로 승인을 얻어냈다. 이화 학당은 여러 이름으로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쳐 이화여자 대학교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되었다.
동양 최대의 이화 여자 대강당은 교육인으로써, 신념인으로써 그녀가 이루고자했던 이화의 상징물이었다. 이화는 지금도 명실 상부한 세계의 명문 여대들 중에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김활란의 이화대학의 총장 퇴임후 그녀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민간 외교 활동인으로써 부각을 나타냈던 당시 퇴임후에도 순회대사직을 맞게된다. 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일은 하느님과 가까이 일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었다. 다락방 전도 협회 이것을 중심으로 김활란은 본격적인 복음화 운동을 시작한다. 신앙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일생을 여성 교육에 몸바쳐왔던 김활란. 그녀는 순수 복음단체인 금란 집회를 복음해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 전파를 실행해 오고 있었다.
김활란, 그녀는 세기적인 지도자이며 조국의 영원한 여성 지도자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