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속의 부르즈 칼리)
조금 뛰어가는데 공사장 인부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안전모에 콧수염을 기른 시커먼 중동 남자였다. 잠시 주저하다 용기를 냈다. “Excuse me!” 하고는, 부르즈 칼리파를 가리키며 맞는 길이냐고 물었다. 그는 시원스럽게 ‘Yes! Yes!’ 라고 답했다. 역시 내 직감이 맞았어! 흡족한 마음으로 한 10분 정도 모래가 겹겹이 쌓인 맨 콘크리트 도로를 달렸다. 한데 공사판이 나오더니만 아예 길은 없어지고 바다가 앞을 가로막았다. 황당했다. 애당초 갈 길이 아니었다. 두바이 남자가 아무렇게나 대답한 것이다.
포기할까도 했지만 이왕 먹는 마음이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빙둘러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20여분을 달려 쇼핑센터 주차장과 ‘Toys R Us’ 매장 앞을 지나 차들이 쌩쌩 달리는 모터웨이에 도착했다. 도로 방향이 대충 도심 쪽이라 장애물이 없다면 부르즈 칼리파까지 가는데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차량 행렬이 끊기는 틈을 타 ‘후다닥’ 도로 위로 뛰어 올랐다. 다행이 좁은 인도가 있어 달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드디어 정상 코스에서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됐다. 사막은 말 그대로 굴곡 없이 평평했다. 한발 한발 디딜 때마다 버석버석 모래가 느껴졌다. 겨울 그것도 오후였지만 사막의 열기도 만만치 않았다. 메마른 불바람 속을 헤치고 나간다고나 할까? 인도나 갓길이 없는 구간은 차를 피해 도로에서 벗어나 사막 위를 달렸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뜨거운 모랫길이었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부르즈 칼리파와의 거리는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각도도 많이 빗나가 있었다. 제대로 가는건지 조바심이 났다. 복잡한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꺾으니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있었다. 차를 요리조리 피하며 그 위로 올라서니 부르즈 칼리파가 거의 정면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멀리 있었지만 제법 위안이 됐다.
바다 위를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드니 레인코브 공원만큼은 아니지만 모랫길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오랜만 달리기’의 피로감을 씻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전신이 노곤해졌다. 설상가상 날도 저물고 있었다. 살짝 겁이 났다. 내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다연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깜깜 어둠’을 만나 길을 잃는다면? 끔찍한 일이다. 이래저래 ‘하늘탑’만 바라보고 그저 달릴 뿐이었다.
달리면서 눈을 들어 앞 하늘을 바라보니 온통 붉었다. 흐물흐믈 초대형 홍시 하나가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칼리파 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석양에 벌겋게 젖은 두바이 CBD는 미래 도시를 묘사한 초현실주의 그림 속의 한 장면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노을과 노을이 빚어낸 바알간 어둠은 하늘과 땅, 자연과 인간, 사막과 도시의 경계를 넘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시공(時空)을 창조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새 환상처럼 펼쳐진 그 붉은 지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