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결혼전 청년이 되기 까지 20여년 동안 살던 수도국산 달동네
인천시 동구 송현동 19번지 일대를 40여년만에 둘러보았습니다.
우리집이 이곳에 이사온건 초등2학년 때로 기억됩니다.
숨가쁘게 오르던 고갯길은 잘 만들어진 아스팔트 자동차길로,
빗탈길 한 지붕 세가족 옹기종기 게딱지 같던 집들은 고층아파트 단지로
강냉이 뻥튀기집, 이발소,솜틀집,연탄가계가 있던 곳은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과 아름다운 공원으로 변해 있었습니다.그야 말로 천지개벽입니다.
비오는 날 주인 없는 틈을타 때거지로 몰려가서 풋풋한 복숭아 서리하던
김서방네 복숭아 밭.그 많던 호박밭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옛 모습들... 박물관 안에 모형으로 남아있을 뿐....
큰 길을 지나 동네로 들어서면 길은 골목길로 더 좁아지고, 윗동네로 갈수록
가파르고 좁아져서 사람이 마주쳐 올라치면 서로 어께를 비켜줘야 했어요.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도 달동네 사람들은 비탈길 골목에서 박물장사와
물건을 흥정하고 아주머니들 삼삼오오 모여 미주알 고주안 이야기 나누고,
시시덕거리다가도 , 때로는 대판 싸우면서도 정붙이고 살았던 달동네 사람들 ...
초등학교 시절,좁은 골목에서 구슬치기,딱지치기,심지어는 갖가지
잡동산이를 놓고 따먹는 낭갑빠이(일본말인듯)를 밥먹듯 하며 즐겨 놀았어요.
재수 좋아 많이 따는 날은 부자된 기분으로 마냥 뻐겼던 때가 생각납니다.
앞집 장원이 옆집 기흥이 뒷집에 살던 순덕이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한국전쟁후 1960년대 까지 어렵고 배고팠던 시절이라,퇴근길 동네 입구의
연탄가계에서 새끼줄에 꿴 연탄 한 장 사서 들고,구멍가계에 들러 봉지쌀
한줌사서 어렵사리 하루를 살아야 했던 달동네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어린 내가 보기에도 많이 민망해 보였어요.
우리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 달동네에서 살았습니다.하지만 부모님께서
억척스럽게 생활하셨던 터라서 쌀과 연탄을 미리미리 준비해 놓을 수 있었지요.
아버님이 회사에 다니셨지만 어머니는 행상을 하셔서 가계에 크게 보템을 하셨습니다.
식구가 자그만치 일곱.우째 이리 많았을까, 디게 많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행상 나간 어머니께서 재수 좋아 물건을 다 팔라치면 빈 함지박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꽁치 서너마리 손에 들고 비탈길 오르는 마음도 그만큼 가벼웠을 겁니다.
꽁치 굽는 냄새 동네방네 진동하고.식구들 흡족해할 모습에 웃음 가득
힘든 줄도 모르고 종종걸음 했을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운데 토막은 꼭 내게 주셨고, 그럴적 마다 어린 소견에도 형제들 보기에 민망했죠.
그러지 마세요.말씀드렸지만 어머나께서는 막무가네셨어요.그런 어머니가
재겐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솔직히 사랑을 독차지 하는게 좋다고만 생각진 않았거든요.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
서림초등학교에서 3명만이 인천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어머님께서는 하늘을 날겄
같다 시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동네반장일을 보셨기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터는 각종 고지서
전달을 내가 도맡아 했습니다. 왠 세금고지서며 잡부금 통지서가 그리도
많았는지...
우리집은 달동네 중턱 밑에 있었지만 우리반 세대수가 많아서 고갯길 넘어
수도국산 정문 아래쪽 까지 갔다 오는데 30분 가까이 걸렸어요.비탈길을
뛰어서 오르내릴 때마다 많은 생각을 했어요.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네가 열심히 공부 해주면 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어머니
께서는 늘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에 시간을 아끼려고 비탈길을 아주 힘차게 뛰어서
오르내렸던 기억이 느닷없이 되살아 나서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수도국산(水道局山)의 본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한 바닷가의 자그마한 언덕이었다고 합니다.
송현(松峴,솔 고개)동,송림(松林,소나무숲)동의 지명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된겁니다.
이근처 초등학교 이름도 송림초등학교,서림초등학교가 있는데 소나무와 관련이 있다
싶지만 지금은 소나무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개발로 인해 소나무가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수도국산 배수지 정문
일정때 만들어 졌던 정문은 지금도 그자리에 있었습니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요.
인천은 본래 우물이 적을 뿐 아니라 수질 또한 나빠서 개항 이후 증가한 인구와 선박
으로 물 확보가 큰 고민이었습니다.일제 통감부의 강압에 의해
한국정부는 1906년 수도국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연결하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
했고,'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 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수도국산 관리실
수도국산 일대가 공원화되면서 관리실로 사용되던 이 건물이 공중화장실로 개조되어
사용중입니다.
중학학교 때 만해도 수도국산은 철조망이 처져있었고 경비가 삼엄하여 진입이 통제되었
습니다.60~70년대의 사회혼란시기라 간첩이 물탱크에 약을 치면 인천시민이
치명타를 입을거라는 염려가 팽배했던 시절이었으니까 통제는 시민 모두의
자연스러운 합의사항이었을 겁니다.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23호)
1908년 만들어진 제수변실은 원통형 콘크리트 구조로 제수벨브(배수관의 단수,유압조절)를
보호하는 역할.1905년 일본인이 서울과 인천 사이의 상수도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경인수도 설계를 완성. 이 설계도에 의하면 수원지(水源池)는 한강 연안의
노량진 일대이고 급수지역은 서울,용산,인천지역이었습니다.이에 따라 송현배수지는 1906년
1월에 착공하여 1908년 준공되었으며 1910년 10월에 노량진 수원지 정수시설을 준공해
노량진~인천 사이에 32.62km의 수도관을 부설하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급수를 시작.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평방미터이고,5.000평방미터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서 급수받은 지역은 동구 일원과 중구 일부지역이고 저수능력은 20.000톤으로
준공 당시와 비슷하다고 합니다.처음 준공당시는 인천시민 모두의 식수원 구실을 했었는데
말입니다.그동안 인천의 인구가 30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참고자료: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전시도록(2006년 10월 15일 발행)
공원화된 지금 3개의 저수조위에 잔디를 심어 아파트 주민이 체육시설로 활용하고 있어요.
아는 사람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으나 깨끗하게 변화된 주거 환경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이 달동네에 청소년들이 마음껏 신바람나게 뛰며 놀 수 있는 공간이 생기다니 ....그리고
이 달동네 꼭대기를 승용차로 오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헉!
첫댓글 어렸을때 뭣도 모르고 수도곡산이라 부르던 생각이 새삼 납니다. 우리 동네에서 거기가 그리도 멀어보이든 곳. 참 감회가 새롭네요. 나도 한번 가보고 시포...
아침 운동하기 좋은곳...할미꽃도 많이 모여요...ㅋㅋ..
호박꽃도 꽃인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