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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9년 가을 지리산둘레길 구간중 벽송사구간을 3회분량으로 옮깁니다.
** sfm홈피 2009년 11월에 실린 글입니다.
아! 벽송사(3)
아! 벽송사의 아린 상처여!!!
한자로 碧松寺는 푸른 소나무 절이다.
소나무가 많은 절, 또는 푸른 솔로 둘러 싸인 절이란 이름일게다.
하지만, 길손이 들른 날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다만 절원터, 본시 절이 있던 자리 뒤쪽으로만 赤松들이 長松인째로 둘러 서 있다.
물론, 원터 마당의 美人松과 오른 옆자락의 道人松이 碧松을 대신하고 있지만...
역사를 거꾸로 돌이켜 보자.
무슨 이념논쟁을 다시 하자는 말이 아니다.
역사는 바로 알아야 한다. 모르고 있는 역사는 차라리 낫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는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믿는다.
"공비토별루트"
참 섬뜩한 말이다.
말 그대로의 뜻은 "공산비적을 싸그리 때려잡는 길" 이다.
말이란 참 우습다.
씨가 된 말이 씨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나라 운동선수들은 "악으로 깡으로" 라는 구호에 익숙하다.
어릴때부터 지도자나 선배들로부터 계속해서 물려받는 구호가 바로 이 구호다.
기본적인 인성교육은 팽개쳐두고, 오직 악으로 깡으로 이기는데만 집중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곳곳에서 사회적인 물의가 불거져 흉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이다.
빨치산.
외국어로 '파르티잔' 이 변형된 말이다.
외국어 이든지 뭐든지 내상식으론 "산에 빨리 치닫는 사람" 이다.
내주변에 빨치동무들이 많기 때문이다.동무들과 산에가면 빨치들이 내닫고 나면 난 항상 뒤처진다.
그럼 난 항상 투덜거리고...
그런데, 빨치산은 이런게 아니란다.
'빨갱이잔당'이란다. 무시무시한 빨간놈들 이란다.
빨갱이의 실체를 알아보자. 실제 빨간놈들인지?
해방되고 난후, 미군정은 남한전역의 정부수립과 치안유지가 가장 급선무였다.
그들 자신 코쟁이들로만 질서유지와 치안을 담당하기란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렇다고 조선인으로 급조하는데는 너무나도 시간이 촉박하였다.
그래서 손쉽게 구한놈들이 훈련되고 조직화되어 있던 일제에 부역한 똥개들이었다.
바로 이 똥개들에게 치안권을 내어준 꼴이다.
패망한 주인이 물러가고 새세계에서 응분의 처분만 기다리고 꼬리를 내리고 있던 일제똥개들에게
다시 완장과 호각을 채워 준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고, 상상해 보시라. 어떠했겠는가를...
죽기는 커녕 자기를 살려주고 완장까지 준 점령군 코쟁이들에게 백골난망하고, 만고충성을 맹세했슴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잘 길들여진 똥개들은 다시 활개를 치게 된다.
민초들을 치안유지라는 명목으로 더욱 더 물어 뜯는 결과로 나온다.
개가 어디 지 잘못을 알기나 하던가??
거기에다가 정부수립이 되고 이승만이가 정권을 잡는다.
國難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간 이승만은 거기에서 호위호식하며 마누라도 양코배기를 얻어서 잘 살았다.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것 마냥 몇 차례의 성명서 낭독한 것이 전부다.
해방되어 귀국한 이승만은 권력욕에 사로잡힌다.
상해시절부터 자기를 수반 안시켜준다고 삐쳐 달아난 농감태기가 아니던가?
더더구나 미친파(친미파)라 양코배기의 물심양면 지원까지 등에 업었슴에랴...
미국정부는 영어도 할 줄 아는 미국을 잘 아는 농감에게 정권을 맡겨야 지들의 꼭둑각시 역할을 잘 해낼테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독립지사, 투사들을 배제한채 이승만에게 남한 단독정부의 권력을 넘긴 것이다.
물론 남한 단독정부도 이승만의 작품이었슴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리 정권을 손에 넣은 이승만은 미군정에서 물려 받은 일제똥개들은 물론, 여기에다가 정부 주요관리들과
말단 면서기들에 이르기까지 일제에 부역한 충직한 일제 똥개들에게 다시 한번 충성의 맹세를 받고
죄를 사함은 물론, 갖가지 이권들을 민초들에게서 빼앗아 똥개들에게 넘긴 것이다.
이리하여 이승만정부는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조선의 민족정통성수립은 도외시한채,
자신들만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이들(똥개)에게 富와權力을 고스란히 넘겨준 것이다.
이 얼마나 치욕적이고 수치스런 역사이던가???
1945년 해방이 되고서 부터 정부수립전까지 온나라는 좌우대결이란 이념논쟁에 빠져들었다.
미군들이 상주하여 우익을 지원하는 형국이긴 하였으나, 해방전부터 지식인들이 중심이된
공산(사회)주의사상은 좌익세력의 근간이 되어 온나라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해방전 풀뿌리에나 의존하던 民草(풀뿌리백성)들은 民衆으로 세력화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민중은 민초와 다른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민초가 개인적인 초기개념'이라면, '민중은 무리를 이루어 세력화하고 의식화한다'는 점이다.
미군정이나 새로 수립된 정부(이승만)의 입장에서 볼때 실로 두려운 일이다.
게다가 북한에는 이미 소비에트연방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 공산정부가 들어서지 않았는가?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군정은 이승만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남한만의 우익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러른다.
'4.3사건'은 이러한 혼란정국에서 발생한다.
박헌영과 이주하를 축으로한 남조선노동당은 멀리 남쪽섬 제주도에까지 세력을 펼친다.
발생에서부터 종결될때까지의 세세한 사항은 구구절절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빨갱이'란 말이 생겨나고 함양땅 벽송사까지 영향을 주는 결과로 자리매김한다.
4.3사건 진압을 위하여 제주도에 투입될 국방경비대는 여수항에 주둔한다.
주둔중인 경비대내의 좌익군인 지창수와 김기회등이 제주도 투입을 거부하고 세력을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 "麗順事件"이다.
이 세력들은 대부분 체포되거나 사살되고 지창수등은 순천, 구례를 지나 연곡사뒤 피아골로 숨어든다.
이들이 바로 초기 빨치산이다.
지창수는 49년에 사살되기 전에 후기 빨치산 남부군의 이현상을 반란당시와 여기에서도 만났다고 한다.
후기 빨치산은 6.25전쟁에서 인천투입 미군의 상륙작전으로 허리가 꺽인 북한군중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과
남로당의 잔존세력들이 태백산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가장 은신이 용이한 지리산으로 피해서 들어 온 세력들이다.
여기에서 초기, 후기빨치산은 자연히 합해진다. 이현상이 남부군의 총사령이 된다.
여기서부터 휴전 10년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이 내원사계곡 끝자락에서 체포될때까지의 역사가
대한민국 빨치산의 역사다.
푸른솔이 우거진 벽송사는 서산스님이 주석했던 곳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산스님은 상좌인 사명스님과 더불어 임진란때 승병으로 출군해 혁혁한 전공을 올린 僧將이다.
부처님法도 나라가 있고나서라는 스님의 기개에 공감하는 바이다.
그래서 벽송절은 옛날부터 護國사찰로서 이름이 드 높았다.
절자리는 지리산의 빼어난 경관과 어우러진다.
앞녘은 천왕봉이 마주 보이는 칠선계곡이요, 왼녘은 중봉으로 향하는 광점동 쑥밭재며,
오른녘은 한신계곡을 통해서 오르는 세석평전이다.
이렇다보니 벽송절은 빨치산의 중요한 거점이 된다.
국방군과 교전하여 발생한 부상병의 치료소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200여명이 넘는 빨치부상자들이 은거하여 치료를 받은 것이다.
"討伐"이란 말의 한자 의미로는 "치고 치다"이며, 사전적 의미는 "강한 세력이 약한 세력을 싹쓰리 깨부순다"이다.
말그대로 "몰살 시킨다" 는 뜻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불과 몇 해만에 이념의 갈등에서 벌어진 비극의 극치를 벽송에서, 그것도 절집에서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치달은 토벌은 여기 벽송사치료소를 불구덩이로 만들었으며,
부상자들과 치료관계자들 모두가 일시에 부처님법당 아래에서 싸그리 몰살된 것이다.
이것이 벽송사가 안고 있는 민족상잔의 씻지못할 쓰라린 비극이다.
불에 탄 절집은 이후에 지금의 벽송사로 다시 태어난다.
남몰래 아픈 기억을 간직한 벽송사는 규모도 넓어지고 가람도 수려하게 재배치된다.
하지만 절집에는 대웅전이란 큰 전각은 없고, 관세음보살이 주재하시는 원통전이란 작은 전각이 대웅전을 대신한다.요란한 규모의 전각이 아니고, 관세음의 大慈悲를 간구하는 절집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아픈 기억 저너머로 부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南無大慈大悲觀世音菩薩摩何薩"
원절터는 원통전 위쪽에 삼층석탑과 미인송 한그루만 남은채로 휑하니 비어 있다.
그 담아래 비극의 현장에는 대나무만 무성하다.
단풍은 왜 이리도 핏빛으로 선연한고...
碧松路
이것도 '길'이라쿠네!
산중 벽송병원 - 불타 없어지고 탑과 미인송만 뎅그러니...
핏빛으로 물든 벽송절의 단풍들..
핏빛 울음
원통전 - 벽송사 법당
원절터의 삼층석탑
도인송과 미인송
비극의 현장에는 대나무만 무성하다.
- 벽송사 끝글입니다. -
지리산둘레길 걷기는 미개통구간 3개구간만 남겨 두었습니다.
올해중 개통되고 나면 마지막 길을 이을 계획입니다.
길을 다 잇고 나서 지리산길 30여편을 실을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벽송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직도 꿈속입니다 |
첫댓글 碧松寺..!!
이런 슬픈 역사를 안고 있었구나..ㅠㅠ
장문의 세세하고 친절한 설명 잘 읽고 갑니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불행한 우리 근.현대사의
또다른 참담한 현장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군요.
'역사는 이긴 자들의 기록' 이란 말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쓰라린 역사의 추억은 잠시 뒤로하고
비스듬이 구부러진 미인송은 그런 쓰라린 역사를
감싸주는 사랑이 서린 나무래서 미인송이 아닐까,,,
뒤에 보이은 솔이 천년된 도인송(道人松)인가?
누가 누구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모습이네,,,,
마치 미인송(美人松)은 넘어질 듯 하면서도
도인송이 비를 맞을까
불볕에 탈날까 감싸고 있는 듯..
오늘은 아름다운 이야기만 해봄세,,,,
진주사람은 반골기질이 강한데
이는 지리산의 기상과도 연관있다 봅니다.
산은 좌/우를 가리지 않는데
몹쓸 인간들이 편 만들어 피로 물들인 거지요...
어찌 단풍이 붉어서만 피아골이라 했을 것이며
벽송사 단풍 빛이 어찌 그리도 선혈 같아 보였을까....
몽이가 한 말은 모두의 온당한 상식이 되어야 함에도
아직도 우리는 이데올로기나 자기검열에 빠져 있다는 슬픔을 느낍니다.
당시, 칠불사, 연곡사, 벽송사, 실상사...법계사...지리산의 명찰들은
모두 큰 참화를 입었었지요...
그래도 산은 새로운 풀을 안고
나무를 새로 키우면서, 인간을 차별하지 않네요...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명백 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