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지기오름 파도소리
장영심
보목리 고사리철은 날마다 소풍날 같다
동서녘집 우알녁집 양은도시락 꺼내 들고
설익은 멸치젓 냄새도 한 귀퉁이 챙겨간다
할망당에 절하듯 연신 허리 굽히면서
제지기오름 파도 소리 바구니에 채우면서
간간이 민요가락도 한 소절씩 흘리면서
들녘의 고사리도 임자 따로 있다며
아예 무덤가는 기웃대지 않는다
제삿날 올릴 고사리 따로 꺾는 어머니
칠십 년이 흘러도 이집저집 기일은 같다
4·3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제사상에
그 때 그 아홉 살 소녀 파도소리 올린다
장미 고집
초하루 철쭉들도 절에 가는 길일까
연분홍 모자 쓰고 양초도 한 봉지 들고
대보사 찾아가는 길 새 소리가 앞장선다
보목마을 휘돌면 비구스님 독경 소리
배고픈 다리 건너와 절마당에 깔리네
돌탑은 백 년을 넘어 무슨 불공 드릴까
몸 굽혀 마음 다해 양초를 켜 올린다
넌출 넌출 내 딸년 장미 고집 꺾기 위해
불전에 뇌물 바치듯 머리를 조아린다
전갈자리 여자
나는 가끔 침대에서 별자리를 바라본다
별과 별 사이의 골목길도 스캔하고
하늘이 아주 맑으면 갈칫배도 띄운다
가끔은 흔들흔들 흔들리며 가는 거지
불배 같은 사랑도 다 저문 남녘의 끝
내 몸에 그리움의 독 어이할 수 없어라
말라게
꽃샘추위 탓인가 치통도 함께 왔다
모전여전 어머니 이도 내 이도 헐렁헐렁
이른 봄 금을 준대도 세상만사 귀찮다
‘곧 죽어도 자식 돈으론 틀니는 안 허는 거여’
‘이 박으면 그 이로 자식을 씹는 거여’
말라게, 정말 말라게 이빨만은 말라게
희한한 일
어느 늦은 봄날 그것도 늦은 오후
그 날 따라 마트엔 손님도 뜸했는데
깡마른 중년의 사내 마트로 들어선다
이것저것 사는 척하며 힐끔힐끔 훔쳐보고
물건값 얼마냐며 은근슬쩍 말을 건다
낌새가 하도 수상해 신고라도 할까 했다
- 이웃집 아줌마가 얘기해서 왔습니다
- 열 달 전 죽은 애 엄마 이 곳에서 봤다기에
- 그것 참 갸우뚱하며, 한걸음에 왔습니다
전생에 그 남자와 무슨 인연 있는 건지
- 잠시 잠깐이나마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돌아선 그의 뒷모습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약력
2014 중앙일보 5월 차상
2015년 <시조시학> 등단
시조집 『자작자작 익는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