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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님제공]
늙으면 죽어야지!
예로부터 3대 거짓말은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말,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그리고 노인이 늙으면 얼른 죽어야지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왕에 늙었으니 이제는 거칠 것이 없다 귀신과 시비를 해도 된다.
늙었다고 탓하지 마라.
더 오래 살고 보자. 품위 있게. 당당하게
내가 얼른 죽어야지! 암! 죽고말고! 한 원어민 강사 청년이 물었다.
언제 죽을 겁니까?
뭐라고! 고얀 놈. 날짜를 알아야 장의사에 예약을 하지요.
전에는 “아이고 골치야!” 하시던데 머리가 아파 자살하려고 하십니까?
골탕? 매운탕도 아닌데. 누구 골탕 먹일 일 있습니까?
빈말이라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것이 내가 죽어야지 하는 말이다.
그만큼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깊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거늘.
정말 죽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소외된 노인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날마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습관적인 말이 되어버렸다.
당찬 녀석
우리가 어릴 적 천당 가려면 좋은 일 많이 하면 무조건 천당 가는 줄 알았다.
만약 집과 자동차를 팔아 그 돈을 몽땅 교회에 바친다면 천당에 가게 될까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뇨! 라고 아이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만약 내가 매일같이 교회를 청소한다면 천당에 가게 될까요?"
아이들의 대답은 역시 이구동성으로 "아니요!
그럼 내가 강아지에게 잘해주면 천당에 가게 될까요?
"아뇨“ 합창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천당에 갈 수 있는 거죠.?
뒤에서 다섯 살 짜리 꼬마 녀석이 저요! 저요! 하고 소리쳤다.
" 죽어야죠 !! 녀석 하는 말이 당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서 나이를 더 먹어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시간이 느리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 와서 보니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다
. 요새는 싱그럽던 젊은 날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이 많아졌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 그리워하자.
-서정주-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되돌릴 수 없는 젊은 시절을 아쉬워하기보다는
노년의 삶에서 즐겁고 유쾌한 일을 찾으려 했다.
그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라는 시에는 노인에게 유쾌한 일 여섯 가지가 전해진다.
머리카락이 빠지니, 머리를 꾸미고 다듬는 수고가 사라진다,
이가 다 빠지고 없으니 치통에서 해방된다.
눈이 어두워 잔글씨를 읽지 않아도 된다.
귀가 안 들려 시시비비를 듣거나 따질 일도 없다.
詩格과 詩律을 따질 필요가 없다. 대신 우리말로 시를 쓴다,
바둑에서 일부러 하수만을 골라 이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편하고 즐거우면 젊은이 부럽지 않는 상팔자다.
정약용의 육쾌(六快)는
우리가 노년에 겪는 변화에 대한 역설적 풍자라고도 볼 수 있지만,
노년에 마음을 비우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데서 얻는 유익함을 일깨워 준다.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늙음은 젊음에 견줄 일이 아니다.
“청춘은 인생의 황금시대”라는 ‘청춘 예찬’을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熱情에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것과 같이 좋은 게 없다,
애욕 번뇌 실망에서 해탈되는 것도 적지 않은 축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많이 겪은 뒤에 맑고 밝은 눈으로 인생을 觀照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여기에 회상이니 추억이니 하는 것을 계산에 넣으면 늙음도 괜찮다.
그리고 오래 살면서 가지가지의 신기한 일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입청산만사휴(一入靑山萬事休)’라는 글귀를 싫어한다.
이는 수필가 피천득의 노년에 대한 위로의 말이다.
그 말은 한번 청산에 들어가면 만사는 끝장이라는 것이다.
젊음을 아쉬워하고 늙은 것을 한탄하며 인생을 체념하는 말이다.
몇 해 전에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노인에게 “늙으면 죽어야 해”라고 막말한 판사가 있었다.
또 노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말라는 노인비하 발언을 해서 욕을 본 정치인도 있었다.
또 미국 한인 밀집 지역의 한 맥도날드에서 교포 노인이 커피 한 잔 시키고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다가, 경찰에 쫓겨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어글리 코리안이라느니 ‘늙으면 죽어야지’ 하는 말도 들린다.
나이 많은 것이 무슨 벼슬인 양 행패 부리는 노인들,
버스나 지하철에서 “요즘 젊은것들”, “나이도 어린 것이”, “너는 애비 에미도 없냐” 하며
자리 양보를 강요하는 노인들이 문제다.
음식점에서
“야, 여기 김치 한 접시 더 갖고 와,
내 말 안 들려!” 하며 반말을 찍찍해대는 노인들도 있다.
공공기관에서 나이를 앞세워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고
자기 업무만 먼저 처리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일도 있다.
무조건 나이만을 앞세워 막무가내로 특별대우를 권리처럼 주장하는 노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단순히 노인들의 언행이 예사롭지 않다거나 엉뚱하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늙으면 죽어야 해’ 할 일도 아니다.
허구한 날 ‘늙으면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사는 노인들도 많이 본다.
그들은 정말 죽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다.
죽고 싶다는 말이 사실은 살고 싶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자신이 노년에 처한 상황에 대한 푸념과 한탄이다.
그리고 자손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 너무 괘념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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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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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길손아!
바닷가를 거닌 시간은,
인생의 나이에서 빼준다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해산물을 유별나게 좋아 한 탓도 있지만 나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여행을 많이 했다.
여행지에서 만나 오래도록 우정을 쌓아온 친구들 중에는
유별나게 수산고등학교를 나온 분들이 많았다.
어류의 종류와 생태, 어구, 어법(고기 잡는 법), 인공어초, 어병을 공부하던 여럿이 나와 가까이 지낸다.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일식집을 운영하며 주방장 일을 도맡아,
간식, 밑반찬을 후하게 주던 인심 좋은 장봉우형은
인품이 넉넉하여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웃음을 입에 달고 산다.
작달만하지만 입이 양옆으로 넓게 째져 있어 호인 중에 호인이다.
올 해도 반가운 벗들을 만나러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삥 돌아야겠다.
한려관광호탤
우리나라에서 경관이 좋기로 이름난 곳은 한려수도 한가운데에 있는 옛날 충무 관광호텔일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가족이 여름휴가로 그곳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여장을 풀기 전이였다.
호텔 라비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지배인이라며 인사를 해왔다.
누구 못지않게 인상이 좋았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통영은 지중해의 어느 해변처럼 아름답습니다.
경치에 걸맞게 오래 기억 될 만한 횟집을 소개 해 주세요.
지배인은 무슨 말을 꺼내려다 말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초등학교 단짝인 여자 친구가 횟집을 하는데 석 달 후면 그 아가씨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자기 이야기 하면 성심성의껏 모실 테니 그곳에 가보시라고,
그러면서 귀속 말로, 일반 객실을 예약하셨는데 마침 사장이 해외 출장 중이라,
예비로 항상 비어둔 귀빈용을 대신 내어드릴 테니 그 방에서 지내시라고 하였다.
과연 vip용은 많이 달랐다.
맨 위층에 있었는데 침대에 누워서, 3면의 바다를 보고 새벽엔 들고 나는 배를 보며 일출을 감상하였다.
이 호텔 소유로 배로 5분 거리에,
여름이면 서울에서 내려온 높은 분들만 사용하는 조그마한 섬이 있었다.
그 섬에는 vip 전용 해수욕장이 있었고,
별장 부대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일반인은 출입금지다.
지배인의 배려로 다음날은 그 해수욕장에서 지냈다.
그냥 신세 질 수야 없는 일.
그래서 통영시장 다리 아래에 있는 그 처녀네 횟집에서 모듬회 두 접시를 시켜
호텔 직원들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접시로 주문하였지만, 약혼처녀의 정이 배어있는 각종 횟감이 스티로폴 박스에 가득 차 있었다.
호텔사장은, 젊은이의 좋은 인상과 총명함 그리고 일 처리 능력을 높이 사고,
현지인이라는 이점 때문에 나이는 젊지만 그를 지배인으로 발탁했다고 한다.
그가 남해 수산고등학교 출신이다.
경주에서 재를 넘으면 바로 감포다.
이곳은 여름철 불국사를 여행 온 손이 금방,
시원한 동해바다에 몸을 담굴 수 있는 해수욕장이 있다.
객이 모두 떠난 늦가을 후미진 감포 바닷가에 싸늘한 불빛이 한들거리기에 찾아가 보았다.
바람막이로 포장을 두른 횟집이었다.
나이 든 아주머니가 고기들을 회 처서 팔고 있었다. ‘
입맛이 까다롭지 않으니 아무거나 한 접시 내 오소.
술이야 낙조와 바다 냄새가 안주가 아닙니까.’
이때 머리에 듬성듬성 성애가 앉은 주인아저씨가 들어왔다.
‘이맘때부터 이른 봄 까지 어부들은 할 일이 없어 매일 술타령이나 하고
놀음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언제 부턴가 청어, 꽁치를 말려 과메기를 만드는 일이 생겨나 어한기인데도 이리 바쁘니
, 인생 늙을 막에 저승길 노잣돈 마련하라는 삼신할머니 속마음 인가 벼.’ 하며, 맛보시라고 과메기를 한 바구니나 내 왔다.
그놈의 갈매기가 족히 한 두름은 가져갔을 거라며 허허 웃는다.
그리고 뭇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아마 사람이 그리워, 사람을 만난 김에 입 좀 놀리려나보다.
자기는 포항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감포어촌계장을 수 삼 년째 하고 있는 김길수입니다, 하며 꺼뻑 절을 했다.
갈매기와 어촌계장,
시나 수필로 어울리는 제목이다.
이런 저런 인연으로 그이와는 오랜 친구가 되었다.
그러니 경주 하면 불국사 석굴암보다
감포 바다와 과메기 그리고 어촌계장이 먼저 떠오른다.
해마다 겨울이 오기도 전에, 그 친구는 나에게 택배로 과메기를 보낸다.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때 뛰어놀던 남쪽 바다,
시인 이은상의 마산에서 사업을 크게 하는 장경식 사장과는
사이판에서 여름휴가를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그가 일체의 경비를 부담했다.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지,
나는 장 사장과 강진 회진 포구로 감성돔 낚시를 하러 갔다.
민박집 주인은, 자기 배라며 끌고 와 그 만이 안다는
비밀 포인트로 향하던 중에, 바다 한가운데서 밧줄 하나를 건져 올렸다.
줄에는 멍게가 덕지덕지 붙어 올라왔다.
양식을 하려고 2-3년 전에 넣어둔 것인데 가격이 좋지 않고 판로가 없어
그냥 방치해 두었는데 제멋대로 자라 이렇게 커졌다며
가져갈 수 있을 만큼 가져가시라고 커다란 멍게를 한 소쿠리나 따 주었다.
낚시 재미에 푹 빠져 그날 밤 늦게야 팔뚝만한 감성돔으로 쿨러를 채워서 돌아왔다.
짬만 나면 친구들을 불러 강진 회진항으로 낚시질을 갔다.
그날 이후로 민박집 주인과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완도 수산고등학교 출신이다.
전에는 물고기 축에도 끼지 못했던 물 메기(도치)나
심통이가 요즘에는 상전 대우를 받는다.
매운탕 거리로는 삼숙이가 제일이었는데
지금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 주고 이제는 뒷전에 물러나, 뒷방 노인 신세가 되었다.
주문진어시장에서 물 메기 탕국에 밥 한술 말아 점심을 때우는 중이었다.
옆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왠 사람이 ‘형씨’ 하고 나를 불렀다.
얼굴은 대추 빛이고 기골이 장비다.
‘병에 술이 남았는데,
그냥 두고 일어서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으니 옛 따! 한 잔 받으시오’ 한다.
고마울 뿐인데 심술이 났다.
‘여보! 아무리 거저 적선한다고,
마시다 남은 퇴주잔을 내미는 것은 예의가 아니오.’ 하니
곧바로 내가 잘못 했소! 벌주 한잔 따르시오. 하며 넙죽 절하고,
주인장 여기 술 한 병 추가요.‘ 한다.
내 마음을 화끈하게 매만져주는 것을 보니 사내다웠다.
오지랖이 넓은 것인지.
그는 장황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자기는 주문진 수산고등학교를 나와 평생을 어부로 살아왔다고 했다.
지금은 남애항에서 어촌계장직을 맡고 있으며, 머구리(잠수부)배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차가운 바다 밑을 뒤지는 일은 힘든 일입니다.
추위를 이기고 거센 파도와 싸워야하니,
됫병으로 소주를 나팔 부는 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얼굴이 검은 것은 해풍에 검게 탄 것이라기보다 술병으로 간에 무리가 온, 술이 준 훈장입니다.
자기만 보면 까빡 죽는 마누라가 온갖 약초로 담근 술독을 30년째 진열해 놓고 있으니
마누라 정성이 지극하여 유리병 서너 개를 사가지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남애항은 설악산 가는 길목에 있으니
잠시 들러, 마누라가 담근 더덕 주 한 잔 하고 가시라며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입담이 얼마나 좋은지, 쉬지 않고 내뱉은 입에서 단내가 나고 게거품이 튀었다.
나는 안동에서 시제를 지내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안동 풍산면에는 선산이 있는데,
그곳 창암정 뒷산에 오래된 산뽕나무가 몇 그루 있어,
산지기가 지난겨울 눈 속에서 양푼만한 상황(桑黃)버섯을 세 개나 땄다고 했다.
산지기가 그걸 선물한다니 가만있을 수야 없다.
긴긴 밤 겨울 내내 읽어보시라고,
먼지 쌓인 나관중 삼국지 다섯 권을 서가에서 꺼내
새것처럼 정성껏 포장하여 산지기 아들에게 선물하였다.
그 해 겨울은 책 읽는 재미로 보내고
지금은 자식들이 읽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버섯을 싼 비료 포대를 나의 차 트렁크에 실어 주었다.
상황버섯은 간에 특효라고 하니 건강한 나보다,
형씨 간에 이놈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느냐고 하며,
노란 버섯으로 술을 담가 유리병에 넣어두면 한동안 좋은 눈요기가 될 것입니다.
그다음에 약으로 드시지요!
설악산에 세미나가 있어 시간에 대려면 지체할 수 없어 바로 가야한다며
그 친구를 남애항에 내려 주고 나는 곧장 떠났다.
어찌도 순박한지. 진짜 뱃놈이다.
처음 본 사람인데 눈물을 글썽거리며, ‘친구여 이담에 날짜 잡아 연락하고 꼭 오시레요’ 하며
허탈한지 한참동안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1년이 지났다. 부근을 지나다 그 사람이 생각 나 전화를 해봤다.
그랬더니 그는 댓돌바람으로 뛰어나와 차 문을 열고 다짜고짜로 내 여행 가방을 꺼내 어깨에 들쳐 메고 성큼성큼 앞장을 섰다.
몇 해 전에 서울 사는 부자가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지었다고 했다.
자기는 당시 이장을 하고 있었는데. 별장의 관리를 자기에게 맡기고 지금껏 와 보지 않은 채,
매년 관리비만 송금해 주고 있다며,
가끔 안사람과 신혼 때처럼 오붓하게 하룻밤을 지낸다는 그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갈매기 우는 소리와 어선의 통통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방바닥에 엎드려 두 손을 턱에 궤고 일출을 보니 장관이었다.
이렇게 해서 바다는 점점 밝아오고 어부들의 바쁜 일과가 시작되었다.
어부 마누라가 차린 조반인지라 싱싱한 회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풍성하고 가짓수도 많았다.
그날은 순전히 나만을 위한 성찬이었다고나 할까.
그는 나에게 동해바다의 겉과 속을 모두 보여주겠다고 했다.
머구리배에 화덕을 실고. 잠수부와 달랑 셋이서 망망대해로 나갔다.
그 친구는 연신 호스에 펌프질을 하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가마니 보다 큰 망태기를 뱃전으로 끌어올렸다.
물속에서는 더 커 보이는 법인데.
꿈틀거리는 곰치와 문어가 얼마나 큰지 왈칵 겁이 났다.
전복, 소라, 해삼, 성게, 멍게, 북방대합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이곳 멍게는 갯벌과 같은 진회색이고,
형태는 돌기가 없어 밋밋한 자갈 모양이다.
눈에 잘 띄지 않게 보호색으로 갑옷을 입었다.
그래서 이름이 돌 멍게인가?
우렁쉥이는 분홍색 뿔이 달려있어야 하는데,
이놈은 이복동생인 모양이다.
하여튼 돌 멍게는 맛과 향에서 단연 압권이었다.
성게 알로 젓갈을 담근 ‘우니’는 일식집에서 단골손님에게 조금씩 내오는 귀한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성게는 알은 티스푼으로 조금씩 발라 먹는다.
내가 아는 성게에 관한 상식은 이게 전부다.
그러나 배위에서는 화덕에 번개탄을 피워 큼직하게 알 전을 붙였다.
그렇게 해야, 감질나지 않게 많이 먹을 수 있다나.
‘문어는 질기다’는 선입견은 살아있는 문어에게는 실례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문어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전복과 소라는 오이 넣고 물 회로, 해삼, 조개는 매콤한 회 무침으로. 나는 뱃구레가 적은 것이 두고두고 한이었다.
떠나려고 하니 언제 넣었는지 차 트렁크엔 쿨러 3개에 싱싱한 해산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선물이기 보다는 뱃놈의 정이 가득하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일출의 이글거리는 해처럼 붉은 덩어리가 가슴 속에서 불끈 솟아오른다.
뜨거운 정을 안고 미련을 남긴 체 떠났다.
태어 날 때부터 친구가 어디 있으랴.
오다가다 눈 맞으면 친구고 안 보면 보고 싶은 게 친구지. 잘 있거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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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동 호박농사
역사학자 함석헌(咸錫憲)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나라는 과거 997번의 외침(外侵)을 당했다고 했다.
그리고 책 표지에는 생뚱맞게 60살 먹은 늙은 창녀(娼女)의 나상(裸像)이 그려져 있었다.
수많은 침략자들로부터 갈기갈기 찢겨 마치 늙은 창녀의 벗긴 몸처럼 퇴락한 몰골을.
한국역사의 책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單一民族)이라고 보기 힘든 역사다,
이 땅에 사는 여인들이 겪은 비극적이고 수치스러운 수난의 흔적이 혼혈로 나타난 것다.
핏기 없는 얼굴로
“오빠 놀다가”하며 멋쩍게 희죽 웃는 모습에서 치욕스런 과거를 보았다.
용산 집창촌은 병자호란 때 몽고군이 주둔하면서부터 생겨 왜군 양키 까지,
그때부터 지금껏 이어온 여인들 수난사를 압축한 것이다.
험한 놈들이 주위에 있으면 고통당하는 것이 약소국가의 여인네들이다.
고려 때에는 원의 지배를 받았다.
충렬왕 때이니까 징기스칸의 손자가 칸(왕)이었으리라.
원의 강압으로 금혼령이 내리고 그네들 주문대로
13-25세 대유녀(大乳女)와 대둔녀(大臀女)만을 골라 공녀(貢女)로 바쳤다.
사람을 개돼지보다 못한 노리개 깜으로 조공(租貢) 품목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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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냥년의 죽음
어린 여자 몸으로 험한 오랑캐들의 노리개가 되어 말 못할 수모를 겪으면서 눈물로 지내다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탈출하여 몇 달 아니
몇 해에 걸쳐, 보퉁이 하나 들고 산 넘고 강 건너 멀고 먼 고향을 찾아왔으나,
지척에 부모님이 계신 집을 두고도 가지 못했다.
정절이 목숨보다 더한 당시 인습에 억매여 더럽혀진 육신을 가족에게 보일 수 없어,
발길을 돌려 마을 뒤 저수지에 몸을 던진 화냥년(還鄕女)의 시신에서 민족의 비극을 보았다.
되놈이나 왜구에게 끌려가 불렀던 노래가 찔레꽃이다.
찔레꽃 넝쿨은 일부러 심지 않는다.
저절로 제 자리를 찾아 홀로 피고 자란다.
찔레꽃은 담장 안에 심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언덕배기에,
옛날에 살던 집을 굽어보는 곳에서 홀로 자란다.
정녕 환향녀의 환생인가?
환향년들아!
이곳에서 심신을 깨끗이 씻어라!
그러면 과거의 일은 불문에 부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몸으로 다시 환생하는 것을 짐이 보장하겠다.
홍제천은 조선여성들의 애환이 깃든 곳이다.
정묘, 병자 양 胡亂때 공녀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여자들이 도망쳐 돌아왔으나 누구도,
어디에서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과거의 일이 깨끗하게 없어진다.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씻어라!
그러면 과거를 불문에 붙이겠다. 하고 조서를 내렸다.
어명일지라도 이들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번 버린 몸이니 깨끗한 몸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일,
그러니 환향녀들은 도성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이곳 홍제동에 눌러 앉아 움막을 짓고 살았다.
호박은 제갈공명이 칠종칠금(七縱七擒) 놓아주었던
남만(南蠻)오랑캐 월남 땅에서 들여온 오랑캐 나라의 박이라고 해서 남과(南瓜)다.
호박은 밥 대신 요깃거리로 먹었던 구황작물이었다.
홍제동은 한양에서 언덕과 계곡이 가장 많은 동네다.
상대적으로는 변변한 평야가 없고 땅은 척박하였다.
그러니 인구가 적었다.
호박은 언덕을 기는 습성이 있어,
아무데나 잘 자란다.
환향녀들은 끼리끼리 홍제동에 모여 호박을 심어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곳이 서대문구 홍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