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百歲) 언론인 황경춘 선배님
선배님은 모임에 늦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늘 약속 시각 10분 전쯤 미리 나와 한갓진 자리에 조용히 앉아 계셨습니다. 막내동생이나 아들뻘 되는 새카만 후배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동안에도 마치 재롱이라도 즐기는 양 빙긋이 웃고 계셨을 뿐입니다. 눈치 보인 후배들이 송구스러워 뒤늦게 한 말씀 하시라고 권하면 비로소 조심스럽게 입을 떼시곤 하셨지요. 적은 말수였지만 쌓아 오신 경륜 그대로 후배들의 삶에 지침이 될 귀한 경험담을 들려주곤 하셨습니다. 정말 잘난 사람, 스스로 잘났다는 사람은 많이 보아 왔지만 선배님처럼 겸손한 분은 뵌 적이 없습니다.
자유칼럼그룹의 큰 어른 황경춘 선배님이 기어이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찾아 하늘나라로 날아가셨습니다. 1924년 3월생, 아쉽게도 만 100세를 반년 앞둔 지난달 31일이었습니다. 만 99세를 바라보던 지난 2월 20일 <100세에 ‘일기 쓰기’의 의미>라는 칼럼을 쓰셨지요.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하루도 무의미하게는 보내려 하지 않으셨던 선배님의 마지막 칼럼이었습니다.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주한 미국 대사관 신문과 번역사, 과장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TIME 서울지국 기자 -Fortune 등 미국 잡지 프리랜서 역임
손수 쓰신 이력은 참으로 간단명료합니다. 그리고 솔직담백합니다. 그 흔한 가짜 이력, 과장 이력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신의 올곧은 성품, 정직성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겠지요.
일제 식민시대, 당시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선배님의 삶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우리 땅에서 초, 중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우리말과 글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습니다. 일본 유학 생활은 태평양전쟁으로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전화를 피해 남해 고향 땅에 돌아왔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봄 강제 징집되어 다시 일본으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종전과 함께 천신만고 끝에 고국에 돌아온 선배님은 얼마간의 교원 생활 도중 미군 통역을 맡았던 일을 계기로 평생 외신기자로서의 외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8·15 광복, 정부 수립과 6·25 참화, 4·19 민주혁명과 5·16 군사혁명, 유신과 신군부의 집권, 민주화 운동에서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를 몸소 겪은 선배님이 강조하시던 칼럼의 주제들이 생각납니다.
바람직한 한일 관계, 시대에 대한 성찰, 세대 간의 이해와 배려, 심신의 건강, 그리고 삶을 다할 때까지 다짐하시던 정진 또 정진...
선배님은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는 일본의 진솔한 반성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일본의 새 총리마다 매번 사과하는 따위의 형식이 아닙니다. 과거의 잘못을 사과·반성하고, 거기에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지 않는 진정성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대 상황, 환경에 대한 성찰 없는 무모한 친일 재단(裁斷)을 깊이 우려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후대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면밀히 성찰하지 않고, 드러난 현상을 형이하학(形而下學)적으로만 따지려 든다면 국민을 양분하는 또 하나의 비극이 올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선배님의 촉각은 늘 곤두세워져 있었지요. 해외 언론, 특히 당신이 오랜 세월 접하셨던 일본 소식에는 누구보다 빨랐습니다. 때로는 칼럼으로, 때로는 필진 카페의 글로 여러 사람에게 두루 알리는 역할을 기꺼워하셨습니다.
우리 여자선수들이 세계 골프를 휩쓸기 시작하던 때의 일입니다. LPGA(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 측이 영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외국) 선수들을 규제하려 한다는 뉴스가 외신에 떴습니다. 대회 진행이나 홍보에 지장을 주기 때문이라는 구실이지만 아시아, 특히 한국 선수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가 분명했습니다. ‘이거 좋은 글감인데…’ 하고 자료를 모으며 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 그 외신을 챙기셨는지 선배님은 곧바로 <영어시험 치른다는 LPGA>라는 칼럼을 올리셨습니다. 저 혼자 머쓱해지고 말았지요.
지난해 6월 건강 때문에 장거리 문화탐방에 참가하지 못한 아쉬움을 필진들과의 덕수궁 산책으로 달래시던 모습(왼쪽). 2016년 자유칼럼그룹 창립 10주년을 맞아 드린 공로패(오른쪽).
연세를 더해 갈수록 선배님은 심신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으려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2018년 자유칼럼 집필 10년이 되던 해 이런 소회를 밝히셨지요.
‘100세 인생’이란 유행어가 돌고 있습니다. … 자유칼럼과 인연을 맺은 지 10년, 건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체력이나 기력의 변화는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배웠던 문법 규정을 오늘 잊는 실수를 예사로 범합니다. 뇌의 순발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제 누가 등을 두들기며 “선배님,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해주면 “그래요” 하고 물러설 용의도 있습니다. 그럴 때까지는 열심히 자유칼럼과 함께 글을 쓰겠습니다.
빈소를 지키던 아들 윤철 씨는 아버님이 나날이 쇠약해지면서도 자유칼럼 얘기라면 그렇게 즐거워하실 수 없었노라고 전했습니다. 이태 전부터 자녀들이 밀어주는 휠체어에 의지하고, 몇 달 전부터는 한 주일에 몇 번씩 투석을 하시면서도 다가오는 칼럼 차례를 기다리고, 또 걱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어른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이젠 그만 쉬고 싶다”고 하시더랍니다. 시름도 병고도 없는 자유인이 되셨지만 그 마지막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선배님,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병고 없는 저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황경춘 선배님이 2008년 1월 28일부터 2023년 2월 20일까지 15년간 쓰신 총 233편의 칼럼은 자유칼럼그룹 홈페이지www.freecolumn.co.kr) <황경춘 오솔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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