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에 지도와 사진을 첨부하여 자료집을 만들 예정입니다.
자료집은 현지에서 배포합니다.
공부 많이 하고 오십시요...우리 국토가 더욱 가깝게 보일겁니다.
답사퀴즈는 이 자료집에서 60% 내도록 하겠습니다...상품 많이 준비하겠습니다.
영월개관
강원도 땅 남쪽에 위치한 영월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두터운 자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색색들이 물들어 가는 자연을 만나보는 여정으로 좋은 길목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정선과 평창, 동쪽으로는 원주, 남쪽으로는 충북의 제천, 경북의 봉화, 영풍군들의 아홉 개 군으로 둘러싸여있는 군이다.
북동부에는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남동부에는 소백산맥이 분기하여 동서로 뻗어, 그 두 산맥의 여파가 군내 각지에 미쳐 산악이 중첩된다. 군내의 중앙부에는 한강의 지류인 평창강과 주천강이 동류 하다가 한강 본류에 합류하게 된다. 군내에는 석회암 층이 곳곳에 분포하여 영월 부근에는 카르스트지형이 잘 발달하여 있고, 고씨동굴 등의 석회 동굴도 이 지역에 잘 나타난다.
영월은 역사적으로 단종의 유배지로 유명한데 관풍헌, 자규루, 청령포, 장릉 등 단종과 관련된 역사 유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북쪽 사자산 남쪽 기슭에 법흥사가 자리잡고 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작은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은 이곳에 유배되어 17세에 죽음을 맞이하는 슬픈 역사를 가진 땅, 그래서인지 더욱 큰 의미를 가지는 곳이 바로 이곳, 단종의 땅인 영월인 것이다.
영월에는 문화 행사로 단종제가 있다. 이 단종제는 매년 4월 5일 한식을 전후로 3일간 영월군 일원에서 전개 민속 행사로 펼쳐진 것으로 단종과 충신들, 왕을 따르던 궁인들에 관련된 고사를 중심으로 그 때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이다. 단종제는 4일 오후 영월읍 시가지에서 학생들과 주민들이 참여하여 단종의 역사를 재연하는 가장 행렬을 하고, 저녁에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엄흥도의 건재함을 애와 영전에 고하는 충신 봉화를 올린다. 충신들의 이름을 고창한 후 봉화를 들고 하산, 7개의 대봉을 선두로 점화되면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또 금강정 낙화암에서는 궁녀 및 종인 7명이 동강에 몸을 던져 순절한 모습을 재연하고 70개의 낙화와 단종 승하를 기리는 유들을 횟수만큼 강물에 띄워 그 넋을 위로한다.
단종에서 노산군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고, 사약을 거부하다가 끝내 종에게 목이 졸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어린 소년, 단종... 그의 마지막 발자취가 새겨진 영월은 "단종의 땅"이라고 무방한 만큼 가는 곳곳마다 그의 체취가 묻어난다. 또한 "삼족을 멸하리라"라는 세조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정신을 높이 기려, 충절의 고장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곳은 당시의 아픈 역사가 그대로 우리에게 느껴지는 곳이다.
.. 觀瀾亭(관란정)
관란정은 영월군 서면 신천리와 제원군 경계인 서남면 절벽위에 있는 정자이다. 청령포로 흐르는 주천강 상류에 있으며 생육신 원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원호는 원주인으로 1423년(세종 5)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때는 집현전 직제학이었는데 단종이 등극한 후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가는 것을 보고 병을 핑계하여 벼슬을버리고 원주 남촌동에 돌아와 통곡하며 세상과 등지고 살았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로 유배되자 뒤를 따라 영월에 와서 청령포로 흐르는 물줄기 상류인 이곳에 초막을 짓고 혹은 저서도 하며 새벽과 저녁에는 단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울며 임금을 생각하였다.
또 남모르게 음식과 의복을 바치고 풀잎에다 글씨를 지어 함지에 함께 넣어 강물에 흘려 보내면 함지박은 청령포앞 구비를 돌아 용수지는 곳에서 빙글빙글 돌며 더 흘러 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하며 원호는 함지박이 어소에 닿을 무렵에 강기슭에 나아가 단종이 있는 곳을 향해 배례하였다고 한다.
원통한 임금을위로하기 위하여 때로는 글을 지어 표주박에 실어 띄우면 단종이 받아보고, 그 빈표주박을 강물에 놓으면 그 표주박은 다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하며 그때 원호가 지었다는 다음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간밤에 우던 여을 슬피 울어 지내었다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저물이 거슬러 흐르라저 나도 울어 보리라」
관란정은 강변 절벽위에 있고 그 뒤에는 넓은 터전이 있어 원호는 추운 날이나 더운날이나 아침 일찌기 여기에 나와 앉아 단종이 계신 청령포를 향하여 흐느껴 울며 해가
물어서야 그치곤 하였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정여각은 수주면 토실에 있다.
관란정은 청령포 상류 30리 지점에 있는데, 석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두 갈래의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단종이 동쪽으로 유배되자 직제학 원호가 관란정을 짓고 몸소 호미와 괭이를 들고 그 옆에다가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니 풍성한 농장이 되었다.
원호가 표주박에 문안 편지와 과일 채소를 담아 강물에 띄우면 스스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관란정에 닿았다고 하니 이것이 과연 하늘이 한 일인가? 원호는 아무리 춥고 더워도 새벽마다 정자에 올라 한숨 쉬며 통곡을 했는데, 청령포에서는 새들도 울며, 열을 지어 절을 하였다고 한다.
높이 솟은 절벽은 열사의 정성이 깃들었고,
누각에 오르니 오관성이 지척이네.
정자는 멀리 절벽을 바라보며 서 있고,
여울은 옛 일을 생각하며 만고에 울며 흐른다.
청령포는 아득한데 구름만 비추고,
관풍헌은 고요한데 두견새만 우는구나.
표주박 서신 끊겼으니 소식을 알 수 없고,
세상은 고요한데 해와 달은 밝구나.
나그네 쓸쓸함을 빈 벽에 의지하고,
저녁 노을 옛 고을에 가득하다.
끝없이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은,
멀리 장릉을 바라보며 흐른다.
어느 날 과부가 빨래를 하기 위하여 강가로 나왔다가 원호가 통곡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은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느니라. 나의 옛 임금이 영월에 계시므로 이곳에 서 영월을 바라보고 있소."라고 말하며, 제천과 산천을 경계로 하고 있는 이곳에다 관란정을 지었노라고 말하였다.
이를 듣고 있던 그 과부는 울면서 말하기를 "첩도 불행히 남편이 죽은 탓으로 개가를 하고자 하여 이 빨래를 바리고 있는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비록 못나고 천한 계집일지라도 어찌 열녀가 되지 못하리오." 라며 눈물을 흘리고 수절하였다.
"청와대에 한반도사진 걸어주오" 영월 한반도 지형 사진작가 -고주서씨
5년전이다.
"형님. 이 산에 한번 올라가 보세요. 우리나라 지도와 똑 같은 모양이 있어요."
사진작가 고주서씨(49세)는 선암마을에 사는 이종만씨(작고)에 이끌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에 올라갔다. 20여분 올랐을까? 작은 공터위에 올라섰다. 거기서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둔기에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훑어보았지요. 동쪽엔 산맥이 길게 이어져 있고 서쪽엔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더군요. 해남반도와 호미곶까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검은 바위가 점을 이루고 있는 울릉도와 독도까지 보고 전율마져 느껴지더군요."
한반도 모습만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땅이 있는 자리는 시멘트 공장이 자리잡고 있다. 열강들이 한반도를 노렸던 구한말 역사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중국쪽에 자리잡은 시멘트 공장은 쉴세없이 연기를 내품으며 한반도를 오염시키고 있다. 그 공장 앞으로 한반도지형을 잇는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그거요.. 압록강 철교지요."
고주서씨의 해석에 무릎을 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이 또 하나 있다. 드넓은 만주땅도 한반도 땅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역사를 송두리채 빼앗을 흉계를 지니고 있는 중국에 자연은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한반도 지형에 대한 고주서씨는 애정은 남다르다. 산에 오를 때는 항상 목욕재개를 한다. 수 천번을 올랐지만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비바람이 치거나 눈보라가 몰아쳐도 어김없이 산에 올라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찍은 한반도 사진만 무려 7만컷이나 된다.
- 필름값도 만만치 않을텐데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는 이유는?
" 한반도의 지형을 그저 바라만 봐도 용솟음치는 국토사랑과 애국심을 느낄 수 있지요. 한반도가 하나 되었을 때의 감동을 매일 느껴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이것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그렇게 신성하게 여겼던 한번도 지형도 하마터면 분단의 아픔을 겪을뻔했다. 함흥쪽에서 압록강쪽으로 도로가 놓이게 된 것이다. 그는 그 공사를 막을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며칠후면 한반도를 가로지를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그걸 지켜봐야하니 가슴이 시커멓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진 한 장이 한반도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한반도 사진 한장이 문화일보 일면을 장식한 것이다. 그때부터 국민들은 한반도 지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홰손될 위험에 쳐해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국회에도 한반도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결국 국민들과 국회의 열화 같은 지지덕에 도로 공사는 중단되었고 이 땅의 한반도를 지킬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한반도 지형 알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영월의 관광버스와 시내버스는 물론이고 식당등 대중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렇게 뿌린 사진이 무려 8만장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개인 사재를 털어가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대구 유니버시아드때 남북이 함께 모여 한반도기를 흔드는 것을 보고 빨리 통일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한반도기를 이 곳에서도 느낀답니다. 많은 분들이 한반도 땅을 보면서 통일을 느끼고 우리 국토를 사랑하겠다는 마음만 가진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 결혼이 늦어진 이유는?
"동강살리기를 위해 젊음을 바쳤고, 그것이 해결되니까 한반도 살리기운동에 하게 만들더군요. 생업도 포기한채 사진만 찍으러 다녔더니 주변에서 미친놈이라면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그러나 누군가는 발 벗고 나서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총대를 메었습니다. 결혼은 2년 전에 했습니다. 환경운동을 하다보니 결혼할 시기까지 놓쳐 버렸어요."
-생활은?
"한반도 사진을 원하는 분들께 계십니다. 가끔 사진을 팔아서 생활하고 있지요. 필름 사고 장비 갖추느라고 집에 돈을 가져다 준 적이 거의 없습니다. 끝까지 이해하고 성원해준 아내에게 감사 드릴 뿐입니다. "
- 언제까지 한반도 알리기 운동을 벌일 생각입니까?
" 전망대에 무궁화 꽃을 심었는데 군청에서 나무를 베면서 다 꺾어 놓았더군요. 어찌나 가슴 아픈지 몰라요. 봄이 되면 무궁화 꽃을 가득 심을 예정입니다. 현재 노끈을 길게 이어 난간을 대신 했는데 상당히 위험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위치에서 볼 수 있도록 팔각정이 설치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곳엔 화장실도 없어요. 거봐요. 할 일이 아직도 많잖아요. 저는 이 곳이 천연기념물이 될때까지 싸울 생각입니다."
-바램이 있다면?
" 한반도 지형은 통일의 상징입니다. 남북 정상이 이 곳을 배경으로 악수를 한다면 통일이 더 빨리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사진을 찍는 것이 일생의 소망입니다. 우선 금년에 진도개와 풍산개가 만나는 사진을 찍을 예정입니다.
정말 아끼는 한반도 사진 한 점이 있습니다. 청와대에 이 사진이 꼭 걸렸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대통령이 매일 한반도 사진을 보면서 통일을 생각하면서 민초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한반도를 휘감고 있는 물이 서강이다. 지금은 얼었지만 이 강은 1급수라서 매자, 모래무지, 메기, 야생 자 쉬리까지 자라고 강물속에는 민물조개와 다슬기까지 자라고 있다. 새벽 안개를 슬그머니 다가설 때면 수달이란 놈이 나타나 물살을 헤칠 정도로 깨끗한 곳이다.
그렇게 청정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고주서씨 같은 분들의 숨은 노력때문이 아닐까?
쌍섶다리유래
1457년 (세조3년)10월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승하하자 백성들은 세월이 흘러도 단종을 흠모하여 세조 조정의 처사를 온당치 않게 여기는 민심이 내려오던 중, 1699년(숙종 25년) 3월2일 조정에서는 당시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새로 부임하는 강원관찰사로 하여금 반드시 장릉을 참배하게 하였다.
원주에서 오는 관찰사 일행은 주천강을 건너야 했으나 , 그 일행은 사인교와 말등 그 수효가 많았으므로 일반 다리로는 건널 수 없었다.
때문에 주천 주민들은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주천리 , 서쪽은 신일리가 맡아서 다리 하나씩 놓기 경쟁을 벌이게 되어 양편 사람들이 남녀 노소 가릴 것 없이 총동원되었다.
관찰사 일행이 이곳에 도착하여 주민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선두 안내자에 의하여 다리가 이상 없음이 판명되면 관찰사가 건너가서 영월로 향하였다.
수일 후 관찰사는 장릉의 참배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길에 이곳 주천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등 다리놓기에 수고한 백성들과 즐겁고 기쁜마음으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그후로부터 민심은 정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이 <쌍다리놓기>는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 놀이는 1985년 제3회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여 민속놀이 부문 우수상에 입상하였다
주천면 땅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주천샘의 세가지 전설
1.주천면의 망산밑 주천강변에 "주천"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예전 한때 술이 나왔던 샘이라고 한다. 인근마을에 부인을 잃고 상심하여 마냥 술타령만을 일삼는 사람이 있었다.돈이 없는데도 아이들에게 술을 받아오라고하여 자식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어느날 또 술을 받아오라고 하자 막내아이는 할 수 없이 이 샘물을 퍼담아 갖다 드렸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맛좋게 마시고 나서 더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샘물을 퍼다가 드렸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돈이 없는데도 아이들이 거침없이 술을 가져오는 것이 의아해서 한번은 몰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샘물을 퍼오고 , 그것을 마시니 술이 아닌가.이러한 조화를 보게된 아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술을 끊고 가정을 잘 돌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후부터는 술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 옛날 주천에는 한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은 항시 술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고 해서 주천이라 불리웠다. 그런데 이 우물은 신기하게 신분이 낮은 상놈이 마시면 탁주로 변하고 신분이 높은 양반이 마시면 약주로 변했다고 한다. 어느 날 낮은 신분이었던 한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그후 그는 고향인 주천으로 내려와 우물앞에 서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도 이제는 신분이 높아졌으니 내가 이 우물을 뜨면 그 물은 약주로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우물을 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젊은이의 신분은 상승되었는데도 물은 약주가 아닌 탁주였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몇 번을 거듭하여 퍼 보았으나 계속 탁주만 나왔다. 화가난 젊은이는 커다란 돌맹이를 그 우물안으로 던졌다.그 후 그 우물은 젊은이가 던진 커다란 돌맹이에 막혀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메말라 버렸다고 한다.
3.주천교를 지나 신일리 비석거리 우축 망산 밑으로 주천면 땅이름의 유래가 되는 "주천샘"이 있다.조선 성종때 편찬된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주천석 , 주천현 남쪽 길가에 있으니 그 형사은 반깨어진 술통과 같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로는 이 돌 술통은 예전에는 西川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을 때는 술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현의 아전이 술을 마시려고 그곳까지 가는 것이 싫어서 현안으로 옮겨놓기 위해 여러사람이 함께 옮기는데 갑자기 우레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술샘이 세 개로 나뉘어 졌는데 , 한 개는 못에 잠기고 , 한 개는 지금의 주천샘이 되고 , 다른 하나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샘물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천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샘에서 술이 나왔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나오고 천민이 오면 탁주가 나왔다고 한다. 고구려시대에 주천현으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 한 천민이 양반 복장을 하고 와서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약주는 나오지 않고 평소와 같이 탁주가 나오자 화가 나서 샘터를 부순 이후에는 술이 나오지 않고 맑고 찬 샘물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효자와 의호총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금산 밑에 한 무덤과 의호총이란 비석이 서있다. 비석표면은 의호총(義虎塚)이라 하고,뒷면에는 『癸亥七月日因巡營分付立故今處士師夏康熙子天崩有虎終喪三日而死』라 하였다.
『1743년 계해 7월에 순영(조선조 정3품의 외관직으로 각도 관찰사를 보직하던 관원)의 분부에 의하여 세웠으며, 금처사 사하가 1720년(康子)에 국상을 당하여 호랑이와 같이 3년상을 마쳤는데, 그 호랑이가 3일 후에 죽었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금산 밑에 살던 금사하라는 이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한 후 어머니마저 병이 나서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봉양하여 왔는데, 갑자기 위중하므로 급히 약을 지어와야 했다. 약방은 강 건너 주천에 있어서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마침 장마가 져서 배를 붙이지 못하자 금효자는 초조하고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라 울면서 강가를 오르내리며 안타까와했다. 그러는 동안 해는 져서 어두운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금효자가 급한 마음에 "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여 강을 건너가서 약을 지어다 드려야 하겠으니 강을 건네주지 않겠느냐." 하며 하소연을 하니, 그 호랑이가 앞발을 숙이며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기에 금효자는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고 약방에서 약을 지어와 그 약으로 모친의 병을 낫게 하였다. 금효자는 또 아버지의 산소에서 3년간 시묘를 살았는데 정성이 지극하였으며 , 산골 묘소에서 혼자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전에 강을 건네주던 호랑이가 동무하여 주었다.
그는 호랑이와 친숙하여져서 한 집안같이 의지하고 살았다.금효자는 아버지의 3년 시묘가 끝나기도 전인 1720년에 숙종대왕이 승하하여 국상을 맞게 되었다. 충성심이 남다른 그는 베옷입고 방갓쓰고 매일 망산(주천의 남쪽 강 건너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서쪽 궁중을 향해 망배하며 3년상을 치뤘는데 그 호랑이도 함께 망배하며 행동을 같이 하였다.국상3년을 마친지 3일후에 그 호랑이는 금효자집 마당에 와서 엎드려 죽었다. 금효자는 죽어가는 호랑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마침내 호랑이가 죽자 부친의 산소 옆에 묻어 주었다.그후 그가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호랑이가 꿈에 나타나 일러주므로 가문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1743년에 강원도 순영 중군이 이 곳에 왔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호랑이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라고 명하여 호랑이가 죽은 지 23년만에 이 비석이 서게 되었다. 또 그 후손들은 계속하여 호랑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금산을 중심으로 사방 10리를 금처사에게 사패전(賜稗田)으로 하사하여 호랑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런데 약 120년전 쯤에 욕심많은 강원감사가 와서 그 사패전을 몰수하여 팔아 버린 후부터는 호랑이 제사도 끊기고 말았다고 한다.
수주면의 개요
태백산의 지맥인 백덕산(白德山)과 사자산(獅子山), 배향산(背向山) 자락에 둘러 쌓인 산촌으로 높은 산과 관계깊은 도마치, 두메, 두덕골, 둠, 안둠안과 같은 화전민 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순수한 토박이식 땅 이름을 많이 간직한 곳으로 감자, 옥수수, 마늘, 깨, 녹두 등이 재배된다.
수주(水周)란 이름 그대로 마을이 온통 강으로 둘러 쌓였다는 뜻으로 한때는 수회면 (水回面)이라고 불렀다. 양사언이 찾아 왔었다는 요선암은 법흥천과 섬안이 강이 합치는 곳으로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을 간직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동양의 이상향인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임을 상징하듯 수주에는 무릉리와 도원리가 있다. 그 외에도 숙종, 영조 임금의 어제시(어제시)가 보관되어 있는 요선정 , 5교 9산 선문의 도량인 흥령사와 영월의 유일한 보물인 징효대사 보인탑비(澄曉大師 寶印塔碑- 보물 612호가 있다.)
오지로 교통이 좋지 않았으나 1989년부터 도로 확포장이 시작되어 매년 관광객이 늘고 있다. 수주면은 무릉리, 도원리, 두산리, 법흥리 ,운학리의 법정 5개리와 행정 12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주천면 , 서쪽은 원주시 판부면과 소초면 , 남쪽은 원주시 신림면 , 북쪽은 횡성군 안흥면과 방림면에 접해 있다.
무릉도원 요선정의 개요
아직도 국내의 대표적인 오지로 영월이 손꼽힌다. 그러한 영월에서도 서쪽 모퉁이에 숨은 듯 박혀 있는 곳이 수주면이다. 차라리 원주땅에 속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을 것 같은 형국. 지도에서 찾노라면 새말과 평창의 정 중간 지점을 짚으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때문에 서울을 비롯한 남쪽이나 서쪽에서 갈 경우는 영월을 거치지 않고 원주나 제천에서 가는 게 빠르고 편한 곳이다. 내놓은 자식 마냥 손길이 쉬 닿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 5대 적멸보궁 중 한 곳인 법흥사가 있고, 개울 좋기로 소문난 주천강의 시작점이 있다.
주천은 작은 동네지만 항상 풍류가 느껴지는 그런 곳. 술주(酒)자에 샘천(泉)자를 쓰는 이름에서 오는 선입견 탓이기도 할게다. 예전에 술 솟는 샘이 있어 양반에게는 청주를 평민에게는 탁주를 주었다고 하고, 못된 평민이 홧김에 샘을 부수었는데... 이후로는 술대신 맑은 물만 쏟는다는 전설로 인해 주천이라는 이름이 생겼단다.
주천에서 배신이라도 하듯 영월행을 버리고 평창으로 이어지는 이정표를 따라 간다. 마을을 벗어나 속도가 붙을 즈음에서 오른쪽으로 수주면 이정표와 법흥사 이정표가 나란히 보인다. 그길을 접어들고 나서야 세속에서 벗어났음을 실감하게 된다. 강을 끼고 달리는 길에는 적당한 휘어짐과 높낮이가 있고 주변에 펼쳐진 경관마저도 평온하다. 그래서 일까? 처음 가보는 사람에게도 낯설다는 느낌이 적다. 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뜻의 수주에는 무릉도원이라는 어구를 나누어 가진 무릉리와 도원리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그 곳,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릉리와 도원리를 나누는 지점에 요선암이 있다. 풍치좋은 주천강에서도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할 곳이 바로 이 요선암이다. 법흥사쪽과 도원리쪽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도원교가 놓여 있다. 도원교를 건너기 전에 왼쪽 강변으로 나있는 비포장길을 따라 들어가면 강변에 작은 바위산이 일부러 옮겨다 놓은 양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요선암과 요선정은 그곳 꼭대기에 있다. 어쩌다 문화유적 화보집에서 보았을 지도 모를 물방울 모양의 바위가 바로 요선암이다. 바위절벽위에 풀잎에 매달린 이슬 모양의 바위가 올려져 있고 바위 앞면에는 마애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 옆에는 정자가 아담하게 지어져 있는데, 지어진지가 오래되지는 않는다. 조선시대 강릉부사를 지냈던 풍류남 양사언이 이곳 경치를 보고, 신선이 노닐만한 자리라하여 요선암(邀仙岩)이라 칭하고 그 글씨를 바위에 새겨두었던 것이 여태껏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선암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수주라는 이름과 무릉도원이라는 지명이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선암 자체도 그렇지만 아래의 강변마저도 신비롭다. 강변에는 반들반들한 수백개의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큰 것은 20여명이 앉아 쉴 수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물에 씻겨 패인 자국이 바위마다 깊게 골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솜씨 좋은 석공이 수 십년을 공들여 만들었다 해도 그토록 기묘하고 모양좋게 배열할 순 없었으리라. 하루 온종일을 바위에 앉아 무심히 흐르는 물결을 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을 성 싶다. 게다가 요선암에서 도원교를 건너면 강가 어디서나 자리를 펴고 앉아도 좋을 서만이강과 곳곳에 청정계곡이 펼쳐진다
요선암의 둥근바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강 기슭 큰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라 새긴 刻字(각자)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 지 정 되어 있다.
요선정은 불교 전성기인 통일 신라시대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 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또한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열반했을 때에는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지금도 정자 주변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작은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요선정 앞에는 치악산에서 흐른 물이 옛 흥녕선원지 앞을 지나는 법흥천과 합류하여 맑은 계곡을 형성하고, 깊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는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넓게 깔려있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강기슭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고 있다.
이 글씨는 조선시대 시인이며 서예가인 楊蓬來(양봉래)가 평창군수 시절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와 일대의 경관을 즐기다가 새겨놓은 글씨라 전해오고 있다. 邀僊(요선) 또는 邀仙(요선)이라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요선정
요선정은 대대로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세하, 곽태응, 이응호를 중심으로 하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 세 임금이 써준 御製詩(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세운 정자이다. 영월 땅에 세분 군왕의 御製御筆詩文(어제어필시문)이 내려진 것은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대왕께서는 144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된후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한편 노산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 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憑虛,晴虛兩樓詩(빙허, 청허양루시) 한수를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 현루인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 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께서는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林鏶(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선왕의 어제시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주천은 옛 고을로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 좋은 곳으로 옛날 심정보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의 현판은 그간 화재를 입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原篇(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여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하니 한 누각이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 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하는 내용의 서문과 함께 정조대왕은 어제시 한편을 내려주셨다.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두 누각은 오랜 세월속에 퇴락하여 마침내 무너졌고, 세 임금의 寶墨(보묵)은 민가에서 보존되니 이를 봉안하고자 무룽리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
요선정에 봉안되어 있는 어제시는 두 틀 板額(판액)에 보존되어 있으며,그 중 하나에는 <숙종대왕어제시>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남한강<南漢江>의 지류<支流>인 주천강<酒川江>의 상류로 풍경이 아름다운 강가에 위치하고 있는 일명 요선암<邀仙岩>이라고도 부르는 정자이다. 이곳 주민들에 의하여 1915년 신축되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에는 우측에 이응호<李應鎬>가 쓴 "요선정<邀僊亭>" 좌측에 "모성헌<慕聖軒>" 현판이 걸려있고, 그외에 홍상한<洪象漢>의 "청허루중건기<淸虛樓重建記>"와 요선정기<邀僊亭記>, "중수기<重修記>"가 걸려있으며, 정자<亭子> 건립 당시에 주천<酒川> 청허루<淸虛樓>에 보관되어온 숙종대왕<肅宗大王>의 어제시<御製詩>를 이곳에 봉안<奉安>하였다. 이 지역 일대는 신라 불교 전성기에 도윤국사<道允國師>와 징효대사<澄曉大師>가 흥령선원<興寧禪阮>을 개원해 포교<布敎>하던 곳으로 전해지며 징효대사가 열반<涅槃>했을 때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곳으로 지금의 요선정 자리는 그 시절의 암자터라 전하고 있으며, 요선정옆에는 석탑<石塔>과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법흥계곡
영월 서강의 상류이며 남한강 발원지로 이루어진 수주면의 여러 계곡은 태고의 신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맑은 물에만 서식하고 있는 가재, 도롱뇽, 쉬리 ,황쏘가리, 자라등 희귀 토종 어종과 멸종위기동물로 보호받고 있는 수달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천혜의 자연보고이다.
사자산(1,120m)에서 발원해 법흥사 앞을 거쳐 주천강으로 흘러드는 계곡이다. 사암봉·사자산·백덕산(1,350m) 등 해발 1,000m 이상의 고봉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모인 탓에 옆새우·열목어 등 1급수에서만 볼 수 있는 물고기들이 자란다. 상류는 경사가 급해 물살이 빠르다. 법흥리는 신라 후기 오교구산 가운데 하나인 흥녕선원지(강원기념물 6)를 비롯하여 징효국사탑비(보물 612), 징효국사부도(강원유형문화재 72), 법흥사부도(강원유형문화재 73), 법흥사석분(강원유형문화재 109) 등 신라의 불교 문화가 많은 곳으로 계곡 상류 쪽에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여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시기 위해 세운 법흥사가 있다.
법흥사 개요
법흥사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창건한 흥녕사 절이다.당시 징효대사는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진신사리 100과를 얻어다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 등에 나누어 봉안하고, 이곳에 적멸보궁형 법당을 세웠다.법흥사는 이들 5대 적멸보궁 가운데 하나인데, 징효대사는 법흥사 적멸보궁 뒷산에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한다.때문에 적멸보궁안에는 부처의 삼존불이 없고 , 뒤쪽으로 뻥뚫린 창만 하나 나 있다. 이것은 산 전체가 부처의 몸이라고 전하는 법흥사 적멸보궁의 뜻이라 한다. 법흥사는 한때 2천여명의 수도승이 운집하기도 했던 큰 가람이었으나 , 수차례의 화재로 인해 절간을 모두 소실하고 현재는 적멸보궁과 심우장 , 요사채, 징효대사보인탑비,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이 남아있다. 법흥사에서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경승지 중 하나다. 처음에는 사자산사라 불리던 곳이었으나, 1939년 중수시에 사자산적멸보궁이라 개칭되었습니다. 사찰로 들어가는 오솔길의 소나무숲이 장관이고 사찰 앞에 줄줄이 이어진 아기자기한 아홉개의 봉우리(구봉대) 역시 일품인 곳이다.
흥녕사 징효대사보인탑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위치한 고려시대 초기에 세운 비석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고승인 징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다.1977년 보물 제 612호로 지정되었다. 징효대사(826-900년)의 이름은 折中(절중)이다.그는 19세에 패족계를 받고 당나라에 들어가 남천보원의 선법을 계승하고 돌아온 철감국사 도윤(798-868년)의 문하에서 수도하였다. 헌강왕(875-886년)때에는 흥녕선원을 개설하여 크게 선풍을 일으키고, 구산선종의 하나인 사자산 선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신라 효공왕4년(900년)3월9일 영월 흥녕사의 암자인 요선암에서 입적하였으며, 향년 75세였다.
비석은 신라말이나 고려초기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탑비로 거북보양을 한 龜趺(귀부)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위에 이수를 얹어놓은 모습이며 비신의 앞. 뒷면에는 비문을 조각하였다.
地臺石(지대석)과 귀부는 같은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귀두와 입에는 큼직한 寶珠(보주)를 혀 위로 물고 있다. 龜甲(귀갑)은 반구형에 가까운데 ,등 전체에는 육각의 귀갑문이 있고 그 안에는 다시 둥근 子房(자방)이 있는 花紋(화문)을 조각 장식하였다. 비좌는 앞.뒷면에 卷雲紋(권운문)을 ,좌우 측면에는 卷雲紋(권운문)과 唐草紋(당초문)이 조화를 이룬 문양들을 두드러지게 조각하였다.
비석위에 놓인 이수는 비좌와 같이 밑에는 받침을 두고 그 주변에는 複葉仰蓮(복엽앙연)을 돌아가면서 양각하였다.측면에는 네 귀퉁이에 용이 하나씩 모두 네 마리의 용이 목을 길게 뽑아 相輪部(상륜부)를 향하고 있으며,상면 중앙에는 간략한 상륜을 얹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보아 섬세하면서도 웅건함을 나타내고 있음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 놓은 원주의 진공대사탑비와 비슷하다. 전문이 비교적 잘 남아 있고 글자 한자의 크기는 2cm~3.5cm인데,징효대사의 행적과 당시의 포교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문 말미에 "天福九年歲在甲辰六月十一日立"이라 하였으니,이는 고려 제2대 혜종 원년(944년)에 세운 비석이다.
澄曉大師浮屠(징효대사부도)
영월군 수주면 법홍리에 있는 법흥사 적멸보궁 뒤에 위치하고 있는 사리탑은 징효대사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석조부도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도의 형태는 八角圓堂形(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지대석은 넓직한 1단의 층단을 마련하고 그위에 하대석이 놓여있다. 하대석은 팔각의 하대와 연화대석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眼象(면상)이 음각되어 있고, 그 안에는 큼직한 花形(화형)이 양각되어있다. 연화대석에는 八瓣(팔변)의 複葉伏蓮(복엽복련)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8각으로 각면에 兩隅柱(양우주)가정연히 조출되어 있을 뿐 그 밖에 조각은 없다. 상대석의 측면 仰蓮部(앙련부)는 원형으로 되어있고, 위는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쪽 3단의 괴임을 각출하고 측면의 앙련은 상하로 각 16판씩 單葉(단엽)의 蓮瓣(연판)을 조각하였는데, 하단의 연판엔는 문양이 없으나 상단의 연판내에는 子房(자방)이 있는 四花紋(사화문)을 조식하였다. 상면에는 하면과 같이 3단의 받침을 각출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은 상 · 하단이 약간 좁아진 배홀림이 있는 八角柱形(팔각주형)으로 전 ·후 양면에는 門扉(문비)를 모각하고 그 안에 자물통을 양각하였는데, 전 ·후면의 형태는 조금씩 다른 점이 있다.
이 같은 전후 양면을 제외한 나머지 6면에는 모두 각종 입상이 양각되어 있는데 전면 문비 좌우 양면에는 仁王像(인왕상)을, 그 밖에 좌우 양면에는 四天王像(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있다.
옥개석은 아랫면에는 3단의 괴임이 마련되어 있고 낙수면 에는 8각마다 합각머리에 굵은 隅棟(우동)이 내려오고, 轉角(전각)에는 귀꽃을 조각하였다. 옥개석은 平薄(평박)하고 추녀의 반전과 귀꽃 등이 잘어우러져 경쾌한 감을 준다.
정상부에는 아무런 조식없이 覆鉢 (복발)을 얹어 놓았다. 복발은 8각 편구형으로 중앙에 3줄의 융기된 橫帶(횡대)에 등근 자방이 있는 사엽화문을 양각하여 도합 8좌의 화문을 장식하였다. 그 위에 놓인 寶蓋(보개)는 옥개석과 동일한 수법의 양식으로 옥개석을 축소시켜 놓은 것과 같다.
보개 위로는 보주가 놓여 있다. 이 부도의 조성 시기는 앙 ·복련과 안상 등의 조성 양식이 고려시대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탑신부의 배흘림이나 각 면에 조각된 입상의 조성양식으로보아 그 보다 다소 뒤진 1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부도로 추정되고 있다. 규모는 전체 높이 2.4m, 지대석의 한변의 넓이 1.5m이다.
“온 산이 다 부처님의 몸” 법흥사 적멸보궁-김봉렬교수
법흥사 적멸보궁은 뒷산 어딘가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뒷산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강원도 영월군, 사자산 법흥사에는 적멸보궁이라는 이름의 법당이 있다. 정면 3칸의 자그마한 규모이며 외관상으로는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건물이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가면, 불단 위에 응당 계셔야할 불상이 없이 바깥으로 창만 뚫려있다. 이런 류의 법당구조는 통도사 대웅전에서도 볼 수 있었다. 통도사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이유는 창 밖으로 보이는 사리탑에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불상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흥사 적멸보궁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뒷동산의 유려한 곡선뿐이다. 뒷산이 불상 대신 모셔진 것이다.
석가세존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라는 당시 마투라 족들이 지배하던 땅이었다. 대대적인 다비식을 끝내고 나니, 여덟 말에 해당하는 세존의 진골, 진신 사리를 수습할 수 있었다. 소문을 들은 주변의 일곱 나라 왕들이 몰려와서 사리를 나누어줄 것을 요청해 세존의 사리는 여덟 등분되어 여덟 나라는 각각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니, 이를 근본 8탑이라 부른다.
세존이 계실 때는 가람도 경전도 필요 없었다. 세존이 머무는 곳이 바로 가람이요, 세존의 말씀이 바로 경전이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자성의 종교지만, 일반 민중들은 구체적인 신앙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자성 구도는 철학적 종교적 사유를 할 수 있는 지식인에게나 가능하지, 지적 수준이 낮은 민중들에게는 난해하고 불가능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세존의 뼈와 정기가 화한 진신사리야말로 최고의 신앙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교 초기에 일어났던 사리 전쟁은 자기 나라를 불교국으로 포교하려던 왕들의 전략적 목표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유명한 아쇼카 왕은 후대에 일곱 나라의 탑(스투파)에서 사리를 꺼내어 그가 세운 8만개의 탑에 골고루 나누었고, 사리신앙은 온 세상에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사리신앙을 전파한 이는 자장율사다. 중국에 유학한 자장은 종남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세존의 의발과 진신사리 100과를 얻어 귀국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는 이 사리를 황룡사 9층탑과 울산 태화사, 그리고 통도사 금강계단에 나누어 봉안했다. 현존하는 곳은 통도사 금강계단 뿐이다. 그러나 다른 기록과 구전에 의하면, 자장은 여러 곳에 그가 가지고 온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했다고 전한다. 오대산의 중대암, 설악산 봉정암, 그리고 사자산 법흥사가 바로 그곳이라 한다. 또한 태백산 정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통도사 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다. 이들 5개소에는 적멸보궁형의 법당들이 세워졌고, 이를 5대 적멸보궁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외에도 대구 달성 용연사에도 적멸보궁이 있고, 사천 다솔사도 최근에 보궁을 만드는 등, 진신 사리와 보궁에 대한 신앙은 아직도 식을 줄 모른다.
세존의 말씀은 교(敎)가 되었고, 세존의 마음은 선(禪)이 되었다. 교는 경전을 통해 기록되어 법보(法寶)가 되었으며, 선은 스님들을 통해 전해져서 승보(僧寶)가 되었다. 세존의 몸이요, 정신의 현현물인 진신사리는 불보(佛寶)가 되어, 삼보를 구성한다. 그 귀한 보물이니, 진신사리에 대한 열망은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법흥사 적멸보궁은 뒷산 어딘가에 사리가 봉안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뒷산 전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어떤 인공적인 불탑보다도, 불상보다도 자연물은 위대하다. 세월이 지난다고 허물어질리 없고, 외적의 침입에도 도난당하거나 불타버릴 염려도 없다.
자장이 가져왔다는 불사리의 진신 여부에 대해 의심이 제기되기도 한다. 세존이 열반한 뒤 1000여년이 지난 그 때에, 그리고 이국인 중국 땅에서 어떻게 100과나 되는 사리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어떻고, 사실이면 어떤가? 불보란 석가세존의 존재 자체이지, 뼈나 구슬과 같은 사리가 아니지 않은가? 물질인 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장이 전해준 불보에 대한 신앙이 중요한 것이다.
사리는 단지 상징일 뿐이다. 법흥사 적멸보궁 뒷산은 사리신앙의 상징성을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거대한 산 속에 몇 톨의 진신사리가 흩어져 묻혀있다. 아무리 첨단 장비를 동원한다 해도, 이 산 속에서 사리를 찾는다는 것은 망망대해에 던져진 돌멩이를 찾는 것만큼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 그러나 아무런 장비 없이도 우리는 쉽게 사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온 산이 부처의 몸이기 때문에, 뒷산에 널린 돌멩이 하나는 부처의 뼈요, 풀포기 하나는 부처의 모발이 된다. 법흥사 적멸보궁이 전하고 있는 뜻은 바로 이것이다. 그 좁쌀만한 사리를 왜 찾으려 하는가? 온 산이, 온 세상이 부처인데.
김 봉 렬<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5대 적멸보궁-신문기사 스크랩
신라의 자장율사는 정암사 외에도 네 곳에 적멸보궁을 더 세웠다. 정암사와 함께 ‘5대 적멸보궁’이라 불린다. 경남 양산의 통도사, 설악산 용아장성능의 봉정암, 강원 영월군 사자산의 법흥사,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이다. 1,3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5곳의 분위기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땅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곳, 길한 곳,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적멸보궁을 찾아간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실 당시의깊이있는 풍광을 마음 속에 그려보면 떠나가는 이 한 해가 새털처럼 가벼울 터이다.
승려의 계받는 "승보사찰"영축산 통도사(선덕여왕 15년, 서기 646년)
"삼보(三寶)사찰’이라는 것이 있다.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사찰이다. 불가의 으뜸 사찰들이다. 불보사찰은 적멸보궁이 있는 통도사,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간직한 합천 해인사, 승보사찰은 수많은대승을 길러낸 순천의 송광사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사찰 통도사이다. 통도사 불이문(不二門)에는 ‘원종제일대가람(源宗第一大伽籃)’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 땅 불교의 근본이 되는 절’이라는 뜻이다.옛날 자장율사는 서라벌(경주)에서 비교적 가까운 양산 땅에 부처의 분신을 모시고 우리 불교의 정점으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통도사가 들어있는산 이름도 부처가 마지막 설법을 했던 영축산(영취산이라고도 함)을 그대로 빌려왔다. 통도사는 한반도에서 가장 접근이 쉬운 대찰이다. 경부고속도로 통도사IC에서 빠지면 바로 절 입구다. 길에서 가까운 만큼 규모도 크고 분위기도세련됐다. 절 입구의 사하촌(寺下村)은 아예 관광단지가 되어 있고, 롤러코스터가 빙빙 돌아가는 테마파크(통도 판타지아)도 있다. 그러나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세 개의 문을 차례로 통과하면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좌우로 고풍스러운 절집들이 도열한다. 단청이 씻겨나간 나뭇결 그대로의 건물들은 바로 옛날 부처의 세계이다. 옷 매무새를 다시 여민다. 적멸보궁은 불이문에 들어선 이후 가장 끝에 있다. 지붕 밑에 사방으로 현판을 걸었는데 이름이 모두 다르다. 적멸보궁, 대웅전, 대방광전, 금강계단이다. 이 중 금강계단이란 글씨는 흥선 대원군이 썼다. 안에는 역시 부처님이 없다. 대신 수미단 뒤편으로 금강계단이 있다. 사리를 모신 곳이다. 승려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이 곳에서 승려의 계를 받는다. 불가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 곳이다.
끝없는 순례자의 발길들설악산 봉정암(선덕여왕 12년, 643년)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능선 중 하나가 소청봉 아래의 용아장성능이다. 이름 그대로 ‘용의 이빨’처럼 생겼다. 과거 암벽 등반가들에게는 더 없이좋은 코스였지만, 사고가 빈발해 결국 일반인들의 능선 종주가 금지됐다.봉정암은 그 이빨의 잇몸쯤 되는 위치에 들어있다. 해발 1,244㎙로 꽤 높다. 높을 뿐 아니라 가는 길도 무척 험하다. 봉정암 순례는 힘들다. 힘든 만큼 아름다운 순례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제 용대리에서 백담계곡으로 든다. 백담사를 거쳐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면 수렴동 계곡. 계곡의 끝자락부터 길은 하늘로 향한다. 지금은 붉은색철다리와 계단이 계곡과 절벽에 놓여 있지만 옛날에는 첨벙거리며 계곡을건너고 네 발로 절벽을 기어올랐을 것이다. 마지막 관문은 깔딱고개. 최근험한 곳에 계단이 놓였지만 젊은 기운으로도 숨이 턱턱 막힌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80%는 중년 이상의 아주머니나 할머니다. 동네 시장에 가려고 해도 택시를 잡아야 할 나이에 험한 산길을 거의 날다시피 오른다. 아이의 대학합격을 위해, 집안의 평안을 위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러 가는 길은 그렇게 기운이 펄펄 나는가 보다. 옛날 자장율사는 헬리콥터라는 것을 예측했을까. 몇 년 전만 해도 봉정암은 석가사리탑과 본당, 요사채가 전부였다. 기도하는 신도가 많아지면서대규모 불사를 했다. 자재는 모두 헬리콥터로 날랐다. 이제는 제법 큰 사찰이 됐다. 100명 이상이 잠을 잘 수 있는 신도들의 숙소도 만들었다. 공양(식사) 시간이면 신도들에게 스님들이 ‘질서’를 외칠 정도이다. 봉정암 참배의 정점은 석가사리탑이다.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해서‘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적멸보궁 뒤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있다.평범한 5층 석탑이다. 그러나 아래로 펼쳐지는 설악 능선을 배경으로 한석탑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다. 1,300년 동안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다람쥐채바퀴 같은 인간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어찌 번뇌가 있겠는가.
산전체가 부처님의 나라사자산 법흥사(선덕여왕 12년, 643년)
강원 영월 땅에는 특이한 지명이 있다. 주천(酒泉)면이다. 이름 그대로 술샘이다. 술이 솟았다고 한다. 양반이 술잔을 놓으면 청주(맑은 술)를, 평민이 잔을 대면 탁주를 냈다. 은근히 부아가 난 평민이 양반 의 옷을 입고술잔을 놓았다. 술샘은 속지 않고 탁주를 넘치게 부었다. 화가 난 평민은술샘을 아예 부숴버렸다. 이제 술은 솟지 않지만 샘의 흔적은 있다. 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물. 인근에 수주(水周)면이 있다. 물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이다. 정말 마을을 뺑뺑 돌아 물이 흐른다. 법흥사는수주면의 끄트머리에 있다. 물 기운과 산 기운이 만나는 곳이다. 산의 이름은 사자산이다. 자장율사는 산 어딘가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 그래서 산 전체가 부처의 나라이다. 법흥사(옛 이름 흥녕사)는 한때 융성했다. 산의 이름을 딴 사자산문이 활기를 띠었고 그 중심 도량 역할을 했다. 그러나 물 기운을 빈 법흥사는 반대로 불 때문에 고초를 많이 겪었다. 891년 불에 탔다가 944년 중건됐다.이후 다시 불에 타 1,000년 가까이 명맥만 유지하다가 1902년 비구니인 대원각이 중건해 법흥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다가 1912년 다시 불에 탔고 1930년에 중건됐다가 1931년에는 산사태로 일부가 유실됐다. 대규모 주차장을 갖춘 지금 새 청사진을 갖고 큰 불사를 벌이고 있다.
법흥사의 적멸보궁은 절터의 제일 높은 곳에 있다. 여러 번 고초를 겪은만큼 새 단장을 한 적멸보궁이다. 5대 적멸보궁 중 가장 깔끔하고 단청도새롭다. 운치는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옛 기세를 느낄 수 있는 유적이 많다. 절 입구에 있는 징효대사탑비는 보물 612호로 지정된 귀중한 유물이다. 탑비에서 바라보는 극락전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탁트인 사방… 가슴도 "탁"오대산 상원사
오대산이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오대산이다. 그리고 자장율사가 중국(당촵唐)에서 수도를 한 산이 오대산이다. 지형으로 봐서는 전자가, 자장율사가 적멸보궁을 세운 곳이라는 점에서는 후자가 맞을 듯하다. 풍수학적으로 오대산 적멸보궁은 땅의 힘이 대단하다고 평가 받는다. 그자리에 부처의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승려들이 먹을 것 걱정 없이 수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정말 터가 좋다. 뒤로는 비로봉이호위하고 앞으로는 오대산의 육중한 능선이 펼쳐진다. 풍수에 문외한이라도 속이 확 트인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오대산 적멸보궁 가는 길은 즐겁다. 볼 것이 워낙많다. 처음 만나는 것은 월정사. 큰 절이다. 조계종의 강원도 대부분 사찰을 호령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이다. 전나무숲은 너무 유명하다. 숲 사이에 좌정하고 있는 월정사 부도군, 우리 사찰에서 만나기에는다소 화려한 8각9층탑, 적광전 뒤의 야산에 펼쳐진 잣나무숲 등은 산사 여행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원사. 상원사는 월정사와 적멸보궁의 중간에 낀 사찰이었다. 월정사의 스님들이 수도를 하는 곳이자 적멸보궁을 보필하는 선원이었다. 조선 세조가 이 곳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했고, 이후 조선 왕조의 아낌을 받았다. 월정사에서 비포장도로로 약 8㎞ 떨어진 상원사는 이제 작은 절이 아니다. 지금 옛 청량선원인 본체의 청기와를 걷어내고 동(銅)기와로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옛 절 옆에는 동기와를 얹은 멋진 새 청량선원을 지었다.
적멸보궁은 상원사에서 산길로 약 40분(1.5㎞) 거리에 있다. 지그재그로난 계단과 돌길을 걸어야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다. 가벼운 겨울 산행으로제격이다. 월정사와 상원사를 들렀다면 꼭 찾아야 할 곳이다. 산에서 느끼는 비속(非俗)의 느낌. 가슴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전각을 말한다. 보궁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의 적멸도량회(寂滅道場會)를 열었던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에서 비롯된다.
《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처음 7일 동안 시방세계(十方世界) 불보살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기 위한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선정에 들었다 한다. 이 때 부처 주위에 많은 보살들이 모여 부처의 덕을 칭송하였고, 부처는 법신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한몸이 되었다. 따라서 적멸보궁은 본래 두두룩한 언덕 모양의 계단(戒壇)을 쌓고 불사리를 봉안함으로써 부처가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법을 법계에 설하고 있음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진신사리는 곧 부처와 동일체로, 부처 열반 후 불상이 조성될 때까지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숭배 대상이 되었으며 불상이 만들어진 후에도 소홀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에서 적멸보궁의 편액을 붙인 전각은 본래 진신사리의 예배 장소로 마련된 절집이었다. 처음에는 사리를 모신 계단을 향해 마당에서 예배하던 것이 편의에 따라 전각을 짓게 되었으며, 그 전각은 법당이 아니라 예배 장소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상을 따로 안치하지 않았다. 다만 진신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 행위를 위한 불단을 마련하였다.
한국에는 신라의 승려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져온 부처의 사리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通度寺), 강원도 오대산 중대(中臺)의 월정사(月精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적멸보궁이 그것이다.
통도사는 금강계단에 진신사리를 봉안해 계율 근본도량 불보종찰(佛寶宗刹)이 되었는데, 부처가 안치되어야 할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당 내부에 동서로 길게 불단만 놓여 있다. 또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야 할 자리는 창으로 훤히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월정사 적멸보궁(강원유형문화재 28)은 불사리를 안치한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고, 다만 전각 뒤쪽의 작은 언덕에 부처의 정골사리[佛頭骨一片)를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세존진신탑묘(世尊眞身塔墓)가 상징적으로 서 있을 뿐이다. 설악산 봉정암에는 부처의 불사리를 안치한 석가
사리탑(강원유형문화재 31)이 있는데, 뇌사리를 안치하였다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한다.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강원문화재자료 32)은 다른 네 곳과는 달리 임진왜란 때 유정(惟政)이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으로, 산 위에 수마노탑(보물 410)이 있다. 사자산 법흥사에는 진신사리가 안치된 보탑과 자장이 도를 닦았다는 토굴이 있다.
이들 5대 적멸보궁은 불교도들의 순례지이자 기도처로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신봉된다. 그 밖에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비슬산(琵瑟山) 용연사(龍淵寺), 경상남도 사천시 다솔사(多率寺) 등에도 적멸보궁이 있다
구산선문..현대불교에서 퍼옴
신라 말 당나라 유학승들에 의해 전래된 선종(禪宗)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불교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들어온 선종 사상을 초석으로 아홉개의 산문(山門)이 형성 되니 이것이 바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처음으로 실상산문(實相山門)이 개설된 828년(신라 법흥왕 3)에서 부터 마지막 수미산문(須彌山門)이 만들어진 932년(고려 태조 15)까지는 실로 104년의 긴세월이 흐른다. 현재 우리 불교의 종가를 이루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맥도 바로 이 구산선문에서 부터 비롯 되었다. 본사가 기획한 ‘구산선문 참선기행’은 한국 선불교의 근본 수행처를 찾아 선맥의 체취를 느끼며 재발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구산선문 참선기행’은 번잡스런 도심의 일상에서 벗어나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켜온 도량을 찾아 선불교의 향훈을 체험하는 테마 기행이다. 4월부터 찾아갈 오늘의 구산 선문을 지면을 통해 미리 가본다. 수미산문 광조사는 북한지역에 있어 기행에서 제외된다.
■실상산문(실상사)
구산선문중 가장 먼저 개창된 것이 실상산문이다. 개조(開祖) 홍척스님(?∼828)은 중국 서당의 법을 얻어 826년(흥덕왕 6)에 귀국해 산문을 만들고 “정(靜) 하였을 때는 산이 세워지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응한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이는 그가 북종선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의 제자로는 편운과 수철이 있었는데 단의장옹주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 구산선문중 실상선문이 가장 왕실과 밀착 됐었음을 알 수 있다.
평평한 절마당 곳곳에 잘 보전돼 흩어져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37호) 2기와 석등(보물 제35호), 창건주의 유골을 모신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탑비(보물 제39호) 등은 실상사의 내력과 함께 고찰의 역사를 웅변해 준다. 단층 기단위의 탑신 전체에 난간·신중(神衆)·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들이 정교하게 조작돼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케 하는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은 통일 신라 시대의 지혜와 향기를 맛볼 수 있게 해 준다. 인근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이 있다.
■가지산문(보림사)
도의선사(783∼821)는 859년(헌안왕 3)에 왕의 청으로 보림사에 머무르며 김언경 등의 후원 아래 사원 세력을 확장시켜 가지산문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그는 성(性)과 상(相)이 다르지 않으며 마음이 족하면 뜻이 일어난다(心足意興)는 화두를 강조했다. 이후 가지산문은 염거·체증·형미·진공 등에 의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전라남도 장흥군에 위치한 보림사에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 사천왕상과 긴 세월 속에서 자태와 위용을 한껏 뽐내는 삼층석탑, 석등(국보 제44호)을 만날 수 있다. 또 왼쪽 어깨에 새겨진 8행의 기록을 통해 보림사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커다란 불상인 철제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근처에 있는 운주사와 쌍봉사도 가 볼만 하다.
■희양산문(봉암사)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중국에 들어가지 않고 산문을 성립시킨 희양산문의 개창자 지증선사(824∼882). 그는 다른 선문 개산조와는 달리 유학에 밝았고 선승으로서의 특별한 인연을 나타내는 탄생·금기·출가 등 6이(異)와 불사의 필요성을 나타내는 6시(是) 등을 주장했다.
봉암사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1년내내 오직 참선으로 수행·정진하는 도량이다. 이 사찰의 최대 자랑 거리는 장중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지증대사적조탑(보물 제137호)과 탑비(보물 제138호). 인근에 김용사와 대승사가 있다.
■동리산문(태안사)
중국 서당의 법을 받아 개창했던 또 하나의 산문이 바로 동리산문이다. 개조 혜철스님(785∼861)은 839년(신무왕 1)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에는 왕실과 연결해 산문을 이끌고 나갔다. 그의 제자로는 개성 중심의 풍수지리설을 제창한 도선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왕건이 고려 국가를 건설해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몫을 했다고 전해 진다.
이 사찰에서 순례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맞배지붕 건물인 옛 누각 능파각. 긴 역사에 비해 절을 이루고 있는 건물수가 적어 전체적으로 단촐한 느낌을 준다. 선원이 있는 언덕에 오르면 동리산문을 개창한 적인선사 혜철의 부도탑인 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에 이르게 된다. 태안사는 부도 이외에도 1454년(단종 2)에 만든 대바라 한쌍(보물 제956호)과 1581년(선조 14)에 제작된 명문이 새겨진 대웅전 동종, 해회당 마루에 걸려 있는 직경1m의 금고(金鼓) 등 많은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인근에는 화암사와 천은사가 있다.
■사굴산문(굴산사지)
사굴산문은 범일스님(810∼889)에 의해 개창됐다. 범일은 831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했다.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道)라 말한 그는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그 뒤 진귀대사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다”고 설해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했다. 그의 제자로는 행적·개청·신의 등이 있으며 이 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쳤다.
굴산사는 851년(신라 문성왕 13)에 범일 국사가 창건한 사찰로 신라말에서 고려초까지는 매우 유명했던 사찰이다. 전성기때에는 승려 수만도 2백여명이 넘었으며 쌀 씻은 뜨물이 동해에 까지 흐를 정도로 큰 가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소실돼 세인의 관심 밖에서 사라졌었다. 이후 1936년 강릉지방의 대홍수로 6개의 주춧돌이 노출됐고 이때 부근 주민이 ‘사굴산사’라는 한문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이절이 굴산사였음이 밝혀지게 됐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절터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5.4m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마주 보고 서 있다. 또 이 절터에는 ‘굴산사지 부도탑’(보물 제85호)과 ‘굴산사지 석조 비로자나 삼존불상’이 남아 있다. 인근에는 등명낙가사와 보현사가 있다.
■봉림산문(봉림사지)
봉림산문의 개창자는 현욱선사(787∼868)이다. 현욱은 824년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장경의 법을 받아 837년에 귀국한 뒤 봉림산문을 만들었다. 그의 제자 심희는 김해지방의 가야계 김율희와 연결해 봉림사를 열었고 이어 918년에는 왕건의 권유로 고려 왕실에 나가기도 했다. 이어 심희의 제자 찬유는 “동일한 진성(眞性)이 일심(一心)이며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 했고 천태사상을 받아 들이기도 했다.
현재 봉림사 절터에는 남아 있는 문화재가 거의 없다. 봉건사지에는 본래 보월능공탑(보물 제362호)과 탑비(보물 제363호) 그리고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26호)이 있었는데 탑과 탑비는 일제시대때 경복궁으로 이건됐고 석탑은 1960년 사지 3㎞ 밑에 있는 상북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인근에는 성주사와 장위암이 있다.
■사자산문(법흥사)
사자산문의 개창조인 도윤스님(798∼868)은 825년(헌덕왕 17)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법제자인 남전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먼저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산문을 열었지만 번성하지 못했다. 이후 그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오면서 부터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법흥사는 신라 선덕여왕때인 7세기 중엽에 자장 율사가 문수 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 세 곳을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기도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이곳에 들러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이후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흥녕사에서 법흥사로 절이름을 바꾸었다. 옛날 흥녕사 시절에는 구산선문으로서 이름을 떨치며 전국의 도속(道俗)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었다. 하지만 오늘의 법흥사는 적멸 보궁 도량으로서 수많은 불자들이 바치는 ‘나무석가모니불’ 정근 소리가 사시사철 그칠날 없이 도량에 메아리 친다. 월정사, 구룡사, 정암사 등이 가깝다.
■성주산문(성주사지)
성주산문은 무염국사(801∼888)에 의해 개창됐다. 무염국사는 821년(헌덕왕 13) 중국으로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마곡의 법을 받아 845년(문성왕 7)에 귀국, 남포지역의 호족인 김흔과 결합해 성주산문을 열었다.
이 산문은 나말 여초에 가장 번창했으며 무염국사는 여엄·대통·심광·자인·영원 등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특히 이 산문은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융합하려는 사상 경향을 가졌다.
성주사는 백제때의 오합사(烏合寺)가 통일신라때에 개칭되면서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서는 성주사의 규모를 불전 80칸, 행랑 800여칸, 수각(水閣) 7칸등 성주사의 규모를 거의 1천칸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돼 그 장엄하던 절이 송두리째 자취를 감췄다.
성주사터에는 오층석탑, 금당터의 석조 연꽃대좌, 세 기의 삼층석탑 등 돌로된 것들만이 그 형체를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신라시대 부도비중 가장 큰 것으로 성주산문의 개창조사인 무염국사의 부도비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는 거의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며 옛 명성을 자랑하고 서 있다. 인근에는 무량사와 장곡사 등이 있다.
■수미산문(광조사지)
구산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문의 개창자는 이엄스님(870∼936)이다. 그는 896년 중국에 들어가 운거의 법을 받아 911년(효공왕15)에 귀국해 산문을 열었다. 이엄의 제자로는 황보 제공과 왕유·이척량 등 전현직 고관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상 경향은 대체로 왕정을 보익하는 성격을 띠었다.
광조사는 진철대사 이엄을 아끼던 태조에 의해 932년에 창건됐다. 그때 이엄의 나이가 63세에 이르렀으나 선풍을 사모해 모여든 구도자(求道者)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선풍을 진작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수미산문의 전통이 확립 됐으며 이 전통은 고려 왕정을 비치는 등대로 발전했다.
산문의 중심 도량인 광조사는 오래전에 소실됐고 이엄 즉 진철대사의 보월승공비(寶月乘空碑)와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황해도지>에 기록돼 있다.
첫댓글 이번엔 프린트해서 소책자 만들어가꾸 공부안해도 되겠당...이번엔 맞춰볼라구 했는뎅...홍홍홍...
관란정에 그렇게 깊은 뜾이 있는줄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