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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캄보디아 사람 - 캄보디아 제대로 알아보기 원문보기 글쓴이: 준찌읏크마에
엉꺼오왓을 누가 설계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처음 기획했던 글(http://cafe.daum.net/cambodian/DngU/35)에 순서를 정하였는데, 그 중 세번째 이야기가 되는 셈인데, 애당초 정했던 제목(3. 엉꺼오 왓의 구조와 엉꺼오 왓의 건축가들 - 엉꺼오 왓의 설계)를 엉꺼오왓이 서쪽을 향한 까닭은? 이라 바꾸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엉꺼오왓의 필요성이 대두 된 특별한 계기는 수리야 바르만 2세의 쿠데타였습니다.
당시 정세로는 수리야 바르만이 주둔했던 시암의 남부지역은 미개한 곳으로 치부되었었고, 그런 지역의 영주가 중앙 정권을 쥔 사건은 상당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여기서 숙청되거나 권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참파로 대거 망명하여 수리야바르만 2세 사후 혼란해진 틈을 타 엉꺼오제국을 침략하게 되는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외삼촌을 몰아내는 쿠데타 훨씬 이전부터 참파는 서서히 엉꺼오제국의 영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이는 마치 우리 국사에서 중국의 힘에 밀려서 여진족들이 조선 영내로 밀려오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었습니다.
워낙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제국으로써는 골치거리였고, 그들이 자국 영토를 잠식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대월국이 905년 당나라의 멸망으로 혼란해진 중국의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독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월나라 남부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참족은 남쪽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고,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집권을 한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국경에 변화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급기야 참파는 대월국의 침략으로 더이상 영토를 지킬 수 없었기에 안남지역(지금의 메콩델타)까지 남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리야바르만 2세로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기에 근본적으로 월나라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임을 알고, 참파와 연합하여 공격을 시작합니다.
헌데, 참파입장에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죠.
엉꺼오제국은 직선거리로 따져도 700km가 넘는 먼거리에 주력이 있는 나라지만, 대월국(월나라)은 바로 눈을 뜨면 마주치는 지근거리에 있는겁니다.
결국 엉꺼오제국과 연합하는 대신, 대월국으로부터 안전 보장을 약속 받고, 자신들이 새로이 차지한 엉꺼오 제국의 영토에 눌러 살기로하고는, 연합세력인 줄 알고 안심하고 있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뒤를 공격하여, 왕은 수 많은 군사를 잃고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며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서 돌아옵니다.
이 당시에 생긴 전설이 엉꺼오 톰 남문 직전 왼쪽에 있는 박세이 참끄롱 사원의 전설과 비슷한 거대한 새(비슈누 신이 타고 다닌다는 가루다 신)가 죽음 직전에 있는 왕을 잡아채서 적의 포위로부터 구해 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참파가 자국을 침식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대외 명분으로는 참파를 위한 싸움이었는데, 도와주기로 한 참파로부터 정말 치사한 배신을 당한 왕은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 묻는 내가 잘못이지.... 워쩌기는 패 직이구 싶었것지. 안그라요? 이를 바득바득 갈었겠죠~
결국 왕은 1150년 안남 지역에서 전쟁 중에 전사할 때까지 참파를 공격하여, 차라리 대월국에게 당하는 것이 나을뻔 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파국은 망국 직전까지 이르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참파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겠다는 선언을 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신이 비슈누 신의 화신임을 천명한 왕은 쿠데타로 실권한 세력들이 참파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해 두어야할 필요가 대두됩니다.
즉 정치적 명분이 필여했다는 셈인데, 전통적으로 크메르 민족의 고유 사상과, 자야바르만 5세 때 시도 되었던 국가사원 따께우에 담고자 했던 민족의 염원,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있는 시암의 일부세력까지 군말 없이 따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필요했습니다.
요즘의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그 무엇? 그것은 바로 당시엔 국력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위대한 신의 탄생이었죠.
그 위대한 신의 탄생.....
여기서는 쉬바신에 대한 경외감 대신 망한 세상, 즉 쿠데타 이전의 혼란했던(수리야 바르만 2세 주장에 의하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의 통치자가 천계에서 강림했다는 메시지를 표현할 필요성이 바로 엉꺼오왓 건축의 계기가 됩니다.
따라서 엉꺼오왓의 건축 시작 시기를 수리야바르만 2세가 집권을 한 1113년 직후라고 보기보다는 약 9년의 시간이 지난 1122년 경으로 추산하는 이유입니다.
이때는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을 찾고 있었고, 참파를 공격하면서 효과도 확실히 나타나고 있었으며, 왕의 원래 주둔지역인 시암도 힘에서 밀리기에 점점 복속해 들어오고 있었던 때이며, 자국은 물론 주변에 자신이 집권한 이유를 분명하게 내세울 수 있는 공적이 필요한 시점으로, 대담하게 대관식을 치루면서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쉬바신이 아닌 비슈누 신의 화신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유심히 생각해 볼 것은, 왕이 궁지에 몰렸을 때 거대한 가루다 신이 나타나 왕을 구했다는 힌두의 설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크메르 사람들 사이에 수 년전부터 널리 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비슈누 신의 화신 수리야바르만 2세는 지금까지 쉬바신을 모시던 사원과는 차원이 다른 사원이 필요했고, 그 답은 자야바르만 5세 때 잠시 시도 되었던 따께우 사원에서 소프트웨어를 따오고, 지금까지 크메르 민족이 세운 모든 사원의 기능들을 함께 담을 수 있으며, 아직까지 한번도 시도 되지 않았던 초 대형의 사원을 구상한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엉꺼오 사원이 위치한 지점을 살펴봅시다.
왜 하필이면 그자리에 건설 되었나 하는 점입니다.
엉꺼오 사원은 프놈 바껭 사원을 중심으로 한 야소다라푸라 지역에 건설 되었습니다.
엉꺼오 톰이 후에 생기면서 구분이 되기는 했지만, 왕궁이 있는 지역과 프놈바껭 사원이 있는 곳, 그리고 쁘렐룹 사원이 있는 사이에 건축이 되었습니다.
헌데, 엉꺼오제국의 대부분의 유적이 동쪽을 향해 정문이 나 있는데, 엉꺼오왓만이 서쪽을 향해 있습니다.
원래의 양식대로 한다면 지금의 반대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도 하등 이상해 보이지 않을 위치에 있습니다만, 그렇게 짓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여기서 후대의 사람들 입에서는 "서방극락정토" 운운하는 말도 나오고, 힌두의 교리에 따른 장례를 위한 무덤 운운 하고 있습니다.
실제 모든 사원들이 왕의 무덤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쁘렐룹 사원은 이름이 "육신의 변화"라는 뜻입니다.
엄청나게 거대한 락샤사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동경하여 왕의 꿈속에 나타나 지금의 쁘렐룹 자리를 지목하면서 거기에 이러이러하게 사원을 지으라고 했답니다.
사원이 지어진 뒤 이 락샤사는 그 탑에 가서 몸을 인간의 크기로 줄여서 시중에 돌아다니면서 아픈사람들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이 돈을 벌게 해 주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다가, 자기 처소로 돌아갈 때는 다시 쁘렐룹으로 들어가 몸을 키웠다고 합니다만, 그런 육신의 변화라는 뜻보다는, 왕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유골을 다른 재료와 섞어서 신상으로 만들고 탑안에 봉안하여 모셨기에, 죽은 왕이 신상으로 변화하여 모셔진 뜻이라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타당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사원들 모두는 왕의 무덤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애당초 목적은 왕의 무덤이 아닙니다.
왕은 신의 화신이기에 당연히 그 탑 안에 영구히 모셔지는 것은 말 할것도 없는 것이며, 사원 본래의 목적은 신이 오고가는 텔리게이트였다고나 할까요? 그런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 서쪽으로 문을 냈다는 말은 다른 사원에서 아니라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뭘까요?
여기서 구글어스에서 다운 받아 편집해 본 사진을 한장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밀한 그림이 아닙니다, 참고만 하십시오. 롤레이나 프놈복의 꼭지점은 그 곳에 있는 사원의 중앙탑 기준입니다.
구글 어스에 표시되어 있는 롤레이 위치는 약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프놈복으로 연결된 선과의 각도가 똑 같아집니다.
바로 위의 두 장은 캡쳐를 잘 못하여 삐딱한 것이 아닙니다. - 구글어스
위 사진에서 모든 선의 출발점은 다리를 건너서 입구탑을 통과한 바로 그 지점입니다.
전승되어져 온 책에 보면, 하짓날 엉꺼오 안에서 뜨는 해는 프놈복 산에서 나온다고 있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지냈었습니다.
헌데, 캄보디아에 인테넷이 빨라지면서 구글어스를 볼 수 있게 되면서 궁금증을 못 이기고 선을 그리다보니, 깜짝 놀란 사실이 있습니다.
하짓날 해 뜨는 곳이 프놈복이라는 전제하에 선을 그려보면, 엉꺼오왓 해자의 동쪽과 북쪽 코너가 되는 원B 지점이 기준선에 잡히고, 이를 토대로 동짓날 해 뜨는 곳이 어디일까 하고 그려본 것이 바로 롤루스 사원군 안에 있는 롤레이 사원과 일직선으로 닫고 있었습니다.
더 기막힌 것은 두 사선의 중심점은 정동쪽을 향하지 않고 있더라는 점입니다.
즉 엉꺼오왓의 동쪽 정면은 정동을 향하지 않고 있고, 롤레이 사원과 프놈복 사원의 중심각에 위치한 정면의 연장선이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인데, 이는 엉꺼오왓 전체가 정동 정서를 향하지 않고 있는 각도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그 해에 추분이 가까워 오면서 그날 일출을 보기 위해 안달복달을 하였습니다.
건망증이 심한 내가 절대 잊지 않고 일출을 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일까지 접어두고 기다리던 추분날, 안타깝게도 구름 때문에 일출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맑은 하늘이 나타나면서 엉꺼오 왓 다리 앞에서(건너기 전) 몸을 잔뜩 낮추어 해가 탑 위치에 닿도록 해 보았습니다.
그 때까지 들어오기를 춘분과 추분날 정확히 탑 중앙에서 해가 뜬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게 된 순간 몸에 전율이 오더군요.
중앙 탑에서 약간 비껴난 위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구글어스에서 롤레이가 동짓날 해 뜨는 위치를 가르키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료에는 하짓날 프놈복에서 해가 뜬다는 것(엉꺼오왓 안에서 보았을 때) 말고는 동짓날에 관한 사료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가 뜨는 장면을 보았을 때, 엉꺼오왓이 약간 틀어지게 지어졌던 이유를 확인하는 순간 그 감격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이듬에 춘분날에도 역시 해는 중앙탑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벗어난 지점에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프놈복의 모습과 이야쏘바르만 1세 때 지어진 사원(위 두장), 롤레이 사원(아래)
두 사원은 모두 엉꺼오왓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습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엉꺼오왓은 해시계였던 겁니다.
아니 거대한 우주의 시계였죠.
떠오르는 해를 관측하여 그날의 날짜와 시각까지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고, 내부 2층 회랑에서 암시하는 창문의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달이 떠 오르는 위치까지 표시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태양이 크게 돌고 있는 황도의 위치까지 표시해 놓았으니 단순한 태양의 변화만 관측하는 해시계가 아니라, 이전에 설명한 우주의 사이클, 4,800신년, 3,600신년, 2,400신년, 1,200신년을 모두 한 바퀴 돌아서 우주가 소멸하고, 그 후 다시 만들어지는 우주의 대 순환사이클까지 관측할 수 있었던 우주의 시계였던 겁니다.
내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더이상 풀 수 없는 문제이기에 나름대로 기록을 꾸준히 하고 있고, 참고할 자료를 꾸준히 조사하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현대 천문학에서 밝혀나가는 부분을 앞서 찾아 낼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엉꺼오왓 안에 들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새롭게 얻는 사료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그것은 증명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남산에서 어린이 회관 준공식에 국민학교 때 학교 대표로 참석했을 때 듣기로 천문학을 공부 할 수 있는 기구들도 준비 되었다는 말에 잠깐 가졌던 관심을 쭈욱~ 더 가져서 천문학자가 될걸 그랬다는 후회가 땅을 치게 합니다....^^
현대 과학에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관에 대해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속에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수수께기의 답이 있다는 충분한 근거는 많습니다.
엉꺼오왓이 그 증거중에 제 1호가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다음으로 더 기막힌 구조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보수가 끝났는지 모르지만, 동쪽회랑 중에 선신들과 락샤사가 거대한 뱀 바수키를 밧줄 삼아 메루산을 축으로 하여 젖의 바다를 천년 동안 젓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일면 유해교반 이라고 하죠.
그 그림 속에 첫 부분은 락샤사의 왕이 바수키의 머리 부분을 잡고 있고, 하누만이 선신의 끝에 서서 바수키의 꼬리 부분을 잡고 있습니다.
헌데, 락샤사 왕의 손이 바수키를 잡기 위해 올린 손과 하누만이 꼬리를 잡기 위해 올린 손, 그리고 중앙에 메루산에 한 바퀴 휘어감은 바수키의 몸을 양손으로 나누어 잡고 있는 비슈누 신의 두 손,
이 네개의 손의 위치가 바로 동지점(락샤사), 춘분점, 추분점, 하지점(하누만)을 가르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엉꺼오왓이 정확히 동쪽 정면을 향해 지어졌더라면, 바로 그 손끝과 연결되는 프놈복과 롤레이 사원에서 해가 뜬다는 것이며, 춘분과 추분날 중앙탑 중앙에서 해가 벗어나 뜨는 각도는 비슈누 신의 손끝만큼 차이가 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설계자나 조각가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여러가지 궁리를 해 보았습니다만, 아직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런 위치를 암시하였나?
해는 동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서 뜨기에 이 그림도 동쪽 회랑의 남쪽에 그려졌고, 전체 회랑의 길이는 분명 입구탑을 꼭지점으로 했을 때 하지나 동지 아니면 그 무엇과도 연결되는 만큼의 길이로 했을 것이 분명한데....
차라리 정동면을 향하여 건축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걸....
이런정도로 정교한 위치 배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동과 정서 방향을 측정하는데 오차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차라리 정동쪽으로 했더라면 더 정확히 일치하는 장관에 더 놀라지 않았을까?
그리 되었더라면 춘분날과 추분날엔 정확히 정중앙탑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요기까지가 인간의 상상력의 한계였습니다.
단순히 태양과 지구의 자전과 공전만을 그리기 위해서는 아마도 엉꺼오왓의 설계자는 정동면을 향하여 중심점이 오도록 지었을 겁니다만, 엉꺼오왓은 태양계의 해시계가 아니었습니다.
천문학에는 문외한인지라 정확한 설명은 못하겠습니다만, 이집트의 쿠퍼왕의 피라미드에서 관측한 별자리가 72년을 기준으로 1도씩 자리를 옮겨간다는 것에서 황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오늘 떠오른 태양을 똑같은 위치에서 보기위해서는 25,900년을 기다려야 같은 황도 위치에서 뜨는 태양을 볼 수 있고, 정확히 태양의 나이로 1년 전에 본(25,900년전) 각도에서 태양을 볼 수 있다는 말이됩니다.
엉꺼오왓의 설계자들은 힌두 경전에 나와있는, 이미 수 천년 전에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는 대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정확히 계산 할 수 있었기에 당연히 엉꺼오왓은 지금처럼 삐딱한 위치에 지어질 수 밖에 없었던겁니다.
당연히 서쪽으로 정문이 날 수 밖에 없었던겁니다.
지금까지는(엉꺼오왓 이전) 일부분의 기능만 했어도 충분했던 국가 중심사원이었지만,
비슈누 신이 이세상에 하얀 백마의 모습으로, 혹은 백마를 탄 모습을 하고 10번째, 마지막으로 나투게 되는 시각을 정확히 예측하여 기다릴 수 있게 된것이 아닐까요?
그것이란다면, 진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것이 엉꺼오왓입니다.
이것이 제가 찾아낸 엉꺼오왓이 지어진 이유이며,
이것이 엉꺼오왓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 첫번째 단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독자 여러분들께 맡겨보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숙제를 더 드려봅니다.
당시에 헬리콥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뭔가가 있었지 않았을까요?
입구탑에서 프놈복이나 롤레이 사원은 가늠도 못할 위치에 있습니다.
어찌 측정을 했을까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한번 풀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