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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개인박물관 운영… 수집활동·자격증 취득 열성 그는 멋졌다 - 이정복 씨 활짝 열려있는 문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자, 어릴 적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로 시작했던 전래 동화 ‘콩쥐팥쥐전’에 나오는 사람 키만큼 오는 장독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팔뚝만한 두꺼비가 수호천사나 된 것처럼 정겹게 기대어 있고, 고려시대 사찰에서 깨끗한 물을 담아놓던 정병이 친숙한 색채로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아궁이에 나무를 땔 때 재를 긁어모으던 ‘부등갈이’까지, 당최 어느 시대를 옮겨다 놓은 것인지 머릿속은 어느덧 계산대에 올라서 있다. 삼국시대 토기부터 근대의 유물까지 총집합해 있는 물품들은 우리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손때 묻혀가며 사용하던 용품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별한 곳이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얼마를 가야 찾아볼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우리 동네에 있는 동산도기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어떻게 동네에 있을 수 있어?’라는 의문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사람은 이정복(52·동산도기박물관 대표·수정소아과 원장) 씨다. 정학예사라는 직함이 당당히 적힌 그의 명함을 내려다보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린 환자들을 진료했던 하얀 가운 안의 그가 아님에 고개가 갸웃 거려진다. 청진기를 들고 아이들의 아픈 몸을 진단했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도기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의 관장으로 변신해 있는 것. 의사와 박물관장, 하얀 가운 입은 우리 동네의 ‘인디아나 존스’인 그의 전적이 궁금해진다. 원장님, 과천으로 출퇴근 동산박물관에는 아파트 개발 현장, 수몰지역 등지를 돌며 원주민이 떠나면서 두고 간 물품을 수집하거나 주로 민속품 가게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이러한 행적을 두고 그는 ‘수집벽’ 때문이라고 말한다.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지 못해 다른 취미를 찾다 시작한 일입니다. 이제 17년이 되 가니 주말에 가족나들이 한번 다녀온 일이 없지요.” 단순히 취미로 시작했다면 3천여 점이 넘는 유물을 수집하고 박물관까지 열 정도로 열을 올리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 이면에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아버지’는 어렵게 수집한 토기를 어린이들의 교육 자료로 흔쾌히 기증했고, 아이였던 그는 ‘나도 어른이 되면 아이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겠다’고 다짐하게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집 마저도 ‘도기’가 차지하게 됐다. 박물관에 전시하고 창고에 고이 보관하는 것까지 모자라 안방까지 파고든 것이다. 요즘에도 주말이면 수집여행을 떠나는 그에게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라는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어느 놈(?)만 사랑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반문이다. 선대의 애환이 서려있는 물품이지만 그가 찾지 않으면 그대로 사장될 수 있을 우려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집해 온 유물을 집으로 모셔와(?) 자칫 잘못으로 깨뜨리기라도 하면 억장이 무너질 정도다.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아이들을 살피는 아픔보다 더한 그의 눈빛에 도기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묻어난다. 의사면허증, 전문의자격증, 의학박사학위증, 박물관학예사자격증 등. 그에게 부여된 자격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세심한 눈초리로, 아픈 아이를 달래고 어르는 정성으로 그는 유물 하나하나와 대면한다. 유물에 대한 애정의 결합체는 박물관학예사자격증. 지난 2001년, 자격증 취득을 위해 병원까지 쉬어가며 대전과 과천을 매일 출퇴근 했지만 힘들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앞섰다. 병원 수입 박물관에 투자
2001년 개관 이후 매년 화로와 질그릇, 조선사발 등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사립박물관으로서 하기 힘든 특별전을 매년 빠뜨리지 않고 하는 데는 나름의 고충도 있다. 사실 금전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병원에서 벌어 박물관에 재투자 하는 쉽지 않은 일을 오히려 쉽게 해내고 있었다. 요즘에도 주말이면 핑하니 길을 떠나는 그에게 가족들은 “아빠, 이제 유물 그만 모으시고 제 용돈을 주세요”라고 농을 섞어 이야기하지만 종종 그와 동행하는 데서 마음의 힘을 보태주고 있다. 이제 그의 묵시적 지지자가 다 된 가족들이다. 점심시간, 잠시 짬을 내 박물관을 찾았다 이내 진료시간이 다가왔다며 서둘러 병원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엔 마음 편히 찾아와 우리의 옛 모습도 즐기고, 자연의 정겨움까지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박물관이 묻어나고 있었다. 연신 “동네마다 작은 박물관이 하나씩 생기는 것이 바람”이라던 그의 모습에서 잊혀지지 않는 우리 것의 체취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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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럽네요 저도 큰오빠소원이 민속방물관 차린거라고 30년동안 모아둔 민속품이 창고에 무지 많은데..3000점..빛을 못보고 있네요... 4년전 기술고시에 합격해버린바람에 영종도 감리단장으로 있으면서 바빠서..창고 에서 아예...쎡고 있네여...
관심이 많으시며 한번오며 구경은 시켜줄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