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촌일곡포촌류(江村一曲抱村流)
맑은 江물 한 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나니
장하강촌사사유(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이 江마을 일일이 한가하다.
자거자래양상연(自去自來梁上燕)
그저 왔다 그저 가느니 들보위의 제비요
상친상근수중구(相親相近水中鷗)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우니 물가운대 갈매기다.
노처획지위기국(老妻劃紙爲碁局)
늙은 마누라는 종이 잘라 바둑판을 그리고
치자고침작조구(稚子鼓針作釣鉤)
어린아인 바늘 두르려 낚시를 만든다.
다병소수유약물(多病所須唯藥物)
병 많은 이몸 아쉬운 건 오직 약물이니
미구차외갱하구(微軀此外更何求)
미천한 이 몸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여름 날 떠오르는 두보(杜甫)의 강촌(江村)이란 시다. 고등학교 때 배운 두시언해에 나와서 익숙하기도 하고 내가 참 좋아하는 시이기도 하다.
‘절르가고 절르오나니 믈가운대 져비오’ 이렇게 배웠었지. 참 오래전 얘기다.
마지막 구절에서 병 많은 몸이 필요한 건 藥 뿐이라 했고, 누구는 젊을 때는 머리맡에 꽃병이 놓이고, 늙어서는 약병이 놓인다 했는데, 이건 옳은 말이기는 하나, 나에게는 맞지 않다.
약은 내가 많이 찾기는 하나 일상에서 접하는 것이요, 따라서 머리맡에도 약병 대신 술병이 놓여있다. 안동소주와 육포, 그리고 노가리.
위의 시와 같은 목가적(牧歌的)인 여름 날, 난데 없는 수해 소식에 전국이 끓는다.
며칠 전 아침, 풍기에서 권 교장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풍강, 거 비 마이 오제?’
‘아뇨, 여는 안옵니다. 세금을 잘 내서 안와요.’
‘그래? 삼가동은 사태가 나서 사람도 죽었는데? 예천은 더하고,’
‘바보들이씨더. 사과 낭글 심거서 그 모양이 됐니더. 그래요, 사과가 사람 배랬니더.’
‘사과나무가 왜?’
여러 해 전 일본 아오모리(靑森)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과로 유명한 그 지역에 엄청난 태풍이 불었다. 나무는 다 뽑혀나가고 사과는 다 떨어지고 말았다. 이런 천재지변에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한 집, 그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한 그루도 뽑히지 않았고, 사과도 떨어지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후,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집은 오래 전부터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유기농으로만 농사를 지었으며, 풀을 갈아엎는 것으로 제초를 하고 흙을 갈아 엎어주었단다.
그 결과 그 집 나무들의 뿌리는 15~20m씩 사방으로 뻗었고, 그 뿌리들이 얽혀져 어떤 바람에도 끄떡이없었으며 과실은 달고 물이 많았다.
그 소문이 퍼져서 지금도 그 사과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디저트용으로만 제공되며, 한 알에 십 만원을 홋가하나, 시중에 팔지는 않는다. 없어서 못판다.
만일 우리나라의 과수원이 아오모리의 이 과수원을 모방했다면 이번 같은 사태(事態)는 나지않았을 것이다!
풍기의 사과 재배는 오래되었다. 이미 백 여년의 역사다.
내가 어릴 때도 동부동 권향님이네, 서부동 길덕이네, 상희네, 산법에 진환이네 근동이네 등에 이미 수 십년된 成木이 있었으니 백여년의 역사가 되었다고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과는 사치품이었다.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웠던 시기에 사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치였다. 사과는 명절이나 제사때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그러기에 누가 사과 한 개라도 먹을라치면 한 입만 먹자고 따라다니던 과일이었다.
그러기에 사과 과수원집은 다 부자였다.
부자가 되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누가 부러워하지 않을까?
직조와 인삼으로 인하여 풍기는 해방 이후에, 또 사변 이후에 평안도 또는 황해도(주로車씨들)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직조와 인삼으로 인해 인근 읍면에 비하여 빠르게 부를 이루어왔다. 인근의 촌락에서, 심지어 문수나 평은 또는 죽령을 넘어서 까지 젊은 여성들은 풍기에 베를 짜러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런 직조나 인삼 등의 일에 시기를 놓친 사람들이 과수제배에 나섰다. 그러나 과수 재배의 제일 약점은 넓은 면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과수원을 할 수는 없었고,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부터 사과재배를 시작했고, 가진 땅이 좁은 사람은 비탈을 개간하여 사과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이들도 점차 부자가 되어갔다.
이러한 풍기사람의 성공 사례는 무서운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서쪽으로는 순흥 단산 부석에서 봉화 물야 춘양에 이르기 까지, 동으로는 노좌를 거쳐 예천 일대에 이르기 까지....
이렇게 산비탈을 개간하여 이루어진 과수원은 빗물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약점을 갖고 있다.
아오모리처럼 키우지 아니한 나무는 물을 보지(保持;보유한고 유지함)하는 능력이 없어서 사태(沙汰)에 견딜 수가 없었다.
비탈에 자란 뿌리 짧은 나무는 큰비를 감당할 힘이 없었고, 진흙더미는 민가를 덮고 하우스를 진창으로 만든 것이다.
삼가동의 사태(沙汰)도, 토사가 덮친 바로 윗 땅에서 250여 그루의 나무를 배어낸 결과로 생긴 참사였다.
결국 이번 경북 북부지방의 홍수피해는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파괴한 결과다.
천재(天災)가 아니라, 인재(人災)였다.
그리고 이를 중단하고 복구하지 않는 한 이런 사태는 반복될 것이다.
이번 경북 지방에서 일어난 것은 강원도 정선에서 본 것과 같은 산사태가 아니라, 내가 위에서 밝힌 바과 같이 무분별한 확장이 가져온 ‘밭사태’ 였던 것이다!!
오늘도 예천 사태 현장에는 미처 익지 못한 풋사과들이 진흙 속에 딩굴고 있다.
癸卯 中伏이 지나고
아주 더운 한 낮
豐 江
첫댓글 천재던 인재던 삶의 터전을 잃고 인명 피해까지 입은
이재민들의 심정은 어떨까
해마다 격은 수해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 이재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
착잡한 날들입니다.
풍강님의 글을 읽고 어릴 때 직조 공장을 했던
많은 일들이 기억나는군요
좋은 것 감사히 받고 인사가 늦었습니다.
글 쓰면서 옛 생각도 많이 나더군요.
그렇게 보고 들은 게 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형님께도 안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