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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악 되게 좋던데. '
'근데 좀 소름 끼치지 않아? '
'뭐가? '
'이 곡 만들고 나서 자살했대. '
우리가 만났던 시기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고, 추억의 부스러기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으며 가장 감정이 충만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난 그 시기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나 혼자 알 수 없는 미래를 사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늙고 빛 바래 간다.
그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고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구멍가게 사이즈의 미래슈퍼를 오른쪽에 끼고 50m 정도 직진을 하다 보면 언덕길이 나
온다. 이 때 왼쪽도 오른쪽도 모두 빌라여야 한다. 언덕길을 쭉 걷다보면 두 갈래 로 나눠지는데 왼쪽 길로
쭉 가다가 교차로가 꽂혀 있는 전봇대로부터 하나 둘 셋 넷 다섯 걸음을 걸어가면 커다란 성이 나온다. 자
그마한 슈퍼를 제외하고는 온통 빌라투성이인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성에는 항상 불이 꺼져 있는 지
캄캄했고, 밤이면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그 성에 병약한 왕자, 혹은 괴물이 살고 있을 거라 믿
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토끼
Alice in Neverland
온통 빌라 투성이인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 나는 이 곳을 네버랜드라고 불렀다.
테두리가 금장으로 되어있는 초인종을 누르면 약 10초 후 오른쪽 모서리의 칠이 벗겨진 대문이 드르
륵 소리를 내며 양 쪽으로 열린다. 손질을 하지 않아 잡초 투성이인 정원이 시야 가득 보이고 오른쪽
에는 작은 연못, 왼쪽에는 주차장으로 쓰이는 공터가 펼쳐진다. 오른쪽 작은 연못에는 본의 아니게 거
식증에 걸려버린 붕어인지 잉어인지 모를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먼지가 잔뜩 쌓인
목마와 주황빛을 내는 가로등이 있고, 일주일 전 공원에서 내가 훔쳐 온 벤치가 경사를 이기지 못하
고 살짝 기울어진 채로 세워져있다. 돌계단을 계속 걷다보면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는데, 그
입구 앞에는 언제나처럼 삐뚜름하게 기대어 선 토끼가 있다.
성안은 늘 그렇듯 깜깜했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자주색의 가죽 쇼파. 그리고 그 뒤에는 원형으로 올라와 있는 작은 무대
위의 유리 피아노가 있다. 이곳은 서양의 홀처럼 설계 되어 있는데 1층은 주방과 화장실 그리고 홀
뿐이었다. 이 홀은 보통의 거실과 같은 용도로 쓰여 졌다. 홀은 유리 피아노, 자줏빛 쇼파, 벽걸이TV,
DVD, DVD 진열장, 와인진열장으로 간소한 편이었고 나와 아줌마 밖에 쓰지 않는 주방에는 일자형
식탁과 냉장고, 식탁, 싱크가 있다. 유토는 늘 그랬듯이 자줏빛 쇼파에 기대어 앉아 있고 나 역시 늘
그랬듯이 보조 등의 은은한 불빛에 의지해 주방으로 걸어 갔다. 차가운 표면의 냉장고 안에는 만들어
놓은 형태 그대로인, 고기와 햄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볶음밥이 있었다. 그 것을 데워 쇼파 앞 테
이블에 올려놓았다. 유리 테이블에 닿는 순간 챙 하는 소리가 울리자 유토의 투명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와인 빛의 홍채가 나를 지그시 보았다.
"치워. "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
볼썽사나운 볶음밥을 내려다보던 내 시선이 유토의 곧게 뻗은 다리로 향했다. 앙상하게 마른 다리에
핏줄이 도드라져 보인다. 유토는 쇼파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나는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는 오기로라도 몇 술 먹고 보란 듯이 화장실로 달려가 위액까지 토해낼 것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되
면 나는 등을 두드려 주어야 한다. 비쩍말라 뼈가 볼록 솟은 안쓰러운 등.
"다른 거. "
유토의 붉은 입술이 들썩였다.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표정이었다. 유토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까딱하고
움직였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다. 아무런 무늬 없는 검은 색
의 반지, ORB모양의 반지.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유토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들어 버린다. 또 그게
싫어 다가가면 갑작스런 키스가 이어진다. 담배 향과 박하향이 골고루 퍼진다. 담배를 피우고 나서 박
하사탕을 먹은 것이다. 유토의 키스는 갑작스럽고도 굉장히 짧아서 인식하는 순간 끝나 버린다. 유토
의 감겨있던 눈이 뜨여 졌고 옅은 와인 빛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 눈은 점차 작아져 가늘게
변했다. 박하향이 머물다 사라진 입에 나는 재빨리 크리스탈 그릇에 담긴 박하사탕을 하나를 집어넣
었다. 다시 가죽 쇼파에 등을 기댄 유토의 입 꼬리가 나를 비웃는다. 입술이 흰 피부와 대조적으로 빨
갛다.
유토는 알비노였다. 색이 바랜듯 한 은발을 가지고 있고 피부는 눈처럼 하얬다. 눈동자에는 색소가
거의 없어 옅은 와인 빛이 섞인 갈색으로 보였다. 피부가 햇빛에 약하기 때문에 유리벽은 검게 선팅
이 되어 있고 그마저도 자주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유토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시간은 태양이
사라진 밤뿐이었다.
유토는 조금 전 부터 보고 있던 파란색의 화면이 뜬 TV의 채널을 바꾸고는 리모콘을 유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유토는 유리를 좋아했다. 테이블도 주방의 식탁도 바닥도 벽도 천장도 모두 유리였
다. 투명한 유리는 왠지 유토와 닮았다.
"이리 와서 앉아. "
유토가 말할 때면 현실성이 없어서 귀에서 들려오는 건지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
아 머뭇거리곤 했다. 그러면 유토는 짜증 섞인 말투로 나를 다시 불렀다. 유토와 성 그리고 나, 어디
에도 현실적인 것은 없다. 우리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현
실성의 의미와 기준에 대해 생각하고 있노라니 유토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유토의
부름에 응해 내가 유토의 옆자리에 앉게 되면 유토는 내 무릎을 베고 누워 DVD를 볼 테고 그러는 동
안 자정이 넘어갈 게 분명하다. 입안에서 작아진 박하사탕을 으깨어 삼키고 새 박하사탕을 입에 넣었
다. 알싸한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집에 가야 해. "
라는 말을 시작으로 학교도 가야 되고 학원도 가야 되고 라는 말들이 변명처럼 쏟아졌다. TV에는 검
정색과 흰색으로 가득한 점들이 가득해서 회색의 덩어리처럼 보였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
질였다.
"가. "
현관문을 나서면서 아줌마가 밥해주면 가리지 말고 그냥 먹어. 또 버리거나 냉장고에 넣지 말고, 토하
지도 말고, 나가면 TV그만 보고 바로자고. 등의 말을 했다. 물론 유토의 눈치를 살피면서. 빨리 꺼지
라는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문 앞에서 빠져나왔다. 들어 갈 때 깜빡한 물고기 밥을 꺼내 물고기들에
게 던져 주었는데 물고기들은 굉장한 속도로 먹이를 낚아챘다. 그 것들에게 날카로운 이빨이 나있
는듯한 착각을 지우며 대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황색의 가로등 불 주위에는 나방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들이 반짝이며 맴돌았다. 들어왔을 때처럼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던 문은 나가자마자 철컹
소리를 내며 굳게 잠겼다. 그와 동시에 나는 현실로 돌아왔고 숨이 탁하고 막혔다. 성안에서는 여전히
빛 한 줄기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나는 등을 돌려 다시 다섯 걸음을 또박또박 걸어 언덕에서 내려온
다. 어느 샌가 박하사탕은 입안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래슈퍼를 제외하면 온통 빌라투성이인 이곳에 어울리지 않게 세워진 성. 불이 항상 꺼져 있는 것
처럼 깜깜하고 밤이면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성에는 왕자님도 괴물도 아닌 유토가 살고 있었
다.
그리고 나는 그 성을 네버랜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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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귄다는 건 어떤 걸까. "
수업시작하기 10분 전 레진이에게 나는 그렇게 물었다. 레진이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소정이에게 시선
을 고정한채 그게 왜 갑자기 궁금한 건데? 라고 물었다. 소정이는 남자친구와 100일 이라며 돈을 걷
고 다녔다.
"네가 머릿속에 어떤 환상을 품고 있는지는 알겠는데, 단순한 거지. 뭐 일진이랑 평범하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여자애가 우여곡절 끝에 이룬 사랑이라든가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2세와 억척스러운 여자
가 하는 사랑 주위에는 있는 거 같아? 없어. 그냥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마음에 들면 만나고 그러는 거야. "
레진이는 내가 며칠 전에 읽었던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진 나는 미리 펴
놓은 교과서에 코를 박았다.
"사귄다는 건 집착 소유욕 같은 걸 서로의 한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고 포옹이나 키스, 섹스까
지도 사랑이라는 허용범위 안에서 할 수 있는 거야 마음에 드는 애라도 생겼냐? "
레진이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세, 섹스? 라고 되물을 뻔 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레진이는 심드렁
하게 샤프심을 갈아 끼웠다. 유토도 그런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분명 유토를 좋아하는데, 유토는 어떤
감정일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소정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지안! 나 남자친구랑 백일이야 축하해줘. "
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우유를 사먹으려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꼬깃꼬깃 한 천원을 꺼내서 주었다.
"고마워! 너 남자친구 생기면 두 배로 줄게! "
남자친구 생기면.
과연 나도 유토와의 기념일에 소정이처럼 다른 친구들에게 축하해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귀는
사이일까. 키스와 포옹 정도는 하는데.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유토 우린 어떤 사이야? 라고 쓴 것을
지우고 '나는 유토에게 어떤 애야? ' 라고 보냈다. 금세 답장이 왔다.
'밥해주는 애. '
유토다운 말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해졌다. 바라보는 것도 좋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좋고, 그 애의
집에서 TV를 보거나 맛있는 걸 해 먹는 것도 좋은데, 왜 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지. 좋아한다는 이
유로 더 큰 걸 바라는 게 당연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애와 확실한 관계가 되고 싶다
는 것은 분명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토끼
Alice in Neverland
남들에게 보여 지기 위한 특별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서로 같은 양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더라도.
오로지 혼자서 시작해 혼자서 끝내는 것. 그건 좀 외로운 일이야. 라고 유토가 말했었다. 하지만 그렇
기 때문에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그건 그저 그리고 싶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야하고 취직을 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피니시라인인데 나는 그
림이 피니시라인이 되기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 싫었다. 내가 펼치는 세계가 내 의지가 아닌 타인
의 의지로 완성되어 간다. 내가 그리고 싶은대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라는 대로 캔버스 가득 채
워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평생 그림을 그리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 가야 하는 일이었기에 군
말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전시회는 달랐다. 오직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 나에게 있
어서는 자유였다.
학원은 픽사티브 냄새, 물감냄새, 파스텔냄새 등이 섞여 오묘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앞자리의 아
이들은 기은표가 학교에 왔다 안 왔나 하는 것이 전시회보다 중요한 듯 쉬지 않고 기은표에 대해 말
하고 있었다. 기은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궁금해 할 정도였다. 심이 작아진 연필을 칼로
대강 깎고 이젤 앞에 앉았다. 텅 빈 캔버스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선을 그었다. 이 번 그림은 색이
거의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주제는 유토. 유토의 백색을 떠올리고 있을 때 연필심이 두둑 소리를 내
며 힘없이 부러졌다. 다시 쓰레기통 앞으로 연필을 깎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앞자리의 여자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기은표. 내가 기은표를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검기 때문에. 기은표의 머리색과 눈동자의
색은 멜라닌으로 가득했다. 유토와는 달랐다. 유토와 반씩 섞어 나누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Alice in Neverland
하나 둘 셋 넷 다섯.
성의 대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뛰어 들어 갔다. 유토가 보고 싶었다. 놀아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성의
기사 폴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성 안으로 들어갔다. 유토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한 팔을 길
게 늘어 뜨려 베고 있었다. 검은색과 빨강색의 가로줄이 있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한 쪽 어깨가 드
러나 있고 소매는 손등을 덮고 있다. 유토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내 손에 든 것을 유심히 보았다.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유토도 TV 보는 것을 그만두고 주방으로 와서 식탁의자에 앉
았다. 감색 반바지 밑으로 흰 다리가 곧게 뻗어 있다. 다리 하나를 올려 접고는 볼을 무릎에 기댄 채
로 날 보았다. 등 뒤로 유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밥 해주는 애 ' 라는 말이 떠
올라 몇 번이나 칼질이 멈추어 졌다.
겨우 완성 된 샐러드를 식탁에 올려놓고 앉았다. 내가 샐러드를 해주면 그래도 곧잘 먹어주었다.
"유토, 우린 어떤 사이야? "
유토가 포크를 든 손을 멈추곤 나를 보았다. 뭘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이다.
"여기에 오게 된 지 2년이 넘었어. 우린 안기도 하고 키스도 하잖아 잠도 같이 자고. "
그 후로 내가 어떤 말들을 뱉어냈는지 모르겠다. 서운하다. 섭섭하다. 이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유토
가 샐러드를 깨작이는 소리, 포크와 접시가 내는 마찰음 같은 게 들렸다. 유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유토 와인 마시고 싶어. "
"와인? "
"너 미성년자잖아. "
"...유토도 미성년자인데 가끔 마시잖아. 담배도 피고, 야한 영화도 보고. "
유토는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일어서서 진열장으로 갔다. 위쪽 맨 왼쪽의 와인을 꺼냈다. 나는 와인 잔
대신 유리컵을 두개 꺼냈다. 유토가 와인을 조금 따라 주었다. 나는 자주색의 와인을 홀짝거렸다. 자
주색 유토가 좋아하는 색. 시큼털털한 와인 맛에 기분이 좋아져 이런 저런 쓸데 없는 얘기를 하다 기
은표 얘기까지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런데 이런 와인은 어디서 어떻게 사? "
"...내가 산 거 아냐. "
유토는 비워진 샐러드 그릇을 싱크대에 올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타민오빠가? "
"아니 제이가. "
나는 유리컵을 입에 댄 채 가만히 있었다. 제이. 가만히 곱씹는다. 제이는 미국과 한국 혼혈 남자인데,
유토가 미국에 있을 때 잠깐 만났던 사람이라고 했다. 유토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여자를 좋아할 수
없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떤 성별의, 어떤 사람을 사귄다고 해도 그 것이 이상하다거나 하진 않는데
나는 왠지 심술이 나기도 하고 이상한 상상이 들기도 했다.
"그 사람이랑 사귀었다고 했지? 나랑은 왜 사귄다거나 특별히 여겨주지 않아? "
"그 게 뭐가 중요해 너는 학교나 학원 끝나고 곧장 우리 집으로 오고 난 널 기다리고 같이 영화도
보고 음악 듣고 널 위해 피아노를 치고, 이걸로도 충분.... "
유토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유토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몇 초간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고 숨을
몰아 쉬었다.
"충분하지 않아. 이렇게 입을 맞추고 안고 그러는데, 그냥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건 이상해. 유토는 날
좋아하지 않아? "
"좋아해. "
"그럼 내가 성 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거야? "
언젠가 레진이가 했던 말이다. 넌 성 적인 매력이 없다고. 느린 발육 탓인가.
"너 그게 무슨. "
나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하나 풀었다.
"이래도? "
브래지어가 드러나자 단추를 풀던 내 손을 유토가 붙잡았다.
"왜 이래. "
"아직도 남자가 좋아? "
"그런 거 아니야. 남자, 여자를 떠나서 내가 좋아한 거고 지금은 니가 좋아. "
단추를 다시 채워주며 유토가 말했다. 조금씩 떨리는 내 손과는 다르게 침착하게 채우는 유토의 손,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체리 향 비슷한 유토의 향기. 단추를 다 채우고 어깨에 올린
다정한 손. 왜 이렇게 심술이 나는지 모르겠다.
"유토. "
"응. "
"근데 남자끼리는 어떻게 해? "
Alice in Neverland
나는 담을 어떻게 넘을까 생각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을 발견하고는 낑낑대고 끌어와 담
밑에 내려놓았다. '나가' 라고 말하는 유토의 귓불은 굉장히 빨개져 있었는데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
은 처음이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까 억지로라도 들어가야 했
다. 쓰레기통을 딛고 올라갔다. 담에는 팔꿈치까지는 닿았다. 쓰레기통이 자꾸만 흔들렸다. 예전에 바
지입고선 잘 올라갔었는데 치마라서 그런지 힘들었다. 팔꿈치에 힘을 주고 한 발을 겨우 담 위로 올
렸는데 지지직하는 소리를 내며 교복 치마가 뜯어졌다. 그리고 쓰레기통은 쓰러져서 데굴데굴 굴러갔
다. 넘어갈 수도 다시 내려갈 수도 없게 되어서 바둥거리고 있을 때 대문이 열렸다. 유토의 짜증 듬뿍
담긴 얼굴이 보였다.
나는 매달린 채로 유토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유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내 쪽으로 왔다.
등 뒤에 서서 내 허리를 잡았다.
"나 믿고 힘 빼. "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피해서 일까? 찢어진 치마와 두꺼운 허리 때문에? 팔에 힘을 빼자마자
나는 밑으로 툭 떨어졌고 동시에 유토의 품에 갇혔다. 내 겨드랑이 안쪽에 유토의 팔이 단단하게 감
겨 있다. 안심이 되었다.
"남자랑 한 적 없으니까 그 딴 거 물어보지 마. "
유토의 숨결이 바로 귀에 닿았다.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깝다. 마른 팔이, 다리가, 숨소리가 전부
다 너무 가까웠다.
"꺼지라고 하고 싶지만 그 꼴로는 못 보내겠다. "
유토의 시선이 내 치마에 머물렀다. 허벅지가 드러나는 찢어진 치마.
나는 결국 유토의 바지를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토에게 건네받은 바지에선 섬유유연제의 향이 났
다. 나는 유토가 불감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유토의 손길이 닿은 허리와 숨결이 닿은 귀는 매
우 뜨거웠다. 치마를 갈아입기 위해, 성으로 들어 갈 때 앞서 걷는 유토의 얼굴이 나만큼이나 달아올
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유토의 작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남들에게 보여 지기 위한 특별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서로 같은 양으로 좋아하고 있지 않더라도 색소결핍의 유토, 그리고 나 아직까지
우린 괜찮다고.
*
아 프롤로그만 남겨놓고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제 부주의로 강등이 되어서요. 프롤로그와 1편 한번에 올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