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를 지배했던 고대 왕조의 도시, 하늘에 떠있는 성, 시기리야.
광활한 밀림 평원 속에
갑자기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그리고 그 위에 지은 궁전.
.
저 절벽 위에 건물터가 있는 것을 보니
저 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도대체 왜 저런 곳에?
스리랑카에서 호텔을 떠나 어느 정도 달리던 중간에
울울창창한 열대의 숲 위로 바위산이 솟아올라있었다.
입구에서 바위 성채까지는 고대 왕조가 꾸민 정원이 펼쳐져있다.
물과 테라스의 정원을 지나 산을 향해 가는 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1500년 넘는 오래된 정원을 가로지른다.
성채로 가는 정원길은 성채 못잖게 그윽한 분위기가 좋다.
이 기묘한 성채는 5세기께, 싱할라왕조의 카샤파 1세란 왕이 지었다.
시기리야란 이름은 사자 바위'란 뜻.
사자의 모습을 한 저 높은 절벽 위에 왕은 궁전을 올려세웠다.
해발 370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사방이 낭떠러지이고,
주변에 아무런 높은 봉우리가 없어 그야말로 전망대같은 궁전이 탄생했다.
제법 긴 평지 정원을 지나니 시기리야의 유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석 암반에 다듬은 돌, 그리고 벽돌이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세월의 풍경이 매력적이다. 습한 기후 때문에 벽돌에는 연두색 이끼들이 가득하다.
돌과 이끼가 어울리는 모습, 벽돌이 만들어내는 패턴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리고, 곧바로 벽처럼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기암괴석들 사이로 난 계단길 위로 시기리야가 있다.
계단, 또 계단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지는 광경들
길은 계속 지그재그로 커브를 틀며 위로, 위로 향한다.
갑자기 도중 나타나는 거대한 바위 문.
사람 궁둥짝을 닮은 저 쌍바위 사이를 지나니
본격적인 시기리야의 입구가 시작된다.
자연 지형에 맞게 낸 길이었겠지만,
궁금증을 계속 유발시키도록 연출한 듯 시기리야로 가는 길은 흥미롭다.
이끼낀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시기리야의
거대한 사자봉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아슬아슬한 철제 계단을 오르고 있다.
오른쪽 가장자리로 사람들이 보인다.그 난간 다음에는 갈색 벽이 이어진다.
저 벽을 지나면 다시 그 위로 보이는 수직 나선형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아직 저 아슬아슬한 계단을 오르지도 않았건만 벌써 아찔할 정도다.
자, 드디어 바위 절벽이다. 이런데다 길을 내서 꼭대기에 궁전을 짓다니,
나선형 계단을 오르니 시기리야 최고의 보물이 있다.
그 보물이란, 고대의 그림이다.
바위산 암벽에 고대인이 그린 프레스코화다.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미인도인데, 1500년 전의 그림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바위벽 중간에 움푹 패인 공간이 나오고, 그 안에 그림 속 여인 22명이 남아있다.
한때 그림은 500여명에 이르렀지만 지워지고, 이들만이 남았다고 한다.
1500년전 그림인데 얼마 전에 그린 듯 생생한 것,
이게 시기리야 프레스코화의 미스터리다.
이 그림이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 까닭은
그림을 그리는 단계가 무척 복잡하고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바위벽에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판을 만든다.
바위 표면에 섬유질을 섞은 점토를 바르고,
그 위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다시 바른다.
그리고 그 위에 또다시 꿀을 섞은 석회로 매끈하게 덮는다.
이런 3단계를 거쳐야 그림판이 완성된다.
그 다음에는 물감을 만들 차례. 각종 식물과 꽃, 잎, 나무 즙을 섞어 안료를 만든다.
이런 정성 덕분에 저 그림은 1500년 세월을 살아남아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추앙받고 있다.
절벽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평원의 모습은 장관이다.
이 평원 가운데 솟아오른 이 붉은 편마암 산이 더욱 신기한 이유다.
걸어온 입구 정원이 어느새 까마득하게 아래에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모습을 잠시 감상한 뒤, 위로 향한다.
정상까지는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지금은 잠시 철제 난간 대신 제대로 만든 길이어서 조금 나은 편.
그러나 이것도 옛날 사람들에 견주면 호강하며 오르는 길이다.
원래 이 바위산 계단은 모두 대나무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
지금의 철제 계단은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저 옆구리 길을 따라 졸졸졸 올라가면, 드디어 정상?
아니다. 꼭 절반을 지나왔다. 이제 중간 지점이 눈 앞에 나타난다.
사자의 발톱을 지나 머리 위로
옆구리 길 마지막에는 갑자기 너른 선반같은 평지가 있다.
시기리야 사자산의 정식 입구 지점이다.
거대한 바위산은 앞쪽에 너른 로비처럼 입구를 드나들 공간이 있었다.
사자 모양의 바위에 사자 조각을 새겼다.
그래서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내 카메라론 광각의 한계가 있어 자료 사진으로.
붉은 바위 덩어리 아래로 거대한 사자 발톱이 보인다.
저 위로 올라가면 사자의 입에 해당하는 꼭대기 궁전터다.
그리고 계단의 각도는 더욱 아슬아슬하게만 보인다.
여기서부터 다시 저 위로 올라가면 진짜 정상이다.
나무 그늘에 앉아 쏟아지는 땀을 잠시 식히며 앞으로 올라갈 계단을 바라본다.
사람이란 참 지독한 존재들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올라가는 우리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저 계단을 만든 이들은 어떠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었을까.
그런 죽음을 강요한 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1500년 뒤, 그 죽음을 딛고 올라가는 우리는 뭔가...
상념에서 벗어나 다시 계단을 오른다. 이제 얼마 안남았다.
위를 올려다본다. 아찔하다.
눈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전망도 더 시원해진다.
덥디 더운 스리랑카의 풍경.
이 더운 곳에서 이 높은 성을 짓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다시 한번 실감한다.
올라가는 길을 위에서 찍은 항공사진 한 컷.
저 위로 올라가야 한다.
오르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빨리 정상에 다다른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자, 정말 정상이다. 갑자기 넓은 평지다. 궁궐은 사라졌고, 터는 의구하다.
한때 500명의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던 왕가의 자리다.
건물이 사라져서 더욱 세월을 느끼게 만드는 곳.
시원한 산들바람에 몸을 식히며, 시야 전체로 펼쳐지는 푸른 숲의 바다를 본다.
신선이 따로 없다.
정상에 오른 방문객들은 모두 감탄하며 저마다 편한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자연을 응시한다. 몇 시간이고, 하루 종일이고 앉아있고만 싶어진다.
왕실만 감상하던 풍경은 이제 모두의 것이다.
왕은 미쳤던 것일까? 이런 곳에 성을 짓다니
시기리야를 보면 누구나 이곳을 떠올릴 것이다.
이스라엘의 저 유명한 유적지, 마사다 요새다.
주변이 숲이 아니라 건조한 황야란 점만 빼면 마사다와 시기리야는 꼭 닮았다. 평원 위로 홀로 솟은 천혜의 요새, 난공불락의 공중 도시란 점이다.
그러나 저 마사다와 이 시기리야는 다르다.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간 이유가.
마사다는 전쟁이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택한 곳이었다.
서기 70년 경, 유대인들은 점점 세력을 넓히는 로마에 결사항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해발 430여미터인 저 절벽 위 요새로 올라가 로마제국의 대군에 저항했다.
특별한 지형 덕분에 세계 최강 로마군도 저 요새는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물과 곡식을 잔뜩 마련한 저항군들은 무려 2년 넘게 저 곳에서 로마군에 포위된 채 버텼다.
그러나 로마는 집요했다. 아예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직접 만들어 공격에 나섰다.
그토록 치열하게 버텼건만 마사다의 요새는 결국 함락 된다.
그리고 함락 직전, 성채 안에 있던 900여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첫댓글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 꼭대기에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