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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mmavitakka 法尋
담마(dhamma)의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붇다께서 설하신 담마(Dhamma)에 대한 尋(vitakka)과
이른바 意의 대상이 되는, 意識되어질 法들 중에서
[manoviññeyyā dhamm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감각적 욕망(kāmūpasaṃhitā)의 대상이 될 법들(dhammā)에 대한 여러 법수들
예를 들어 法尋(dhammavitakkā) 등의 법수들이 나타납니다.
여기에 대한 의견을 드려 보겠습니다.
dhammavitakka에 대한 자료는 아래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5욕락은 욕계에서 생겨나는 법들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신 분이 불환자(욕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분)이시라고 합니다.
먼저 5욕락이라고 나타나는 전5경에 대해서는 경문에 명확하게 나타나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까지도 5욕락은 색계 등에서도 생겨나는 법이라고 이해하시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붇다께서 설하신 담마에 대한 일으킨 생각 혹은 思惟(Dhammavitakka)는
그 의미가 설하신 법에 대한 기억(念, sati)과 동의어로 생각하셔도 됩니다.
身 | 触 | 身識 | 身觸 | 身受 | 触想 | 触思 | 触愛 | 触尋 | 触伺 |
意 | 法 | 意識 | 意觸 | 意受 | 法想 | 法思 | 法愛 | 法尋 | 法伺 |
그러면 제6근의 경계가 되는
法(혹은 法想,思,愛,尋,伺 등)은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그 중에서도
[manoviññeyyā dhamm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의 담마
6根(內)과 6境(外)가 항상 set로 나타나는데 왜 5욕락(kāmaguṇesu)과 동일한
똑 같은 정형구[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가 나타남에도
제6境인 法에 대해서는 그 상세한 설명이 나타나지 않는가에 대한 의견입니다.
먼저 제6境인 담마는 無見無對(혹은 色)이라고 나타납니다.
여기서 無見이란 肉眼으로 볼 수 없는 즉 제1境인 色境이 아닌 것을 말하고
無對란 肉身으로는 接할 수 없는 触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은 어떠한 것일까요?
s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볼 수도 있고 부딪힘도 있는 물질, <*有見有對-色>
anidassanasappaṭighaṃ rūpaṃ, 볼 수는 없으나 부딪힘은 있는 물질, <*無見有對-色>
anidassanaappaṭighaṃ rūpaṃ. 볼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물질. <*無見無對-色>
386) 주석
'볼 수도 있고 부딪힘도 있는 물질'은 형상(색깔)의 감각장소[色處]를 말하고,
'볼 수는 없으나 부딪힘은 있는 물질'은 눈의 감각장소 등 아홉 가지 감각장소
(즉 안·이·비·설·신과 성·향·미·촉)를 말하고,
'볼 수도 없고 부딪힘도 없는 물질'은
이러한 열 가지 감각장소를 제외한 나머지 미세한 물질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D.A.iii.997)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4大의 지수화풍,
[Channaṃ, bhikkhave, dhātūnaṃ upādāya gabbhassāvakkanti hoti;
여섯 가지 요소에 의지하여 모태에 들어감이 있다.
okkantiyā sati nāmarūpaṃ,
듦(入胎)이 있을 때 정신·물질[名色]이 있다.]
6界들이란 지수화풍이라는 4大와 욕계에 어울리는 空과 욕계에 상응하는 識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태에 듦'이란 慾(kāma)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앞 그림 욕계 일체에서 眼~身을 생략하고 意法 등에서 생겨나는 법들 66법의 60법
대신에 59법을 넣으면 앞은 동일하고 마지막 두 부류에 6界와 5蘊이 들어갑니다.
즉 6界, 5蘊(界)가 法尋伺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 두류 [6界, 5蘊(界)], [法尋伺]는 현행의 측면도 있지만 훈습의 측면이 강하다고
이 전의 글에서 의견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훈습이란 기억(念, sati)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만약 긍정적이라면 바른 사띠 즉 正念이고 부정적이라면 삿된 사띠입니다.
삿된 사띠란 3愛(욕애, 유애, 무유애)와 동의어로 읽으셔도 됩니다.
이러한 갈애가 어디에서 일어나서 일어나고, 혹은 어디에서 사라지면서 사라지는가?
內 | 外 | 내識 | 내觸 | 내受 | 외想 | 외思 | 외愛 | 6界 | 5蘊 |
意 | 法 | 意識 | 意觸 | 意受 | 法想 | 法思 | 法愛 | 法尋 | 法伺 |
먼저 貪하는 思惟(saṅkappa, 尋/vitakka)가 문제이지 세상에 다채로운 5境들은 문제가 아니며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세상에 다채로운 5境들이 있고, 여섯 번째가 마노(意)라고 말씀하십니다.
[“pañca kāmaguṇā loke, manochaṭṭhā paveditā.
ettha chandaṃ virājetvā, evaṃ dukkhā pamuccatī”ti.
“세상에는 다섯 가닥 감각적 욕망이 있고
마음[意]이 여섯 번째라 알려졌나니
여기에 대한 욕구를 빛바래버리면
이렇게 해서 괴로움에서 해탈하노라.”]
즉 외부(前5境)이 문제가 아니라
제6根인 意에서 발생한 사건이 전5根으로 진행된 결과라는 말씀입니다.
[manoviññeyyā dhammā kāmūpasaṃhitā]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면
12처에서 제6根인 意와 前5境을 제외하면 前5根과 제6境인 法이 남습니다.
그런데 제6境인 法 모두가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되지만
감각적 욕망과 짝하는(상응하는, 연결되는) 법들이란
전5근인 (안이비설)身을 구성하는 4大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法處所攝色(無表色)이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욕계는 기본적으로 물질(色)과 관련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하 자료 (*dhammaṃ anussaraṃ = dhammavitakka)
Khuddaka Nikāya, itivuttakapāḷi, 3. tikanipāto, 4. catutthavaggo, 7. dhammānudhammapaṭipannasuttaṃ (KN 4.86) ♦ 86. vuttañhetaṃ bhagavatā, vuttamarahatāti me sutaṃ — ♦ “dhammānudhammapaṭipannassa bhikkhuno ayamanudhammo hoti veyyākaraṇāya — dhammānudhammapaṭipannoyanti bhāsamāno dhammaññeva bhāsati no adhammaṃ, vitakkayamāno vā dhammavitakkaññeva vitakketi no adhammavitakkaṃ, tadubhayaṃ vā pana abhinivejjetvā upekkhako viharati sato sampajāno”ti. etamatthaṃ bhagavā avoca. tatthetaṃ iti vuccati — ♦ “dhammārāmo dhammarato, dhammaṃ anuvicintayaṃ. ♦ dhammaṃ anussaraṃ bhikkhu, saddhammā na parihāyati. ♦ “caraṃ vā yadi vā tiṭṭhaṃ, nisinno uda vā sayaṃ. ♦ ajjhattaṃ samayaṃ cittaṃ, santimevādhigacchatī”ti. ♦ ayampi attho vutto bhagavatā, iti me sutanti. sattamaṃ. ∴ |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음 경(It3:37) Dhammānudhammapaṭipanna-sutta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376) 비구에게 이것이 법을 따르는 것이니 상세하게 설명하면, 말을 할 땐 오직 법을 말할 뿐 법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고 생각을 일으킬 때에는 오직 법에 대한 생각을 일으킬 뿐 법이 아닌 것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혹은 이 둘을 배제하고377)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문다.378) 이것이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 여기서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을 좋아하고 [82] 법을 기뻐하고 법을 골똘히 생각하고 법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비구는 정법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다. |1| 움직이거나 서거나 앉거나 혹은 잠잘 때에도 안으로 마음을 조화롭게 하여379) 오직 고요함을 체득하도다.” |2| {86}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
* “tasmā hi attakāmena, mahattamabhikaṅkhatā. saddhammo garukātabbo, saraṃ buddhāna sāsana’’n ti.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 이러한 부처님들의 교법을 기억하여 정법을 존중해야 하리라." 376)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dhamma-anudhamma-ppaṭipanna-ssa)'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법이란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navavidha lokuttaradhamma)이다. 이러한 법에 이르게 하는 법은(tassa dhammassa anudhammo) 계의 청정 등(sīlavisuddhiādi)의 예비단계의 도닦음의 법 (pubbabhāgapaṭipadādhamma)이고 이러한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dhammānudhammaṁ paṭipannassa), 즉 증득하기 위해서 도닦음을 행하는(adhigantuṁ paṭipajjamānassa)이라는 뜻이다.”(ItA.11.50) 한편『상윳따 니까야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출세간]법에 이르게 하는 법을 닦는(dhamma-anudhamma-ppaṭipanna)'이라는 것은 '출세간인 열반의 법을 따르는 법이 되는 도닦음을 닦는 (lokuttarassa nibbāna-dhammassa anudhamma-bhūtaṁ pațipadaṁ paṭipanno)'이라는 말이다.” (SA.ii.34) 즉 '열반이라는 출세간법을 얻도록 하는 도닦음을 닦는'이라는 뜻으로 설명 하고 있다. 복주서는 “열반의 법(nibbāna-dhamma)이란 열반을 가져오는(nibbān-āvaha) 성스러운 도(ariya magga)를 말한다. '따르는 법이 됨'이란 열반을 증득함(nibbāna-adhigama)에 적합한 고유성질을 가진 것(anucchavika-sabhāva-bhūta)을 말한다.”(SAȚ.ii.34)라고 덧붙이고 있다. 377) “'이 둘(tad-ubhayaṁ)'이란 것은 ① 남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anu-ggahaṇattha) 법을 말함(dhammabhāsana)과 ②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법을 생각함(dhammavitakkana)을 말한다. 이 둘을 '배제하고(abhi-nivaijetvā)'라는 것은 닦지 않고(appaṭipajjitvā), 행하지 않고(akatvā)라는 뜻이다.” (ItA.ii.91) 378) 주석서는 여기서 평온하게 머무는 것을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설명한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평온하게 머문다.(upekkhako viharati)'라고 하셨다. 그렇게 도닦음을 행할 때에(tathāpaṭipattiyaṁ) 중립적이 되어(udāsīno)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samathavipassanābhāvanā)을 증장시키면서(anubrūhanto) 머물러야 한다. 사마타를 닦아서(samathapaṭipattiyaṁ) 평온하게 되면 오직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위빳사나도 열성적으로 닦으면(ussukkāpetvā) 그곳에서 형성된 것들[行]에 대한 평온의 지혜(saṅkhār-upekkhāñāṇa)를 통해서 평온하게 된다(upekkhako), 위빳사나의 지혜가 도와 합쳐질 때까지(maggena ghaṭīyati) 마치 선명한 태양이 맑게 운행하듯이 그렇게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sato sampajāno)’ 머물러야 한다.” (ItA.ii.91) 379) “안으로 마음을 조화롭게 하여(ajjhattaṁ samayaṁ cittaṁ)'라고 하셨다. 앞에서 설한 대로 명상주제라 불리는(kammaṭṭhānasaṅkhāte) 영역 안에서(gocarajjhatte) 자신의 마음을(attano cittaṁ) 갈망 등의 오염원들(rāgādikilesa)을 고요하게 함(vūpasamana)과 제거함(pajahana)을 통해서 조화로움이 함께 하면서(samayaṁ samento)라는 [말씀이다.]” (ItA.ii.92) |
Khuddaka Nikāya, itivuttakapāḷi, 3. tikanipāto, 4. catutthavaggo, 8. andhakaraṇasuttaṃ (KN 4.87) ♦ 87. vuttañhetaṃ bhagavatā, vuttamarahatāti me sutaṃ — ♦ “tayome, bhikkhave, akusalavitakkā andhakaraṇā acakkhukaraṇā aññāṇakaraṇā paññānirodhikā vighātapakkhikā anibbānasaṃvattanikā. katame tayo? kāmavitakko, bhikkhave, andhakaraṇo acakkhukaraṇo aññāṇakaraṇo paññānirodhiko vighātapakkhiko anibbānasaṃvattaniko. byāpādavitakko, bhikkhave, andhakaraṇo acakkhukaraṇo aññāṇakaraṇo paññānirodhiko vighātapakkhiko anibbānasaṃvattaniko. vihiṃsāvitakko, bhikkhave, andhakaraṇo acakkhukaraṇo aññāṇakaraṇo paññānirodhiko vighātapakkhiko anibbānasaṃvattaniko. ime kho, bhikkhave, tayo akusalavitakkā andhakaraṇā acakkhukaraṇā aññāṇakaraṇā paññānirodhikā vighātapakkhikā anibbānasaṃvattanikā. ♦ “tayome, bhikkhave, kusalavitakkā anandhakaraṇā cakkhukaraṇā ñāṇakaraṇā paññāvuddhikā avighātapakkhikā nibbānasaṃvattanikā. katame tayo? nekkhammavitakko, bhikkhave, anandhakaraṇo cakkhukaraṇo ñāṇakaraṇo paññāvuddhiko avighātapakkhiko nibbānasaṃvattaniko. abyāpādavitakko, bhikkhave, anandhakaraṇo cakkhukaraṇo ñāṇakaraṇo paññāvuddhiko avighātapakkhiko nibbānasaṃvattaniko. avihiṃsāvitakko, bhikkhave, anandhakaraṇo cakkhukaraṇo ñāṇakaraṇo paññāvuddhiko avighātapakkhiko nibbānasaṃvattaniko. ime kho, bhikkhave, tayo kusalavitakkā anandhakaraṇā cakkhukaraṇā ñāṇakaraṇā paññāvuddhikā avighātapakkhikā nibbānasaṃvattanikā”ti. etamatthaṃ bhagavā avoca. tatthetaṃ iti vuccati — ♦ “tayo vitakke kusale vitakkaye, tayo pana akusale nirākare. ♦ sa ve vitakkāni vicāritāni, sameti vuṭṭhīva rajaṃ samūhataṃ. ♦ sa ve vitakkūpasamena cetasā, idheva so santipadaṃ samajjhagā”ti. ♦ ayampi attho vutto bhagavatā, iti me sutanti. aṭṭhamaṃ. ∴ | 어둠을 만듦 경(It3:38) Andhakaraṇa-sutta 1. 이것은 참으로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아라한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해로운 생각380)은 어둠을 만들고 눈을 없애 버리고 무지를 만들고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무엇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은 어둠을 만들고 눈을 없애버리고 무지를 만들고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악의에 대한 생각은 어둠을 만들고 눈을 없애버리고 무지를 만들고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해코지에 대한 생각은 어둠을 만들고 눈을 없애버리고 무지를 만들고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해로운 생각은 어둠을 만들고 눈을 없애버리고 무지를 만들고 통찰지를 소멸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381) 2. “비구들이여, 세 가지 유익한 생각은 어둡지 않음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무엇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출리에 대한 생각은 어둡지 않음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악의 없음에 대한 생각은 어둡지 않음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해코지 않음에 대한 생각은 어둡지 않음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83]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유익한 생각은 어둡지 않음을 만들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통찰지를 증장시키고 곤혹스러움에 빠지지 않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뜻을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3. 여기서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 가지 유익한 생각은 유지되어야 하고 세 가지 해로운 것은 없애야 한다.382) 생각과 고찰을 가라앉혀야 하나니 소나기가 먼지를 제거하는383) 것처럼. 그는 생각이 고요해진 마음으로 여기서 고요한 경지를 얻는다.”384) {87} 이러한 뜻 또한 세존께서 말씀하셨으니 이처럼 저는 들었습니다. |
380) 여기서 '생각'은 vitakka를 옮긴 것이다. vitakka는 '생각'으로도 옮기고 '일으킨 생각'으로도 옮기고 '사유'로도 옮겼다. 381) 이러한 ‘세 가지 해로운 생각(tayo akusalavitakkā)'은 『디가 니까야』제3권「합송경」(D33)에서 “세 가지 해로운(akusala) 생각[尋, vitakka]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kāma-vitakka), 악의에 대한 생각(byāpāda-vitakka), 해코지에 대한 생각(vihiṁsā-vitakka)”(D33 §1.10 (5))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그 외에도 S14:12 §3, A4:11 §1 등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와 반대가 되며 본경 §2에서 '세 가지 유익한 생각(tayo kusalavitakkā)'으로 정리되는 ‘출리에 대한 생각(nekkhamma-vitakka)', '악의 없음에 대한 생각(abyāpāda-vitakka)’, ‘해코지 않음에 대한 생각(avihiṁsā-vitakka)'은 팔정도의 두 번째인 바른 사유의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382) “없애야 한다(nirākare).'고 하셨다. 자신의 흐름으로부터(santānato) 끄집어내야 한다, 버려야 한다, 제거해야 한다(nīhareyya vinodeyya pajahe-yya)는 뜻이다.” (ItA.ii.94) 383) 여기서 제거하는'는 sameti를 옮긴 것이다. 일반적으로 sameti(sam + √i, to go)는 어울리고 함께 하는 것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가라앉히다(vūpasameti)나 뿌리 뽑다(samucchindati)” (ItA.ii.94)의 뜻이라고 주석서는 밝히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384) '여기서 고요한 경지를 얻는다.'는 idheva so santipadaṁ samaijihagā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여기서(idheva)'란 지금 여기에서(diṭṭheva dhamme)이고 '고요한 경지(santipada)'란 열반이다. '얻는다(samaijihagā)'는 증득하게 된다(samadhigato hotī)이다.” (ItA.ii.94)라고 설명한다. |
dhammavitakko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etthesā taṇhā uppajjamānā uppajjati, ettha nivisamānā nivisati.
… 법에 대한 일으킨 생각(*尋 / 伺)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는 일어나고 여기서 자리 잡는다.
“tayome, bhikkhave, akusalavitakkā. katame tayo?
anavaññattipaṭisaṃyutto vitakko,
lābhasakkārasilokapaṭisaṃyutto vitakko,
parānuddayatāpaṭisaṃyutto vitakko.
ime kho, bhikkhave, tayo akusalavitakkā”ti.
“비구들이여, 세 가지 해로운 생각346)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멸시받지 않음과 관련된 생각347)과
이득과 존경과 명성과 관련된 생각348)과
남들에 대한 동정심과 관련된 생각349) 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해로운 생각이 있다.”
tasmiṃ pahīne tasmiṃ byantīkate santi adhicittamanuyuttassa bhikkhuno
sukhumasahagatā upakkilesā ñātivitakko janapadavitakko anavaññattipaṭisaṃyutto vitakko,
tamenaṃ sacetaso bhikkhu dabbajātiko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나면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는
친지들에 대한 생각, 지역에 대한 생각, 멸시받지 않음에 대한 생각이라는
섬세한 오염원들이 남게 된다.
마음을 닦는 현명한 비구는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tasmiṃ pahīne tasmiṃ byantīkate athāparaṃ dhammavitakkāvasissati .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나면 이제 법에 대한 생각586)이 남게 될 것이다.”
586) “'법에 대한 생각(dhamma-vitakka)'이란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오염원)에 대한 생각(dasa-vipassan-upakkilesa-vitakkā)이다.”(ibid)
열 가지 위빳사나의 경계는 『청정도론』 XX.105 이하를 참조할 것.
so hoti samādhi na ceva santo na ca paṇīto nappaṭippassaddhaladdho
na ekodibhāvādhigato sasaṅkhāraniggayhavāritagato hoti.
4. “이러한 삼매는 평화롭지도 않고 수승하지도 않고 [오염원들을] 가라앉혀서 얻은 것도 아니고
단일한 상태를 증득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극과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억누르거나 차단하여587) 얻은 마음의 상태이다.
587) 즉 이 삼매는 오염원들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얻은 상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억누르고 차단하여 얻은 상태라는 뜻이다.(AA.ii.363)
so, bhikkhave, samayo yaṃ taṃ cittaṃ ajjhattaṃy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비구들이여, 이런 마음을 안으로 확립하고 안정하고 하나에 고정하여 삼매에 들 때
그 삼매는 평화롭고 수승하고 [오염원들을] 가라앉혀서 얻은 것이고 단일한 상태를 증득한 것이다.
“puna caparaṃ, bhikkhu, bhikkhu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so tehi dhammavitakkehi divasaṃ atināmeti,
riñcati paṭisallānaṃ, nānuyuñjati ajjhattaṃ cetosamathaṃ.
ayaṃ vuccati, bhikkhu — ‘bhikkhu vitakkabahulo, no dhammavihārī’”.
5. “비구여, 다시 비구는 비구가 들은 대로 완전히 외운 대로
마음으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한다.
그는 이런 법에 대한 사유로 하루 종일을 보내고, 홀로 앉음을 소홀히 하며
안으로 이 마음의 사마타[止]에 몰두하지 않는다.
비구여, 이 비구는 사유는 많이 하지만 법에 머무는 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dhammavitakke dukkh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anatt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khay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vay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virāg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nirodhānupassī viharati ... pe ...
dhammavitakke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ati ... pe ....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法尋(伺)에 대해서 괴로움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法尋(伺)에 대해서 무아를 관찰하면서 머문다. … 法尋(伺)에 대해서 부서짐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사그라짐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소멸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머문다.
evamevaṃ kho, bhikkhave, ekādas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열한 가지 특징을 갖춘 비구가
abhabbo dhammavitakke aniccānupassī viharituṃ ... pe ...
abhabbo dhammavitakke dukkh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anatt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khay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vay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virāg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nirodhānupassī viharituṃ...
abhabbo dhammavitakke paṭinissaggānupassī viharituṃ”.
法尋(伺)에서 무상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法尋(伺)에서 괴로움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法尋(伺)에서 무아를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法尋(伺)에서 부서짐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사그라짐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빛바램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소멸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놓아버림을 보면서 머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있다/없다.
첫댓글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sarati )하고 계속해서 고찰(*vitakketi)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꾸준히] 닦는다.
그러면 비구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서 성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