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중재자인가, 중개자인가
……(중략) 어떤 교회 서적에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는 중재 역할, 즉 중재자를 ‘중재자’ · ‘중개자’로 구별하여 쓴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유일한 중재자이시요 성모님이나 성인들에게는 ‘중재자’가 아닌 ‘중개자’로 쓴다고 하였습니다. 이 중재자 · 중개자를 구별하여 쓰는 뜻은 무엇이며 그렇게 구별함으로써 그 역할이나 능력에 어떤 구별이 있는지요.
중재자 · 중개자
중재자와 중개자의 구별에 대해서 당황하신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광주 가톨릭 대학에서 1984년에 펴낸 “성서신학대사전”에서는 중재자를 중개자에서 찾아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구별하자면, 중개(仲介)란 “당사자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함”으로써 중개 무역, 중개업 등 경제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고, 중재(仲裁)란 ‘다툼질의 화해를 붙임”, 또는 “국제법상 당사국간의 분쟁을 그가 선임한 제삼자}의 판단에 의해 해결하는 일”로서 중재인, 중재 재판, 중재 계약 등 법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동아국어대사전”, 동아출판사, 1970년 참조). 한글학회가 펴낸 “우리말 큰사전”(어문각, 1992년)에서는 ‘중개’란 “제삼자로서 두 당사자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근 노릇”이요, ‘중재’란 일차적으로 ‘다툼질을 하는 둘 사이에 서서 화해를 붙임”을 뜻하며, 이차적으로 ‘중재자’란 “하느님과 인류 사이를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달리 일컫는 말”로서 풀이되어 있기도 합니다.
둘 사이에 흥정이나 화해를 조정하는 의미에서 ‘중개자’나 ‘중재자’는 같은 뜻을 지닙니다만 분명하게 구별하자면 상업적 개념의 ‘중개’보다는 계약이나 법적인 의미의 ‘중재’가 더 바른 사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라틴어 Mediator은 고유 명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중개자나 중재자보다 신학에서 더 선호하고 있는 용어는 ‘중보자’(中保者, 仲保者)라는 단어입니다. 이 용어 역시 일차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일을 주선하는 사람”, 이차적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사람에 대하여 그 죄를 사하고, 하느님께 대해서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 참조).
중보자는 누구인가
우리말 사전에서는 중보자 또는 중재자(중개자)가 이차적인 의미, 종교적인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만,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모세나 많은 예언자들에게도 중재자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와 성인들이 중재 역할을 한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신경 내용에 근거해서 그들이 하느님께 우리를 대신해서 어떤 청원을 더욱 쉽게 전구(傳求)해 준다고 믿어 오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안에서 중보자 또는 중재자
구약 성서는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에 관한 역사입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고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성립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법적인 개념으로서도 중재자의 역할을 충분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온 땅의 만민에게 축복을 가져올”(창세 12,3) 중재자인 셈입니다.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축복을 얻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흥정 이야기(창세 18,22 참조) 역시 아브라함이 중재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도록 소명을 받은 모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십계명으로 계약을 맺는 일에 중재자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통치권, 입법권을 행사하는 등 중재 역할을 수행합니다(탈출 32,l1 참조).
이집트 탈출 이후 모세의 중재 역할이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분담됩니다. 즉 칠십 장로에게도 하느님의 영이 내립니다(민수 11,24-25 참조). 레위 지파의 사제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선택됩니다. 전례 의식 안에서 하느님의 업적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하느님의 뜻을 해석해 주고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 주었습니다(민수 6,24-27 참조). 즉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용서를 기원하는 중재자들이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스라엘 왕들 역시 백성에게는 하느님을 대리하며, 하느님께는 백성을 대표하는 중재자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왕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렸고(시편 2,7; 89,26-27), 그리고 왕의 악함은 악한 백성의 원인이며 결과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정치적 타락으로 인한 사마리아 함락, 바빌론 유배는 하느님의 대리자, 즉 중재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한편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서 의로운 자들, 권리가 박탈된 자들, 소외된 자들을 변호하던 사무엘, 아모스,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은 개별적인 부름에 의해 중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언서에는 특별한 중재 업무를 수행한 인물들이 묘사됩니다. 이사야서 40-55장에 등장하는 ‘야훼의 종’이나 처녀에게서 잉태될 “임마누엘”(이사 7,14)은 메시아적 인물로 종말론적인 중보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이사 11장 참조).
신약 성경 안에서의 중보적 인물
신약 성경은 구약에서 예언된 이 결정적인 중보적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특징은 그분이 마치 하느님을 대리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경건한 유다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으로 보일 만큼,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치에 서서 ‘죄의 용서’를 선언합니다. 유다인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는 율법 위에 서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공공연히 해석할 뿐만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등등의 율법들을 재수정합니다(마태 5,21-48 참조). 하느님을 두고 감히 이름조차 부르기를 두려워했던 유다인들에게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마태 5,7 이하 참조), 자신이 하느님을 ‘압바’(아빠)로 부르기를 즐겨 하셨습니다(마르 14,36; 마태 11,25 참조). 이러한 하느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두고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재자를 예수께만 사용한다고 한정하였나 봅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와 성인들의 중재 역할
교회는 여러 차례 공의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느님이시요 동시에 참으로 사람이심을 선언하고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보자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구원 역사 안에서 사람들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보자이신 예수님은 당신 교회를 맡을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당신 몸의 지체들을 당신의 구원 사업, 즉 중재 사업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즉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 또 그들의 후계자로 교회를 책임 맡은 사람들 역시 이차적인 의미에서 중재자인 셈입니다.
교회 역시도 세상의 구원을 위한 성사, 다시 말해 중재 역할을 떠맡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아울러 교회는 사도 신경 안에서 “성인들의 통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인들이란 교회가 시성식을 치르고 성인으로 선포한 사람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하는 의인들을 모두 지칭합니다. 이 가르침은 하느님은 살아 있는 사람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하느님이시고 그 능력을 발휘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죽은 이들 역시 살아 있는 우리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의인의 기도가 더욱 힘이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중재 역할(창세 12,2-3; 18,16-33)이나 모세의 기도를 통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모 마리아의 중재 기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제8장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정결을 보존하였으며,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그분을 철저히 따랐던 분임을 강조하면서 어머니로서의 중재 역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성모 마리아의 간청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라고 끝맺는 성모송의 기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재를 부탁하는 기도문의 구절도 그렇거니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공경과 하느님께 드리는 흠숭을 구별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66항). 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는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중재적 역할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더욱 드러내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60항 참조).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어떤 힘있는 사람으로부터 허락을 받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어릴 적엔 엄격한 아버지께 직접 무엇을 청하지 못하고 어머님을 통해서 허락을 얻어내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는 이러한 역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중재 역할
이제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구원을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잘못을 속죄해야 하는 사명도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10명만 있었더라면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의인으로서의 사명, 중재자로서의 사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향잡지, 1993년 1월호, 조규만 바실리오(가톨릭 대학교수,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