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늑대 종족의 최후.
--한국 늑대의 사진들--
3년전 이 블로그를 시작할 무렵 멸종 된 한국 늑대에
대해서 두 개의 글을 올렸었다.
이 글들은 1959년 발간되었던 이 상오 선생의 책
'한국 야생 동물기'에서 발췌한 것들이었다.
먼저 여러번 되풀이해서 말해드리지만 늑대는
한반도 남부에 살던 고유종으로서 북한이나
중국의 승냥이와도 다르고 더더구나 세계 어느 나라에도
늑대라고 할만한 종자는 없다.
한국 늑대의 비교적 확실한 전신 모습 - 멸종도 되었지만
박제나 변변한 사진 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 한국 늑대다.
일본 오사카 동물원에 혹시 박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늑대 사진 아시는 분은 댓글 부탁.
단 대공원에서 복제했다는 승냥이 의심 이리 사진은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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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가 멸종되기 전부터 그 이름이 이리[狼]를 대신해서
전 세계 이리 족들은 물론 들개 종까지 대신하는
무차별 명칭 남용 현상이 생겨서 '늑대'는 가고 '이름'만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엄연히 잘못된 일이지만 늑대 명칭 남용은 뿌리가 깊어
이를 시정할 방법은 없다.
중국 동북지방의 승냥이.북한에도 살고 있다.
앞 한국 늑대와 비교해보시기를.
머리도 크고 다리도 길고 꼬리도 굵다.
전체적으로 늑대보다 체구가 더 다부진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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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늑대에 대해서 더 아시고 싶은 독자 분은 내가 올렸던
진짜 한국늑대의 모습을 CLICK! 하시기 바란다.
나는 한반도에 늑대가 휩쓸고 다니던 시절의 글을
이 상오 씨 글에서 발췌해 올렸었다.
한일 합방 후 늑대 떼가 갑자기 증가,
인명피해가 많자 총기 사용 허가를 엄격하게
규제했던 일제(日帝)는 포수허가를 대폭 내주고
늑대 사냥을 장려하였다.
1915년에만 대부분 어린이들인 113명이 늑대의
피해를 입었다.
나는 '한국 야생 동물기'에 소개되었던 늑대 피해
여러 사례를 이 울프 독 블로그에 소개했었다.
나는 후에 이 글들을 읽다가 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늑대들이 거의
경상남북도 일대에서만 활동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서 더 발견했던 사실이 있었다.
이 글이 올라갔던 때만해도 야후 블로그에
로그 인하지 않고도 댓글을 달 수 있었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댓글들이 올라왔다.
신빙성 가지 않은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이야기로서 각 독자분들의 집안 어른들에게서
들었던 늑대의 일화들이었는데 역시 경상남북도, 즉
영남지방을 무대로 했던 것들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이 발견한 사실을 보고 늑대가 멸종했다고 생각되는
현 싯점에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멸종 위기에 몰린 동물은 멸종의 한 패턴을 보인다.
분포도를 상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멸종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해당 동물은 넓은
면적에 걸쳐 서식한다.
그러다가 점점 그 서식 면적이 넓어진다.
숫자가 줄어 드는 것이다.
멸종 위기가 본격적으로 감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축소 된 면적에서도 서식지가 마치 표범 무늬처럼
서로 격리된 여러 조각으로 나뉘는 것이다.
나는 늑대가 영남지방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늑대가 이런 멸종 단계를 밟다가 없어 진 것이
아닌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늑대는 이미 100년 전 부터 영남지방으로
축소 된 서식지에서 살다가
멸종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러다가 며칠전 전자 신문[아카이브]을 검색해보면
무슨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다른 일로 도서관에 가는 김에 한번 검색해보았다.
과연 검색에서 나의 추리를 뒷받침 해줄 한 단서가 발견되었다.
늑대 출현에 관한 해방 후 기사는 1957년 부터 다시 나타난다.
해방 후 신문에 나타나는 늑대는 모두 경상남북도,
즉 영남지방에서만 발견된다.
1957년 6월 19일 기사다.
안동군 일대에 살인 늑대떼가 나타났다는 기사다.
늑대의 첫 습격은 전달인 5월 24일
오후 세 시쯤 안동군 월곡면 노산동 전 태균 씨 따님 춘자[9세]
양이 노산동 산길에서 늑대에게 목을 물어 죽였다.
이 늑대들은 계속해서 6월 3일 마동 조 태준[7살]군을 물어 죽였다.
9일에는 김 진호 씨 장녀 8세 춘자 -위의 춘자 양과 동명이인-양을
물고 달아나다가 동리 사람들에게 추격당하자 놓고 달아났다.
동리 사람들이 추격해서 춘자 양을 구조했으나 중상을 입어서
생명이 위독하다.
사람을 세 명이나 해친 늑대는 한 두 마리가 아니라
20여 마리의 떼 늑대로 추정되었다.
해방 후에 나타난 유일한 떼 늑대로 추정된다.
경찰은 수렵대를 조직해서 추적 중이다.
1958년 8월 10일 기사에는 4일 새벽 창녕군 창녕면 김 성태 씨
집에 늑대가 침입해서 마당에서 어머니와 함께 잠자던 3남 [5살]
용구 군을 물고 도주했다.
늑대는 집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찢어먹고
뼈와 다리 일부만 남겨 놓았다.
1958년 같은 달 7일 달성군 구지면 내동에 김 태환 씨
집 마당에서 잠자던 김 태환씨 아들 김 성원[7세]군을
앞산에서 내려온 늑대가 피습해서 김 군의 복부를 물고 도주했다.
김 군이 비명을 지르자 늑대는 도주했다.
그러나 배를 물린 김 군은 전치 2 주일의 부상을 입었다.
1965년 9월 19일 기사다.
3일 밤 10시쯤 창경군 장마면 잠리 박 수복 씨 집에
늑대가 들어와 잠자던 장남 하곤 군을 물고 도주,
박 씨가 추격을 하자 박 군을 버리고 갔으나 박 군은 절명했다
4일 밤 새벽 창경군 어유면 진창리 정 태종 씨 집에
늑대가 들어와 안방에서 잠자던 정씨의 차녀 진녀[9세]가
물려갔는데 1시간 후 앞 밭에서 왼팔이 짤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것이 인간을 습격했던 한국 야생 늑대의
마지막 기사다.
지금으로 보면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 같지만 박 정희 대통령 시기의 이야기다.
야생 늑대의 이야기는 동물원으로 옮겨져서도 계속되었다.
1963년 3월 15일 기사 .
일본 오사카 동물원에서 일본 토종 도카다 말을 도입하는
대신 창경원에서 기르는 늑대를 보내 주기로 했다.
이 늑대는 4년 전 -1959년 경북 영주에서 잡힌 5-6세 되는
늑대였다.
1964년 11월 6일 기사.
그 전날 5일 창경원에 새 늑대가 들어왔다.
창경원은 영주읍 최 기철 씨 덫에 걸린 5살짜리 늑대를
한 마리를 2만 8천원을 주고 구입했다.
짜장면이 30원하던 시절의 금액이니 짐작이
가실듯.
영주에서 틀에 잡힌 늑대. 나도 어렸을 때
직접 본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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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일본으로 보내진 늑대를 잡아서 창경원으로
가져온 분이다.
60년대에 영주에서만 총 5마리의 늑대가
생포되어 창경원으로 입양되었다.
영주의 이 분이 계속 늑대들을 잡아 공급했으리라.
이들은 근친 교배로 영주 늑대의 맥을 이어 오다가
마지막 한 마리가 1996년에 죽었다.
위의 기사들 외에 늑대 새끼를 사로잡았다는 기사는 75년도
[서울 도선사 뒤]나 82년 [충북 청원군]의 기사가 있었지만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별로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는 견해다.
해방후 마지막으로 얼굴을 내민 늑대들은 영남지방의
남부 [창녕군]와 북부 [안동, 영주시]의 작은 지역에
각각 고립되어 잔존되어 있다가 멸종의 길을 간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제한 된 정보지만 한국 늑대는 동물의 멸종의 전형적
특징인 서식지 축소 → 서식지 표범 점무늬화→서식 점 무늬
점차적 소멸의 단계를 밟았다고 보겠다.
만에 하나 한국 늑대들이 멸종되지 않고 연명하고
있다가
기적같이 얼굴을 내민 다면 그 곳은 영남 지방일
가능성이 크다.
예전에 여기서 본듯한 내용인데 다시보니 새로와서 퍼왔습니다.
문제되면 이동해주세요. 백싼님 ㅋㅋ
첫댓글 호랑이도 한국호랑이가 호랑이중에 가장큰게 입증된바있죠. 늑대도 그렇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