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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났을 땐,
서로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어 있었다.
※독(毒)
P.
금발에 가까운 연갈색의 머리를 높게 질끈 동여매고 ‘검사 신예월’이라는 명패를 앞에 두고 있는 앉아있는 여자의 손길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욱 큰 소리를 내며, 폐쇄된 공간을 가득 채운다. 네모난 검은 안경테 안에 들어있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금방이라도 노트북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타다다닥, 탁.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작업을 마친 그녀가 후, 하는 한숨을 내쉬기 무섭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신 검사님, 식사는?”
문 앞에서 활짝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은준이었다. 예월은 마치 은준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거리며 그를 맞았다.
“뭐 사줄 건데요?”
“신예월 양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정도 일 줄은 몰랐네. 벌써 내가 몇 번째 사는 줄 알아?”
“아, 그럼 선배님 혼자 드세요.”
예월이 얼굴엔 한껏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휙 돌리며, 다시 타이핑을 하는 척 노트북을 두드렸다. 저게, 진짜. 예월이 얄밉다는 식으로 말하는 은준의 얼굴엔 오히려 웃음기가 가득했다. 결국엔 이번에도 은준이, 뭐 먹고 싶은데? 하고 묻는 물음에 예월이 짤막하게 떡볶이라 대답했다.
“떡볶이만 먹으려니까 내가 다 질린다. 9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냐, 너는?”
“그럼 선밴 먹지 마요. 나만 먹죠, 뭐.”
대학생 시절부터 예월과 선후배 사이였던 은준이 그녀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보면 항상 들려오는 대답은 떡볶이였다. 덕분에 서울 길거리에 있는 노점상 중 안 가본 떡볶이 집은 없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밀가루류의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던 은준이 주식을 떡으로 하는 데에는 예월이 한 공로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근데 선배랑 인연이 벌서 9년이나 됐나?”
“그렇지. 정확하게 내가 군대 갔다 온 공백기간을 빼다면 한 7년쯤?”
“선배랑 나도 참 징글징글한 인연이네요.”
같은 대학 법학과부터 시작해서 서울지검 마약부 검사가 되기까지. 이러자, 저러자 하는 계획은커녕 서로의 진로 계획을 알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같은 곳에 있게 되는 두 사람이었다. 대학은 은준이 2년이나 앞서 들어갔지만, 검찰청에 들어온 건 예월이 1년 빨랐다. 엄연히 따져보자면, 검찰청에선 예월이 선배였지만 되려 은준이 선배소리 듣고 있는 것도, 대학교 시절부터 입에 익은 호칭을 부르다 보니 일어난 아이러니였다.
“아, 이번에 홍룡파 마약 밀거래 사건 네가 맡게 됐다며?”
“원래 제 담당이잖아요. 그 놈의 홍룡파 잠잠하나 싶었는데 또 시작이에요.”
홍룡파라는 말에 예월이 이젠 넌더리가 난다는 듯 도리질을 했다. 벌써 홍룡파만 다섯 번째 담당하게 됐으니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조용한가 싶으면 한 사건이 터지고, 또 잠잠하다 싶으면 심심치 않게 사건을 던져주고 가는 게 홍룡파 녀석들이었다.
“선배는 어떻게 알았어요? 나도 이제 막 통보 받은 건데.”
“정은준이 모르는 게 어딨어?”
“어련하시겠어요.”
대답하는 예월의 표정이 그닥 좋지는 않다. 은준을 위아래로 흘겨보는 눈빛에 은준이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너 가자미 같다, 가자미. 사실 강력계 강재운 검사 잠깐 만났는데, 홍룡파가 얼마 전 살인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지 강력계에서도 홍룡파 녀석들 찾느라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나 보더라. 그러면서 도움 될거라고 이거 전해주래.”
“이게 뭔데요?”
“이번에 새로 알아 낸 홍룡파 조직원. 꽤 영향력 있는 인물이야. 아마 이번 사건에 연루 됐을거라고 보고 올라 왔더라.”
홍룡파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워낙에 자주 나타나는 놈들이라 홍룡파 조직원들이라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었다. 오죽하면 일년에 친척들 얼굴 보는 횟수보다 홍룡파 녀석들 보는 횟수가 더 많을 정도였다. 마약 사건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조직원들을 바꿔가며 여러번 검거했었고, 간간히 형사사건에도 휘말리기도 하는 조직이었다.
예월이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은준이 건네주는 파일을 덥석 낚아챘다. 예월이 가지고 있는 홍룡파 정보에 비해선 턱 없이 적은 양의 자료이긴 했지만, 신선한 자료들이었다. 홍룡파에서 이번 마약 밀거래를 주도하는 인물이 새로 나타난 인물이란 말을 전해듣긴 했지만, 아직 세세한 사항까지는 조사하지 못한 상태였다. 은준이 건낸 황색파일을 뒤적거리며 용의자들의 자료를 훑어보는 예월의 눈빛이 패기에 찬 모습이었다. 지켜보던 은준이 무의식적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필을 꼼꼼히 살피는 예월을 바라보는 모습이 꽤나 걱정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가 율. 스물 아홉. 나이로 봐선 신참은 아닌거 같은데요.”
“새로 들어왔는지 아니면 홍룡파에서 숨겨뒀던 건지 아직 신원파악은 제대로 안됐는데, 짐작으론 후자인 거 같아. 영향력이 있는 놈들이라니까.”
어디서 수집한 사진들인지 전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만 찍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반반하게 생겨서 멀쩡해 보이는데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인생을 망칠 짓을 하고 있으니, 가 율이란 놈 인생도 꽤나 안타깝다 생각하는 예월이었다. 가 율에 대한 정보를 대충 머릿속에 넣어놓고, 뒷장으로 넘기자 또 다른 용의자의 정보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
끔벅끔벅. 예월의 눈커풀이 천천히 오르내렸다.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며 용의자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했다. 혹시나 잘못보고 있는 게 아닐까. 벗어 둔 안경을 다시 쓰자 흐릿했던 글자와 얼굴이 더욱 또렷해졌고, 그녀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흑백이었지만 7년 전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았던 때와 다름이 없었다. ‘차강하’라고 적혀 있는 이름 석자도 정확했고, 830704로 시작하는 그의 주민번호까지 똑같았다. 하얀 종이에 적혀있는 검은 글자들이 확실히 그가 맞다고 증명하고 있었다.
“정 선배.”
“…….”
“선배, 이것 좀……. 하, 이것 좀 봐줘요. 며칠 야근했더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나 봐.”
예월이 못 믿겠다는 듯이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보고 있던 파일을 은준 앞에 내밀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하 맞아, 예월아.”
은준은 예월이 내민 자료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흔들리고 있는 예월의 눈과 마주하며 확인 사살을 했다. 예월의 행동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은준의 행동에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지는 예월이다. 앞으로 쭉 뻗어있는 예월의 팔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
그의 대답은 담담했지만, 고개는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데요?”
“강력계에서 홍룡파 수사 들어갈 때부터.”
의외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가는 예월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강력계에서 언제부터 홍룡파 수사를 시작했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얼추 3주쯤 되어가는 거 같았다. 왜 말해주지 않았냐는 말이 식도 끝까지 차 올랐지만 깊은 한숨과 함께 넘겨버렸다.
은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은준의 말대로 공백 기간을 뺀 7년 동안 줄곧 예월의 옆에서 함께 지낸 사람이었다. 집에 있는 가족들보다 더 자주 얼굴을 맞대는 두 사람이었고, 검찰청이라는 한 지붕 아래 24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날도 허다하게 많았다. 은준은 누구보다 예월에 대해 잘 알았고, 예월과 강하의 관계를 지켜봐 온 한 사람으로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한 게 뻔했다. 은준의 마음이 어땠을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은준에게서 물씬 밀려오는 배신감이란 감정을 이성적으로 제어하기는 어려웠다.
“선배, 미안한데 오늘은 그만 가줄래요? 식사는 나중에 해야겠다.”
“예월아.”
“선배는 나랑 강하가 어떻게 끝났는지 다 알고 있는 사람이잖아요. 나 선배 이해할 수 있어요. 그냥, 지금 이 상황이 조금 혼란스러워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요.”
이어 ‘미안해요.’ 라고 말하는 예월의 말에 되려 은준의 얼굴에 미안하다는 기색이 짙어졌다. 희미하게 웃으며 빨리 나가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눈빛에 은준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ㅡ
은준이 나가고 자리에 멍하니 앉은 지 어언 3시간째였다. 예월의 책상엔 황색 파일과 사진 한 장이 놓여있었다. 유채꽃이 만발하는 화창한 봄날, 강하와 예월의 추억이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예월은 두 개의 사진을 놓고, 어떤 차이점이라도 찾아내려는 것처럼 한참 동안을 비교했다. 하지만 차이점 따위는 없었다. 이젠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부정하려 해도 부정 조차 맘대로 되지 않는다. 예월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열일곱.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예월, 우리 오늘부터 사귈 거야.”
“누구랑 사귀는데?”
“우리 둘. 너랑 나.”
너무 당혹스러워서 놀라는 감탄사 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사귈래’도 아니고, ‘사귀자’도 아닌 ‘사귈 거야’였다. 잠시 패닉 상태였던 예월이 정신을 차리고, 뭐라고? 라고 다시 반문하자, 강하는 자신감의 근원지를 밝혀내 주었다.
“너 나 좋다며?”
“그게 남자로서 좋다는 의미야?”
“그럼 설마 내가 여자로서 좋다는 의미였어?”
“야, 차강하! 그게 아니잖아!”
예월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주먹 쥔 손을 올리려 했을 때, 이미 깍지까지 끼고 맞잡은 손을 올리며 해죽 웃고 있던 강하였다.
우리의 열일곱. 호기심을 바탕으로 시작한 연애였다. 사랑한다는 느낌이 어떠한 것인지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주변에 연인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한 열애이기도 했고, 멋모르는 철부지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두 남녀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쁜 새끼…….”
거지 발싸개보다 못한 놈. 개새끼. 비열하고 치졸한 놈. 욕으로 그를 표현하자면 2박 3일 밤을 꼴딱 새워도 모자랐다. 모든 게 제멋대로였다. 시작도 제 맘대로 해놓고, 끝도 저 혼자 끝내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린, 그야말로 개새끼였다. 매사 즉흥적이었고, 생각한 건 생각한 데로 꼭 실행에 옮기는 고집 센 녀석이었다. 잘못을 해 놓고도 천진난만하게 웃거나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용서를 구하는 능글맞은 놈이었다.
그와 함께 사랑한 6년, 그리고 그를 떠나 보내고 청승맞게 혼자 그를 그리워한 7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잊으려고 하는 노력은 매번 실패하기 일쑤였고, 멀리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짙은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그였다.
그런데, 그런 차강하가 적이 되어서 나타났다. 그녀의 일생 일대에 있어 최고의 반전이었다.
01.
“장범룡이 도주했다고요?”
“네, 홍룡파 놈들이 머물던 남양주 창고도 싹 다 비워 버렸더라구요.”
예월의 직속 마약수사관인 권규현 수사관이 홍룡파에 관한 소식들을 전해주는 중이었다.
홍룡파의 두목 장범룡이 살인 미수사건으로 불구속입건 되어 수사를 받던 도중 조직원 몇 명과 함께 도주해버렸다. 진작부터 구속영장을 발부했어야 했던 것인데, 장범룡이 지병이 있다는 이유로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한 후 불구속입건이 되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구속적부심사 : 구속된 피의자에 대하여 법원이 구속의 적법성과 필요성을 심사하여 그 타당성이 없으면 피의자를 석방하는 제도)
권규현 수사관이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평소같으면 책상에 손가락을 퉁퉁 튕기며 불만을 표현했을 예월인데, 오늘은 잠잠했다. 다행히도 수사관은 아직 그런 예월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장범룡이 데리고 도주한 조직원이 누구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조직원들 안에 어쩌면 차강하와 가 율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접수된 정보대로 이 오늘 그들이 계획한 밀거래가 그대로 시행될지, 아닐지는 장담하지 못하는 바였다. 차강하와 가 율이 그대로 시행한다면 현장에서 검거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해야 하는 마당이었다. 권규현 수사관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골치가 아픈 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예월을 붙잡았다.
“우선은 오늘 현장 나가는 계획은 그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차강하던 가 율이던 우선 잡아야 되지 않겠어요?”
예월은 두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차강하…….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 만으로도 예월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체포영장이랑 구속영장 같이 발부해 주시면 오늘…….”
“그러실 필요 없을 거 같네요.”
“에? 갑자기 왜요?”
“불구속으로 처리할 겁니다.”
규현이 혹시 잘못들은 건가 싶어 예월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토시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말이었다.
“지금 홍룡파 두목 장범룡이 수사 진행 중에 도주 한 거 못 들으셨습니까? 차강하, 가 율 그 새끼들도 언제 튈지 모르는데 불구속이라뇨! 장범룡이 도주했다는 것은 물론이고 마약 유통만으로도 충분이 구속영장 발부 가능하다고요!”
불구속 상태로 수사를 진행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비록 이번 밀매자들이 초범이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홍룡파 마약전과로 보아 구속영장을 발부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홍룡파 두목 장범룡이 도주한 상태란 점은 무엇보다도 구속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였다. 예월이 이런 사실을 모르는 터도 아닐 것이고, 사건을 한두 번 다뤄본 사람도 아니면서 헛소리만 내뱉어대니 미쳤나 싶은 생각이 날 정도였다.
“그리고 제가 직접 현장 검거하겠습니다.”
“지금 뭐라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수사관님들께선 현장에 나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규현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리고 황당하다는 탄성을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월의 내뱉은 말이 대담하다고 해야 될지, 멋모르고 까분다고 해야 할 지 적당한 표현도 떠오르지 않는 규현이었다. 대게 현장에 검사가 직접 나타나는 일은 드물었다. 검사가 나서는 건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현실에선 발로 뛰는 건 검찰 수사관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 위험도가 높은 마약관련사건은 베테랑 수사관들도 매 사건마다 긴장을 늦추지 않는데, 현장 경험이라곤 한번도 없는 여자 검사가 혼자서 검거하러 나서겠다는데 미치고 팔짝 뛰지 않고는 못 베길 장관이었다.
“그 놈들은 손이건 발이건, 총이건 칼이건 되는대로 휘두르는 놈들이에요. 수사관들도 항상 긴장하는 현장을 검사님 혼자 어쩌시려고요? 갑자기 신 검사님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이번 사건은 제가 알아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도 마시고, 더 이상 관여하지도 말아주세요.”
“정말 왜 이러세요, 검사님! 그건 안됩니다! 이게 억지 쓴다고 될 일이에요?”
“무슨 일이에요?”
예월을 만나러 온 은준이 문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을 눈치채곤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규현은 금방이라도 복장이 터질듯한 얼굴로 은준을 붙잡고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은준 검사님! 신 검사님 좀 어떻게 말려보세요. 이번 홍룡파 건을 불구속으로 진행하시겠답니다. 게다가 수사관들 대신에 혼자 현장 나가시겠대요! 이건 제 직무를 떠나서 사람 생명이 걸린 일이 될 수도 있는 문젠데! 신 검사님 혼자서 어떻게 홍룡파를 상대합니까! 좀 말려 주세요!”
흥분한 규현의 말을 찬찬히 듣고 있던 은준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수사관과 예월 사이에 언쟁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예월이 법을 어겨갈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수사관님,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명심하세요. 신 검사님은 판사가 아니라 검사에요. 판사라면 예외가 있을지 몰라도 검사는 법 그대로 진행하셔야 된다는 거 잊지 말아주셨으면 하네요. 한 두번 사건 다뤄보신 분도 아니면서 도대체 왜 이러시는 이해가 가질 않네요, 도무지.”
규현은 더 있으라고 해도 못 있겠다는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규현이 나가자 바로 피곤하다는 듯 예월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잠시 말 없이 가만히 움직임 없는 예월을 바라보다가, 은준이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이야? 어리석게 행동하려 하지마.”
다소 화가 나 있는 말투였다.
“선배는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알아서 할거에요.”
“제 정신이야? 강하랑 서로 얼굴 안 보고 연락 못한지 7년이 지났어. 강하가 예전 모습 그대로일지, 아닐지 장담하지도 못해. 근데 무슨 생각으로 혼자 이 사건을 진행하겠다는 거야? 위험하다는 거 몰라?”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구요.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해결해요.”
“정신 차려, 신예월. 이미 7년이 지났어. 차강하 때문에 너 이럴 필요 없다는 거, 모르겠어?”
은준의 언성이 서서히 높아져 갔다. 은준의 서글서글한 눈매는 잔뜩 일그러졌고, 날카로운 예월의 눈빛은 제어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아래로 내려갔다.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게 만드는 은준의 말이 허를 찔렀다. 차강하 때문이었다. 은준의 말대로 이미 7년 전에 모든 게 끝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월은 7년 동안 단 한번도 차강하라는 존재를 잊은 적 없었다. 이곳 저곳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간 차강하를 잊기엔 7년이란 시간은 턱 없이 부족했다.
“최소한 이 일에 대해선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예월아. 그게 우리 일이야.”
“선배가 말려도 이번 사건은 내가 직접 뛸 거에요. 이거만큼은 말리지 마요.”
은준은 흥분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예월의 심정이 어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행동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당최 파악되지 않았다. 탁월한 업무 처리 능력으로 상층부의 이목까지 끌고 있는 예월이 정해진 규칙까지, 아니 대한민국 헌법을 어겨가면서 밀거래 사건을 처리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은준은 더 이상 예월을 말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은준은 문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예월의 완고한 표정을 봐서인지, 원래부터 자기 주장을 꺾지 않는 성격을 알아서인지 예월을 설득하는 것에 자신이 없어보였다.
“근데, 예월아.”
“…….”
“결국 아플 건, 너야…….”
ㅡ
눈 앞에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랜드 호텔이 보였다. 수많은 샹들리에 조명 아래, 한껏 갖춰입은 사람들이 제 각각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 이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곳 어딘가에선 마약 밀매범들이 선량한 고객인냥 가장을 하고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
‘그랜드 호텔 718호실이구요. 유통자는 이미 어제 호텔 안에 히로뽕을 놓고 사라진 상태이고, 홍룡파 놈들이 오늘 오후 9시에 가져갈 겁니다. 장범룡이 도주한 상태라 차강하, 가 율 둘 중 1명만 현장에 나타나지 않을까 싶고요.’
권규현 수사관은 몇 시간 동안 투쟁을 벌이며 한사코 안 된다고 말리다가, 결국 예월 앞에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예월이 혼자서 현장에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대신, 20분이 넘어도 연락이 없다면 그 땐 수사관들이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고 말이다.
아홉 시가 되기 10분 전. 예월은 호텔 안 안내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서울 지방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현재 718호에 머물고 있는 투숙객을 마약 소지 및 거래 혐의로 수색 중이니, 협조 부탁 드립니다.”
예월 앞에 있던 직원은 물론 양 옆에 있는 직원들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예월을 쳐다봤다. 한 두 번 있던 일이 아닌 예월은 검찰 공무원증을 꺼내 검사라는 것은 직원들에게 확인시켰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7층 통로를 통제해 주시고, 718호실 열쇠도 부탁 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718호 열쇠 대신 스페어 키를 내밀었다. 카드를 건네 받은 예월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빠르게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가 다시 예월을 태우고, 7층으로 올라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예월은 다시 한 번 수갑과 전기 총을 확인했다. 두 주먹을 꽉, 쥐어봤다. 다짐. 나를 위한 다짐.
차강하……. 결코, 너 때문이 아냐. 내 발로 직접 뛰고, 내 손으로 널 직접 체포하는 건 전부 날 위해서야. 변해버린 네 모습을 보면서, 7년 동안 차강하라는 늪지대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나를 구해내기 위해서야. 절대로 너를 위해서 이러는 게 아냐.
예월은 아랫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베이지 톤으로 정돈된 호텔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예월이 손에 꽉 쥐고 있던 카드를 도어락 앞에 갖다 대자, 큰 어려움 없이 현관이 열렸다.
터벅 터벅. 카펫 위를 걸을 때와 달리 방 안에선 예월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모든 불이 다 꺼진 호텔 방안은 예월의 발자국 소리가 크게 울릴 정도로 조용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엇이라도 찾으려는 사람처럼, 두 눈에 힘을 주어 굴리며, 예월이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거렸다.
“뭐야.”
그 때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남자가 예월의 뒤에서 예월을 위협했다. 남자의 손엔 폴딩나이프가 들려 있었고, 그 차가운 금속은 예월의 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서늘한 금속만큼이나 예월의 피가 식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어디서 온 새끼냐?
폴딩나이프를 쥐고 있는 남자의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폴딩나이프가 예월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귓가에서 들리는 낮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에 예월의 온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움직여. 제발 손이든, 발이든 움직여 신예월. 머릿 속으론 수 없는 생각이 지나갔지만, 몸뚱라니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디서 온 새끼냐?”
남자의 손에 더 강한 힘이 실렸다. 목선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천천히 흘러내렸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 때문에 침을 꼴깍 삼킬 수도 없었다. 예월은 어둠 속에서 남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전기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오른쪽 허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쏘기 전에 내려놔.”
허리춤에서 묵직하게 느껴지는 물체가 무엇인지 짐작했을 텐데도, 남자에게선 놀란 듯한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월의 경고에 큭 하는 서늘한 웃음만 흘려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여자였군.”
예월의 목소리에 남자는 우습다는 듯이 다시 한 번 비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목에서 칼이 떨어져 나가자, 더욱 아린 통증이 느껴졌다. 예월이 이를 꽉 물고, 남자의 허리에서 총을 떼지 않으며 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1초. 2초.
“아!”
무모하단 걸 알면서도,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에, 남자가 예월의 왼쪽 어깨를 잡고, 반대편 벽으로 몰아붙였다.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내팽개쳐지듯 벽에 부딪힌 예월이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동시에 방 안에 불이 들어왔다. 어디서, 어떻게 불이 켜진 건지 알 겨를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해야 한다. 남자가 강하게 누르고 있는 왼쪽 어깨에서부터 내려오는 통증에 예월이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 탄식이 튀어나왔다. 가 율. 남자는 가 율이었다. 강하가 아닐 거란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확인하고나니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일종의 안도였다. 강하는 절대,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안도감.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마약 거래 혐의로 인해 같이 동행해주셔야 되겠습니다.”
그제서야 온 몸의 세포가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걸 느낀 예월이 꽉 잡힌 어깨를 움직이려 애를 쓰며, 수갑을 꺼내기 위해 뒤 춤으로 손을 뻗었다. 수갑이 서로 부딪히면서 낸 짤랑 거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눈치 챈 율이 예월의 손목마저 꽉. 잡아 올렸다. 어깨에 이어 손목까지 꽉 잡힌 예월은 이젠 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여봐도 남자의 힘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예월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율의 눈을 직시했다. 율은 예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의 눈매가 예월과 대결이라도 하자는 듯 도전하는 모습이었다. 가 율은 입 꼬리를 올리며 나이프를 들어 예월 앞에 들어 보였다. 칼날 끝에는 붉은 색의 피가 묻어 있었다. 가 율은 손에 쥔 칼을 고쳐 잡으며 예월의 목 옆으로 나이프를 가져갔다. 여전히 예월의 두 팔을 잡고 벽에 밀어붙이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게 뭐야.”
비릿한 율의 웃음에 예월이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모든 게 허튼 짓이었다. 옴짝달싹 할 수도 없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미간, 일그러지는 미간 뿐이었다. 목 언저리에서 다시 한 번 서늘한 금속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손 놔.”
남자의 목소리에 율이 현관 쪽을 향해 돌아봤다. 예월도 지금까지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어떠한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율이 잡고 있는 예월의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마약 밀수 용의자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손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트렁크를 잡고 있었다.
너 만은 아닐거라는 그 믿음.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그 안도감. 차강하. 너만큼은…….
깨져버리고 만다. 처음부터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율이 예월의 목에 칼을 두었을 때부터 율의 힘에 압도 되기까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둠속에서도 강하는 예월을 보고 있었다.
강하가 가방을 내려놓은 채, 뚜벅뚜벅 예월의 앞으로 걸어왔다.
“뭐?”
“네가 잡고 있는 이 손. 당장 내려놓으라고.”
T A L K
고등학교 때, 법과 사회를 배우다가 문득 소재가 떠올라 수업은 듣지도 않은 채 시놉을 짰던 기억이 납니다.ㅋㅋ
고등학교 땐,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 등등 시험때문에 썼다가 중단하고 썼다가 중단하고...
그때 보셨던 분들은 아마 조~금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려나요?ㅋㅋㅋ
튼, 4화까지는 제가 고등학교 때 썼던 글이라, 지금의 문체와 다소 다른 점이 있어요.
부족한 부분이 많아 수정을 해 올리려고 했었는데, 수정을 하다보니 예전의 제 문체와 지금의 제 문체가 자꾸 섞여서
그냥 수정하다 중간에 관둬버렸습니다, 하하. 그래서 5화부터는 지금보신 문체와 조금 다를 수 있으니 미리 양해 구합니다!
업쪽은 독.
첫댓글 독
재밋어용 기대됩니당
독 재밋어여 담편기다릴게여 ㅎㅎㅎ
기억나네요 ㅋㅋㅋ
재미있어요! 우왕 다음편기다리고있을꿰용^^^^*
잘보고가여
독 담편 기대 되네요...ㅎㅎ
재미있어요
독.!첫편만봤는데흥미진진하네요~^^끝에살짝나온강하..존재감대박!ㅎㅎ 잘읽고갑니다~기다릴께용♥
짱 잼써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 새롭고 탄탄한 시작이라 재밋게 읽었어요~ 담편 기대되네요
독....흥미진진하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