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이슬이에 제대로 젖은 취객의 고성방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아주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인상까지 썼다. 뭐니뭐니해도 꽤 많은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 단지안에서 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 메밀묵, 찹쌀떡 [짧은 이야기] #
하지만 소리와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들려오는 소리는 취객의 고성방가와는 사뭇 틀린 것이었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반가운 것이었다.
"차압싸아알 떠억! 메에미이일 무욱!"
그것은 구성진 노랫가락 같기도 했다. 찹쌀을 쭈욱 늘리고 곧장 떡하면서 똑 끊어지는 소리라던가, 마찬가지로 메밀을 쭈욱 늘린다음 묵, 하고 똑 끊어지는 소리 같은 게 제대로 리듬을 타며 몇번이나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버스 시간이 머지 않았다는 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장사치를 바라봤다.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흐릿하고 새초롬한 가로등 불빛에 비춰지는 그림자가 전부였지만, 그랬기에 그 자리만 마치 시공간의 거대한 법칙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메밀묵, 찹살떡 장사치는 아주 어릴 때였다. 그것도 눈으로 직접 봤던 적은 없고 그저 창문 밖으로 들려오는 외침을 들은 게 전부였기 때문에 지금 보는 것이 내 평생 처음인 셈이다.
요즘은 이상할만큼 안개가 자욱하다. 차라리 비가 오면 좋을텐데. 습기에 지독하게 약한 내게 요즘의 날씨는 정말 쥐약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안개와 가로등 불빛이, 검정 옷을 입고 목청껏 메밀묵과 찹쌀떡을 외치는 장사치를 위한 무대의 장치인 듯 보였다. 혼자서 열심히 일인극을 하는 '그'라는 단 한명의 배우를 위한 장치말이다.
꽤 먼거리였지만 그 자리에서 멈춰서 멀거니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날 향하는 게 보였다. 그냥 그렇다고 느껴졌다. 난 평소 시력이 좋지 못하고, 더더군다나 편식으로 인한 야맹증까지 갖고 있었다. 정말로 그가 날 보고 있는 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난 곧장 모른 척 앞을 향해 걸음을 딛었다. 난 그가 열심히 외치는 메밀묵도, 찹쌀떡도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 난 그의 손님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아주 우연히 오랜만에 만난, 즐겁고 유쾌하기만 했던 어린시절로의 연결고리를 잃고 싶지 않았던 내 유치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파트의 경관을 위해 배치된 나무 뒤에 숨어서 계속 그의 모습을 훔쳐봤다. 그는 여전히 구성진 목소리로 메밀묵과 찹쌀떡을 외치고 있었다. 문득 목이 쉬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호흡과 목소리는 성악가들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곧 그런 걱정은 접었다. 난 지금까지 성악가들이 목이 쉬었다는 소리는 들어본적이 없다.
다른 행인들도 반가운 마음에, 그리고 아직도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라 나처럼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다시 자신들의 바쁜 길을 가기 시작했고, 여전히 장사치에게 다가가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내심 그들이 장사치의 손님이 되길 바랬지만, 나조차 이렇게 숨어서 지켜볼 뿐 손님이 되주지 못하는 데 하물며 다른 이에게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문득 누군가가 그리워졌다. 내 어린시절을 따스하게 바라보고 지켜주던 나의 태양같던 그 남자가 갑자기 그리워졌다. 그렇구나. 내 어린 시절은 마냥 즐겁고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었구나.
풍족하지 못했던 어린시절에는 갖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제약이 많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배우고 강요당한 도덕윤리에도 불구하고 난 동네 슈퍼나 학교 문방구에서 자잘한 물건들을 몰래 슬쩍해 갖고 오곤 했었다. 등교 시간 바로 10분전의 그 혼잡함을 틈타면 그건 꽤나 쉬운 일이었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거스름돈까지 당당하게 받아 챙기기도 했었다.
내 어린시절의 반절은 대체로 이런 기억뿐이다. 어느 날은, 동생까지 한패로 끌어들여 대량으로 물건을 슬쩍하기도 했었다. 그 때부터는 그저 슬쩍 갖고 오는게 아닌, 엄연한 도둑질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힌다던 말처럼 결국 동네 슈퍼마켓에서 들키고 말았다. 무섭게 다그치며 집전화번호를 묻는 그들에게 난 부모님의 연락처가 아닌, 언제나 날 향해 웃어주던 그의 연락처를 알려줬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그는 그 자리에서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깊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아닐꺼라는 생각을 하며 그저 확인차 왔을 것이었을테니까. 언성을 높이는 주인아저씨에게 그는 싹싹하게 죄송하다 사과하고, 날 데리고 그 곳을 나왔다. 난 누군가가 날 위해 내 대신 사과하는 게 끔찍한 일이라는 걸 그 때 배우게 되었다.
그는 한참동안 내 눈을 들여다봤다. 어쩌면 그는 내 눈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오랫동안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차라리 혼이 나면 시원했을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내 잘못에 대해 침묵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매를 들었고, 매섭게 욕을 던졌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 있던 내게 그의 행동은 상당히 부담스럽고 무서운 것이었다. 학원에서 굴러다니던,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의 소유인 하모니카를 집에 들고 왔을 때 처음에는 놀라고, 두번째는 내 거짓말에 실망하고, 세번째는 조용히 돌려주고 오라던 어머니보다 그의 행동이 더 두렵게 다가왔다.
그는 내가 훔치려했던 찹쌀떡을 사서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난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한 채 그저 손에 쥐어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는 그것을 또한 가만히 바라보더니 봉지를 뜯어 들어 있던 두 개 중 하나를 자신의 입에, 또 다른 하나는 내 입에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비워져 버린 내 손을 말없이 꼭 힘주어 잡고만 있었다.
울었다. 가게 주인이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고, 내게 무섭게 매질하는 아버지가 뒤에서 욕을 하며 달려오는 환상이 보였지만 그래도 울지 않았는데, 그의 말없는 행동에 울어버렸다. 울다가 목에 걸린 찹쌀떡에 캑캑 대면서도 난 그에게 약속했다.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미안하다고 약속했다. 그런 날 향해 그는 빙긋이 웃어줬던 것 같다.
난 찹쌀떡을 참 좋아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창문 밖에서 리듬있게 이어지며 들려오는 메밀묵 찹쌀떡이란 소리에 가슴을 설레곤 했다. 어쩌면 아버지가 사주실 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하지만 단 한번도 아버지는 사주신 적이 없었고, 내게 찹쌀떡은 꽤나 귀한 음식이 되어버렸다. 먹고 싶지만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찹쌀떡의 가치를 매우 상승시켰다.
하지만 그건 몇년 전, 언제나 나라는 어린 싹을 향해 따스한 빛을 뿜어주던 그의 죽음과 함께 싹 바껴버렸다. 그토록 좋아하던 찹쌀떡이 내게는 괴로운 기억의 고리가 되어버렸던 탓이다. 한번은 편의점에서 파는 찹쌀떡을 사 먹어 봤지만 그의 기억을 지워버릴 셈이라도 되는 듯 난 그 날 먹었던 모든 걸 토해내야 했다. 그리고 내게 찹쌀떡이 갖는 인상은 더욱 나빠졌다.
"차압싸아알 떠억! 메에미이일 무욱!"
꽤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장사치는 고장난 카세트마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외면하는 모두에게 목청껏 스스로의 존재를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이 불러오는 기억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흘러내릴 것 같은 눈물을 겨우겨우 참으며 벗어났다.
첫댓글 음, 최근에 들은 적은 없지만 아주 가끔 정말, 가끔 듣곤 해. 초등학교 때 까지만해도 밤마다 들렸었는데..^_^ 그 소리만 들리면 군침이..(.......)
이쪽엔 가끔 밤마다 들리더군요.새벽엔 그 소리를 생각하며 잠을 자곤 했는데..난 그 소리가 좋다기 보단 지나가던 그 아저씨의 뒷모습이 좋았었어요..하핫
우리집주변하고 사무실주변에 가끔들리던데;; 거기까지갔나 `ㅡ`?;;
찹쌀떡, 메밀묵하니까 우리 부모님들의 옛날 모습을 상상할수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