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가톨릭 교회의 교계 제도
가톨릭 교회는 변화 극심한 현대 세계의 변천 속에서도 수천 년을 독특한 질서와 제도로 이어 오고 있습니다. 때로는 권위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시대의 정표를 읽을 줄 모른다는 비난을 수없이 듣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을 중심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사도 전래의 교회 제도 속에 우리는 그 나름대로 익숙해 있지만 실상 우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주교, 신부, 교구의 관계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계 제도는 과연 어떤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파견과 교계 제도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이 사람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요한 17,18).
교회는 파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파견하셨고, 그리스도는 당신의 구원 사명을 세상 종말 때까지 계속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파견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의 사명과 권한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며,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직분과 거기에 따른 권한은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는 구심점이며 교회의 조직과 체제를 이루는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도들의 직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위계 질서를 교계 제도라고 합니다.
교회의 교계 제도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신품성사의 등급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신품성사의 등급에서 나오는 위계 질서가 주교, 신부, 부제이며 이 세 등급을 모두 합쳐 성직자라 부르고, 주교와 신부를 합쳐 사제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자치권 또는 통치권의 등급입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다스리는 권한, 즉 관할권을 뜻합니다. 자치권은 광범위하고 복잡하나 주교, 신부, 부제로 구분되는 신품성사는 단순합니다. 그러나 자치권은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교구장과 본당 신부, 그뿐 아니라 수도회와의 여러 가지 특수한 통치권 등 여러 계층과 분야로 나누어집니다. 따라서 교계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에 대한 안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교직과 재치권
초대 교회에서는 지금처럼 주교와 신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전교하다가 어떤 지역에 교회 공동체가 탄생하면 지금의 사제단과 같은 장로들을 뽑아 그 지역 교회를 사목하게 한 다음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목 서간을 보면 감독과 장로를 상대로 여러 가지 사목 방침을 정해 주는데, 감독이 지금의 주교인지 장로가 신부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주교, 신부, 부제의 명확한 교계 제도가 확립된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로 추정됩니다. 안티오키아는, 초대 교회가 박해를 받자 많은 신도들이 피신한 도시로, 그 도시에 신자들이 불어나자 예루살렘 교회는 바르나바 사도를 파견했고, 바르나바가 다르소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바오로 사도를 불러 같이 사목을 했던 교회입니다.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기점으로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였고, 베드로 사도 역시 안티오키아에서 사목한 바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처음으로 안티오키아의 신자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역사를 지닌 교회의 주교로서 2세기 중엽 로마에서 순교한 이냐시오 주교의 서간을 보면 주교, 신부, 부제라는 명확한 교계 제도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때부터 2천 년 동안 교회는 사도의 후계자는 주교라고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교는 한 교구 안에서 완전하고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사도의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행사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교는 교구장이라는 권한을 가진 성직자라는 뜻입니다. 신품성사의 최고 등급이며 충만한 신품성사권을 지닌 주교는 통치권에 있어서도 교구장인 셈입니다.
교구장 주교의 직무
교회는 주교에게 신앙의 스승, 거룩한 예배의 대사제, 사도의 후계자 등 많은 칭호를 부여해 왔습니다. 이런 칭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목자라고 할 수 있는데 목자는 성서적 의미를 지닌 단어로서 주교의 직무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교황이 선출되어 착좌식을 거행할 때 왕권을 뜻하는 삼중관을 씁니다. 그냥 왕관이 아닌 삼중관을 쓰는 이유는 왕 중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중세 유럽의 왕들은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아야 인정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교황은 왕 중의 왕으로서 삼중관을 쓴 것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 이후 삼중관을 없애고, 목자의 직무를 뜻하는 영대를 걸치는 예식으로 착좌식을 거행한 것은 교황의 목자 직무를 바로 보여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새 교회법에서 고위 성직자의 까다로운 예절, 복장 등을 삭제하거나 간소화한 것은 주교의 목자 직무를 더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신부 역시 목자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주교의 직무와는 크게 다릅니다. 교구장 주교는 교구 내의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구심점이며 주교를 중심으로 사제단이 형성됩니다. 주교는 각 사제에게 사목권을 나누어 줌으로써 사제들이 자기 지역과 영역에서 목자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배려합니다. 그러므로 주교는 우선 교구 내 성직자들을 통솔하고 격려하며 각자 임무에 따라 배치합니다. 마치 한 가정의 아버지요 맏형으로서 신부들을 사목하는 것입니다.
주교가 가지는 이런 직무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그 외 주교의 구체적 직무와 거기에 따른 권한과 의무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주교는 한 교구의 목자로서의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법은 주교가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6개월 이상 교구를 비울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제395조). 또 주교는 매년 교구 내에 있는 본당과 일정한 구역을 방문할 의무가 있으며, 이 사목적 방문은 적어도 5년에 걸쳐 전교구를 다 돌아야 하는 것입니다(제396조). 이렇게 함으로써 주교는 교구 내에 있는 각 사제들에 대한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교는 교구 전체에 대해서 전반적이고 충만한 그리고 직접적인 사목 직무를 가지고 있으므로 교구 재산의 관리자이며 평신도 운동과 각 단체에 대한 육성과 감독의 임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구 내 모든 수도원들을 사목 순시해야 하며, 교구 내의 가톨릭 기관들도 정기적으로 순시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교회 재산 관리를 위하여 부제직을 세우면서 사도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사도로서 해야 할 본연의 임무입니다. 주교가 사도의 직무를 계승한다면 기도와 복음 전파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신자들에 대한 강론과 가능하면 예비자들에 대한 교리 교육에 있어서도 교구 내에서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교는 신앙의 스승인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과 설교는 가장 올바르며, 시대의 징표를 알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의 목소리요, 성령의 목소리를 전하는 대변자여야 합니다.
주교와 신부와의 관계
한 교구가 되기 위해서는 주교, 신부, 부제라는 신품성사에 의한 교계 제도가 이루어져야 하며, 교구로서 완전하고 독립적인 자치권이 있어야 합니다. 주교는 우선 교구 전체의 목자이지만, 혼자서 사목직을 수행하지 않고 교구의 사제단과 함께 수행합니다. 주교는 각 신부에게 사목권을 나누어줍니다. 여기에 주교와 신부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구장 주교는 교구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도의 권한을 통상적으로, 직접 그리고 충만하게 행사하는 반면 신부는 언제나 주교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아서 사도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주교에게서 받은 권한의 내용에 따라 어떤 지역의 본당이나 또는 일정한 사목 분야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부언하면 신품성사를 받을 때 사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교도권(말씀의 선포), 성사권(성사 집행), 사목권(교회 봉사) 등 삼중직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교는 일단 주교로 임명된 후에는 누구에게서도 권한을 위임받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께로부터 파견된 교구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부는 항상 주교에게서 사목권을 받아야 하고, 그때 신부는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제직을 합법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당 주임 사제
본당 주임 신부만큼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목자 노릇을 하는 사제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본당 신부는 주교의 권위 밑에 있지만, 그가 바로 그 본당의 고유한 참 목자라고 교회는 말합니다(교회법 제515조).
따라서 본당 신부는 무엇보다 신자들과 함께 회로 애락을 나누어야 하며 신자들과 함께 살아야 하고 본당을 오랫동안 비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제의 의무입니다. 특히 주일을 비롯, 대축일에는 미사를 드리고 강론을 해야 하며 자기 신자들을 위해 미사 예물 없이 교중 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본당 신부는 사도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만큼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데 전력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봉사가 약해지면 자연히 성사 중심의 사목이 되기 쉽습니다. 이때 그 공동체는 형식주의에 사로잡히게 되고 동시에 복음의 자유로움과 생동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구의 독립성과 교구간의 연대성
완전한 교계 제도가 있는 교구는 완전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가집니다. 마치 하나의 독립 국가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타교구가 다른 교구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습니다. 마치 강대국이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의 내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 교구가 이처럼 완전한 독립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이요,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따라서 행정적으로 독립성을 지닌 각 교구는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루기 위해 연대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국가 혹은 지역 단위로 주교 회의가 설립되어 주교단의 공동 사목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교구를 중심으로 몇 개의 교구가 모여 하나의 관구로 결합하게 되었는데 이런 연대성은 교구뿐 아니라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계 주교 대의원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여 전세계 교회가 함께 사목 방향을 논의하고 일을 모을 수 있게 된 것 등입니다.
미래는 갈수록 각 교구의 벽을 넘어 더 깊은 연대성을 지닌 교회로서의 일치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향잡지, 1993년 2월호, 권지호 프란치스꼬(부산교구 성소국장 ·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