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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은 온조왕에서 시작된 왕통이 구수왕 이후 비류계인 고이왕,책계왕,분서왕,계왕 등에게 빼앗겨 온 왕위를 확고히 온조계로 정착시킨 군주로 온조 이후 첫번째 온조계왕이었던 초고왕을 따라 ''근''자를 붙였고,그의 아들인 근수고왕에도 ''근''자를 붙였다. 그는 요동의 낙랑군 지역까지 해상 활동을 전개한 고이왕,책계왕,분서왕의 위엄을 이어 강력한 해상 활동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상황을 '양서'는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게 되자 백제도 역시 요서,진평의 2군의 땅을 점령해 스스로 백세군을 두었다''고 하였다. 하였고 요동지역에 있던 망명 부여가 백제에게 격파당하여 백랑곡 부근의 모용씨 가까이 갔다가 그의 공격으로 그 왕이 포로가 된 기록을 볼 때에 여기서 나타난 백제는 요서 진평군에 배치된 군사였음을 알 수 있다.그리고 그 당시 백제는 요서 이외에도 양지강 하구 양안을 점령하였다.이는 백제가 양자강 유역의 월주와 왜를 지배하던 해양강국임을 알 수 있다.그런데 이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살펴보면 백제 고이왕 때인 247년 위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자 동천왕이 평양지역으로 잠시 천도하였다가 고국원왕 12년(342)에 환도성으로 천도하였으나 343년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적연의 공격으로 다시 환도성이 함락되자 평양의 동황성으로 일시적으로 천도한다.그후 고국원왕은 근초고왕 24년(369년) 에 고구려가 낙랑국과 대방국을 정복한 이래 처음으로 남쪽의 백제를 처음으로 공격하나 치양에서 패하였다.근초고왕은 그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한수의 남쪽에서 대열을 하였는데 기치는 모두 황색을 사용하였다.이것은 중앙을 나타내는 것인 황제만이 사용하던 색으로서 당시 백제가 왜국과 중국의 식민지를 경영함으로써 제국의 풍모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음 해에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인 후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천도(이도)해 고구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그리고 30년(375)에 박사 고 흥으로 서기라는 역사책을 만들게 하여 국력의 강성함을 자랑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