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한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심보선, 식후에 이별하다
얼마나 다행인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 우주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 물질이
별들을 온통 둘러싸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그 어둠을 뜯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별은 어둠의 문을 여는 손잡이
별은 어둠의 망토에 달린 단추
별은 어둠의 거미줄에 맺힌 밤이슬
별은 어둠의 상자에 새겨진 문양
별은 어둠의 웅덩이에 떠 있는 이파리
별은 어둠의 노래를 들려주는 입술
별들이 반짝이는 동안에도
눈꺼풀이 깜박이는 동안에도
어둠의 지느러미는 우리 곁을 스쳐 가지만
우리는 어둠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하지
뜨거운 어둠은 빠르게
차가운 어둠은 느리게 흘러간다지만
우리는 어둠의 온도와 속도도 느낄 수 없지
알 수 없기에 두렵고 달콤한 어둠,
아, 얼마나 다행인가
어둠이 아직 어둠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은
나희덕, 별은 시를 찾아온다
음원을 공유했다
토마토를 대량 재배했다
똑같은 것을 두 개씩 달아주기를 즐겼다
지구인 수를 셌다
비밀번호에게 집을 맡겼다
개를 껴안고 잠들었다
달걀마다 산란일자를 표시했다
어둠이 사과 속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사과 속에 씨앗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했다
열매와 돌을 같은 모양으로 만들었다
반숙 완숙이 공존했다
지문을 믿었다
나무들의 침묵을 믿었다
불빛을 방목했다
전파를 믿었다
허공을 분할했다
구름을 최후의 저장소로 선택했다
지도를 완성시켰다
엄지에게 전권을 주었다
표지판을 세우고 길을 잃는 놀이를 멈추지 않았다
냉장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싶어졌다
햄버거는 내부 구조를 바꾸지 않았다
돼지와 닭 들을 생매장했다
품질보증 마크가 찍힌 관이 유행했다
전신이 벼랑인 초고층 아파트가 유행했다
지하 묘지를 공개했다
덫을 파는 철물점이 있었다
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몸 없이 번지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네비게이션과 네비게이션이 소통하게 만들었다
고양이에게 화장실용 모래를 선사했다
땀을 뒤지기 시작했다
피와 주파수를 섞었다
생수를 퍼 날랐다
사랑을 믿었다
눈물이 참이라고 설정했다
밤 속에 어둠을 남겼다
신의 거처를 남겨 두었다
고독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신호등의 최소 간격을 유지했다
사랑에 손을 쓰는 것을 허용했다
입국 심사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발가락이 향하는 곳을 여전히 앞이라고 불렀다
원스톱 쇼핑몰 귀신 출입을 금지시켰다
희망을 허용하고 있었다
외계행성사냥꾼 위성을 쏘아 올리고 외계인은 몰라봤다
화살표를 따라가면 푸드홀이 있었다
이원, 사랑은 탄생하라
혼자 걷는 천변이 너무 고요해,
해만 둥그렇게 입 벌리고 있어,
그 입에서 나온 말을 길 위에 그려 보려고,
그 입에서 터진 소리를 울려 귓속 동굴을 꺼내 보려고,
길을 짓밟고 동굴 속에 불을 켜 해를 가둬 보려고,
해의 심지를 부추겨 세상을 태워 보려고,
햇빛을 백색 가루처럼 뒤집어쓴 너는 말끝이 자꾸 불꽃되어 지워지는 시를 썼다
밤의 허기로 채운 책들이 저물녘에야 오리 떼처럼 꽥꽥거리고
양쪽 귀 사이로 타전되는 밀담을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네가 되기 위해 말할 뿐,
내가 나를 말하기엔 나는 나를 이미 모른다
머리에 뿔을 달고 혼자 떠도는 저녁 모퉁이,
빛과 어둠 사이에 그림자가 없다
해의 밀령을 판독 못해 저격당한 별만 오롯하나
오리 발자국 무늬만큼의 기별이나마 해의 이마에 적어두지 못했다
강정, 백치의 산수
문득 눈을 감자 눈에서 잘려 나간 시선이 목도리처럼 날아갔다 사랑해 그러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있다
외진 저수지가 그 처음을 허구 중에 던질 때 그 허구
행성의 눈물샘이 행성의 조각 하나를 가라앉게 하는 일이 우주의 저녁이다
나로부터 나에까지 끝없이 달아나는 가운데 너
너로부터 너에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가운데 나
행성의 조각 하나가 행성의 눈물샘을 반짝이게 하는 일이 우주의 아침이다
너는 그때까지 있다
외진 저수지가 그 끝을 맹세 중에 띄울 때 그 맹세
문득 눈을 뜨자 눈으로 뛰어드는 시선이 목도리처럼 날아왔다 그만해 그러나 놓아주지 않았다
신용목, 별은 시를 찾아온다
너는 밤마다 이 기계를 하러 온다
문이 하나도 없는 기계
너는 어느 순간 공처럼
이 기계 속으로 뛰어들 수는 있다
그러나 들어오는 순간 너는 죽음을 먹게 된다
이 기계는 너를 먹고, 먹을 뿐
아는가, 너는 없다
오아시스에서 잠들었지만
자고 나면 늘 사막이라고나 할까
너의 손이 닿자 기계 전체가 살아난다
앰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에서 내려다본 밤의 뉴욕처럼
기계 전체에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너는 마치 경광등을 켠 앰뷸런스처럼
별들 사이를 헤엄쳐가는 핼리 혜성처럼
내 몸 안을 휘젓고 다닌다
고동치는 도시, 부르르 떠는 별의 골짜기
내 몸 속이 번쩍번쩍한다
그러나, 너, 착각하지 마라
차디찬 맥주라도 한 잔 마셔두어라
너는 이 기계의 서랍을 열어본 적이 있는가
서랍 속에는 너와 같은 모양의 쇠공들이
백 개 천 개 들어 있다
모두 불쌍한 사랑 기계 자체의 물건들이다
밤하늘에서 가늘게 떨고 있던 행성들을
통제하는 기분인가
인생 전체를 배팅하는 기분인가
그러나 속지 마라 떠들지도 마라
기계는 혼자서 자기 보존 프로그램대로
움직여가는 것일 뿐
너만을 모셔둘 곳은 이 기계 내부 어디에도 없다
네가 할 일이라곤 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 뿐
이 문 없는 기계가 만든 가없이 텅 빈 몸 속을 헤엄치는 것일 뿐
김혜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지하철 창밖으로 백 년 전의 그대가 서 있고
백 년 후의 나는 지하철 안에 서 있네
떠나보내며 사랑을 알게 된다는 이 보편적 진리
창밖의 그대가 사랑해라고 말할 때
지하철을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내 몸에 주름이 하나 생긴다
그대를 사랑하며 흔들리며 간다
그대를 사랑하며 그리워하며 간다
그대를 사랑하며 주름이 늘어간다
백 년 전에도 흔들 만큼 흔들어라
백 년 후에도 흔들릴 만큼 흔들려라
최명란, 명랑생각
첫댓글 좋아요 ㅜㅜ 감사합니다!
좋은 글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