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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있어서 넌 특별해. 사귄다는 게 확실히 어떤 건지는 모르지만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
지난 밤 유토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트도 없고 특별히 달달하지도 않은데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몇 번이고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유토의 성이 눈앞에 보이면 난 달리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내쉰다. 가슴은 설
렘으로 가득하다. 하필이면 제일 학교도 제일 늦게 끝나는 날이고 학원 수업도 어쩌다 보니 늦게 되
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마을버스는 12시 쯤 끊기니까 같이 있을 시간은 1시간도 채 안 되는 구나.
나는 더욱 속력을 냈다. 그냥 오늘은 자고 갈까? 라고 말 하면 그 애는 무슨 말을 할까. 그 애는 집에
가야지 엄마한테 혼나기 싫으면, 이라는 둥 잔소리를 하겠지만 내가 떼를 쓰면 자줏빛 커다란 이불을
조금 빼내곤 내가 잘 자리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 애라면, 유토라면 분명히.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내 눈은 유토를 찾았다. 유토는 작은 연못에 앉아 물고
기들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얇은 니트와 반바지 하나만을 입고, 늘 신던 토끼 모양 슬리퍼를 신고
있다. 이건 분명 타민오빠의 '고약한 취향' 이다. 유토는 늘 그렇게 투덜거렸다. 차갑게 언 다리와 볼.
소름이 오소소 돋아있다. 나는 코트를 벗어 유토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2년 전 그 때가 생각났다. 어
렴풋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리고 토끼
Alice in Neverland
이상한 나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있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었다.
엄마와 싸우게 되면 난 늘 짐을 쌌다. 계속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대충 훔치며, 민트색 트
렁크에 짐을 싸면 엄마는 문에 머리를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그건 내가 사준거니까 두고 가. 그 것
도, 그 것도 그 옷도 내가 사준 거잖니. 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난 뭘 가지고 나가라고? 쌀 짐도
없었다. 엄마는 마지막으로, 그 트렁크도 내가 사준거야. 라고 말했고 나는 짐 싸는 걸 포기했다. 후
드를 걸치고 책가방을 맨 뒤 엄마를 피해 나왔다. '이건 할머니가 사준 거야! 라고 말했다. 엄마는 조
금 웃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을 나섰다. 철 없는 16살의 가출이지만 믿는 구석은 있었다. 레진이의
부모님은 밤에도 일을 하셨기 때문에 잠은 레진이네서 자면 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 된다.
물론 아르바이트 때문에 엄마와 싸운 거지만서도. 아르바이트라는 단어 자체는 날 설레게 했다. 쪼잔
한 엄마에게 용돈을 받는 거랑은 다르고, 어떤 의미로는 어른이 되는 것 같았다. 극성맞은, 엄마 딸이
아닌 서지안이라는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독립. 물론 이 거창한 의미와 신념과 두근거림은 얼마 가지
못했지만 말이다.
쌀쌀한 날씨 탓에 손등이 텄고 구두 안에 발은 꽁꽁 얼었다. 레진이와 소정이랑은 진작 갈라졌다. 낯
선 아저씨를 따라 주택가를 바쁘게 뛰며 전단지를 대문에 붙였다. 이 게 내 첫 아르바이트였다. 몇 미
터씩 걸을 때마다 수도 없는 문들이 생겼고 덕분에 현기증이 났다. 넌 너무 느리구나. 아저씨는 나에
게 핀잔을 주었다. 구두 안에서 혹사당하는 발은 온통 상처투성이일 것 같았다. 운동화를 신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밀려 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별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묵묵히 문을 찾아
다니며 붙이는 수밖엔. 이 것 좀 버리면 안 될까요? 하루 종일 해도 못 붙이겠어요. 내가 볼멘소리를
하자 그 아저씨가 어떻게 그러냐고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진짜 융통성 없네. 아저씨는 그럼 이쪽에서
쉬엄쉬엄 붙이고 있어 조금 이따가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아저씨는 날쌔게 날 지나쳐갔다. 이 곳
저 곳 다 빌라투성이. 나는 쭈그려 앉아 구두에서 언 발을 꺼냈다. 손으로 꾹 꾹 주물렀다. 녹아라,
녹아. 그 때 또르르 노란색의 귀여운 공이 내 발치에 와 닿았다. 초등학생 세 명이 그 공을 가지고 노
는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그 애들 곁에 살짝 던져주었다. 고마워요 누나. 놀이터의 모래 냄새 같은
것이 스쳐지나 갔다.
동네 끝자락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더 위의 하늘은 새까만 색. 나도 모르게 그 애들을 쫓아갔다. 손
에 든 전단지가 한, 두 장씩 바닥으로 흩어졌다. 다시 데리러 온다는 아저씨의 말이 떠올라 줍고 뒤늦
게 쫓아갔다. 꼬마 애들은 커다란 담 앞에서 갈 길을 잃은 듯 서 있었다.
"뭐하고 있어? "
"그 게...이 멍청이가 저 담 너머로.. "
"공을 날린 거야? "
"공은 아니고... 야구 방망이요. "
어떻게 치면 방망이가 날아가지? 조금 웃고 있자 멍청이로 낙인찍힌 아이가 내 옷깃을 잡았다.
"누나 저는 야구선수가 꿈인데, 지금 그 방망이를 찾지 못했다가는 꿈을 놓치게 될 것만 같아요. "
적잖게 당황했다. 담은 꽤 높았다. 그럼 벨을 눌러서 집 주인한테 달라고 하면 되잖아. 라고 말하자
그 애들은 그 게..라며 말끝을 흐렸다. 야구선수가 꿈이라는 아이가 괴물, 귀신, 유령 어쩌고 하는 말
을 했다.
"너네 그런 걸 믿어? 나이 헛먹었구나. "
엄마가 하던 말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다니. 순간 짜증이 났다. 벨을 꾹 눌렀다. 몇 분이 지났지만 아
무런 응답이 없었다. 아무도 없나보네. 하고 등을 돌리려고 했지만 여전히 내 옷깃은 꼬마아이에게 잡
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딘가에서 날 보고 있다면 또 어린 애 취급을 하겠지. '니 주제에 알바는 무슨 알바니. '
나도 모르는 새 나는 담을 넘고 있었다.
담 위에 올려 놓은 전단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일단 방망이를 찾아서 잡아 담 위로 넘겨주었다. 누나
감사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애들은 사라졌다. 멋지게 담을 넘었을 때와는 다르게 나는 머뭇거렸다.
발 디딜만한 곳도 없고 올라설 것도 없었다.
"뭐야? "
소리가 난 곳을 보았다. 그 곳에는 그 애가 있었다. 추운 날씨에 얇은 티 한 장을 입고 있는, 하얗고
예쁜 그 애가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애에게 다가갔다.
Alice in Neverland
그 애는 자신의 이름을 유토라고 말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꽤 놀란 것 같았다. 치마를 입은 여자애가
담을 훌쩍 넘어오다니, 나는 유토의 투명하고 고운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유토의 와인빛 눈동자
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순간 적으로 정신이 돌아온 나는 급히 사과했다. 엄청난 무례였다. 흰 머리칼
과 하얀 피부 붉은 눈동자와 입술, 마른 팔다리 어느 하나 평범한 구석이 없었다. 유토는 내 시선을
피하고 그 건 뭐야? 하고 물었다. 긴 손가락이 전단지를 가리켰다. 곧 피자, 치킨 등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한 장 빼앗아갔다.
"내 집 대문에 맨날 이런 거 붙이던 게 너였구나. "
나는 오늘 처음 한 거라고 변명했다. 그리고 내 집이면 혼자 살아? 하고 물어봤다. 그러니까 유토는
응 하고 대답했다. 유토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었다. 이 커다란 집에서 혼자 살다니. 나는 고개를 들어
집을 살폈다. 정원에는 연못이 있고 작은 언덕 너머에는 유리로 된 집이 있다. 마치 성같았다. 유토는
툭 털고 일어나 대문을 열어주었다. 어떻게 나가야 하는 지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는 안녕하고 대문을 나섰고 유토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유토의 성에서 나오자 나는, 내가 알바 중
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멀리서 아저씨가 뛰어왔다. 나는 또 이마를 콩 쥐어 박혀야 했다. 얼른
따라오지 않고 뭐해. 라는 아저씨의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꽤 한참동안을 유토의 성 앞에 있었
다.
가출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집에 들어 왔고 그 후에도 나는 멍했다. 나는 오랜만에 일기장을 폈다. 있
었던 일을 빠짐없이 적고 있는데 엄마가 자꾸 훔쳐보려고 해서 나는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갔다 온 앨리스가 된 느낌이었다.
나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단지를 한 아름 들고 유토의 집을 찾았다. 유토는 주황색과 남색이 섞
인 하늘을 등지고 날 바라보았다. 우리는 많은 얘길 나누진 않았다. 나는 그 곳에 있다는 자체로 몹시
흥분 됐다. 이상한 나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있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그 때도 유토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고, 물어볼 때마다 유토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무뚝뚝하게
대답해주었다.
"니 머리카락이랑 눈동자는 왜 그렇게 예쁜 색이야? "
유토의 예쁜 눈동자가 잠시 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연못으로 떨궜다. 그건 색소가 없어서. 나는
알비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색소가 없는데 왜 그렇게 예쁜 색이지. 나는 의아했다. 색소가 없다는 유
토는 하얗고 빨갛고 예뻤는데 색소가 많은 나는 별다른 색 없이 검고 평범했다. 멜라닌 색소가 부족
하면 눈동자는 피와 가까운 붉은 색을 띠고 모발은 흰색을 띠게 된다는 것. 후에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되었다. 3일 째 되던 날 나는 유토의 집 안 에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유토는 나를 안고 욕실로 들어
갔다. 그 애의 핸드폰을 손에 걸고 장난치다 핸드폰이 연못에 빠지게 되었고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연못으로 뛰어 들었다. 무모해. 유토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도 늘 했던 말
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생각을 해야 되는데 너무 반사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다가 몸이 남아나지 않
겠어. 라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깨끗하고 넓은 욕조에 날 내려놓고 샤워기를 들어 대강 온도를 맞
추었다.
"그런 건 또 사면되는데, 그리고 물도 한 해에 두 번 정도 밖에 안 갈아서 더럽단 말이야. "
"핸드폰 배터리 분리해서 마를 때 까지 놔둬야 돼. 나도 자꾸 물에 빠뜨려서. "
욕실을 나서려던 유토가 다시 돌아와서는 내 이마에 주먹을 콩 쥐어박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굉장
히 이상한 느낌. 이게 스킨쉽이라는 건가. 생각했을 때 유토가 욕조에 앉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
해 쭈그려 앉았다. 욕조에 팔을 괴고 날 지그시 보았다.
"밖은 어떤 곳이야? "
따뜻한 물에 몸이 녹아 나른해졌다. 작게 입김을 토해내자 우리 사이에 김이 서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한참동안 얘기했고 그 애는 두서없는 내 말을 한참 동안 들어주었다.
Alice in Neverland
"이제 전단지 알바 그만둘거야. "
해가 지지 않아 유토는 집 안에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고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공부에만
전념해야 될 것 같아. 라고 말하자 유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보았다.
"그럼 우리 집도 안 들르겠네. "
조금도 서운해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유토에게 나는 '아마도'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옆자리
에 앉았다. 유토의 집엔 늘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재미있는 게임기도 있었고, 최신영화도 볼 수 있었
다. 일어서서 하는 게임도 있었는데 리모콘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둘이 싸우기도 했다. 늘 지는 나에게
게임 졸라 못해. 라고 핀잔을 주던 것이 생각나서, 게임 한 번도 못 이겨봤는데 라고 조그맣게 말했
다. 나중에 이기면 되지. 유토가 대수롭지 않게 말해서 조금은 놀랬다.
"나 알바 안 해도 놀러 와도 돼? "
"응. 그리고 알바 때문에만 놀러왔던 건 아니잖아? "
"그야 재밌는 게 많으니까. 맛있는 것도 많고. "
유토에겐 나이차이가 좀 나는 형이 하나 있고 외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보다는 꽤 자
주) 한국에 오는데 그 때마다 쓸데없는 걸 잔뜩 사온다고 말했다. 그 중엔 먹을 것도 꽤 많았다. 치킨
맛이 나는 꼬불꼬불한 과자(라면모양이다.) 파스텔 색상의 마시멜로우, 특이한 모양의 초콜릿들. 신기
해하자 내가 올 때마다 꺼내서 주곤 했다.
"이제 용돈이 많아졌냐? "
"엄마랑 화해해서 적진 않은데, 아직 물감이랑 파스텔 사려면 멀었어. "
엄마는 내가 미술을 하는 걸 싫어했다. 재료는 오로지 내 용돈으로 사야했다.
"그러면 아르바이트할래? 넌 매일 밖에서 보고 듣는 것들을 얘기해줘. 사진으로 찍어줘도 되고. "
유토의 눈에서 한 순간 빛이 머물다 사라졌다.
"그런 아르바이트가 어디 있냐. "
"형한테 말해서 먹을 거 더 보내달라고 할게. "
"정말? "
"응. "
먹을 걸 좋아한다는 걸 너무 빨리 들킨 것 같아서 생각 좀 해볼게. 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유토는 그러라고 했다. 이미 밖은 어둑어둑해져서 그 애가 나와도 되는 시간이 되었다. 그 애가 대문
을 열어 주었다.같이 있으면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쉬웠다. 대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날 가만히
불러 세웠다.
"이거 말이야. "
유토의 시선은 대문에 내가 붙여놓은 전단지를 향하고 있었다.
"맛있어? "
"피자? 응 그럼 맛있지. 엄청 맛있어. "
"우리 이거 시켜 먹자.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토는 고기랑 햄을 먹지 않았다. 채식주의자라고 말했다. 계란, 유제품, 생선
이랑 해산물정도는 먹을 수 있다며 고기랑 햄은 내 접시에 주었다. 나는 피방이랑 올리브를 골라냈다.
다음번엔 쉬림프피자를 먹기로 했다. 콜라를 쪼르륵 마시며 우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유토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거의 들어주는 쪽이었고 나는 재잘재잘 말하기 바빴다. 유토는 마음껏 밖에 나갈
수 없으니까 주로 밖에 대해서 말했다. 호응은 해주지 않았지만 주의깊게 듣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
다. 한참 들떠서 설명하는데,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유토가 내 입가에 손을 갖다대었다. 기름이 묻어서.
라고 말했다.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 같은 느
낌.
그 때 난 고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둔 사춘기 소녀였다.
Alice in Neverland
"뭘 그렇게 생각해. "
"그냥 옛날 생각나서. "
유토는 옛날? 이라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코트를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유토
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유토는 내 얼굴에 손가락을 대
고 천천히 움직였다. 차갑지만 싫지 않은 느낌.
"아, 우리 그거 먹을까? "
"그거? "
"예전에 니가 붙이고 다니던 전단지에 있던 것. "
"피자?
"응. "
"끝났을 텐데 24시간 하는 곳도 있나? "
성에 들어와서 컴퓨터로 알아보니 24시간 운영하는 피자집이 한군데 있었다. 쉬림프 피자를 시켰다.
그 때의 약속대로. 유토가 제일 커다란 조각 하나를 내 접시로 옮겨주었다. 저녁도 제대로 못 먹은 탓
인지 엄청 맛있었다. 정신없이 먹던 내게 유토가 콜라를 따라 내밀었다.
"천천히 좀 먹어. "
"너무 맛있어. "
유토가 피자 조각 하나를 더 접시에 내려놓고 피망과 올리브를 골라내주었다. 그 것까지 먹자 배가
좀 차는 것 같았다. 입이 짧은 유토는 한 조각을 겨우 먹고 TV채널을 돌렸다.
"유토 우리는 이제 특별한 사이야? "
그 말에 유토가 나를 보았다. 한 쪽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그게 중요해? 라고 묻는다.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알았어. 라고 말하곤 내 볼을 꼬집는다.
"편지 같은 것도 서로 쓰고 기념일도 챙겨야 돼. 기념일이 뭔지 알지? 사귄지 22일,100일, 200일, 1
주년 뭐 이런 거 말이야. "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해? "
"적어놓고 그러는 거지. 핸드폰에 저장해도 되고 난 이미 했어 3월 21일 우리가 사귄 날짜야! "
"보통 니 또래 애들은 다 그러냐? "
"응...다 그러는데 왜 싫어? 이런 거? 귀찮아? "
내가 재차 묻자 유토는 그런 건 아니야. 라고 말했다. 등을 돌린 내 얼굴을 자신의 앞에 다시 갖다 놓
고는 말을 이었다.
"싫지 않아. 근데 솔직히 말해서 조금 귀찮긴 해. "
"....유토. "
"...그래도 니가 좋다면 노력은 해볼게. "
"정말? "
내 말에 유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 같기는. 작게 속삭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는 내 입가에 손
을 갖다대고 살짝 닦아냈다.
"항상 뭐 먹을 때마다 묻혀. "
부끄러운 감정 반, 설레는 감정 반이었던 것 같다. 고개를 홱 돌려 유토의 시선을 피했지만 가슴이 너무 소란스
럽게 뛰어서 유토를 마주볼 수 없었다. 정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 뚜렷하지는 않지만 2년 전 그 때처럼 너무
희미하지도 않았다. 뭔가 한 발 더 들어선 기분.
다 먹고 나서는 집에 가지 않을 핑계들을 댔다.
"나 그냥 자고 갈래. "
약간 얼굴을 붉히며 유토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유토는 나를 살짝 떼어냈다.
"그러다가 또 엄마한테 혼나면 어쩌려고 그래. 내일 학교도 가잖아. "
"상관없어. 유토랑 같이 잘거야. 꼭 안고서 잘거야. "
유토의 옷깃을 쥐고 살짝 흔들었다. 유토의 볼도 내 볼 마냥 홍조를 띠고 있었다.
"하여간... 그 고집 누가 말려. "
유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2층으로 올라가 자주색 이불을 조금 빼주고 시트를 빳빳하게 펴주었다.
"오늘만이다. 알았지?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하고 포근한, 그리고 유토만의 향기가 나는 침대 안으로 들어가 유토를 끌
어 당겼다. 씻고 자야 된다고 침대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유토를 강제적으로 옆에 눕혔다. 유토는 허탈
한 듯 웃고 팔베개를 해주었다. 유토의 향기가 가득하다. 유토의 가슴에 고개를 묻자 유토는 한참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대로 쭉 유토와 있을 수만 있다면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
유토의 품에서 잠이 들 무렵까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