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원조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멤버
1934년 목포가요제에서
16세의 앳된 미남 가수 지망생 강문수(남인수)는
2살 연상의 이옥례(이난영)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난영은 어려서부터 오빠 이봉룡과 간간이
무대에 선 경험이 많고 17세 때인 1933년
이미 음반을 취입해 데뷔한 가수였다
1935년 이난영이 19세 되던 해
<목포의 눈물>을 불려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이난영이 소속된 OK레코드사는 <조선악극단>을
거느리며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고의 레코드사였다
<목포의 눈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난영은
같은 소속사의 가수 겸 작곡자이자 공연 기획자 김해송과
1936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서울의 유명 음식점
식도원에서 서둘려 결혼한다
이유는 배 속에 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첫사랑 이난영이 결혼하던 그해
남인수는 작곡가 박시춘의 <눈물의 해협>이라는 곡을 받아
정식으로 가요계에 데뷔한다
시에론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남인수의 데뷔곡 <눈물의 해협>은
레코드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는 시련과 함께
흥행에 참패했다
이 소식을 들은 OK레코드사 이철 사장은
<눈물의 해협>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눈물의 해협> 똑같은 곡에 더 구슬픈 가사를 바꿔
다시 취입하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눈물의 해협>이 다시 탄생한 곡이
1938년에 발표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다
<애수의 소야곡>으로 일약 스타가 된 남인수는
이난영과 같은 소속사 OK레코드사에서
가수 활동을 하며 조선악극단 단원으로
이난영과 함께 전국 공연을 펼친다
당시 조선악극단에는 한국 최초의 원조 걸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저고리시스터즈>가 있었는데 <저고리시스터즈>는
이난영과 장세정 두 사람이 고정 멤버이고
다른 멤버들은 그때그때 프로젝트에 따라 결성되는 그룹이다
<저고리시스터즈>는 1945년 해방과 함께 해체된다
당시 조선악극단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아
일본까지 정기 순회공연을 할 정도였다
조선악극단이 일본 순회공연 도중
<홍청자>라는 걸출한 멤버를 한 명 스카우트하는데
앗뿔싸! 이 여인이 이난영의 연적이 될 줄이야
홍청자는 일본 다카라즈카 쇼 무대에서
활약하던 중 조선악극단의 교섭을 받고
새 멤버가 되어 빼어난 미모와 무용 실력으로
단숨에 조선 악극단의 주요 멤버가 되었다
1944년 해방을 1년 앞두고 OK레코드사의 사장이자
조선악극단의 단장이었던 이철 사장이 사망하자
조선악극단도 흐지부지되다 해방과 함께 사라졌다
광복이 되면서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은
<KPK악극단>을 조직 조선악극단 멤버들을
다시불려들이는데 이 때 홍청자도 다시 들어온다
<KPK악극단>은 다시 활기를 찾아 전국 공연을 펼친다
1948년 8월 18일 밤 11시 소양강 강가에
한 장의 유서를 남기고 한 여인이 강물로 뛰어들어
투신자살을 시도했는데 그 여인은
한국 최고의 가수 이난영이었다
당시 KPK악극단은 춘천에 머무르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강가에 <김해송 前-나는 갑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강물로 뛰어 들어갔으나 마침 순찰을 돌고 있던
순경에 의해 이난영은 구조되었다
이난영의 자살 동기는 남편 김해송의 염문설 때문이다
김해송은 KPK악극단 단원 홍청자와 염문을 뿌리면서
당시 언론은 김해송의 부인이 이난영이 아닌
홍청자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러나 김해송은 2년뒤 1950년 6.25 전쟁 때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애수의 소야곡>이후 승승가도를 달리던
남인수는 명실상부한 당시 남자가수 최고가 되어
엄청난 돈을 번다
1955년 남인수 소야곡 2탄 <추억의 소야곡>이 나왔다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몸부림치며 울며 떠난 사람아
저 달이 밝혀주는 이 창가에서
이 밤도 너를 찾는 이 밤도 너를 찾는
노래 부른다
다시 못 올 옛사랑이 안타까워라
못생긴 내 마음만 원망하건만
그래도 못 잊어서 이 한밤에도
그 이름 불러보는 그 이름 불러보는
서글픈 밤아
바람결에 너의 소식 전해 들으며
행복을 비는 마음 애달프구나
불러도 대답 없는 흘러간 사랑
차라리 잊으리라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 섧구나
그는 남편 없이 고생하는 이난영을 여러모로 도우다
급기야 1958년 부인이자 가수였던 김은하와 이혼 하고
이난영과 동거를 시작한다
둘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인수는 폐결핵으로 1962년 44세 젊은 나이에
이난영 무릎에서 눈을 감았다
3년 후 이난영도 심장마비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