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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망각한 듯, 유흥업소가 밀집된 도로 안쪽의 넓은 골목길은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입간판들이 빽빽이 들어차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건아하게 취기가 오른 남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지나가자 호객행위를 하는 술집 종업원이 달려와 떠밀다시피 주점 안으로 끌고 간다.
근처에 즐비한 노래방 입구에선 소리를 지르는 건지, 노래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고성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요즘 그 일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민철은 어디선가 이미 한껏 들이켜 취한 상태였지만 갈지자로 휘어지는 걸음을 하면서도 기어이 도박장으로 향한다.
술집으로 위장한 그 가게는 안면이 있는 손님들만을 선별해 지하에 차려놓은 불법게임장으로 안내한다.
민철이 들어서자 익숙한 듯 보이 하나가 다가와 넙죽 인사를 하며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게임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벌써 여러 번 마주쳐 아름아름 알게 된 도박동지 하나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요즘 뭐 좋은 일거리 잡았어? 매일 주머니가 꽤 두둑해보여.”
그가 민철에게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말을 건다.
“꽤 좋은 건수가 생겼지.”
“호오, 뭔데 그래?”
“아직은 비밀.”
“너 설마 위험한 짓에 손대는 거 아니냐? 운반이라던가 뭐 그런...”
간혹 도박자금을 위해 조직폭력배들이 하는 약이나 불법적인 물건의 유통에 운반책으로 고용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같은 놈은 써주지도 않아.”
“하긴, 신용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면 일을 맡겨주지도 않지. 큭..”
남자는 음침하게 키득거렸다.
“그럼 뭐야? 대체 무슨 일을 잡았길래 이렇게 돈이 술술 들어오는 거야?”
“큭큭.. 그런 게 있어. 두고 봐라. 앞으로는 여기저기서 돈다발이 굴러 들어올 테니.”
“여기저기? 무슨 돈 들어올 데가 그렇게 많아? 하여튼 수상하다니까.”
남자의 핀잔에 민철은 그저 어깨를 들썩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 참. 혹시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민철의 느닷없는 말에 남자는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 올린다.
“어려운 일은 아니야. 네 몫으로 크게 떼어줄 테니 잘 생각해봐.”
“생각하고 말 것도 없지. 돈이 된다는데 뭔들 못하겠어.”
“큭.. 역시 이래서 너랑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물론이지. 조만간 따로 연락할게.”
민철은 남자의 휴대폰번호를 받아 저장했다.
남자가 자신의 게임기 앞으로 가버리고 나자 민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 모금 깊게 빨아 들였다 천천히 내뱉자 어두침침한 지하실에 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간다.
흘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돌아가는 게임기 앞에 앉아 있는 모습들이 이미 익숙해진 풍경이다.
어차피 자신도 저들과 똑같이 이 시궁창 같은 지하실에 묻혀 눈이 충혈 되도록 사행성게임에 빠져있다.
이렇게 변해버린 모습이 이따금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사는 방식 또한 모두 틀린 것이다.
빛 속에서 사는 인간들이 있다면 이런 어둠속에 들어붙어 기생하는 인생도 있는 것이다.
문뜩 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그는 형제이고, 또 친구였다.
하지만 함께 있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둘 사이는 변해버렸다.
물론 민철은 이 모든 게 자기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자신의 인생은 3류 보다 못한 막다른 길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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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 화학을 빌미로 자금추적에 탄력을 받은 수혁은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한번 드러난 약점을 깊이 파고들자 화학 쪽 예산에 이어 의류와 건설 쪽에서도 이상기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부사장무리의 비리를 캐나갔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빼돌린 자금은 외국투자회사로 이동되었다.
전문 인력을 고용해 더 자세히 조사하자 그 회사의 설립주 명이 부사장의 외가쪽 친척의 이름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사실 그 투자회사는 단지 이름뿐인 유령회사였고, 단순히 자금을 해외로 돌려 돈세탁을 한 뒤 국내로 들여오는 루트로 사용될 뿐이었다.
이렇게 들어온 돈은 정상적인 은행권에서 거래가 가능했다.
그 자금은 친척이나 아들, 딸의 명의로 부동산이나 고가의 미술품, 보석류에 재투자되었다.
이런 현물들이 고스란히 비자금이 되어 정치권의 어두운 구석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수억을 호가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상류층 부인들의 골프모임이나, 식사자리에서 건네졌고, 그것은 곧바로 기업의 편의나 은행권의 신용으로 이어졌다.
사회의 숨겨진 이면에서 뻔하게 돌아가는 권력과 자금의 쳇바퀴인 것이다.
수혁은 책상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자료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하며 앞으로의 일을 구상해나갔다.
자료를 좀 더 수집하고 증거를 확보한 뒤 꼼짝 못하게 옭아매어 그들을 단번에 쓸어버릴 생각이다.
마음 같아선 그동안 받아온 온갖 수모를 몇 배는 더해 철저히 갚아주고 더는 호화로운 생활따위 할 수 없게 거지꼴로 만들어 교도소에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란 고작 그들의 명예를 땅바닥으로 내던져 짓밟아주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겐 최고의 굴욕이라는 것을 수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없신 여기던 바로 그 존재에게 똑같은 취급을 당할 때의 그 굴욕감.
수혁은 그들이 당할 모욕을 상상만 해도 온 몸이 짜릿짜릿해졌다.
“일하자, 일”
생각만 했는데도 의욕이 샘솟는다.
자신이 청해그룹의 정식 회장으로 취임할 때 그들이 내보일 그 멋진 표정들을 생각하며 수혁은 다시 일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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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잠귀 밝은 진우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이 깼다.
배 위에 올려져 있던 수혁의 팔을 살짝 들어 침대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썰렁한 기운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보일러가 꺼졌나?’
난방을 확인한 후 온도를 좀 더 높이고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마치, 초가을 태풍처럼 밖에는 요란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 멀리 어두운 먹구름 사이에서 번쩍하고 번개가 치고 뒤이어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도 들렸다.
시계를 보자 아직 새벽4시.
좀 더 자야지하는 생각에 다시 침대시트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오자 습관처럼 수혁이 허리를 끌어당긴다.
그는 진우와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한 이후 매일 편안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잠시라도 떨어졌다 돌아오면 잠이 든 상태에서도 귀신같이 알고 팔을 뻗어온다.
수혁을 자신의 가슴에 꼭 끌어안은 진우는 그의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쓰다듬었다.
거친 느낌이 고집스럽고 심술궂은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나타내는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났다.
평온하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느껴진다.
그 따뜻함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얼굴로 내려가 수염이 조금 자란 까칠한 턱과 뺨을 조심스레 매만진다.
언제부터 이 남자에게 빠져버린 걸까..
까치집을 지은 머리카락조차도 사랑스럽다고 느껴버리다니...
몸을 섞었기에 마음이 간 것이 아니다. 이건 좀 더 오래전부터의 감정이다.
아주 오래전 .. 어쩌면 뜨거웠던 여름날 처음 눈이 마주쳤던 그 순간일지도...
예사롭지 않은 빗줄기에 차를 몰고 가는 것이 조금 걱정됐지만 수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출근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비는 더욱 거세져 이젠 폭풍처럼 몰아쳤다.
와이퍼를 쉼 없이 작동시켜도 시야가 가려질 것 같았다.
진우는 걱정스런 마음을 누른 채 그를 배웅했다.
회사에 도착할 때 쯤 잘 들어갔는지 문자라도 보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내리는 비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전신을 무겁게 누르는 것만 같았다.
진우는 눈에 보이는 집안일만 대충 마치고 책 한권을 집어든 채 소파에 앉았다.
두 다리를 모으고 웅크려 앉아 책을 읽었다. 며칠 전 수혁이 심심할 때 읽어보라며 사다준 것이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 무게에 작게 한숨이 새어나왔지만 사온 사람의 성의가 있으니 안 읽을 수도 없었다.
겨우 집중해서 20페이지쯤 읽어나갔을 무렵 문자가 왔다.
9시 쯤 수혁에게 보냈던 문자가 이제야 답장이 오나 보다 하고 튕기듯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을 열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수혁의 것이 아니었다.
[나 지금 ‘베르체’에 있다. 잠깐 나와라.]
아파트 앞 대로변에 위치한 까페 이름이 적혀 있고 발신인은 정민철이었다.
진우는 핸드폰을 닫으며 그것을 무시했다. 나갈 생각 따위 조금도 없다.
그러자 다시 메시지가 왔다.
거부감에 확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핸드폰으로 손이 갔다.
[좋은 구경 시켜줄 테니 어서 나와. 바람맞히면 나중에 후회한다.]
라며 여고생이나 쓸 법한 이모티콘까지 찍혀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리 꼭대기부터 시작해 발끝까지 온 몸을 훑어간다.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몸 안으로 스며든 불안함이 그걸 얘기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요란하게 몰아치는 빗방울과 세차게 흔들리는 바람....
이 아늑하고 따뜻한 집안과는 천국과 지옥처럼 다른 세상.
진우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다 이내 결심한 듯 겉옷을 집어 들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산을 썼는데도 온 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아파트에서 불과 200여 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그 잠깐의 거리를 걷는데도 이모양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까페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불량스럽게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민철이 여어~하며 손을 들어 반긴다.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추운 곳에 있다 갑자기 따뜻한 실내로 들어온 탓인지 얼굴로 열기가 확 몰린다.
그래도 몸은 아직 추운 듯 가볍게 떨려왔다.
“뭐 마실래? 내가 살게. 비싼거 마셔.”
거들먹거리며 메뉴판을 이리저리 넘기던 민철이 불성실한 태도로 이봐, 아가씨하고 써빙하는 아르바이트 여학생을 부른다.
그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다가온다.
“여기서 제일 비싼 게 뭐야? 그걸로 두 개 갖다줘.”
“과일파르페인데 오늘같은 날씨엔 추우실꺼에요. 얼음이랑 아이스크림이 들어가거든요.”
“상관없어. 비싼걸로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은 짜증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그냥 커피로 주세요.”
돌아서 가려는 그녀에게 진우가 말했다.
여자는 그것도 귀찮다는 듯 예. 라고 짧게 말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그녀가 가고나자 민철과 진우는 마주앉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철이 담배 두 대를 모두 태우고 나자 까페에서 제일 비싸다는 과일파르페와 진우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진우는 커피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정승처럼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민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건이 뭐야.”
진우의 낮고도 차가운 음성에 민철은 어깨를 들썩해 보이고는 꼬고 있던 다리를 펴며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는 잠시 주위를 흘끔거리더니 겉옷 안주머니에서 작은 사진 몇 장을 꺼내어 올려놓았다.
보이지 않게 엎어져 있는 사진들을 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손대서는 안 되는 아주 더러운 물건 같아 만지기가 꺼려졌다.
하지만 투시력도 없는 그가 언제까지고 노려만 본다고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진우는 손을 뻗어 사진을 잡았다.
여전히 눈을 민철에게 고정한 채 손으로 사진을 뒤집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
진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예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으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때?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그런지 비디오 캡쳐인데도 화질이 예술이지?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잖아. 청해 그룹의 젊은 피 천수혁 이사라는 게 아주 잘 보여”
진우는 온 몸의 피가 발끝으로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순간 두 귀가 멍해져 주위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눈 앞이 안개에 싸인 듯 시야가 흐려지고 숨조차 크게 쉬기 힘겨워졌다.
머릿속이 그대로 정지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필름 현상이 아닌 칼라프린트로 인쇄 된 사진 속에는 수혁과 진우가 나체의 모습으로 서로 끌어안고 침대에서 뒹구는 모습들이 새겨져 있었다.
연결부위가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도 있었고 깊은 키스를 나누며 절정을 맞는 모습도 있었다.
“....어...어떻게.. 이걸...”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슬러 입을 열었지만 채 한 문장을 이어갈 수 없었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진우를 보며 민철의 입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뭐 그런 거 까지 자세히 알 필요 없잖아. 어차피 일은 벌어졌는데.”
민철은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가 어떻게 은밀한 침실에 들어와 이런 걸 얻어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아파트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수혁과 진우 오직 두 사람 뿐......
순간, 진우의 뇌리에 또 한 명의 사람이 떠올랐다.
설마..... 라고 여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희연...씨...?”
그 이름에 가늘게 늘어진 민철의 눈빛이 순간 움찔한다. 진우의 예상이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얼마 전 새로 단 커튼이 잘 어울리는지 보러왔다며 그녀가 잠시 집에 들렀던 일이 떠올랐다.
괜스레 거실과 방을 오가며 여기저기를 흘끔거리고 진우에게는 커피를 내오라며 주방으로 쫓았었다.
분명 그녀의 짓이었다.
“그 여자가 시킨 거야?!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다.
자신과 수혁의 사이를 의심해서 벌인 일이라면 의당 그녀가 직접 찾아와 화를 내거나 쫓아버리거나 아니면 그래도 용서할 수 없다면 수혁과 헤어지면 될 텐데 어째서 민철을 끌어들였는지.. 진우는 그녀의 생각을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돈 많은 인간들이 뭔 생각을 하며 사는지 따위는 관심 없어. 난 다만 내 손에 있는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할 뿐이야.”
민철의 차가운 말에 진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노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민철을 주시했다.
“원하는 게 뭐야? 이런 사진으로 협박해서 나한테 얻으려는 게 뭐지?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무일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텐데.”
“쿡.. 그래. 아주 잘 알지.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내 말만 잘 들으면 이런 사진은 세상에 나올 일 없이 그대로 사라질 테니까. 물론 청해그룹 천수혁이사의 명예와 이미지도 그대로 유지되겠지.”
수혁의 이름이 언급되자 진우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를 협박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절대 널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쥔 채 테이블을 내리쳤다.
요란한 소음에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흘끔댄다.
“아아, 걱정 마. 나도 너무 거물급과 직접적인 협상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난 원래 소심한 인간이라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철의 표정은 먹잇감을 앞에 둔 굶주린 하이에나 같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이런 걸 가지고 수혁을 협박할 생각이 없다면서 내게 찾아온 이유가 뭐야?”
진우의 물음에 민철은 테이블에 팔을 기댄 채 천천히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는 진지한 .. 그러면서도 조금은 다정한 표정으로 은근하게 말을 걸었다.
“진우야. 우린 오랜 친구야. 그렇지?”
“흥.. 글쎄. 최소한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야. 난 늘 네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 언젠가 내가 성공하면 모두 갚을게. 넌 내 형제고 친구야. 우린 20년이 넘게 함께 지내왔잖아. 네가 곤란해지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 또 네가 지금 천수혁과 사는 걸 행복해 한다는 것도 알아.”
다정스런 말투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를 좋아하지? 난 네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불길함이 전신을 훑어간다.
민철은 여전히 가식적인 눈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아주 작은 거면 돼. 천수혁 정도면 집안에 명품이며 고가의 물건들이 많겠지? 그저.. 그가 소유한 물건들 중 눈에 띄지 않게 한두 개 슬쩍 해 오면 돼.”
진우의 온 몸이 뻣뻣이 굳어졌다.
“마....말...도..안 돼는.. 소리하지..마...”
입술이 바르르 떨려왔다.
“어떤 게 좋을지 잘 생각해봐. 너의 작은 수고로 일이 쉽게 끝날수도 있어. 하지만.. 싫다면 할 수 없지. 위험부담이 크긴 하지만 이걸로 직접 천수혁과 협상을 벌여볼까? 아니면.. 다 귀찮은데 그냥 잡지사에 팔까? 난 어디까지나 널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큰 돈도 마다하고 작은 걸로 타협하려는 거야. 내 맘을 모르겠어?”
“친구라면서 내게 도둑질을 시키겠다는 거냐?”
“도둑질이라니. 그냥 불우이웃 돕기라고 생각해. 가난한 친구를 위해 집에 있는 물건 하나 적선하는 거지.”
“나쁜자식.”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온 몸이 타버릴 것 같았다.
“그럼 난 간다. 또 연락할 테니 그때까지 잘 생각해봐. 그 사진은 가져가도 돼. 난 또 출력하면 되거든.”
씨익 웃으며 가볍게 일어나 나가버리는 민철의 뒷모습을 진우는 언제까지고 노려보았다.
비는 더욱 거세졌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이지?
민철은 왜 이런 좀도둑 같은 짓을 자신에게 시키는 것일까...
머릿속이 폭발할 것 같았다.
첫댓글 혼자 싸매고 있음 안 되는데.. 무슨 속셈일까나..
그냥 돈달라고 하지 왜 찝찝하게 물건을; 정말 무슨속셈인지
데코님 글 스토리가 넘 좋아서 앞에것도 다 읽어보았는데요 하나같이 다 재미있었어요^^ 다음편이 궁금해지네요 아웅 궁금해 ㅋ.ㅋ
뻔하지머 물건훔친걸 수혁이가 알게하겠지
잘 봤어요!! 수혁한테 알리는게 나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