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1985년 머리를 하얗게 물들이는 찬란한 여름에 나는 대구의 고등학교 2학년생 이었다.
사춘기가 막 지난 또래의 친구들이 그렇듯 나 또한 한 여자아이를 가슴에 담았기에 순진했던 그때나이의 아이들과 그나마 비슷해보였을뿐, 고아원 출신에 자취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최상위의 성적을 놓치지 않는 나는 그닥 평범한편은 아니었겠지..
유난히 더웠던 그날 아저씨의 자전거 대리점에서 일을 거들며 고장난 페달과 씨름을 하던중 파닥거리며 얼굴에 바람이 불어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선 옆을 돌아봤다.
얼굴이 하얗기에 더욱 두드라져 보이는 걸까? 한국사람이 머리가 까만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칠흙이란 말이 어울리게 새까맣게 흐드러진 머리칼을 귀뒤로 넘기며 h는 가늘고 길다란 하얀 팔을 반팔셔츠위로 내놓고는 나에게 부채질을 하고있었다.
"오빠!! 나 기다리는거 뻔히 알면서 왜 먼저 갔어! 교문앞에서 기다렸단 말이야!!!"
"....."
"사람 죙일 기다리게 해놓고 미안하단 말도 안해? 미안하다고 안할거야?"
"죙일은 무슨.. 벌써 여기와놓고는, 너도 이제 고등학생 된지도 석달이 넘었는데 자꾸나만 찾으면 어떡해"
"아!!!몰라 석호오빠 봤는데 오빠 먼저 갔다길래 온거야. 나는 뭐 오빠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줄 아네? 다 우리오빠니까 그러는거지."
"....."
"오빠 땀좀봐라. 밥도 안먹고 일하는거지? 먹어. 먹어야 일도하고 공부도 하고 그러지."
도시락을 먹으며 흘깃 올려본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또한 고아원 출신임을 알고는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 부모가 누구일지 정말 궁금하게도 화려한 외모를 가진 그녀는 나처럼 누구부터 입었는지도 모를 원내의 싸구려 옷을 입고 다녀도 부자집 따님으로 오해를 받았고, 어둑어둑한 표정을 지닌 쾡한 나와는 달리 천성이 활기차고, 생기넘치는 그녀에게서 사람들은 h의 모자란 환경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배운적도, 본적도 없으면서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깃들고, 상대를 압도하는 빛나는 눈을 가진 h에게 이런 초라한 환경은 어울리지 않았고 그녀또한 그것을 아는 듯 나에게만은 쓸쓸한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내가 원래부터 성적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않지만 내 인생의 목적이 그녀가 된 후로 나는 그녀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무조건 성공해야 했고,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성공의 기반으로 가장 안정된다는 판단에 학벌을 선택한 나는 공부에 집중하게 됐고, 절실하게 뚜렸한 목표가 있었던 나는 고일 이학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비단 그녀의 외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바르기 때문만은 아니니라.
천운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던가.. 그녀가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고아로써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천운이라면, 유독 사람들이 따르고 사랑받으며 사는것도 천운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친오빠와 다름없다 굳게 믿고있는 h를 한 여자로써 절실하게 원한다는 것도 우리좋은오빠가 아닌 긴장되고 애틋한 남자로써 h에게 서고 싶어하는것도 나의 천운이겠지...
이모는(우리 보육원생들은 원장님을 이모라 불렀고, 많은 원생들이 엄마라 부르길 원했지만 한사코 이모는 당신께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들에게 한몸이었던 엄마와 같은 사랑을 줄 자신이 없다며 우리들에게 사정이야 어쨌든 우리를 사랑함이 절대적이었을 친모의 은혜를 존재를 잊어서는 안된다며 엄마라 불리길 거부하셨다) 내가 핏덩이 젖먹이였을 때 이곳 보육원에 맞겨졌으며 그로 일년후 h가 역시 젖먹이인 상태로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해가 동쪽에서 뜨듯 당연하게 나와 h는 많은 사람들이 친남매일지 모르리라 의심할정도로 붙어다녔으며 자라면서 아름다운 외모를 갖추어가는 h와 평범하기 짝이 없이 커가는 나를보며 의심을 접게 되었다 농을 치시며 어울리지 않게 호호호 웃으시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많은 이목의 집중속에 커간 h는 5살 때 입양을 간적이 있었으나 늘 밝았던 본래모습과는 달리 어린아이 답지않은 서러운 울음을 그치질 않으며 나를 찾다가 결국 한달만에 탈진하여 병원에 실려가 결국 그 부모가 포기하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려보낸적이 있다.
나또한 6살때의 일이라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아주 슬프고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어 자전거집 아저씨의 도움으로 보육원을 나와 동갑의 원생 친구들과 자취를 하게 됐을 때 중3이나 돼서 서럽게 울며 고작 걸어서 30분 거리인 방으로 갈 채비를 하는 내머리를 놓칠세라 한참을 감싸안았으며 '오빠!..오빠!!'하며 달리 다른말도 못하고 오빠란 말만 되내이던 그때 이미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음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렇게 우리는 같이 말을 배우고, 같이 한글을 배우고 ,구구단을 배우고 ,이모를 놓고 싸우고 ,내가 먼저 학교에 들어가 돌아와서 나를 찾으며 우는 h를 놀리고 ,다음해에 같이 손잡고 학교에 가고 ,사춘기를 겪고 그러면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그녀는 고등학교 신입생이 된 것이다.
도시락을 다 비우고 기어이 페달을 고친 나와 h는 일단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기말고사 공부를 하려는 나를 어김없이 불러낸 h의 손에는 갓 닦아내 물기가 흐르는 빨간 사과 두알이 있었다.
h와 함께 모기를 좇으며 어슴프레한 저녁기운이 뜨겁게 달구어진 달동네 지붕들을 식히는 것을 옥상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나의 유일한 행복이고 기쁨이었지만, 아려오는 가슴과 허무또한 어쩔수없이 따르는 지독한 감정이었다.
사과 한알을 꼼꼼하게 깍아 하이예진 것을 내게 쥐어주고는 나에게 오빠는 이런맛 절대 모를거라며 껍질체 빨간 사과를 한입 베문 그녀의 입이 오물거렸다.
"뻘써 사과가 이렇게 익었네.. 아직 초여름인데."
"몰라..비닐하우스에서 컸나보지.. 어제 이모네 갔는데 사람들이 주고 갔다길래 몇 개 가져왔어"
"이모가 뭐라 안해?"
"헤헤헤헤. 지 동생들 먹으라고 준걸 다 훔쳐간다고 버럭 화내고 그랬지. 오빠한테만 다 주지말고 다른애들(h의 집과 나의 집에서 같이 자취하는 다른 친구들)도 주라 그러던데?"
"이모 맨날 보다가 떨어져 사니까 섭섭하지? 자취는 아무나 하는줄 안다고 나와사니..(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기다렸다는 듯 다른곳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던 원생언니 둘에게 고집을 부려 내방 세집건너 집에 방을 구해 자취를 하게됐다.)"
"오빠 맨날 못보는게 더 섭섭해. 그리고 다큰애가 염치도 없이 어떻게 거기사냐?"
"...."
"오빠. 난 오빠랑 떨어져서는 하루도 못살겠어서 어떡하지? 아... 우리오빠 오빠 너무좋다.."
팔짱을 끼고 내 어깨에 머리를 묻은 그녀의 새까만 머리를 보니 가슴이 차올랐다.. 붉어진 내얼굴을 들키면 그녀는 뭐라고 했을까..
"오빠랑 나랑 친남매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메.. 사람들이.... , 근데어쩌면우리 정말 오누이일수도 있어. 오빠랑 나랑 같이 B형이잖아."
"혈액형이야 네 개밖에 없는거잖아"
"치. 그래도 난 오빠한테는 뭔가 다른게 느껴지는데? 석호오빠나 석규오빠도 좋지만 오빠랑은 전혀 틀린 느낌이야. 혈육이라는 느낌이 이런 느낌이겠지.. 오빠는 전혀 안그래?"
"....."
"아유.. 우리부모님은 오빠낳고 키울자신이 없어서 버려놓고두 왜 나를 또 낳아서 버렸을까.. 이모말대로 우리 엄마도 우릴 사랑했을까?"
"우리엄마가 어딨어. 너네엄마 내엄마 다른엄마지."
"치.. 농담한번 해본거였어. 섭섭하다."
서로가 서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
이렇게 아픈 감정이 또 있을까? 나의 어머니가 나를 버릴때도 이렇게 아팠을까? 과연 연애감정이란 것이,,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고통이라는 것이 치졸하고 사치스런 감정일까?
가끔은 나를 친오빠라 믿기까지 하는 그녀를 사랑했던 나의 순수한 가슴을 죄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쩔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하필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 힘들었던 나의 청소년기는 그렇게 지났고 나는 서울대 상대에 합격하게 됐다.
대구를 떠나 서울로 가게 되면서 가장 큰 걱정은 역시 그녀와 떨어져 살아야 될 상황이었고, 짐을 꾸린 나의 앞에 삼년전 그때처럼 울음을 가득 머금고 있는 얼굴을 한 h가 서있었다. 집을 나서는 나의 잠바를 쥐어잡은 그녀는 이내 나를 부둥켜 안고는 겨울이라 차갑게 식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오빠....오빠...."
엉엉 참 서럽게도 울며 목소리까지 쉬어서는 h는 나에게 물었다.
"오빠는.. 또 나 떠나는거야??.. 알아.. 오빠가 나와 떨어지려구 가는게 아니란걸 알아.. 근데.. 근데 왜 항상 떠나는건 오빠야?"
너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뒤돌아서서 울고있는 나를 들킬까봐 입을 열지 않았지만 이내 나를 돌아세운 그녀에게 난 눈물을 들키고 말았고 우린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어야 했다.
눈에서 물이 이렇게 많이 나올수도 있구나 싶었다.
서울로 가는 기차안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생각.. 아니. 생각은 했지만 떠올리기 싫어 억지로 부인했던 그 생각.
과연 나는 이룰수 없는 그녀곁에 있어야만 하는것일까.. 나를 오빠로 믿고 의지하는 그녀를 남몰래 사랑하며 곁에 있는 것이 과연 서로에게 좋은일일까.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사랑을 얻지못해 느끼는 처절한 공허함과 허무감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내 존재조차 의식못하게 강력한 고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고자 들어간 서울대가 그녀를 피하기 위한 구실이 되었다. 입학후 나는 아르바이트라는 구실로 대구에 한번 내려가지 않았고, 그녀가 찾아와도 이런 저런 핑계로 그녀를 피했다.
찢어지게 괴로웠지만, 보고싶어 혈압이 올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서로를 위한길이라 생각하고, 일학기를 마쳤다.
사람맘이란 것이 참 간사하다.
방학을 맞아 갑자기 시간이 한가해진 나는 계속 h가 머릿속을 해집어놔 견딜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h곁에 있는 것이 괴로워서 그녀를 피해 살았으면서도 보고싶은마음을 참지못해 몰래 한번만 봐야지 다짐하고는 대구로 내려갔다.
아직 방학이 시작되지 않은 h의 학교 학생들이 삼삼오오 다니는 것을 보니 하교길인가 싶어 서둘러 그녀집 담벼락 앞에 숨어 그녀를 기다렸다.
이윽고 집으로 오던 h는 문앞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아려왔다. 나도모르게 눈물이 좌륵 흘렀다.
눈에띄게 퀭해진 볼과 생기없는 눈, 새까만 빛을 뿜던 머리가 푸석해진 것을 보니 얼마나 h가 울고, 힘들어했을지 가슴이 조였다.
"오빠?"
단번에 나의 인기척을 눈치챈 h에게 들키고는 뒤돌아선 순간 그녀는 조용하게 말했다.
"기다렸어"
환하게 웃고있는 h가 거기 서있었다.
나는 바로 학교를 휴학하고 대구에 내려와 고등학생 과외를 몇 개 하며 돈을 모았다.
동네에서는 나는 꽤 알려진 우등생이기에 과외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해 h는 여상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우리는 두 개짜리 월세방을 구했고, 나는 학교를 다니며h는 회사를 다니며 그렇게 다시 같이 살게 됐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되었을때였다.
"오빠는 왜 여자친구 한번도 안데려와? 이렇게 근사한 오빠를 왜 여자들이 몰라보고 있는거야... 오빠 혹시 내가 질투할까봐 말도 안하고 연애하고 그러는거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너도 애인도 못만들면서 그래."
"치.. 나한테 목놓는 남자 많은거 알면서 그러는거야? 오빠같이 근사한 사람만 보다보니 다른 남자가 눈에 안차서 그런다. 오빠도 나처럼 이쁘고 깜직한애만 봐서 눈만 높아져서 연애 못하는거지?"
몇일후 신촌의 카페로 불러낸 그녀의 옆에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안경을 쓴 까무잡잡한 족제비 같이 생긴 놈 하나가 앉아있었다.
"동호씨 인사해 우리오빠야. 오빠 뭐해? 어서 앉지않고"
"누구야?"
"헤헤.. 오빠 놀라켜줄라고 말안했어. 남자친구야. 아휴 빨리 앉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동호입니....."
일어서서 악수를 건네던 그놈의 손이 멈췄다. 아마 떨고 있는 나의 손을 봤던모양이지.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시선의 초점이 흐려졌다. 새파랗게 질린 내얼굴을 보고 놀란 h가 왜그러냐며 다가오는 것을 뒤로 나는 화장실로 가 구토를 하고, 카페를 나섰다.
신촌에서 한강까지는 무슨생각을 하며 걸어갔는지는 생각도 나지않는다. 망치로 맞은 듯 멍하게 걷다가 양화대교를 미친 듯 뛰어건너고 정신이 든후 강렬한 질투심이 매몰차게 밀려왔다.
당장 그사람을 찾아가 온몸을 갈갈이 찢어죽이고 싶을만큼 지독한 질투에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신길의 집까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질투로 인한 분노 외에는 다른 생각도 못했다.
집에 돌아오니 초조한 얼굴로 h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
"오빠 괜찮은거야? 어디갔다온거야. 옷은 왜이렇게 엉망이야? 오빠 그사람 맘에 안들어서 그래? 그래?"
"...."
"오빠 우리 만난지 일주일도 안됐어. 오빠가 싫으면 안만날게 화내지마. 응? 화낼거야?"
"...."
"나도 그남자 그렇게 좋은건 아니야. 하도 나좋다고 따라다니기에 갸륵해서 만난거야.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뭐라고 말좀해봐!"
"....."
"아휴.. 전번에 정희언니 우리집에 왔다갔어. 오빠가 좋은데 오빠가 나한테만 신경쓰느라고 마음을 안연다고 하소연을 하고 가드라. 그래서 오빠 여자도 만나고 다니고 그러라고 내가 일부러 그남자 잠깐 만난거야.. 됐지? 아..! 말좀해봐"
"h야...."
"어? 됐어? 이제됐지 오빠?"
"사랑해"
"....."
"....."
"나도 오빠 사랑해"
"그런게 아니라!!"
답답한 가슴을 쥐어잡고는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난... 너한테 남자이고 싶어..."
"왜..왜그래 오빠.."
"사랑해!! 중학교때부터 쭉 사랑해왔어! 그때부터 넌 나한테 동생이었던 적은 없어! 넌 늘 나에게 하나뿐인 여자였어!!"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의 두눈에도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오빠 왜그래 우리오빠잖아..."
"우리오빠 아니야!! 난 죽어도 너한테 오빠하기 싫어! 미안해.. 내가 이러면 너한테 미안한 것 알어. 그래도 어쩔수 없었어.. 도망칠수도 없었어!!"
"오빠 이러지마! 싫어!! 말도안돼!! 이러지마 오빠!"
"미안해..사랑해!"
"아아아아아악!!!!!!"
귀를 틀어막고 화를 못이기듯 통곡을 하며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다.
"어떻게!!어떻게 오빠가 나한테 이럴수 있어!! 왜 날 배신해!! 어떻게 우리오빠가 나를... 어떻게 날 여자로 봐!!! 난이제 누굴믿고 살라고!!!!"
나를 부둥켜안고 그녀는 내가 독립을 하러 나왔을 때, 서울로 올라가게 됐을 때처럼 울고 또울며 '오빠...오빠."되세겼고 나는 미안하단 말밖에 할수없었다.
다음날 새벽 울다지쳐 자고있는 그녀를 두시간은 바라보며 마음을 정하지도 못했으면서 몸은 간단한 짐과 그녀의 사진들을 챙기고는 방을 나섰다.
군에 지원한 나는 입대하기전까지 여관에서 술로 지새웠다..
소주.
고등학교때부터 h에 대한 연정의 고통을 달래기에 종종 혼자 소주를 마시던 버릇은 h와 같이 살면서 해보지 못했는데 참 오랜만이다 싶었다.
사랑이 이렇게 아픈것인데 왜 사람들은 사람을 찬미하는가..
그래.. 사랑에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왜 나에게 사랑은 고통일 뿐인가..
사랑에 기쁜 사람.
사랑에 우는 사람.
사랑에 충만함을 느끼고 웃는 사람의 정서는 얼마나 별천지일까.. 상상이나 할수 있는 세계일까..
2011년 대구
석호에게 뜻밖의 소식을 접한 나는 대구까지 오는동안에도 믿지 못했지만 영안실에 놓인 사진은 h였다.
이런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무릎을 꿇고 멍하게 있는 나를 데리고 나간 석호가 담배한보모금을 깊게 들이켰다.
"이런날이 오기전에 네가 h를 만났어야 옳았어. 매정한놈 그렇게 너를 한번이라도 보고싶어했는데.."
주머니 깊숙이 오래된 지갑을 꺼낸 석호는 나를 흘깃본후 나에게 주었다.
"네가 대학때 사준거라메.. 그걸 아직도 쓰고 있었으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봐"
묵묵히 지갑을 받아들어 열어본 나는 한숨을 깊게 내리쉴 수밖에 없었다.
"애송이 시절의 네사진이야. h는 늘 그렇듯 네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있었어 물론 마음을 정리하고 말이지."
사진안의 나와h의 모습과 뒤로 보이는 우리들의 추억이 묻어있는 신길의 방을 보니 그동안 매몰차게 잊으려 노력한 기억들 하나 하나가 와르르 쏟아졌다.
"5년전인가? 네가 화상전화사업으로 큰돈 벌었을 때 말야. 그때h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네가 봤어야 했어. 실은 내가 너한테 전화할 때 가끔은 h가 너를 보고 싶어해서였어 캠 뒤에서 너를 숨어보며 매번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말야.."
코를 훌쩍이고는 눈물을 애써 훔치던 나에게 또 가방을 건네며 석호가 말했다.
"넌 참 잔인한 놈이야.. 네가 온라인으로 보내면 탄로날거라며 대신 현금으로 전해주라고 했던 돈이야. 돈을 받자 대뜸 그러드라 너가 보내는 거냐고, 나한테 이런 큰돈이 어떻게 있냐고 그러드라고, 자존심상하는 일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드라고,, 자기가 그깟 돈몇푼 받자고 너를 기다려왔냐면서 버럭 화내드라."
"....."
"네가 돈을 주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 h남편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생활력있는 사람이었는데.. 남들사는 것 부러워하지는 않게 살았어. 이번에도 둘이 캐나다에 여행 갔다가 이렇ㄱ[ 됐잖아... 그래 h남편 예기해서 미안하다."
h의 남편..
h의 결혼 소식은 군제대후 몇해 지나지 않아 들을수 있었다.
내가 군대를 가고 대구로 내려가 앓고 있는 그녀를 위로해주며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던 지금의 남편과 25살에 결혼했음을 듣고 한동안 정신을 못차린 기억이 있다.
h가 그사람을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것이냐며 질투에 벌건 눈을 부릅뜬 나에게 석호는 아무말도 못하다가 흐느끼는 나에게 h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너라며 네가 보고싶다 울었더랬다.
서로 세월을 보내며 나는 32살 때 오랜 친구 사이였던 회사 동료의 프로포즈를 받고 결혼한적이 있었지만, 좀처럼 마음을 못여는 나에게 우정으로의 복귀를 선언 이년만에 이혼하게 됐고 얼마지나지 않아 회사를 나와 실용화가 눈앞에 닥친 화상전화사업에 손을 댄 나는 이내 유행이 급속도로 퍼져 큰 돈을 벌게 됐지만 본래 돈을 벌 목적을 상실했던 난 작년 일선에서 손을 때 과천 변두리의 조용한 집을 구해 유일한 취미였던 피아노에 열중하며 살아왔다.
"h에게 딸이 있지 않나? 학생이라 대구에 있었을테니 무사하겠지?"
"y말하는 건가? 그래 그러고보니 안보이던데 어디서 쉬고 있나 모르겠다. 졸지에 부모를 한번에 잃어버려 많이 힘들겠지."
석호와 같이 오랜만에 술을 먹으며 참아온 눈물을 터뜨리며 h를 부르며 잠든 다음날 나는 내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이 새까만 머리에 대비돼는 하얀 얼굴 가늘고 긴 팔다리를 한 h가 울고있었다.
"h?"
어떻게 이런일이..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벅차며 h가 돌아왔다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부어 나를 올려보는 그 얼굴은 분명 h였다.
"h니?"
"외삼촌이구나.. 외삼촌 사진으로 봤어요. 외삼촌 맞죠? 왜.. 이제오셨어요..."
"아........................."
그후 당연스럽게 y의 대부가 된 나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대구에 내려갔고, 늘 엄마에게 언젠간 만날 외삼촌이라며 예기를 들은 y는 나에 대해 잘 알고있었고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이라며 스스럼이 없었다. 나또한 h와 놀랍게 흡사한 y에게 낯섦이란 전혀 없었으나 y가 h를 지나치게 닮았음은 결국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다.
y를 보며 항상 h의 모습을 찾던 나는 기어이 y를 h와 착각했는지 h에게 느꼈던 전혀 다른 여자에게 느낄수 없으리라 여겼던 감정을 y에게 느낌을 알수 있었다.
44살의 중년 이혼남과 17살의 여고생이라...
스스로 부당함을 절실하게 느낀 나는 더 빠져들기 전에 헤어나야 함을 알고 대구를 찾지 않고 다시 떠날 준비를 했다.
죽을때까지 야속한 나를 원망하며 그리워했을 h에게 더 이상 죄를 지을수가 없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간다는 명목으로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유학을 가기전 분주했던 나에게 찾아온 손님은 뜻밖에도 화난 얼굴을 한 y였다.
"y..."
"외삼촌..."
"......"
"엄마 버리고 저까지 버리려고 하고,, 외삼촌 정말 그런 사람이예요? 왜 엄마말과 이렇게 틀리죠?"
"학교는.."
"방학이예요. 저 여기서 당분간 지낼거예요. 외삼촌이 저 버리고 가기전에 얼굴이라도 많이 봐둘려고 왔어요.."
만류에도 막무가내인 y를 이길 자신이 없어 방 하나를 내준 나는 씁쓸함을 버릴수 없었다.
h처럼 나에게 기대고, 조곤거리고 할때면 걷잡을수 없이 오버랩 돼는 h의 모습과 h에 대한 감정은 나를 괴롭혔다.
y가 찾아온 후 넷째날이었다.
어슴프레한 저녁 정원으로 불러낸 y의 손에는 방금 닦아 물기가 흐르는 빨간사과 두 알이 있었다.
한알을 깍아 나에게 건넨 y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채로 남은 한알을 한움큼 베물어먹었다.
당황한 나는 살짝 떨었고 y는 그 미동을 감지했다.
"왜요? 엄마랑 너무 닮아서 놀랐어요?"
"음..."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던 y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저씨 너무좋아. 우리 아저씨 너무좋다."
"왜..왜 아저씨야 외삼촌이지.."
"치.. 피한방울 안섞인 외삼촌도 있어요?"
나를 빤히 쳐다보며 y는 말을 이었다.
"아저씨 나 좋아하죠?"
"무슨소리야 어른한테 버릇없어. 볼일 없으면 들어가겠어"
돌아서 현관을 향하는 순간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오빠.."
"..........."
"왜요? 왜 얼굴이 빨개졌어요?"
"............"
"오빠..."
"그만해."
"아저씨 우리엄마 좋아했죠? 직접 들은건 아니지만 평생 한번을 찾아오지 않는 아저씨와 엄마에 대한 사연에 대해서 눈치도 못챘겠어요??"
"그만 들어가자 저녁이 되니 서늘해진....."
"아저씨 내가 엄마 닮아서 나 좋아하는거 다 알아요."
"내가 좋아한건 h지.. 네가 아니야!"
"그럼 내가 싫어요? 왜 감정을 속이려들어요? 단지 엄마를 닮아서지만 아저씨 날 좋아하는거 알아요"
문을 거칠게 닫고 들어온 나는 잠을 이루기가 힘들었다.
잊은줄 알았던 젊었을때의 설래임과 흥분이 가슴을 감쌌지만 이번에도 정리해야만 옳은 부질없는 감정이란 것이 괴로웠다.
다음날 아침 어색한 식사도중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나였다.
"식사 마치고 공항으로 가자. 표는 이미 예약해놨다"
"....."
"나는 유학준비로 서울에 갈 일이 있어. 공항은 혼자가도록해. 시간 맞게 택시 불러놨다."
"아저씨..."
"외삼촌이라고 불러."
식사를 마친 나는 충분히 돈을 채워논 전자화폐를 y에게 쥐어주고 밖을 나갔다.
하루종일 떠돌다가 몇 년전부터는 찾기도 힘들어진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돌아온 과천집에는 우려와는 달리 불이 꺼져있었다.
뭔지모를 아쉬움과 함께 쓸쓸히 y가 주었던 사진을 들어보곤 담배를 태운 순간 현관이 열리며 y가 들어왔다.
"....!"
"밖에서 아저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진을 떨구는 내손을 본 y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제가 간줄알고 서운해하시기라도 했어요?"
".....치우려고 하던 것뿐.."
"저도 아저씨 따라 유학갈래요"
"....."
"아저씨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그래주실거죠?"
"해외에서 공부가 하고 싶다면 내가 다른 알맞은 것 알아주겠어 거기로 가면 돼"
"저는 아저씨와 같이 갈꺼예요."
"....."
"저 아저씨 좋아해요."
"어렸을때는 그럴수도 있어 y의 친구들이 학교선생님 좋아하는 것과 같은거야"
"어려서부터 아저씨 사진보면서 아저씨 예기만 듣고 자랐어요. 저한텐 부모님 다음으로 친숙한 사람이 아저씨예요. 언제부턴지 모르게 아저씨에 대한 호감이 깊어갔죠. 아저씨가 우리 엄마에게 그런것처럼.. 물론 실제 아저씨를 보고는 사진속의 젊었을적의 모습과 달라서 놀랐지만 그정도는 당연히 예상할수 있는거죠.. 그래서 금방 적응됐어요."
"....."
"아저씨.. 저 좋아하는거.. 대구에 있을때부터 알았어요.."
"내가 좋아한건 h라 했잖아."
"알아요. 그리고 아저씨가 저에게서 암마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도 알아요. 그래서 좋아한다는 것도 알구요. 저를 엄마로 착각하고 좋아하는 거지만,, 그래도 절 좋아하는건 맞지 않아요?"
"....."
y는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사랑해요..."
"그만...해 난 44살이야 넌 여고생이라구 이건 누가봐도 맞지않아 거짓말이란 말이야"
갑작스래 내품으로 가슴을 묻고선 울먹으며 y는 말했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아저씨 그렇게 비겁해요? 남들 눈이 무서워서 자신을 속여요? 저에게... 저에게도 아저씨가 가져왔던 고통을 물려주면서두요?"
y의 어깨를 감싸안고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두손은 멤돌기만 할뿐, 그뿐이었다.
몇십년전 h가 나에게 안겨울며 그랬듯 y는 '아저씨..아저씨.'만을 되내일 뿐이었다.
일주일후 인천공항에 나서는 나를 y는 환하게 웃으며 배웅해주고 있었다. h가 내게 돌려준 지갑안에는 20살이 되어 성인이 되면 나를 찾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y의 편지가 들어있다.
지갑안의 h의 사진을 한참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