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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부활은 십자가의 사랑에 따른 하느님의 응답
“000, 우리 엄마 잘 계셔요. 뭐라 얘기하세요?” 며칠 전 엄마를 잃은 지 5개월여 된 일곱 살 꼬마가 전화로 물어 온 말이다. 죽음은 아무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부활 역사 신비 속에 묻혀 있다. 그래도 우리는 신앙 안에서 죽음과 부활의 문제를 제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희망 속에 삶을 산다. 과연 부활은 무엇인가. 이것이라고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알고 그리고 살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부활을 알아보자.
부활에 대한 정의를 “국어사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소생(蘇生). 2) 일단 폐지하였던 것을 다시 씀. 3) 쇠퇴하였던 것이 다시 일어나 흥하게 됨. 부흥(復興). 4) [기독교]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생명을 회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영광스럽게 변화되는 현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라 함.” 부활에 대한 이 다양한 설명 중에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네번째 설명이다.
그리스도교의 부활 교리를 한마디로 말하면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신앙에 의한 계시이다. 따라서 삶에서의 부활 신앙이든지,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현실 생활 안에서 찾아야 하는 부활의 의미든지 모두가 생명과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신앙생활 그 자체가 바로 해답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좀더 체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부활을 알아보자.
부활에 대한 점진적 계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바람이다. 그러나 죽음은 엄연히 우리들의 세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무릇 모든 종교가 이 죽음의 문제를 안고 제 각각의 설명과 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참으로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중요하고 궁극적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아담의 타락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창세기의 원조 이야기 이후 끊임없이 구원의 말씀과 역사가 펼쳐지지만 부활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죽은 자들의 부활이 하느님에 의해 당신 백성들에게 점진적으로 계시되었을 뿐이다.
죽은 자들의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은 인간 전체, 영혼과 육신의 창조자인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내재적인(본질적인) 결론으로서 주어진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는 또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과 더불어 당신 계약을 충실히 지키신 분이다. 바로 이러한 이중의 전망 속에서 부활에 대한 신앙이 표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카베오의 순교자들은 시련 속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이 우주의 왕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위해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2마카 7,9). “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2마카 7,14).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주님의 많은 동시대 사람들은 부활을 희망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확고하게 가르치셨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마르 12,24). 부활에 대한 신앙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께 대한 신앙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에 대한 신앙을 당신의 고유한 인격에 결부시키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예수를 믿고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키실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지금부터 예수께서는 일부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되돌려 줌으로써 그에 대한 표시와 담보를 주시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것이기는 하겠지만 당선 자신의 부활을 선포하신다. 이 유일 무이한 사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요나의 징표”(마태 12,39)처럼 성전의 징표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있을 당신의 부활을 예언하신다.
처음부터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몰이해와 반대에 부딪쳤다. “어떤 점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육신 부활에 대한 것보다 더 모순되는 것을 만난 적은 없다”(성 아우구스띠노, 시편 88,2.5). 인간 생명이 죽음 이후에 영적인 모양으로 지속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난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하게 죽은 이의 육신이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다고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하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녀 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사도 13,32-33).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을 이루는 진리로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진리로 믿고 살아왔으며, 사도 전승의 기초로 행해졌고, 신약 성경의 문헌으로 이루어졌으며,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파스카 신비의 본질적인 요소로 설교되었다.
결국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살펴본 부활은 인간 중심의 생명 욕구로 생겨난 “죽음에서의 소생”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생명력에 대한 신앙”으로서 “극진한 사랑의 자기 희생(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 영광과 권능의 응답으로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삶에서의 부활 신앙
부활은 과연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실제 사건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은 정말 역사적인 실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자체에 대한 확실한 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신비는 신약 성경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확증된 발현이 있는 실제 사건이다. 이미 성 바오로는 50년경 코린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전해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 후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뒤에 다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4). 바오로 사도는 여기서 자기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회개한 다음 알게 된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 전승”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부활 전승에 의해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입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를 살펴보자.
빈 무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루카 24,5-6). 부활 사건들 가운데서 첫째 요소는 빈 무덤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부활의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시체가 무덤에 없었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은 모두에게 본질적인 징표가 되고 있다.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그들이 부활의 사실 자체를 인정하는 데 첫발이 되었고, 그것은 처음 거룩한 부인들과 이어서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요한 20,2)는 빈 무덤 안으로 들어와서 “수의가 흩어져 있는”(20,6) 것을 발견함으로써 “보고 믿었다”(20,8). 이것은 빈 무덤의 상태에서 그가 예수의 시체가 없다는 것이 인간적인 행위일 수 없으며 나자로의 경우처럼 예수께서 단순히 지상의 삶으로 되돌아온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발현 사실과 사도들의 태도 변화
그리스도의 발현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의 마리아와 거룩한 부인들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마태 28,1-8; 루카 24,1-12; 마르 16,1-8; 요한 20,1-10 참조). 그리고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는데 먼저 베드로에게, 다음에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자기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도록 소명을 받은 베드로는 형제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분을 본 것이다. 바로 그의 증거에 의하여 공동체는 “정말 주님은 부활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36)고 외쳤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인 차원 밖에서 해석하거나 그것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제자들의 신앙이 스승께서 미리 말씀하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란 철저한 시련을 겪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되는 것이다. 수난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커서 제자들은(적어도 그들 가운데 일부는) 부활의 소식을 곧바로 믿지 않았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신비적인 환희에 찬 공동체를 보여 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절망적이고(“침통한 표정”: 루카 24,17)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래서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온 거룩한 부인들의 말을 믿지 않고 “부질없는 헛소리처럼 여겼다”(루카 24,11). 예수께서 부활날 저녁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마르 16,14).
그래서 부활이 사도들의 신앙(또는 믿음)이 ‘만들어 낸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부활하신 예수의 실제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의 은총의 활동 아래 생겨난 것이다.
“오, 파스카의 밤이여, 너만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거처에서 살아나오신 순간을 알 수 있나니” 하고 부활 찬가는 노래한다. 사실 아무도 부활 사건 자체를 목격한 증인은 아니었고 그 어떤 복음 사가도 그것을 묘사하지 않았다. 아무도 어떻게 그것이 물리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면서도 초월적인 신앙의 신비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의 젊은이, 라자로에게 행하셨던 다른 부활들의 경우처럼 지상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기적적인 사건이었지만 예수의 권능에 의하여 기적을 입은 사람들이 평범한 지상의 삶을 다시 찾은 것에 불과하다. 어떤 순간에 그들은 또다시 죽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당신의 부활한 몸 안에서 그분은 죽음의 상태로부터 시간과 공간을 넘는 다른 삶으로 옮아간 것이다. 예수의 몸은 부활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가득 찼다. 그분은 당신 영광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였기에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 대해 그분은 “천상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부활은 단순히 지상 생활에서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초월적인 하느님의 생명력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과정과 내용은 인간의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신앙으로서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과 결합하는 방법인 은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이기는 방법임을 알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코린 15,14). 부활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친히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확인이 된다. 모든 진리들, 인간 정신에 가장 접근할 수 없는 진리까지도.
파스카 신비 안에는 두 개의 측면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다는 것과 당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로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 우리를 다시 올려 주는 의화이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결합된 신자들은 이미 실제로 부활한 그리스도의 천상 생활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 생활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다”(콜로 3,3).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셔서 하늘에서도 한자리에 앉게 하여 주셨습니다”(에페 2,6).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양육되는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다.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우리 역시 “그분과 더불어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4).
이날을 기다리면서 신자들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그리스도께” 참여하게 되는 존엄성을 누리고 있다. 여기서 자기의 고유한 몸에 대한 존경이 요구되며 또한 다른 사람의 몸, 특히 고통당하는 사람의 몸에 대한 존중이 요구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인류애, 자신의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 특히 가장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절망을 모르고 하느님의 뜻과 인류에 대한 봉사를 위해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3년 4월호, 이성배 요한(효성여자대학교 교수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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