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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자귤(紫橘)
종실반란은 고대에 근절할 수 없었던 폐단이며, 역대왕조에서는 항상 종실반란이 있었다. 그러나 반란이 왕조내내 시종해서 발생한 것은 북위를 꼽을 수 있다. 북위종실은 도무제(道武帝)의 건국부터 효명제(孝明帝) 가 영태후(靈太后)에게 독살당할 때까지 129년간 존속하며 8명의 황제를 거쳤는데, 모두 합쳐서 20차례의 종실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빈도는 역대왕조에서 볼 수없을 정도였다.
- 건국때부터 반란이 일어나다.
종실반란은 북위의 병폐라 할 수 있다. 도무제 탁발규(拓跋珪)는 386년 4월에 북위를 건립한다. 건립때부터 종실반란의 고통을 겪게 된다. 386년 8월 탁발규의 숙부 탁발굴돌(拓跋窟咄)이 반란을 일으켜 탁발규와 국가통치권을 쟁탈한다. 탁발규의 근신 우항(于恒)도 굴돌과 결탁한다. 그러나, 우항의 신분이 들통나면서 도무제는 과감하게 처리한다. 다만, 우항을 우두머리로 하는 5명의 핵심인원만 처형하고, 그들을 따르던 자들은 모두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조치는 적대세력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고, 굴돌은 더욱 공격을 강화한다. 탁발규는 어쩔 수 없이 북쪽의 음산(陰山으로 도망쳐서, 외삼촌인 하란부락(賀蘭部落)에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사신을 후연(後燕)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그리고 후연의 도움으로 탁발규는 비로소 겨우 탁발굴돌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통상인의 생각대로라면, 반란을 일으킨 종실에 대하여 분명 강경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절대로 그들이 다시 재기할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탁발규는 탁발굴돌에게 승리한 후, 부역했던 종실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대범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을 용서했을 뿐아니라, 여전히 그들을 중용한다.
이들 부역종실의 대표자는 탁발의열(拓跋意烈)이다. 탁발의열과 탁발규는 당형제(堂兄弟)간이다. 탁발의열은 시종 탁발굴돌을 지지했고, 심지어 병력을 동원하여 탁발규가 북연(北燕)으로 보내는 사신을 막기까지 했다. 하마터면 탁발규의 구원계획이 실패할 뻔한다. 굴돌이 패배한 후, 탁발의열은 후연으로 도망친다. 그후 탁발규는 후연을 공격하고, 탁발의열은 안에서 탁발규에 호응했고, 정형관(井陘關)에서 탁발규를 맞이한다. 그렇게 하여 탁발규의 용서를 받고, 요서공(遼西公), 광평태수(廣平太守)에 봉해진다.
위수(魏收)는 <위서>에서 탁발의열의 성격이 "웅경(雄耿)"하다고 적었다. 그리고 스스로 종실자제라는 점을 내세워 탁발규의 아끼는 장수 화발(和跋)을 무시했다. 그러나 자신의 서열이 화발보다 아래가 되자 그것을 수치로 여겼고, 암중으로 계속 힘을 모아 모반을 준비한다. 398년, 탁발의열의 모반음모가 폭로되고, 그제서야 탁발규는 탁발의열을 사사한다.
2. 지속되는 반란
북위가 북방을 통일하면서, 북위종실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진다. 모역의 대표자는 바로 위왕(衛王) 탁발의(拓跋儀)였다. 탁발의는 원래 탁발규의 심복이었다. 위수는 두 사람을 당형제간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두 사람은 친형제이다. 탁발의는 북위건립초기의 여러가지 대사에 거의 참여했고, 탁발의가 앞장서서 백권들이 탁발규에게 황제위에 등극하도록 권했다. 그는 조례(朝禮)를 제정했고, 큰전투에도 참전한다. 그러나 이런 심복이 409년 반란을 일으킨다.
탁발의의 모반을 자극한 도화선은 점복(占卜)사건이다.
말년의 탁발규는 무사(巫師)로부터 자신은 반신(叛臣)에 의해 죽임응 당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리하여 빈번하게 대신을 도륙한다. 탁발의는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었고, 결국은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나 탁발규에게 붙잡혀 사사당한다. 상산왕(常山王)등 30여명의 종실은 유연(柔然)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같은 해 11월, 탁발규는 친아들인 차남 청하왕(淸河王) 탁발소(拓跋紹)에게 피살당한다. 그러나, 탁발규의 죽음으로 분란은 끝나지 않았다.
탁발규는 부친을 시해하고 황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조정내의 갈등을 격화시키게 된다. 그리하여 북신후(北新侯) 안동(安同)이 앞장서서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탁발소가 피살당한다. 조정신하들은 탁발규의 장남 탁발사(拓跋嗣)를 후임황제로 세우니, 그가 명원제(明元帝)이다.
명원제는 관대한 정치로 정국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소수민족정권의 큰 특징은 우두머리의 자리에는 능력자가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혈맥이 같고, 세력이 팽창하면 그는 우두머리의 자리를 노리게 된다. 나중에 결국 진류왕(陳留王)의 아들이자 종실 탁발열(拓跋悅)의 반란이 일어난다.
탁발열은 명나라때 남옥(藍玉)같은 무장이다. 용맹하면서 모략도 있지만, 아주 교만하고 방자했다. 도무제시기, 탁발열은 두려움에 안문(雁門)으로 도망쳐서 안문의 지방호족들과 모반을 꾀한다. 나중에 지방에서 조정에 충성하는 지주에게 생포되어 경사로 압송되낟. 도무제는 그의 부친 진류왕의 공로를 생각하여, 그를 처벌하지 않고 지나간다. 명원제에 이르러서도 그는 여전히 탁발열을 신임했고, 그에게 황궁에서 호위를 맡게 한다. 그러나 탁발열은 야심을 여전히 품고 있었고, 409년, 몸에 칼을 지니고 명원제를 암살하려 하나. 다행히 명원제의 곁에 있던 시종에게 발견당한다. 탁발열은 피살되고, 이번 종실반란은 이렇게 소멸된다.
3. 대규모반란
명원제이후는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시대로 접어든다. 태무제는 웅재대략으로 대외개척을 했지만, 내부반란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태무제는 전공이 있는 귀족의 지위를 높여주고, 종실의 이익은 억눌렀다. 그리하여 더욱 큰 규모의 종실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먼저, 형제 탁발준(拓跋俊)의 반란이다. 누설후에 그는 탁발도에게 사사당한다. 그후 또 다른 동생 탁발비(拓跋丕)가 반란을 일으킨다. 탁발비는 문무를 겸비했고, 명원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탁발비는 야심이 있었고, 또한 대산 유결(劉潔)이 부추기자 황위를 찬탈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태무제가 유연을 정벌하는 동안 유결은 조서를 위조하여, 고의로 태무제에게 원병을 보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막에 주둔하고 있던 북위군 병사는 식량부족으로 모두 사망하고 만다. 유결은 다시 유언비어를 퍼트린다. 태무제가 이미 사막에서 죽었다고 말하면서, 황위를 찬탈할 준비를 한다. 443년, 유결의 역모가 누설되어 삼족을 주살당한다. 유결이 탁발규와 결탁한 일까지 발각되어 탁발비도 사사당한다.
4. 한화(漢化)중의 반란
태무제가 죽은 후 문성제(文成帝)가 등극한다. 453년 2월 다시 할아버지뻘인 탁발숭(拓跋崇)과 외척 두원보(杜元寶)가 연합하여 모반을 일으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7월에는 숙부 탁발인(拓跋仁)과 외척 여약문(閭若文)의 모반사건이 발생한다.
헌문제(獻文帝)시기에는 하마터면 북위정권이 무너질 뻔한 을혼(乙渾)의 난이 일어난다. 을혼은 권력을 독점하며 섭정하고,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다. 심지어 그의 처에게 공주라는 명호를 내려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는 북위의 조조격이었따. 나중에 풍태후(馮太后)의 주재하에 대신들이 비밀리에 준비하여 을혼을 죽여버리고, 을혼의 일당을 제거한다. 다만 종실이 금방 을혼일당이 남겨놓은 권력의 공백을 메운다. 헌문제의 3명의 황숙이 실권을 가진 고위관직에 앉는다. 종실의 역량의 사상유례없이 강해진다. 심지어 종실의 먼친척인 탁발비(拓跋丕, 위의 탁발비와 다른 인물임)도 동양왕(東陽王)에 봉해져서 한때 위세를 떨친다.
헌문제의 재위기간동안 풍태후가 섭정하니, 여자가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잇으니, 북위종실은 다시 야심을 품게 된다. 467년 탁발도부(拓跋道符)의 반란사건이 발생한다. 탁발도부는 헌문제의 숙부로 황위를 탈취하고자 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피살당한다.
헌문제의 사후에 효문제(孝文帝)가 등극한다. 479년에는 안락왕(安樂王) 탁발장락(拓跋長樂)의 반란이 발생한다. 이 일의 도화선은 탁발장락이 자신의 봉지에서 나쁜 짓을 많이 하여 현지백성들에 의해 고발된 것이다. 조정에서 약간의 징벌을 내리자, 탁발장락은 이에 원한을 품고 반란을 준비하지만 미리 누설되어 피살당한다.
5. 왕조말기의 반란
효문제의 다음은 선무제(宣武帝)이다. 그때, 북위통치계급중 이성귀족(異姓貴族)은 기본적으로 모두 죽어버렸고, 동성종실의 권력은 최고조에 디른다. 여러 왕들은 지위도 높고 권력도 컸다. 그리고 모두 선무제의 윗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군주가 그들은 억제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선무제의 숙부인 원희(元禧, 이때는 탁발씨가 원씨로 성을 바꾸었음), 원간(元干), 원우(元羽), 원상(元詳), 원옹(元雍)등 5명은 모두 온갖 나쁜 짓은 다 벌이는 자들로, 민간여자를 강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더욱 심한 경우로는 공공연히 원외랑 풍준(馮俊)의 처를 간음했다.
여러 왕들이 교만방자했던 배경속에서 마침내 501년 함양왕(咸陽王) 원희가 황문시랑(黃門侍郞) 이백상(李伯尙)과 결탁하여 모반을 일으킨다. 504년에는 다시 북해왕 원상의 모반을 누군가 폭로한다. 508년 8월, 경조왕(京兆王) 원유(元愉)는 선무제의 총신 고조(高肇)가 황제를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몄다는 핑계로 '청군측(淸君側)'하겠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원유의 거사는 41일만에 결국 상서 이평(李平)에 의해 진압된다. 팽성왕(彭城王) 원협(元脇)은 황제가 고조의 형의 딸을 취하는 것에 반대한 바 있어, 고조가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원유의 반란을 틈타 고조는 원협이 반군과 서로 연락했다고 모함하여, 원협은 결국 독살당한다.
선무제의 다음은 효명제(孝明帝)이다. 당시 권신 고조는 지방의 많은 병력을 배경으로 중앙정부를 멀리서 조종했다. 종실 고양왕(高陽王)은 계책을 세워 고조를 주살하고, 이 공적으로 고양왕과 여러 종실들은 상을 받는다. 원옹은 태부(太傅), 태위(太尉)가 되고, 청하왕 원역(元懌)은 사도(司徒),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받고, 광평왕(廣平王) 원회(元懷)는 사공(司空)이 된다. 종실이 조정을 가득 채웠다고 할 수 있다.
효명제시기에 종실의 최강권신 원차(元叉)가 나타난다.
원차가 반란을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원역이 중용된 일이다. "당시 태후가 득의하여 청하왕 원역을 강제하여 간통한다." 여기서 태후는 호태후(胡太后)이다. 그녀는 원택과 관계를 가지고, 원역은 이로 인하여 굴기한다. 원차는 질투를 느껴 정변을 일으켜 호태후를 구금한다. 그리고 조서를 위조하여 원역을 죽인다. 원역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종실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중산왕(中山王) 원희(元熙)는 업성(鄴城)에서 거병하나 실패로 끝난다. 원차가 집권하면서 북위의 쇠락은 가중되고, 결국 육진기의(六鎭起義)가 일어나 북위는 그후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결론
북위는 소수민족정권으로 군주독재는 시종 내부의 유력자로부터 견제를 받아왔다. 게다가 소수민족의 제산은 여러 아들에게 나눠주는 습속이 있었다. 그리하여 북위종실은 모두 실력도 있고, 실권도 있었다. 북위 조정내에서는 시종 3갈래의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 즉 황권, 한족사족, 종실귀족. 3자는 각각 서로 다른 목표를 가졌다. 황권이 추구하는 것은 독재였고, 한족사족이 추구하는 것은 남조와 같은 문벌제도였으며, 종실이 추구하는 것은 분봉제였다. 3갈래 세력의 갈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여 조정에서는 권력쟁탈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북위의 종실반란은 전체 왕조에서 계속되었고, 결국은 북위를 망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