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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작아져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커지셔야 한다
- 본당 공동체의 현실과 전망
글 _ 김정용 베드로신부 광주대교구
우리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은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다. 그럼에도 이 문제가 늘 새롭게 제기되는 것은, 진단과 해법모색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쌓아올린 교회 담장 안에서 교회 스스로 통계적 호황과 현상 유지를 즐기는 축제에
도취되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 여정을 따라나서지 않으려는 교회의 굼뜨고 닫혀있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교회의 닫힌 마음과 체질화된 비만의 몸집은 공동체의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신학적 진단과 그에 따른 실천적
전망이 더욱 요청된다는 신호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본당 공동체의 현실 진단을 토대로 한 전망에 초점을 둘 것이다.
그러나 이 짧은 지면을 통해 본당 공동체가 안고 있는 과제전부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본당 공동체의 몇 가지
근본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공동체의 중심이동’ 을 제안하고자한다. 이 글이 교회의 공동체성에 대한 다양하고
폭넓은 논의를 위한 작은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본당 중심에서 세상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해할 때 우리는 흔히 본당을 그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이는 마치 교회의 현존을 본당이라는 고정된
장소에 묶어 두려는 것과 같다. 이런 생각은 모든 교회적 관심사를 본당이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 갇히게 하고, 본당이 마치
그리스도인 삶의 최종 목적지인 양 여기게 한다. 또한 이런 본당 중심적 사고는 교회의 시선을 오로지 본당만을 향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 역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게 한다. 바로 그 때문에 교회는 스스로 고립된
성채가 되고, 마치‘세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 유령집단처럼 존재할 수 있다. 교회 스스로‘함지 속 등불’ (마태 5,15
참조) 처럼 자신의 관심사에만 심취되어“세상의 빛” (마태 5,14) 이길 포기하는 것처럼. 이런 현상은 구체적으로
몇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선 고립되고 폐쇄적인 공동체의 얼굴은 흔히 거대한 성전건축의 화려함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을 위한 수려한 집을 짓지 않고 서는 마치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여기면서 세상 속 하느님의 현존과 교회의
현존을 그 수려함 뒤에 가둬놓는다. 흡사 우리 교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분’ (마태8,20 참조)
이어서 온 세상과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마태25,40) 당신의 거처를 찾으셨던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마치 교회가
길을 잃고, 세상 한가운데서 ‘구원의 길’ (사도 16,17) 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추종하는‘길 공동체’ 임을 망각한
것처럼. 교회가 머물러야 할 거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 위에 있다. 바로 그 길 위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양상은 교회적 사명을 주로 본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위축시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적 사명 실천의 바탕이 되는‘말씀선포-성찬례-사랑실천’ (회칙「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25항 참조) 은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무력하거나 인색한 것으로 드러나기 일쑤다. 본당 공동체가 세상(지역)의 누룩이 되기보다는 자기 몸매를 유지
하고 관리하는 데 급급한 집단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하느님께서 몸소‘세상 사람들 한가운데 사시기’ (요한 1,14 참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길을 걸으셨던 분이심을 주저 없이 따른다면, 본당 공동체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세상 안에 존재해야 한다. 본당 공동체의 힘과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쏟아야 한다.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의 고단한 삶과 연대하고, 세상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세상의 복음적 치유를 지향함으로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그렇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본당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바로 복음적, 영적 충전소 구실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좇는 새로 운 가족(혈연, 지연, 학연이 아니라 공생의 가치를 나누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을 형성하도록 세상을 향해 파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본당 공동체의 관심사와
모든 에너지가 세상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봉사에 집중되도록 새롭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사제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본당이 다양한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라 사제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 공동체로서 실현되기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을 감히
언급하고 싶다. 이에 대한 우리 사제들의 더욱 전향적이고 허심탄회한 성찰은 공동체로서의 교회 실현을 위해 흠이 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본당 공동체 내 사제의 현존과 교회적 사명이 곧 본당의 모든 운영을 압도적으로 지배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본당 내 사제의 현존 방식과 사목적 역량은 무엇보다 ‘복음 선포와 영적 동반(영적 식별력) ’
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본래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사도6,4; 마르 3,13-15 참조) . 본당 사제는 특히 오늘날
세상에서도 더 이상 환대받지 못하는 권력의 옷을 입은 권위를 단연코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한 권위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상을 부당하게 훼손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친교(소통)의 공동체로서 형성되는 데 근본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본당 공동체는 본당 사제의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사에 의해 좌우되는 공동체가 되어서도 곤란하다. 본당 사제의 본질적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과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몸소 증언하고 실현하는 데 있기에 그렇다.
공동체와 관련하여, 직무사제직의 본질이 교우들의 보편사제직에 대한 봉사에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공동체 구성원의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할 까닭은 없다. 교우들은 다만 자신이 지닌 신앙적 감각과 주체적역량을
표출하고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했을 뿐이다. 본당이 사제 중심에서 공동체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공동체 구조의 쇄신이 불가피하다.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구조와 공동체적 결정 구조, 공동체
구성원이 창의적이고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목형태로의 변화가 요청된다. 아울러 교회가 공동체로서 실현되려면
공동체 구성원의 양성 또한 매우 긴요하다. 사회적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지녔으나 그리스도교 정신을 심층적으로 체화하지
못한 사람들이 부당하게도 공동체의 정신과 교회적 지도력을 흐려놓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적 증가 중심에서 양성 중심으로
교회의 미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그리스도인다움에 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통계적 숫자 외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여기서 복음선교의 의미가 숫자적 관심에 압도되어
그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모색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 복음 선교의 근본 문제라는 점을 상세히 언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떻든 교회의 미래는 결국 그리스도인 양성에 달려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양성은 개개인의 성숙한 삶만을 위해서 가 아니라 교회가 공동체로서 충만히 실현되기 위한
핵심적인 과제이다. 우리 교회가 대체로 교우들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양성하기보다는 이른바 일꾼으로
소모하는 데 바빴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지적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양성의 문제는 물론 교우들만이 아니라 사제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된다. 단지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익힌 것만으로,
교회로부터 어떤 직무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사목적 역량을 완전하게 갖추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교회의 미래는 그리스도인의 숫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그리스도인 다움에 있다"
따라서 먼저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그 배움을 삶으로서 증언해야 한다. “사도들의 가르침”
(사도 2,42) 은 사도들 스스로가 구축한 이론이나 고압적인 주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분이 삶 속에서
몸소 걸으셨던 하느님의 길이었다는 점을 마음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사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기꺼이 배울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
공동체 내 사제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가르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 안에
선물로 주어진 다양한 은사의 풍요로움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모임 중심에서 인격적 친교 중심으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적 내용의 하나는 교회적 친교이며 그의 방식이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사용되는 친교 개념은 흔히 잘못 이해되거나 그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이 대체로 구성원들 간의 자족적인 만남이나 배타적인 모임의 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그러나 친교의 본래적 의미가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 곧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운명을 나눈다는
점에서 여타의 모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설령 그리스도교적인 형식을 갖춘 모임이라도 삶의 깊은 만남과 공유가 없는 모임은 친교의 실현이라 말하기 곤란하다.
또한 친교는 교회의 인격성을 체험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교회의 인격성은 특히 교회 구성원 간의 동반자적인 형제-자매애 체험 속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 때문에 교회적으로 어떠한 형태의 지배적인 관계(사회적 계층, 교회직무의 차이에 따른)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교회의 위계적 친교 역시 단순히 가부장적인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하다.
친교의 의미를 교회 내적인 관계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 특히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과의 보편적 친교와 연대는 친교의 의미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징표의하나이다.
교회의 친교는 명백히 온 인류와의 연대를 포괄하는 것이 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우리 교회가 공동체 현실의 변화와 쇄신을 꾀할 때, 지나치게 인간중심적,
교회 중심적 사고 속에 갇혀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교회의 많은 계획과 활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 그분의
본질적 존재방식과 사명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옷을 입고 있으나 그 내면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닿아있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교회의 교회다움은 교회의 모든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투명하게 드러났을 때 비로소 가시화되는 것이라
면,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분의 시선, 그분의 삶의 방식,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더욱 체질화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한 출발점이 아니면 그 무엇을 교회적
실존과 행위의 근거로 삼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동체를 형성한 까닭 또한 단순히 교회의 조직 운영과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원하셨다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를 반드시 그리스도교적인 꼴을
갖춘 사람들의 모임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속한 가정과 직장에서, 또 자신이 속한 지역과 사회적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삶으로서 증언함으로서 하느님 나라와 그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확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과 연대를 통해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굽힘없이 선포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의 건전한 공생과 생명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는 이들과 더불어 가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루는 공동체야말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공동체의
이름을 그에 걸맞게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 열어가는 공동체
지금까지 다룬 내용들은 (본당) 공동체의 방향에 대한 몇 가지 숙고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정작 중요한 것은,
본당 공동체 구성원 스스로 공동체의 방향을 찾고, 공동체의 구체적 처지와 특성을 고려한 고유한 실천방식
(공동체 패러다임 변화를 위한 구체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열린 의지가 있다면 나머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고 여긴다.
한국교회 안의 거의 대부분의 본당 공동체가 천편일률적 이고 획일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고유하고
개성 있는 공동체의 역사를 그려가는 모습 을 기대하는 것은 과연 과분한 기대일까.
2009년 3월 경향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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