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인의 땅의 歷史]
단종 복위 운동 벌어진
죽계천에는 핏물이 흘렀다
순흥 피끝마을과 금성대군 신단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세종 여섯째아들 금성대군
이유(李瑜)를 기리는 제단이 있다.
금성대군 신단이라고 한다.
이유는 1457년 형 수양대군이 벌인 쿠데타
계유정난(1453년)에 반대해 단종 복위를 기획하다가
탄로나 사약을 받았다.
이 사건으로 순흥부사를 포함한 순흥 일대
반 계유정난 세력이 떼죽음을 당했다.
훗날 1742년 영조 때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그가 유배됐던 자리에 제단이 설치됐다.
순흥에 흐르는 죽계천을 따라 죽은자들 피가 15리를
갔는데, 그곳에 있던 마을을 ‘피가 멈춘 마을’이라고
해서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 박종인 기자 >
* 유튜브 https://youtu.be/8uFoUVqsWW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임금이 된 조카와 권력자 삼촌 수양
문종이 죽고 왕이 된 어린 단종이 종친을
불러 모았다.
즉위하고 다섯 달이 지난 1452년 음력
윤9월 2일이다.
할아버지 효령대군은 물론 수양대군 이유 이하
모든 삼촌들이 집합했다.
수양 아래 동생 안평대군 이용은 불참했다.
단종은 삼촌들에게 표범가죽 방석
아닷개[豹皮阿多叱介·표피아닷개]를 일일이
선물했다.
모인 삼촌은 모두 15명이었다.
이제는 조카로 하대하지 못하게 된 왕을 알현한
뒤 삼촌 수양이 이리 말했다.
“내 오늘 한 말씀 아뢰고자 했으나 성상께서
말을 하지 않으셔서 감히 못하였다.
훗날 반드시 아뢰겠다.”
(1452년 윤9월 2일 ‘단종실록’)
이들 조카와 삼촌들은 이미 할아버지
세종 생전에 모인 적이 있었다.
1442년 세종이 팔도에 흩어져 있던 자기
아들들 태실(胎室)을 경상도 성주에 모아 집단
태실을 조성했다.
문종을 제외한 둘째 수양부터 손자 단종까지
직계 왕손 19명 태항아리를 모아서
성주 태봉에 묻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 왕이 된 그 손자가 삼촌들을
궁궐로 부른 것이다.
회합에 불참했던 안평대군은 이듬해 10월 18일
역모 혐의로 조카가 내린 사약을 먹고 죽었다.
열두 살 먹은 조카 단종은 거듭 거부했지만
이미 8일 전 수양이 주도해 권력을 잡은
계유정난 쿠데타 세력 기세는 꺾지
못했다.
이틀 전
“지친(至親)에게 사사(賜死)할 수는 없다”
고 울면서 반대했던 안평대군 형 수양대군은
“개인적으로는 죽일 수 없지만 공론을
저지하지는 않겠다”
라며 ‘점잖게’ 사약을 방조했다.
(1453년 10월 16일, 18일 ‘단종실록’)
이후 쿠데타 여진 속에 좁은 조선 땅이
몇 번씩 뒤집어졌다.
1455년 여름 수양이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
바로 그날 동생 금성대군 이유는 경기도
삭녕(현 연천~철원 일대)으로 유배당했다.
시작이었다.
(1455년 윤6월 11일 ‘세조실록’)
**경북 성주에 있는 세종왕자태실**
----세종 직계 왕자와 단종 태항아리를 모은 곳이다.
계유정난 후 쿠데타 세력은 이곳에 있던 반 쿠데타 왕족
태실을 파괴했다.
가운데 기단만 남은 태실이 금성대군 이유 태실이다.
맨 위쪽 난간에 붙어 있는 태실은 세종 원손
단종 태실이다----
< 박종인 기자 >
수양의 권력 찬탈, 금성의 유배
안평대군에게 씐 혐의는 역모였다.
단종을 끄집어 내리고 본인이 왕이 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였다.
훗날 사육신으로 추앙받는 집현전 소장
학자들도 안평대군 처리에 관해서는 수양대군과
같은 편이었다.
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반수양대군파가
속속, 은밀히 세를 규합해나갔다.
그 핵심에 금성대군이 있었다.
단종 등극 3년째인 1455년 금성대군 집에서
몇몇 인사가 활쏘기를 하면서 잔치를 벌였다는
제보가 입수됐다.
이들을 처리해 달라는 수양대군파 관료들
요구에 단종은 ‘그대로 따랐다[從之·종지]’.
(1455년 2월 27일 ‘단종실록’)
금성대군은 관직을 내놓고 유배당했다.
며칠 뒤 누명은 풀리고 금성대군은 관직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또 며칠 뒤 쿠데타 세력은 금성대군이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같은 해 3월 21일 ‘단종실록’)
넉 달 뒤 어전회의에서 수양대군이 이렇게
선언했다.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따위를 유배
보내야 한다.”
셋은 모두 자기 아우들이다.
이 꼴을 보고 있던 조카 단종이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나이가 어리니 간사한 무리들이
발동하는구나.
이제 대임을 영의정에게 전한다.”
‘대임(大任)’은 왕위다.
그리고 어전회의에 참석해 있는 삼촌 수양대군이
바로 그 ‘영의정’이다.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는 삼촌을 물리치고
단종은 마침 와 있던 명나라 사신에게 이를 전격
통보했다.
수양이 그날로 왕이 되었다.
삭령에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이듬해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
(1455년 윤6월 11일, 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모반, 그리고 피바다
1456년 반수양대군으로 돌아선 집현전
학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다가 발각됐다.
거사에 동참하기로 했던 김질이 고자질해서
실패로 돌아간 일이었다.
금성대군은 한성에서 떨어진 순흥으로
재유배됐다.
(1456년 6월 27일 ‘세조실록’)
사육신 사건은 엄청난 피바람 속에 마무리됐다.
1년 뒤 이동이라는 안동 관노가 한성까지
올라와 이렇게 밀고했다.
“이유가 순흥에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해 불의한
짓을 도모한다.”
(1457년 6월 27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이 유배지 순흥 유생들과 함께 격문을
돌리고 거병해 다시 조카 복위를 모의 중이라는
것이다.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순흥부사 이보흠도 정식으로 금성대군 모반을
보고했는데, 알고 보니 이보흠 또한 가담한
대규모 역모였다.
그해 10월 합동수사본부에 세조가 물었다.
“누가 괴수인가.”
“예전이라면 노산군인데, 지금은 금성대군
이유입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죽이소서.”
(1457년 10월 21일 ‘세조실록’)
금성대군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실록에 따르면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은 사약을
받으면서 금성대군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목매 자살했다.(같은 날 ‘세조실록’)
1457년 7월 복위 운동이 제압됐다.
7월 16일 세조는 대사헌 김순을 순흥으로
내려보냈다.
명분은
“큰 옥사를 멀리서 지시할 수 없다”
였다.
이미 세조는 7월 10일 ‘칼을 채워 설득하다가
안동으로 옮겨서 계속 수사하라’고 김순에게
지시해 놓은 터였다.
(같은 해 7월 10일, 16일 ‘세조실록’)
열흘 뒤 실록에는 ‘대사헌 김순이 금성대군
옥사를 처리하고 안동에서 돌아왔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순흥에서는 그 한 달 남짓한
수사 과정을 ‘참극’으로 기억한다.
1822년 이황 후손 이야순이 쓴 ‘태평서당기’에
따르면 ‘사람들이 순흥 일대 65가구 혼령을
위로해제사를 지냈다’.
(이야순, ‘태평서당기’)
그러니까 수백 명이 수사 과정에서 실록이
기록하지 않은 고문과 비공식적 처형을 당했다는
것이다.
(박찬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순흥 의거’,
민족문화 34권, 한국고전번역원, 2010)
결국 공식 사료에는 은폐됐거나 기록되지 않은
참극이 모반의 땅 순흥에서 벌어졌다는 뜻이고,
순흥 사람들은 이를 ‘정축지변(丁丑之變)’
이라고 부른다.
----순흥에 흐르는 죽계천을 따라 죽은자들 피가
15리를 갔는데, 그곳에 있던 마을을 ‘피가 멈춘
마을’이라고 해서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핏물이 멈춘 피끝마을
그 참극을 상징하는 곳이 있다.
‘피끝마을’이다.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순흥에 죽계천이 흐른다.
정축년 수사 과정에서 최소 65가구 수백 명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 넘게 흘렀다.
핏물이 정화되고 다시 개울물이 맑게 변한
지점에 있는 우음리(雨陰里) 마을은 이후
지금까지
"피끝마을"
이라고 불린다.
핏물이 멈춘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1711년 피끝마을 뒷산
미궐봉에 고씨 성을 가진 무녀(巫女)가 성황당을
짓고 당제를 올렸다.
정축지변 때 희생된 사람들 혼을 달래는 제사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성황당에 당제를 지낸다.
피끝마을 남쪽에 합도마을이 있다.
조개 합[蛤]자를 쓴다.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 형세가 조개처럼 보인다.
이곳 또한 계유정난에 즈음해 뜻있는 사람들이
낙향한 마을이다.
그런데 도로 건너 논 한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작은 둔덕이 있다.
사람들은 이 둔덕을 ‘조개섬’이라고 부른다.
‘조것도 섬이냐’하는 ‘조게 섬’의 변형이다.
----‘피끝마을’ 뒷산에 있는 성황당. 금성대군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1711년 고씨 성을 가진 무당이 만든 성황당이다
. 지금도 당제를 지낸다----
< 박종인 기자 >
권력자의 뒤끝
1458년 예조에서 세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성주에 있는 태봉에 주상과 여타 동생,
특히 난신(亂臣) 이유 태실이 섞여 있으니
이들을 옮기고 이유와 노산군(단종) 태실은
철거하게 하소서.”
(1458년 7월 8일 ‘세조실록’)
세조는 즉시 보고에 응했다.
그리하여 금성대군 태항아리는 파괴돼 사라지고,
단종 태항아리는 텅 비게 되었다.
일찌감치 제거됐던 안평대군 태항아리,
금성대군 편을 들었던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태항아리 또한 사라졌다.
그리고 4년 뒤 다시 예조에서
“주상 태실을 다른 장소로 옮기게 하소서”
라고 권했다.
세조는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다”
며 반대했다.
예조는 이에 따라 태실 앞에 귀부를 세우고
비석에 이렇게 새겨넣었다.
‘겸손하여 윤허하지 않으시니 검소한 덕이
더욱 빛나네.’(1462년 9월 14일 ‘세조실록’)
수사가 마무리된 직후 순흥은 풍기군 밑으로
들어가고 도호부 이름을 빼앗겼다.
창고와 관사는 파괴됐다.
(1457년 8월 2일 ‘세조실록’)
숙종 때 순흥부가 다시 설치됐지만
(1682년 1월 13일 ‘숙종실록’)
지금도 순흥은 영주시 순흥면이다.
금성대군은 숙종 때인 1698년 복권됐다.
1742년 영조 때 금성대군이 유배됐던 자리에
제단이 정식으로 설치됐다.
그게 지금 있는 금성대군 신단이다.
담대했고, 허망했고, 살벌했던 15세기
풍경이었다.
----산등성이에 형성된 영주 동촌2리는 형태가 조개처럼
보여서 ‘합도(蛤島)’ 마을이라고 부른다.
이 또한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들어왔던 마을이다.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마을 앞 논 작은 둔덕은
마을 상징이다.
이름은 ‘조개섬’. ‘조개처럼 생긴 섬’이 아니라 경상도
사투리로 “저것도 섬이냐”라는 뜻의 ‘조게 섬’이다----
< 박종인 기자 >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Red killer
문재명당 입법 반역질을 보다가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뒤집혀진 속을 달래는 데엔
'박종인의 땅의 역사'만한 것이 없다.
세조 태실을 '옮기소서' 하는 주청을 '형제가
태를 같이 하였다'라며 짐짓 여유를 부리며
거절한 세조를 향해 '겸손하시어 검소함이
더욱 빛나네'라며 귀부를 세워 아첨을 떨어대는
예조 꼬라지를 읽고 있자니 문득 4년동안이나
기르던 반려견을 파양해 내쫓아 버린 주제에
다시 애견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는 문재인 모습이
생각나 권력과 배금에 미치면 저렇게 앞뒤가
뒤틀린 해괴한 망동도 서슴 없이 저질를 수
있다는 사실에 대략 난감하다.
계유정난은 왕위찬탈이 목적이다.
탄핵촛불 역시 대권찬탈이 목적이다.
적폐청산이나 피의 숙청은 호형호제로
그게 그거다.
그런데 그 추잡한 권력욕을 '겸손과 검소'로
둔갑하기 위한 속임수는 수양이나 문재인이나
다를게 없으니 역사는 돌고돌아 또 우리 앞에
이렇게 우뚝 서 온고이지신의 교훈을
던져 준다.
다만 받아 깨우치고 말고는 읽는 사람의
자유다.
명왕성
권력이 무섭군요 예나 지금이나 지난 5년
얼마나 무너졌는지 원.
서울 性醫學 설현욱
..아브라함이 자식이 8..
큰아들은 86세에 얻은 첩 하갈 소생의 아들
이스마엘, 작은 아들은 100세에 얻은
이복동생이었던 본처 사라 소생의 아들 이사악..
이 두 사람의 종교가 몇 천년을 두고 죽고죽이는
싸움을 벌였지..
도고산
어쨌든 수양 대군은 자기 형이 일찍 죽기를
기다렸고 형이 죽자마자 바로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아주 나쁜 군주이다.
그리고 수양 대군을 사주하고 부추긴 칠삭둥이
한명희 이놈도 마찬가지이다.
여천천걷기
요즘 종북좌파들이 하는 꼬라지 보니 이해가 되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독재라고 하지만
점잖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통치였었다.
근데 군사독재 근처에도 못 갔던 자들까지 현시점을
독재 운운하고 계엄타령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never다이
단종과 단종비 定順王后 정말 경멸하는 조선의
아픈 역사이지만 생각할 수록 가슴이 저려옵니다.
히말라야
단종하고단종비 떠올리면 그어린 나이에 ,
영월이 생각나고 마음이 넘 아프다.
세조를 생각하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 생각
된다.
오죽했으면 세조비가 인간도살자라고 했을까????????
근데 kbs 는 세조 리더심 을 칭솔하는듯 한다.
kbs 사장가족이 그런경우 당하면 그렇게 할까????
역사에 슬픔이다
savenation
삼촌에 의해 쫓겨나고 죽음까지 당한 단종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적장자로 왕이된 순종을 몰아낸 수양대군 일당은
모두 역사의 죄인이다,
순종이 끝까지 재위했다면 한반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챌린져강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빌붙어 나불대던
아첨꾼들은 변함이 없군요. 예조...
겸손하시어 검소함이. ...
에라이 낯간지러워서도... 조선왕조 500년...
피의 역사... 사색당파의 역사..
탐관오리의 역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각종 사화.
그리고 일제에게 먹힌 역사..
답답하네...
챌린져강
순흥.. 안동 영주 풍기 땅 65가구 생목숨이
고통끝에 피를 이루었다는 이야기가 또 폐부를
아프게 하는군요.
그 당시 그 땅이라면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순박했을 터..
그 권력의 회오리 속에 희생양이 된..
마음이 아프네요.
필화
뺏고, 뺏기고, 다시 찾으려 하고, 이리하여 싸움이
일어나고, 피 비린내가 진동하고,....
억사의 소용돌이는 거듭되고 있다.
뺏는 쪽도, 다시 찾으려는 쪽도 각기 명분은
있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순결과 충절이 오랫동안
기억된다.
선비의 고장 영주의 순흥 사람들 금성대군과 함께
선비다운 법도와 인륜을 지키려는 충절이 가상타
할 것이다.
30년 전에 가본 '피끝'마을 앞을 흐르는 죽계천은
맑았고 물소리 청아했다.
역사가 길게 흘렀다는 시간의 증언일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뺏고 삣기는 다툼을
계속되고 있다.
2017년의 빼앗긴 싸움은 가장 명분이 흐리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은 순간의 흥분과 선동에
놀아났을 뿐 긴 역사의 흐름을 외면했다.
그래서 유장한 역사 속에 한 순간을 살아간다는
겸손이 아쉽다.
東禹
조선 침략의 원흉 일제와 침략 원흉들이 아무리
악랄했다고 해도, 양산 털개와 잡범 죄명, 그리고
종북 남로당 바퀴벌레 무리들 만큼은 절대
아닐거라고 단언한다.